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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22/09/01 11:47:09 |
Name |
aura |
Subject |
[일반] 낡은 손목 시계 - 4 (수정됨) |
아득히 아련한 감각이 심장을 간지럽혔다, 조여온다.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온갖 감정이 범벅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사라진다.
나는 아내를 닮아 예쁠 내 아이의 웃음을 떠올렸다. 추운 겨울 날에 내리쬐는 따뜻한 볕처럼 소중하고, 포근할 것이다.
내 아내인 윤을 닮아 티 없이 맑고, 바라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들겠지.
덕분에 허물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내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당연히 태동은 아직 느낄 수 없지만 대신 묵직하고, 감동적인 전류가 손과 팔을 타고 찌르르 울렸다.
윤아, 너무 기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래.
진짜?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기쁘지만 슬프고 두려웠다.
당연하지.
나는 아내를 눕히고, 아내의 배를 토닥거리며 아내와 아이가 좋아할만한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
윤아, 정말 고마워. 당신한테도 고맙고 뱃 속에 아이도 너무 고마워.
태어날 아이는 나보단 당신을 닮아 예쁘고, 건강했으면 좋겠어.
아이가 걸음마를 뗄 때 쯤에는 더 좋은 곳으로 함께 여행가자.
...
아내에겐 그것이 자장가처럼 들렸는지 베시시 웃었다가도 꾸벅꾸벅 졸며 눈을 감았다.
오빠, 나도 고마워...
그래도 걱정이야...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나보단 오빠를 닮는게...
아니, 것보단... 하고 싶은... 해야 할 말이... 있는.... 데...
내게 안겨 응석 부리듯 중얼거리던 아내는 몰려드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어떻게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 나의 노력이 우습게도, 이상하리만치 나에게도 수마가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꾸벅, 꾸벅 조는 와중에 이대로 잠들어버릴까 싶다가도 아내와 아이의 미소가 컴컴한 시야 속에서 별빛처럼 반짝였다.
나는 꾸깃 주머니 속에 숨겨둔 손목 시계를 꺼내 움켜쥐었다.
시간은 11시 59분.
끼릭. 싸아아아.
갑자기 나를 둘러싼 세계가 송두리째 바뀌는 느낌.
오싹하고 스산한 공기가 공간을 가득 매웠다.
싸아아아. 까드득, 까드득.
저 멀리 화장실 세면대 물이 나오는 소리.
이를 가는 소리.
끼리릭.
손톱으로 쇠문을 긁는 소리.
불가해한 현상과 소리에 터질듯한 긴장감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그럼에도 이상하리 만치 잠이 쏟아진다.
필사적으로 버티기 위해 세게 입안을 깨물었다.
짠맛과 동시에 비릿한 혈향이 구강을 통해 비강에 도달한다.
터벅터벅터벅.
문 밖 복도 멀리부터 급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만큼 내 심장도 널뛰듯 쿵쾅거린다.
터벅. 삭.
발자국 소리자 문 앞에 다다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을 어지럽히던 물소리며, 긁는 소리 따위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는 반대로 숨 막힐 것 같은 적막이 공간을 장악했다.
홀로 우주를 부유하는 우주비행사가 된 것만 같다.
그리고 12시.
쾅쾅쾅쾅쾅!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몰려드는 수마를 버티며 동시에 귀를 막았다.
이런 난리통에도 아내는 평온히 잠들어 있다.
쾅쾅쾅쾅쾅!
문 열어!! 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여자의 악다구니가 공포심을 배가 시킨다.
끼리리릭.
문을 긁는 소리를 도저히 들어주기 어렵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내를 감싸 안고, 숨을 죽이는 것 뿐이다.
...
12시 1분.
밖이 조용해졌다.
다시 우주를 표류하는 듯한 숨막히는 적막감이 공간을 채운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온전히 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지만, 곤히 잠든 아내를 보며 어지러운 마음을 다 잡았다.
지켜야할 것은 아내 뿐만이 아니다. 어떻게든 이 시간을 나는 견딜 것이다.
쾅!
시발년시발년시발년시발년시발년...
분을 이기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힘껏 문을 내리치고는 멀어지는 것 같다.
음성의 높낮이나 속도가 일정해 사람 같지 않은 기괴함이 느껴지는 그것의 말소리가 멀어진다.
흐아아.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몇 번 숨을 몰아쉬고 맥이 풀려 후들 거리는 두 다리를 채근해 간신히 일어섰다.
영화에선 이럴 때 꼭 주인공이 문 밖의 상태를 확인 한다 거나,
현관문 구멍을 본다거나... 그랬던 것 같다.
이 상황이 되고 나니 왜 멍청하게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랬는지 알 것도 같다.
그것은 일개 사람이 거부할 수 없는 생존 본능, 영역의 안전을 확인하고자 하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다행히 이 방은, 그런 클래식 클리셰와는 그나마 거리가 있다.
방에 있는 인터폰을 통해 문 밖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인터폰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달칵, 인터폰이 들리는 소리와 함께 인터폰의 파란 화면이 깜빡 점등된다.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렸다.
바닥에 끌릴 정도로 머리를 잔뜩 기른 '무언가'가 문 앞에서 입을 뻥긋 거리고 있었다.
'시발련시발련시발련....'
소름이 확 돋아나고, 온 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그 순간,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것은,
속닥속닥속닥
인터폰 카메라에 입을 대고 알 수 없는 말을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 행동에 나는 간신히 비명 만을 참은 채 인터폰을 달칵 다시 내려 놓았다.
패닉에 빠진 와중에 홀린 듯이 다시 인터폰을 집어 들었을 때, 문 밖에 그것은 사라진 상태였다.
컥, 컥.
마치 공기가 얼어붙은 것 같은 갑갑함에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렵다.
산소가 부족해 자꾸만 의식을 잃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창문, 창문을 열어.
속삭이는 소리에 필사적으로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질식할 것 같은 공기에 나는 뚜벅 뚜벅 방 안의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 창문을 열어. 그러면 숨을 쉴 수 있어.
참아야 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은 내 통제를 벗어난다.
방 안에서 밖, 밖에서 방을 볼 수 없도록 유리창을 막은 여닫이 나무 문을 열었을 땐.
히죽, 찾았다.
온통 눈동자가 빨간, 기괴하고 괴상한 그것과 마주쳤다.
입꼬리는 길쭉하게 찢어져 거의 귀까지 닿을 것만 같은 끔찍한 재앙의 형상.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다시 아내를, 그리고 내 아이를 잃었다.
5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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