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시놉 : 증권회사의 지점장 강재훈(이병헌). 안정된 직장과 반듯한 가족, 나름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부실채권 사건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는 가족이 있는 호주로 떠난다. 그러나 다른 삶을 준비하는 아내 수진의 모습을 보고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돌연 자취를 감추는데...
이 작품은 일종의 로드 무비입니다.
주인공의 행보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얼굴만 쫓아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겪는 상황, 보는 광경, 사람들과의 만남, 거기서 느끼는 감정을 몽땅 담아냈어요.
그리고 극 말미에 주인공이 체득한 어떤 결론이 이 영화의 주제가 됩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과 유사한 플롯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거예요.
['내일을 위한 시간]과 차이점이 있다면 [싱글라이더] 주인공의 대사는 많지 않습니다.
말 보다는 행동으로, 행동 보다는 표정으로 묘사하겠다고 작심한듯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이 연출을 따를 배우로 이병헌을 선택한 것은 탁월한 일이었습니다.
영화 오프닝이 시작되자 마자 제작진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짐작합니다.
영화의 또 다른 '옳은 선택'은 이국적 풍경의 아름다움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극 대부분이 호주 로케 촬영이었음에도 관객에게 급한 마음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초반부터 중반부까지 호주의 풍광보다 주인공의 마음에 집중합니다.
롱쇼트와 클로즈업을 오가며 인물의 감정을 한 번 거쳐서 시드니의 모습을 보여주는 촬영 방식입니다.
만약 낯선 나라의 美를 담아내는 것에 치중했다면 영화는 초장부터 틀린 작품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영화가 여기까지란 점입니다.
우선 주제가 모호합니다.
꿈을 말하는 이야기인지, 가장의 역할 담론인지, 삶의 주체성과 방향에 관한 건지, 사랑과 믿음을 말하려는 건지,
딱 하나를 꼬집어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양한 담론을 유려하게 풀어나갈 능력이 있다면 좋았을 터이지만
[싱글라이더]는 각기 다른 색깔의 주제를 배합하는 것에도,
또는 그 중 어느 것 하나를 골라 뾰족하게 부각시키는 데에도 실패하고 맙니다.
게다가 이야기의 흐름은 영화 포스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단조로운 편입니다.
진행 상황이 긴박하지 않은 플롯에다가 주제가 모호해버리니 작품성 면에서 이중고를 겪습니다.
이병헌 다음의 주요 캐릭터의 쓰임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주인공의 부인 (공효진)과 호주 유학생 (안소희) 두 캐릭터 모두 분량이 크지 않으나
주인공의 행보에 미치는 역할은 매우 큽니다.
그만큼 중요한 배역임에도 이 곳에서는 다소 단순하고 편리하게 쓰였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습니다.
'공효진' 캐릭터는 앞서 언급한 '여러 주제들'을 다루는 데에 결정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애초에 철저히 주인공 (이병헌)의 시선에만 극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에 '부인'의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문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이런 각본이 계속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극 후반부 '부인'의 어떤 선택이 주인공 이병헌의 감정 연기에 큰 도화선을 담당하는데도 불구하고
감정의 흐름에 동참하기가 어렵습니다. 입체적으로 그려야 할 대상을 간편하게 처리해버립니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주제의 모호함'과도 연결됩니다.
'안소희' 캐릭터는 그저 주인공의 행보와 후반부 극적 재미를 위한 소모품에 불과했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중반부까지 주인공과 '안소희'는 꽤나 눈길이 가는 유대를 보여주다가 급작스럽게 도구화 되어버립니다.
설상가상, 영화의 극적 장치가 머리나 가슴을 크게 뒤흔들지도 못합니다.
도구적으로 '잘' 쓰여야 할 목적조차도 달성치 못하고 맙니다.
영화가 섬세하다는 것은 그저 클로즈업을 많이 쓰고 작은 감정 변화를 화면에 담는 것이 전부가 아닐 것입니다.
주인공 이병헌은 작품 내에서 분명 훌륭하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둡고 칙칙한 가장의 모습마저 '완벽'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민감하고 정확하게 연기합니다.
다만 그 연기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어떤 주제로 향해가는 것인지 섬세하게 안착하지 않습니다.
찰리 채플린 작품 [시티 라이트]의 엔딩 장면에서 채플린의 표정은
그저 복합적 감정 연기를 잘했다는 것만으로 칭송 받지 않았습니다.
그 직전까지 영화가 삶의 딜레마를 견고하게 쌓아올렸고
마지막 클로즈업을 통해 희비극을 또렷하게 보여줬기에 박수받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주영 감독의 각본-연출 데뷔작 [싱글라이더]는
심리를 그려내고 담는 방식에서는 좋은 데뷔작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보다 탄탄한 구성과 선명한 주제 의식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운 범작에 그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