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KF-21 초도 비행 기념 T-50/FA-50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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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T-50/FA-50 이야기 2편 - 개발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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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T-50/FA-50 이야기 3편 - (개발사2) 탐색 개발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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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T-50/FA-50 이야기 4편 - (개발사3) 초음속 훈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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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T-50/FA-50 이야기 5편 - (개발사4) 배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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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상 본문은 반말체임을 양해 부탁 드립니다.
[국방부 최고의 반대자를 설득하다 - 1995년 11월]
탐색 개발을 결정할 당시 핵심적인 역할이었지만 전박사나 T-50 계획에 가장 비협조적이고 비관적이었던 사람은 당시 중기계획과장이었다.(3편 참조) 이 사람은 사업조정관으로 승진하여 포트워스의 설계 사무실에 방문하게 되었다.
사업조정관은 사업이 체계 개발로 가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책이었기에, 전박사는 이번 기회에야 말로 이 인물을 사업에 호의적으로 만들어야 겠다고 결심한다.
브리핑을 철저히 준비하고 심지어 공항에서 빠져나오는 도로까지 몇 번씩 확인해 두었다. 픽업을 해서 공항을 나오는 길에 길을 헤매게 되면 그것 마저도 안 좋은 인상을 줄까 봐 염려 되었다.
"전 박사가 쓸데없는 짓을 해서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는 것을 알고 있소? 헛물켜고 있는 거지. 이 사업은 가기 힘들어요. 전 박사가 하도 졸라 내가 탐색 개발을 보내 주었지만 나는 이 사업에 대해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나자마자 이런 식이었다.
공항에서 사무실로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계속 핀잔을 줄 뿐이었다.
전 박사는 되려 오기를 가지고 사무실에서 개발 현황과 사업의 당위성 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우리는 미국의 도움 없이는 안 됩니다."
조정관은 전 박사의 브리핑을 단 칼에 자르며 말했다.
"그럼 우리는 영원히 미국의 지배하에서 살아야 합니까?"
"그건 아니지"
그가 말끝을 내리기에 전 박사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기로 결심했다.
"언젠가는 벗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이고 이렇게 열심히 해도 항공무기 자주 능력을 갖추려면 30~40년은 걸립니다. 그 사이에 미국이 마음 돌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미국은 하루아침에 마음을 돌려 먹을 수 있습니다."
사업 조정관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 하기에 전 박사는 이판사판이다 하는 심정으로 따지면서 현재 상황에 대해 이것 저것 설명 해 주었다.
그랬더니 조정관은 어두운 표정으로 "이 사업이 아무리 당위성이 있고 설계가 잘 진행중이라고 해도 국가에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소." 하는 것이었다.
이에 전 박사는 그 전까지 타사 항공기에 투자한 역사가 없는 록히드가 투자를 할 정도로 사업성이 좋다고 강조했지만,
"그들이 투자를 한다고 해 봤자 얼마나 하겠소. 뻔하지. 록히드가 투자한들 정부는 돈이 없어서 힘들 것입니다."
"이 사업은 국방부 차원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 범 국가적 역량을 모아야 할 일입니다. 앞으로 대 정부 차원으로 홍보하고 이해를 넓혀 가야한다고 봅니다"
"그 일을 누가 할 것이며, 그래도 힘 들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부정적 반응이었다. 전 박사는 맥이 빠졌다.
그러나, 사실 보통 조정관 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고, 어떻게든 해 내겠다는 전 박사가 대단한 거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이 후 조정관은 록히드 항공사 사장을 만나 투자 의지를 확인하고 생산시설을 견학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았다. 전 박사는 끈질기게 조정관을 따라다니며 항공 산업의 중요성과 이 일은 우리 나라의 국운과도 관련되는 사업임을 끊임 없이 강조했다.
전 박사는 마지막으로 조정관을 공항으로 배웅하면서,
"사업조정관님, 진심으로 다시 한 번 건의 드립니다. 이사업은 정말로 해야 하는 사업입니다. 국방부 내에서는 조정관님의 생각을 무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와 주십시오"
라고 최후의 부탁을 했다.
"전 박사, 정말로 수고가 많습니다. 이 사업은 전 박사의 의지를 보니 될 것 같습니다. 나도 여기서 세뇌가 된 것 같아요.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 박사의 말은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만, 이것이 제 뜻으로만 되겠습니까?"
하며 결국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조기 귀국과 삼성의 제의]
국과연에 미운털이 박힌 전 박사는 신임 본부장의 명으로 탐색 개발이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8월 귀국을 명 받는다.
한국에서라도 사업을 위해 뭔가 하려하면, 업체 주도로 사업이 넘어갔는데 국과연에서 왜 설치고 다니냐며 고깝게 보는 분위기였기에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윗 사람들은 전 박사를 해임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지만, 국방부 장관이 전 박사가 이 사업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한 통에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러던 중 95년 11월에 미국에서 설계 점검 회의가 열렸다. 여기는 전 박사도 참여 했는데 이 때 회의가 끝난 후 삼성 항공에서 온 노 석호 부사장이 전 박사를 불렀다.
"전 박사, T-50 체계 개발 사업이 진행 되게 되면 전 박사가 삼성에 와서 이 사업을 끌고 가야 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이야기에 전 박사는 어리둥절 했다.
"삼성에서 업체 주도로 이 사업을 하더라도 이 사업을 끌고 갈 만한 사람이 없어. 천상 전 박사가 해야 돼. 내가 이번에 가면 빨리 조치를 취할게"
전 박사는 고민에 빠졌다.
[탐색 개발 종료]
95년 12월을 기해 드디어 탐색 개발이 종료 되었다.
탐색 개발을 통해 개념과 기본 설계가 완료 되었고, 기술 이전을 통해 주요 구성품에 대한 개발 능력도 확보 했다. 또한 CD-406이라는 기본 형상도 설계 되었다.
또한 무엇보다 앞으로 항공 산업의 핵심이 될 인력들이 양성 되었다. 국과연 39명, 공군 8명, 기타 업체 인력 약 40여명의 핵심 설계 인력이 양성 되었다.
구체적으로 환경 제어 장치, 비행 조종장치, 무장 제어 소프트웨어, 임무 컴퓨터, 착륙 장치 등이 탐색 개발 기간 중 개발 되었다.
온갖 역경을 뚫고 탐색 개발이 성공적으로 완료 되었으나, 이제는 다음 단계인 체계 개발로 나아가야 했다. 그동안 전 박사의 끊임 없는 노력과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적어도 공군과 국방부는 이 사업에 대해 적극적인 분위기여서 천만 다행이었다.
그러나 체계 개발은 조 단위의 개발비가 필요하기에 국방부 수준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재경원에서 재원을 받아 내야만 했다.
[체계 개발 지연 - 전환 단계 사업 착수]
탐색 개발이 종료 되어 모든 인원이 미국에서 귀국했으나 사실 당장 체계 개발을 위한 예산을 만들 방법은 없었다. 여기서 멈춰 버리면 그간 애써 양성한 인력이 공중 분해 되었으므로 국방부에서는 임시로 전환 단계라는 사업을 만들어 1996, 97년 2년간 진행했다.
[T-50 사업 부장에서 면직 되다 - 96년 11월]
국과연 입장에서 전 박사는 눈엣 가시와 같았지만 국방 장관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에 어쩌 지를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96년 10월 마침내 국방부 장관이 교체 되고 곧이어 11월 국과연은 황박사를 T-50 사업 부장에서 면직시켜 전 박사는 공식적으로 T-50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된다.
전 박사는 자신에게 직책이 있던 없던 어떻게든 이 사업을 성공 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다고 결심한다.
이런 등의 이유로 전 박사는 삼성 항공의 체계 개발 계획서 작성을 돕고 있었다.
전 박사는 이 사업을 진행하면서 항공기 개발에 있어 모든 기술을 획득하여 자체적인 항공기 개발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는 항공기 설계 뿐 아니라 관련 전자, 소프트웨어 등을 모두 망라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개발 계획서를 준비하면서 전 박사는 다른 것은 몰라도 항공 전자만은 록히드가 아닌 우리 쪽이 주체가 되어 개발해야 한다고 줄기 차게 주장했다. 안전이 중요한 비행 제어 시스템은 록히드 주도로 하지만, 항공 전자만은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 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전자 시스템은 완성 된 이후에도 업데이트가 잦은데, 이것을 록히드 주도로 하게 되면 여기에 대해서도 주도권을 잃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전 박사의 제안은 사업비를 증가 시키고 싶지 않은 삼성 항공 경영진에 의해 일언지하에 무시 당했고 삼성 항공에 속하지 않은 외부인인 전 박사로도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이 후 삼성 항공 측은 완성 된 계획서를 보여 주면서 전 박사에게 의견을 구했다. 전 박사가 보기에는 전반적으로 개발비가 너무 적게 책정 되어 있었다. 시험 비행사도 없고 각종 구조 시험 장비들도 모두 국과연이나 항우연 장비를 빌려 쓰는 식으로 계획 되어 있었다.
전 박사는 탐색 개발 때의 경험을 이야기 하며 함부로 예산을 줄이면 나중에 더 큰 문제나 비용이 발생하며, 사업비 4,5억 달러 차이로 이 사업이 가고 못 가고가 결정 되지는 않는다며 사업비 증가를 주장했지만 삼성 항공에서는 그냥 계획서를 제출 하였으며 이로 인해 후일 실제 개발 상에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외국 업체들의 견제?]
T-50의 체계 개발에 관한 논의가 한국 정부에서 이루어지자 여러 외국 업체들로 부터 일종의 방해 작전이 이루어지게 된다. 예를 들면 Bae는 호크기를 초음속 기로 개발하여 공군에 납품하겠다는 제안을 하고, 또한 독일 DASA 사도 한국의 여러 업체에 공동 개발을 제안 해 온다.
Bae 같은 경우 여러 이유로 초창기 부터 T-50 계획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2편 참조), 아음속 훈련기 시장의 강자로서, 새로운 초음속 훈련기의 등장은 여러가지로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또 호크기의 추가 판매를 위해 계속 공군에 여러가지 제안을 해 왔는데, 문제는 이런 제안을 받아 들이면 공군의 훈련기 소요에 영향을 미쳐 T-50의 체계 개발 사업은 물 건너 가게 된다.
또한 DASA의 계획도 마찬가지였는데 유럽 쪽에 너무 많은 파트너를 고려하는 등 처음부터 여러가지로 현실성이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런 제안들은 공군이나 국방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 했지만 나중에 다른 쪽에서 골치 아픈 문제를 야기한다.
[재경원과 KDI의 타당성 검토]
T-50 체계 개발은 결국 재경원에서 예산을 타 와야만 했는데, 사실 재경원 쪽에서는 이 사업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국방부의 T-50 체계 개발 요청에 경제 부총리는 한국개발연구원 KDI에 타당성 검토를 지시했다. KDI 쪽은 5명으로 검토팀을 구성했는데 이들은 이 사업에 부정적이었다.
KDI가 가장 첫번째로 꼽은 문제는 이 사업이 KFP 절충 교역에서 시작 함으로서 록히드가 파트너로 기정 사실화 된 것이었다. 사업 파트너를 결정할 때 경쟁 체제를 도입하지 못 해서 좋은 조건을 받지 못 했다는 논리인데, 지금까지 이 글을 쭉 읽어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논리는 일견 그럴 싸 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말이 안 된다는 걸 잘 아실 것이다. 당시 한국이나 해외 항공 산업 상황이나 수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하는 얘기였고, 절충 교역이 아니면 그런 원천 항공 기술을 아예 얻기 어렵다는 점. 또한 유럽 업체들의 조별 과제 식 사업 진행에 관한 문제점이나 기술 전수가 잘 이행 되지 않는 점 등 여러 문제점을 알지 못하고 하는 얘기였다.
이런 맥락에서 KDI는 록히드와 관계를 끊고 DASA와의 합작을 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앞서 얘기한 여러 이유로 DASA와의 합작은 실제적으로 현실성이 없는 얘기였다.
또한 DASA는 스텔스 기술 이전 등을 이야기 하였기에 KDI는 고작(?) F-16급의 기술 이전을 받는 록히드와의 합작은 더 더욱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였는데, 2022년 현재에도 유럽 업체 중 스텔스 기술을 도입한 기체가 없는 마당에 1990년대 중반에 DASA가 스텔스 기술을 준 다는 말을 믿었다는 이야기는 좀 심하게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문과 분들을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특히나 국방이나 기술 관련한 부분에서 이런 문제는 좀 심심치 않게 터지며, 이런 사업 평가 등에는 이공계 베이스로 관련 지식이 있는 분들도 반드시 참여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전 박사는 KDI의 검토가 진행 되는 동안 어떻게든 KDI 검토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최대한 애를 썼지만, 결과적으로 KDI는 최종 결과 보고서를 부정적으로 작성해서 청와대 경제 수석에게 보고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최후의 노력]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 박사는 밤새도록 고민한 끝에 청와대 경제 수석과 경제 부총리에게 편지를 쓰기로 한다. '국방과 기술' 지에 기고한 '한국 항공 산업과 고등훈련기(KTX-2) 개발'이란 기고문과 함께 T-50 사업의 당위성과 앞으로 KDI에서 보고 할 내용의 문제점 등을 상세히 적은 편지를 간절한 마음을 담아 보냈다.
사실 이 사업은 범 정부적 공감대가 이루어져야만 진행 될 수 있는 사업이었기에, 전 박사는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관련 요직에 있는 분들에게 사업에 대한 이해를 구해 놓았으나 대부분이 교체 되고 말았다.
(청와대 경제 수석, 경제 부총리, 재경원 방위 예산 국장 및 실무과장, 국방부 장관, 국방부 방위 실장 및 획득 개발관 등)
전 박사는 다시 관련 장관 및 중요 담당자 그리고 국회 국방위원들 모두에게 편지를 띄웠다. 일일이 찾아 간다고 만나 주지도 않을 것이므로 이 방법이 그나마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 본 것이다.
당시 전박사가 편지를 띄운 곳들은 다음과 같다.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한승주 주미 대사 시절 만난적이 있음 - 4편 참조), 경제 수석 비서관, 외교 안보 수석 비서관, 총리실, 재경원 경제 부총리, 재경원 예산 실장, 재경원 방위 예산 국장, 국방부 장관, 차관, 방위 사업 실장, 획득 개발관, 사업 조정관, 공군 참모 총장, 통산부 장관, 통산부 기초 공업 국장, 항공 우주 과장, 과기처 장관, 국회 국방위원장 및 국방 위원들…...
전 박사는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진인사 대천명이란 말처럼 이제는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그는 평소 다니던 교회에 40일 새벽 기도를 다니면 신께 사업이 진행 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마지막 결정]
드디어 KDI가 청와대 경제 수석에게 보고를 하는 날이 왔다. 국방부에서는 T-50 사업 단장인 이재기 장군이 참석했다.
KDI의 보고서 내용은 부정적이었고 대부분의 부서 참석자들도 부정적이었다. 특히 재경원은 이 사업은 무기한 연기(사실상 취소)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 수석은 T-50 사업 단장에게 발언 기회를 주었고, 사업의 당위성과 사업의 전망이 밝음을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강력히 주장하였고 특히나 이 사업을 포기하게 되면 국가적으로 항공 산업 자체를 포기 해야 한다는 점들을 분명히 설명했다.
결국 이 날 회의는 아무 결론 없이 끝났지만 경제 수석은 점차 사업에 긍정적으로 돌아섰으며 외교 안보 수석과 재경원 예산 실장과도 회동을 했다.
이렇게 고위직에서는 사업에 긍정적인 기류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으나, 막상 재경원 실무자들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내년 예산에 대한 동결 방침이 이미 세워져 있기 때문에 신규 사업을 넣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정권 말이어서 각 부서가 정책 결정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이런 상황에 재경원 예산실은 국방부 사업 기획단의 공문서 조차 받지 않았으며, 통상부와 재경원은 서로 상대 탓을 하며 97년 6월 24일 계획된 총리 주재 항공우주산업 심의회도 개최 할 수 없다고 하는 판국이었다.
사업단장은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여 직접 경제 부총리에게 비공식적으로 상황 타개를 촉구하자는 건의를 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이 때 청와대 경제 수석이 나서 6월 17일 관계 기관 회의를 소집했으며, 이 때 재경원은 8,9월에나 가서 보자는 입장이었으나 국방부 사업 조정관(이 글 초반에 언급된 것과 같은 분인지는 모르겠음)이 다른 사업을 조정해서라도 이 사업을 지금 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임으로서 타 부서가 반대할 명분이 없게 되었다.
결국 약간의 우여 곡절이 더 있었지만, 95년 7월 3일 국무총리 주관 항공산업 정책 심의회가 열렸으며, 이 자리에 국무총리, 경제 부총리, 국방부 장관, 통산부 장관, 과기처 장관, 건교부 장관, 정보 통신부 장관, 국과연 소장, 항우연 소장, 산업 연구원장, 서울대 노오현 교수 등이 참석해 회의를 가졌으며, T-50 체계 개발 산업 진행이 최종 결정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