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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24 16:03:13
Name aura
Subject [일반] [단편] 새벽녀 - 10
야근이 잦아서 많이 늦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 - -


아라와 나는 두부의 발걸음을 따라 산책을 시작했다.
쌀쌀한 이른 아침 산책 임에도 두부는 잔뜩 신이 난 모양이다.
모터 달린 꼬리를 마구 살랑거리며 지나치는 나무, 풀 따위들의 냄새를 킁킁 맡아댔다.
그런 두부의 모습을 보니, 흐뭇한 마음이 절로 들어 미소가 지어졌다.


"근데 이 시간에 매일 산책하는 거야?"


문득 강아지를 키우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도 제 시간에 줘야하고, 산책도 시켜야 하고.


"아뇨. 이렇게 아침에는 잘 안 하는데... 이상하게 오늘 두부가 아침부터 산책가자고 보채더라구요."
"보채?"
"네. 산책줄을 가지고 와서 툭툭 제 앞에 던지거든요."


가만히 집에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아보였나?
그나저나 산책가자고 집사를 보챌 줄도 알다니, 아무래도 두부는 내 생각보다 훨씬 똑똑한 견공인 것 같다.


"두부야! 이리와."


나는 앞서 걸어가며, 온갖 곳에 몸을 치대고 있는 두부를 불렀다.
뾰족한 두 귀가 쫑긋 하더니, 이내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살짝 쭈구려 앉아 하얗고 복슬복슬한 두부를 맞이했다.


강아지에 대해서는 딱히 어떤 감흥도 없었던 나였지만,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괜히 나도 강아지를 한 번쯤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얗고 복슬복슬한 털의 감촉도 좋았고, 왠지 내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은 영리함도 마음에 들었다.


"역시. 두부는 오빠가 좋은가 봐요."
"왜?"
"두부는 원래 낯을 많이 가리거든요. 낯선 사람은 자기 머리도 못 만지게 하는데, 오빠는 몸을 만져도 가만있잖아요."


강아지란 게 원래 사람이면 다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두부는 자신이 낯을 가린다는 아라의 말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내 손길을 즐기고 있었다.
쓰다듬는 것을 잠깐 멈추니, 다시 쓰다듬으라는 듯 앞발로 내 손을 툭툭 건드렸다.


"하는 짓이 완전 사람 같네. 똑똑하다. 하하."
"그쵸? 강아지가 원래 똑똑한 동물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두부가 특별하긴 하죠. 엣헴."


두부의 칭찬에 아라의 어깨가 으쓱했다.
아라는 이뻐죽겠다는 표정으로 두부 앞에 쭈구려 앉아 두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왕!"


순간 두부가 신난 다는 듯이 짖으며, 우리 주변을 정신 없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재빠른 두부의 몸놀림 만큼, 순식간에 산책줄이 엉켜들었다.


"앗."


발목에 엉킨 줄 때문인 지 쭈구려 앉은 아라의 무게중심이 밖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황급히 아라가 넘어지지 못하게 한 쪽 팔을 낚아챘다.


"왕왕!"


어째서인지 기세가 더욱 오른 듯한 두부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발목을 걸고 넘어지는 산책줄과 아라의 손을 낚아챈 반동이 합쳐져 순식간에 무게 중심을 잃어버렸다.
문제는 그 순간에도 내가 아라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콰당.


엉덩이에서 가벼운 충격이 느껴졌다. 원래부터 앉은 자세였기 때문에 넘어져서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아라의 팔을 붙잡은 상태로 넘어졌기 때문인 지 넘어진 상태로 아라를 끌어안은 것 같은 민망한 자세가 연출되어 버렸다.


"왕왕!"


그 모습에 두부는 더욱 신이 난 듯 아라와 내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괜찮아요?"


아라가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로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왜 일어나도 내 몸을 짚으면서 일어나는 거니? 혹시라도 짚을까, 나도 모르게 배에 힘이 들어가잖아.


"괜찮아."


나는 아라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더러워진 옷을 툭툭 털어냈다.


"두부 너!"


약이 올라 그런지 잔뜩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라가 두부를 노려봤다.


"왕!"


두부는 '어쩌라고?'하는 듯한 표정으로 아라를 향해 당차게 짖어보였다.


'근데, 어째 두부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


"큰일이에요! 리드줄 손잡이를 놓쳤어요!"


노려보던 것도 잠시 아라가 당황한 표정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두부는 멀어지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멀어지고 있었다.
아마 넘어지면서 산책줄 손잡이를 놓친 모양이었다.


"뭐해? 쫓아야지!"


나는 발을 동동구르는 아라에게 소리쳤다.
그렇게 이른 아침에 숨 막히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헉. 헉."


강아지란 것들이 그렇게 빠르고 지치지도 않는 지 처음 알았다.
정신없이 두부를 쫓다보니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 같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며 신난 아이처럼 달리던 두부가 멈춘 것은 작은 굴다리 안에 도착해서였다.
녀석도 폭주한 덕분에 살짝 지쳤는 지 혀를 쭉 빼놓고 헥헥 거리고 있었다.
여기라면 안전하다는 듯이 두부는 편안히 엎드려 있었다.


"후우."
"하아. 하아."


굴다리 안으로 들어가기 전, 가파른 숨을 몰아쉬었다.
쏟아지는 입김이 시야에 가득찼다.


"드디어 잡겠네. 요 녀석. 가자."


호흡에 여유를 챙기고, 아라의 옷을 끌여당겼다.


"저... 저... 하아. 하아. 죄송한데요. 오빠."
"응?"


아라의 표정이 살짝 창백해 보였다.


"두부 좀 데리고 와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아라가 굴다리 안으로 들어가길 꺼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그러려니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부를 향해 다가갔다.
순간 두부의 표정에 물음표가 가득 찼다.
'어떻게 들어올 수 있는거지!?' 같은 표정이었다.
당황하여 바닥에 껌처럼 달라 붙어있던 녀석을 잡고 굴다리 밖으로 나왔다.


"여기. 이거."
"고마워요."


어느새 안색이 돌아온 아라가 두부의 산책줄을 건네 받았다.
굴다리 안으로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안색이 안 좋았던 아라의 모습이 대비됐다.
티가 났는 지 아라가 먼저 내게 해명하 듯 설명했다.


"사실은 제가 굴다리 같은 곳을... 무서워해요. 조금."
"그래?"
"무서워한다니 보다는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거죠..."


트라우마라. 그런 걸 굳이 억지로 떠올리 게 할 필요는 없겠지.


"두부 요 영악한 녀석! 영리하다 못해 영악하구나! 요 놈!"


나는 괜히 두부의 양 볼을 꼬집으며 화제를 돌렸다.
찹쌀떡처럼 쭉 늘어나는 두 볼의 감촉이 무척 좋았다.


"고마워요. 어쩐지 오빠한테는 늘 신세만 지는 것 같네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차려준 저녁도 마다하고 매몰차게 뛰쳐나간 날이 떠올랐다.
머쓱한 걸?


"신세는 무슨, 신경 쓰지마. 산책은 이제 토 나올만큼 했으니 돌아가자. 간만에 제대로 운동했네."
"저 오빠! 괜찮으시면, 그 때 못 먹은 저녁 오늘 어떠세요?"
"오늘...?"


자꾸 거절해서 미안했지만, 오늘은 할 일이 있었다. 아직 선약은 아니었지만.
생각난 김에 카톡을 보니 아침에 연락해두었던 과 동기에게 답장이 와 있었다.


- 오컬트 쪽으로 관련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나야 환영이지. 오늘 오후에 보자. 우리 학교 동방로 와.
   밥은 무조건 네가 사는 거임.
  

그다지 친하지 않았음에도 흔쾌한 허락의 메세지였다.
그런데 대학교 동방이라니, 이 녀석 아직 졸업 안했던가?
취업전선이 만만치 않기 때문인지 남학생들도 너도나도 휴학하는 게 유행이었기 때문에
녀석이 아직까지 졸업 못한 화석 학번이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나도 한 학기 휴학한 전적이 있기도 하고.


굳이 이상한 걸 따지자면, 초고학번 주제에 아직도 동방 따위에 출몰한다는 것이겠지.
그 동아리 후배들의 심정이 어떨까? 살아있는 화석이나 전설의 포켓몬을 보는 것 같아서 신기할 수도 있겠고,
눈치가 보여 갑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알았어.


간단히 녀석에게 답장을 보냈다. 아라에겐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은 거절해야겠다.


"미안. 오늘 해야할 일이 있어서."
"아, 그렇구나. 그럼 괜찮아요."


어쩐지 시무룩해진 것 같은 표정이 신경 쓰였다.
나는 스마트폰 다이얼패드 화면을 아라에게 건넸다.


"오늘 말고 다른 날은 어때? 그러고보니까 연락처를 모르더라. 알려줄래?"


아라는 꾹꾹 번호를 다 누르고 내게 스마트폰을 다시 건넸다.
나는 통화버튼을 눌러 아라에게 신호음이 가도록 하고, 아라의 번호를 저장했다.


"오빠."
"응?"
"생각보다 능숙하시네요?"


아라가 탐정같은 눈으로 나를 요리조리 쳐다봤다.


"뭐가?"
"아니에요. 아무것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는 아라의 입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11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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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인
20/12/24 16:36
수정 아이콘
님도 능숙하십니다.
조금만 더 분량이!!! 오늘도 감사합니다.
20/12/24 17:12
수정 아이콘
댓글 감사합니다. 가능하다면 연참 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미카엘
20/12/24 16:59
수정 아이콘
앗 연재 다시 하시고 계셨군요.. 정주행하겠습니다
20/12/24 17:12
수정 아이콘
안녕하세요. 미카엘님. 반가운 아이디네요. :)
노둣돌
20/12/29 11:21
수정 아이콘
연휴뒤라 늦게 감상했어요.
응원할께요^^
20/12/29 12:0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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