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
2022/08/29 14:51:49 |
Name |
aura |
Subject |
[일반] 낡은 손목 시계 |
유품, 고인이 생전에 사용하다 남긴 물건.
송곳같이 찌를 듯 차가운 비보와 함께 유품인 낡은 손목 시계 하나가 딸려온 것은 어느 을씨년스러운 가을 밤 이었다.
살인이었다. 사자의 넋을 기릴 시체조차 찾을 길이 없는 잔혹한 살인.
절단되어 유기 되어 있던 왼쪽 팔과 팔목에 채워져 있던 낡은 손목 시계만이 현장에서 발견된 전부였다.
이제 나는 싸늘하게 식어있을 내 아내의 주검조차 온전히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 찾아온 것은 부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부지불식 간 혼절해버린 나는, 깨고 나서야 이것이 꿈이 아님을 깨닫고는 절망했다.
세상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견디기 힘든 감정이 가슴 깊은 곳을 난도질하고 구멍낸다.
커다란 싱크홀이 가슴 속에 난 것 같아.
도통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고, 참을 수 없는 공허함에 눈물이 마르질 않는다.
울다 지쳐 혼절하고 깨어난 신혼 집에 그리운 온기 대신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아내의 빈자리 뿐이었다.
타는 듯한 갈증과 함께 더 이상 몸 밖으로 배출할 수 있는 수분이 없어 눈물조차 흘릴 수 없을 때 쯤 찾아온 것은 분노였다.
여즉 수사에 아무런 진척이 없는 무능한 경찰과 내 아내를 끔찍하게 살해한 인간의 탈을 쓴 짐승 같은 '무언가'와 그리고 세상을 향한 분노.
퇴근 시간 무렵 다녀왔다는 소리와 함께 늘 맑은 웃음을 내게 주던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 몇 번에 몇 번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체념했다.
아내는 이제 돌아올 수 없다. 차갑고 광활한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공포가 나를 짓눌렀다.
그 때부터 매일 밤, 아내가 남긴 유품을 손에 쥐고 울게 되었다.
오직 이 낡은 손목 시계만이 나와 아내가 함께였음을 증명해주는 역사였다.
결혼하기도 훨씬 오래 전인, 연애 초 쑥맥스럽게 선물했던 이 낡은 시계를 내 아내는 무척 좋아했었다.
당신의 첫 선물에 담긴 마음이 너무 예쁘다며, 훨씬 비싼 시계조차 마다하며 이 낡은 시계를 늘 차곤 했었다.
째깍. 째각.
희미한 초침 소리가 방안을 가득 매운다.
일초, 이초. 작은 시계 초침 소리에 회한과 분노와 절망을 담아 나는 간절히 기원했다.
이 지옥같은 시간을 돌릴 수 있기를.
그렇게, 낡은 시계 용두를 정신병이 걸린 사람처럼 거꾸로 돌려 댔다.
광기 어린 손가락에 피가 맺힐 때까지 손목 시계의 시간을 되감던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오빠..., 오빠!
꿈에서라도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맑은 음성이 나직하게 멀리서부터, 그리고 천천히 가까이 들려온다.
꿈인가?
일어나!
다그치는 소리와 함께 날 흔드는 생생한 손길.
순간 나는 작은 비명과 함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끈적한 식은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현실적인 감각.
윤아?
뭐야? 얼굴이 왜 그래? 무슨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
그리운 얼굴, 목소리 그리고 체온.
나는 아내를 부여잡고 흐느꼈다.
뭐야? 왜 그래?
아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당황했다.
아내를 꼭 끌어안자마자 작게 전달되는 따뜻한 온기에 나는 그제야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다 퍼뜩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2022년 10월 20일.
식은 땀이 다시 한 번 목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오늘은 아내가 살해 당했던 날이다.
2에 계속.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