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은 확실히 나와 같은 범부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차분하고, 깊이 생각할 줄 알았으며, 시답잖은 농담은 잘 하질 않았다.
이 외에도 녀석만의 특징은 많았지만(그야말로 사람 자체가 독특했다.),
그 중에서도 우물쭈물 부끄럽기만 했던 10대 소년의 나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녀석의 행동력이었다.
그것은 당시 나로서는 어떻게 따라할 도리가 없는 재주이며, 용기였다.
'지금.'이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은 그 기다란 다리로 황새처럼 성큼성큼 주은호의 반으로 향했다.
나는 병아리처럼 심장을 쌔근거리며, 잔뜩 움츠려든 발로 총총 황새를 좇았다.
분명 내기의 주체는 녀석이었건만, 녀석을 좇는 그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9사 만루 2아웃의 마무리 투수와도 같은 심정이었다.
"다행히 자리에 있구나."
"잠깐만."
슬쩍 열린 교실 문틈 사이로 주은호의 위치를 확인한 녀석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녀석은 수조에 담긴 물처럼 담담했건만, 어째선지 잔뜩 떨고 있었던 나는 잠시 녀석을 제지했다.
"왜?"
"어떻게 하려고?"
"글쎄."
"아무 생각 없던거야?"
설마 대책도 없이 다짜고짜 주은호네 반으로 찾아온건가?
아니다. 녀석이 절대 그럴리 없었다.
"그건 아니지."
"그럼?"
"첫 번째 단계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그래, 주은호의 이미지가 아닌 있는 그대로 보는 거, 맞지?"
"맞아. 그럼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할 것 같아?"
녀석이 천진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말투가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같기도, 친구를 놀리는 천진한 아이같기도 했다.
"그렇게 말해도 내가 알 리가..."
"보는 것 만큼 좋은 방법이 없겠지. 어떡할래?"
"?"
"아 그리고 너 악기 하나 쯤은 할 줄 알지? 뭐 못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지만."
"응? 악기는 왜...? 뭐 기타 쯤은..."
"아 그럼 됐다. 다녀올게."
스르륵 낚아챘던 녀석의 팔이 빠져나갔다.
나는 소금물에 빠진 붕어마냥 입을 벙긋거렸다.
나는 홀린듯이 주저함이 머무르지 않는 녀석의 발자국을 따라 교실로 들어섰다.
낯선 객의 방문에도, 일상다반사인 듯 은호네 반 아이들은 각자 조잘조잘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이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았다.
모두는 시끌벅적했다. 그저 나만이 폭탄이 떨어지기 전의 숨막히는 정적과 고요를 느끼고 있었다.
녀석의 보폭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마치 카모플라쥬한 카멜레온처럼 주위 사람들은 전혀 눈치챌 수 없게,
지극히 평범한 걸음으로 폭탄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과연 녀석이 주은호에게 건넬 쨔르봄바같은 첫 마디는 뭘까.
그리고 마침내,
"안녕."
실로 다소 맥 빠지는 첫 대사였다.
나는 그제야 긴장이 탁 풀어져 가물가물했던 시야가 밝아졌다.
쉬는시간을 이용해 한창 잡담을 나누던 주은호와 그 친구들의 눈은 일제히 녀석을 사격했다.
주은호의 친구들은 한 두번 겪어본 일이 아닌 듯, 잠시 눈빛이 반짝했다가 이내 관심의 불꽃이 꺼졌다.
주은호의 표정은 도통 알 수 없는, 아리송한 표정이었는데 어찌보면 무관심으로 인한 무표정 같기도 했고,
또 다르게 보면 아주 약간의 호기심이 어린 의아한 표정같기도 했다.
그 와중에 스쳐지나가며 언뜻볼 수 있었던 주은호의 얼굴은, 이제까지 니가 본 건 주은호가 아니라는 듯
그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아니, 이정도면 뽐내는 수준이 아니고, 고양이 털처럼 뿜어대는 수준이었다.
"별다른 용건이 있는 건 아니고. 주은호, 맞지?"
"응."
녀석의 행동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정말 주은호를 전혀 모르는 사람같았다.
입꼬리 끝쯤 아주 어스름하게 걸린 담백한, 녀석 특유의 미소가 아니었더라면 나조차 감쪽같이 속았을 것이다.
"왜?"
의아한 듯 주은호가 녀석에게 반문했다.
무표정에 가까웠는데, 마치 생화같은 매력이 있었다.
"별 다른 용건이 있는건 아니고."
녀석이 바지춤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니 전화번호 좀 알려줄래?"
"..."
이어지는 녀석의 말이 자신에게 다가오던 흔해빠진 남자들과 같이 뻔해서였을까.
나는 어쩐지, 주은호의 표정에서 실망스런 기색이 느껴졌다.
이 쯤에서는 그 친구들 뿐 아니라 그 반의 모두가 녀석을 쏘아보고 있었다.
숨막힐 듯한 적막함이 교실을 휘감았다.
"거 참, 무안하네. 뭐 딴 맘있어서 달라는 건 아니고."
"?"
녀석은 쏟아지는 시선따윈 별 것 아니라는 듯 털어냈다.
무심한 듯, 시크한 녀석의 말투는 다시금 은호의 표정에서 생기를 북돋았다.
"내 번호가 굳이 필요한 이유가 뭔데?"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주은호가 반문했다.
"이렇게 말하면 또 별 거가 되려나."
녀석은 미소지었다.
그 순간 녀석의 미소는 평소와 다르게 꽤 매력있어 보였다.
"너 나랑 일하나 같이하자."
"뭐?"
녀석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구름 같았다.
뭐냐. 무슨 짓을 벌일 셈이냐. 나조차 그런 심정이었다.
"평범한 건 재미없지 않아?
내가 건전하지만, 아주 재밌는 일탈을 제안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주은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주은호가 녀석의 말에 동요하는 걸까.
"자세한 건 문자든 전화든 이따가 하자고, 슬슬 쉬는 시간도 끝날 시간이고."
"..."
분명 그 정적은 찰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세어본다면 2~3초 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이 10초처럼 느껴졌다.
"줘 봐."
"여기."
그리고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결국 녀석은 기어이 주은호의 번호를 받아내고 말았다!
커다란 충격이 온 몸을 감쌌다.
이게 가능한 일이었구나. 그 주은호의 번호를 받아내다니!
대단했다. 놀라웠다. 그리고 부러웠다. 아, 나지막이 탄성이 터져나왔다.
"운이 좋았네. 그리고 때마침 종소리도 울리고. 이따 연락할게."
그토록 선명한 종소리는 그 이후로 단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었다.
충격을 받은 건 나 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녀석과 나는 운 좋게도 때마침 울리는 종소리에 유유히 주은호의 반을 빠져나왔다.
어안이 벙벙했다. 아마 번호를 받고 종소리가 울리는 것까지 녀석은 계산했었을 지도 모른다.
마법같기도하고, 마술같기도 한 녀석의 솜씨는 도저히 묻지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어떻게 된거야?"
주은호의 번호를 단 그 몇 마디로 받아낼 수 있다니.
"별 거 아냐."
녀석은 심드렁했다.
나는 약간 울컥했다. 지금 누구 번호를 받아낸 건데, 고작 그 반응인거냐.
"있는 그대로 봤지.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대했고."
"?"
또 녀석은 스승이자 짖궂은 악동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주은호가 바라는 걸 찾아줬을 뿐이야."
녀석은 점점 수수께끼같은 말만 했다.
당시의 나로서는 녀석에 대한 주석없이 녀석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든, 남자든. 그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을 준다.
그것만큼 확실한 호감따내기는 없지."
"니가 주은호가 원하는 걸 줬단거야? 대체...?"
그게 뭐지?
"그렇게 궁금한 표정 짓지마. 정말 별 거 아니니까. 그리고, 차차 알 게 될거야."
"..."
"어쨌든 두 번째 단계도 잘 넘겼네."
"두 번째?"
"그래. 서로 연애를 하던 지지고 볶던 감정의 교류는 연결고리가 있어야하니까.
그러니까, 솔직히 도박성이 짙긴 했지만, 실패를 염두에 두고서라도 번호를 받은거고."
당연한 소리였다. 인간관계에서 대화가 없는 관계란 있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고작 이깟 번호 하나로 되는 건 아무 것도 없겠지?"
녀석의 말은 의문형이었지만, 평어체이기도 했다.
분명 내기는 주은호와 사귀는 것 이었지.녀석의 말대로 번호를 받았다고 해서 상대와 백 퍼센트 사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깟 번호 하나라니. 그 번호 하나에 얼마나 많은 남자아이들이 좌절했는데...
"자, 그럼 삼 단계로 나아가 보자고."
"삼 단계는 뭔데?"
"간단하지. 몸에서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진다."
녀석이 한 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나는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건 일종의 녀석의 시그니쳐였다.
녀석은... 더 없이 신을 내고 있었다.
<4>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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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겠습니다. 부들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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