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프레젠테이션(PPT) 전문 디자이너이자 개인사업자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서러운 사연들로 점철된 작금의 자게 분위기에 개탄을 금치 못한 바, 과연 10개까지 나올까 싶긴 하지만 저도 생각나는대로 몇 자 적어 봅니다. 좋은 대세편승이다.
1. 임재범형 (내가 만약 외로울 땐 누가 날 위로해 주지)
보통 나이가 지긋하신 클라이언트님의 경우입니다. 미팅을 가면 대부분 먼저 프로젝트 내용 설명을 듣습니다. 사실 저는 해당 프로젝트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원고만 제대로 주시면 그걸로 내용 좀 정리하고, 이쁘게 다듬고, 가독성을 높이고, 뽀샵질 좀 하고... 뭐 그렇습니다. 물론 많이 알면 좋기야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대학교 시절 강의 수준으로 1시간 가량 이 프로젝트의 중요성과 향후 비전, 경쟁사 동향, 임원분들 경력과 출신 대학교, 수익 방식, 년차별 사업계획, 현재의 매출 실적과 예상 매출실적에 대한, 굳이 원고에 반영되지도 않을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장대한 대하 드라마를 듣고 있을 필요까진 없습니다.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그래도 이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인데 자기 먹고 살기 힘든 이야기와 개인사(가령 직장에서 짤리고 이 사업을 시작하는 중이고, 애들은 다 커서 대학교 다니는데 등록금은 왜 이렇게 비싸며, 정치판은 왜 그 따위로 돌아가는지, 부동산 시장과 물가는 왜 이렇게 요동을 치며, 와이프가 요즘 골프 배운다고 난리를 치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겠냐, 요즘 핫한 걸그룹 멤버 아무개가 있는데 나이 먹고 주책인 거 같긴 하지만 드라마에서 보니 이쁘긴 이쁘더라 손나은짱 등등)를 토로하시며 신세 한탄에 들어가게 되면 감히 말 끊을 엄두도 못내고 꼼짝없이 경청해야 합니다. 프로젝트 진행하시느라 힘드신 건 이해하고, 자신의 노고에 마땅한 관심과 보상이 없으신 것도 안타까우며, 반대로 심심하고 외로우셔서 시간 때울 상대 찾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대상에서 부디 저는 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보노보노형
참고자료 : https://pgr21.com/pb/pb.php?id=humor&no=266463
정부 '친환경' 사업계획 관련 프로젝트 때였습니다. 저희가 이틀 정도 작업한 몇 가지 컨셉(시안, 혹은 샘플이라고도 하죠)을 보내드렸으나 담당자(팀장)분께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며 얼마 전에 자기 직원이 만든 PPT가 하나 있는데 굉장히 마음에 드신다며 이걸 좀 디벨롭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전문가인 우리보다 직원분께서 만든 디자인이 더 좋으셨다니, 부끄럽고 죄송하고 반성하는 마음 가득히 메일을 확인했는데... 마스터(배경) 왼쪽 아래에 부담스러운 크기의 '아기공룡 둘리'가 매 페이지마다 각각 다른 포즈로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 뭐같은 둘리는 왜 들어가 있냐고요. 그분의 답변이자 사고의 흐름을 정리하자면 '친환경? > 녹색! 녹색을 쓰자 > 그렇다면 녹색 캐릭터를? > 녹색하면 역시나 둘리!' 뭐 이랬습니다. 저작권 따위는 무시한다!
후일담으로, 마지막까지 '크롱'과 경합을 벌였으나 인지도에서 밀렸다고 하시더군요. 크롱 의문의 1패.
3. 3단 합체형
컨셉을 3번 정도 드렸습니다. 전부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십니다. 이해합니다. 이쪽 일이 원래 그렇거든요. 그런데 A, B, C 각각의 요소를 일부 차용해서 하나로 합쳐 달라고 하시면 괴작이 됩니다. 이 경우 '그건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습니다. 전문가는 우리입니다. 그 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강력하게 항변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결됐냐고요?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을 버렸습니다. 간단하다?
4. 대학생형(?)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대학생이고요, 조별과제를 이쁘게 만들어서 교수님한테 발표해야 되는데 비용이 얼마나 드나요?' 그래서 비용을 말씀드립니다. 당연히 업체기준으로요. 대학생분들에게는 당연히 뜨악할 만한 가격이죠. 정말로 으아아아아아아~ 라고 하는데 그런 의성어는 일본 애니메이션에나 나오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더니 장당 천 원쯤에 어떻게 안 되냐고 통사정을 합니다. 미래의 고객님이 될지도 모르는 분이라 차마 뭐라 하진 못하겠는데 전화를 너무 안 끊길래 제가 먼저 끊어드렸습니다. 전화가 다시 오더니(아마 저희 회사 말고도 여러 군데에서 거절당한 듯) 선생님(?)만 믿는다며 꼭 해달라고 하시는데 결국 잘 타이르는데 30분 정도 걸린 듯 합니다.
조별과제는 직접하세요. 하기 싫다거나 단가가 안 맞아서 그런 게 아니랍니다. 고객님의 즐겁고 신나는 학창시절의 추억을 제가 감히 뺐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 모두 조별과제에 얽힌 알흠다운 추억 하나쯤은 있으시죠? 같은 조였던 여자사람후배와 사귀게 된다든지 하는 그런 '흔한' 스토리 말이죠.
5. 나보다 전문가형
국책 과제 관련 모 대학교 프로젝트 일을 했을 때였습니다. 3일 정도 디자인 작업을 마친 후, 발표일 하루 전 컴퓨터랑 파일을 들고 그 대학교 지방 캠퍼스에 가서 총 책임자이신 '이공계' 교수님 외 프로젝트 멤버분들과 마지막 수정 작업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여차저차 시키신대로 수정 작업을 하고 있는데 교수님 왈, 사실 이번 PPT 디자인이 별로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급하게 만드느라 그렇게 된 건 자기도 이해하니(발표일 4일 전에 부랴부랴 전화가 왔습니다) 일단 전반적인 수정은 패스하고 이대로만 잘 마무리 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러시면서 제 모니터를 꼼꼼히 보시더니 하신 말씀이 '음... 내가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는 이유는... 으음... 뭘까... 왜 마음에 안 들까? (몇 초간 정적) 아, 이거슨? 87년? 아니 90년? ... 아니, 으음... 그래, 88년, 맞아 88년식 디자인이야... 그래서 그랬던 거였군 (끄덕끄덕)' 였습니다.
그 전까지만해도 전 저 스스로 이쪽 방면에서는 나름의 경력과 경험이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그 교수님의 드높은 식견에 그만 반성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송구스럽고 부끄럽지만 사실 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근 20년에 가까운 과거인 87년, 88년, 90년식 디자인 각각의 유의미한 차이점을 말이죠. 특히 87년식 디자인과 88년식 디자인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해 주실 분 계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호돌이 같은 걸 껴얹나?
이런 분은 유독 이공계쪽 담당자분들이 많습니다. 순전히 우연이겠지만 말이죠. 이과 망했으면
6. 스무고개형
경쟁입찰, 현상설계, 현상공모 건축 PPT의 경우, BGM과 성우 내레이션, 과거에는 플래쉬와 CG 동영상까지 포함한 온갖 화려한 효과의 각축장이 되기 때문에 문구 하나하나에 공을 굉장히 많이 들입니다. 정작 PPT 점수는 전체 배점 중 많아야 20% 남짓이지만 그 20%에서 1%를 더 따기 위해 마지막 제출의 순간까지 문구를 고치고 고칩니다. 그래서 왠만한 프로젝트의 경우 전문 시나리오 작가를 따로 섭외합니다.
그렇게 완성된 PPT를 제출 당일 늦은 오후(보통 제출은 PM 6시까지인 경우가 대부분) 사장님께서 검토하시면서 입맛을 다시십니다.
'야, 저 단어 말고, 뭔가 새롭고, 산뜻한, 남들이 쓰지 않은, 센세이션하고 기발하고 참신한, 뭐 그런 단어 없어?'
가령 이런 겁니다. '야, 처음 인트로 나갈 때 나오는 우리는 새로운 흐름을 담았습니다. 여기 있잖아. '흐름' 말고 뭔가 다른 단어 없어? 너무 흔하잖아?' 그러면 회의 석상에 있는 분들은 뭔가 골똘히 고심을 시작합니다. 제출까지 2시간 남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바꾼다고 성우 재녹음을 할 수 없다는 물리적인 한계 따위는 가볍게 무시됩니다. '흐름... 흐름... 흐름... 뭔가 다른 단어가 없을까?' 그 때 옆에 있던 시나리오 작가가 한 마디 합니다. '사장님, 지금 이 프로젝트의 성격상~ 블라블라~ 최적화된 쉽고 간결한 단어를 쓰심이~ 블라블라~ 흔다다는 건 좋은 것이기 때문에~ 블라블라~'
여기서 넘어가면 다행인데 대부분 만족 못하시죠. 그렇게 '폭탄'은 제게 넘어옵니다. 'PPT 전문가분 생각은 어떠심? 이런 일 무진장 많이 해보셨을 테니 뭔가 기발한 단어 들은 거 없으심? 아예 문구를 싹 바꿔도 좋을 듯?'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 다닐 때 국어 공부 좀 열심히 할 걸 하고 후회하며 저는 각종 단어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영어로 Flow는 어떨까요?' '그건 너무 어렵고' '그럼 적층?' '그건 쌓는 거잖아' '연계?' '너무 약해' '조화?' '흔한 거 말고' '아우르다?' '문구로 넣기 애매할 거 같아' '물결?' '왠지 수해나서 건물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어' '교차? 아니면 Cross?' '교차... 교차... 음 싫어. 그냥 싫어' .... '사통팔달?' '어렵다니깐' '소통?' '흔해'
이런 식으로 장시간 제 머릿속에 있는 비스무레한 단어를 진땀 빼며 나열하다가 더 이상 나올 단어가 없을 때 즈음 되면 실무진께서 저를 살려주십니다. '사장님, 지금 제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수정할 시간이...' '아, 그래? 그래 알았어. 뭐 그냥 이대로 하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7. 질 수 없음형
역시 사장님이나 높은 임원분들이 포함된 다수의 사람들과 회의 할 경우 자주 만납니다. 저희가 뭔가 만들어가서 시연합니다. 시연이 끝난 순간이 저희로서는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죠. 과연 무슨 말이 나올까? 이번에는 제발 그냥 넘어갔으면 등등 평소 믿지도 않았던 신께 기도를 올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간절한 저희의 기도를 신께서 들으셨는지 사장님(이나 높은 분)께서 굉장히 이례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잘하셨네요.' 이 소리가 나오면 정말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하다고 합니다. (살았다! 오늘은 칼퇴근!) 문제는 그 다음 직원분들을 향한 사장님의 사족이죠.
'야, 다들? 뭐 할 이야기들 없어?' (정적)
그 말씀 한 마디로 인하여 아무 생각없이 저희의 작업물을 보고 있었거나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등 뭔가 딴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뭔가 한 마디씩 해야 하는 상황으로 돌변합니다. 결국 누군가 한 마디 던지죠. '사장님, 전반적인 칼라가 좀...' 그 순간 다른 직원들 역시 처음 발언자에게 지지 않기 위해 뭔가 주도면밀하게 검토한 척 할 수 있는 멘트들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조직도 등 구성이 좀 흔하게 보이는, 텍스트가 너무 많아서(적어서) 의도 전달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은, 그림이 들어간 페이지들의 레이아웃이 좀, 톤의 매너를 포함해서 전반적인 완성도가 미흡한,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전체적으로 뭔가 좀 아쉽고 훵한 느낌이 드는, 상단 제목이 좀 더 잘 보이도록 전체적으로 수정이 필요할 거 같은, 완전히 새로운 시안을 하나 더 만들어 보고 우리가 직접 서로 비교를 해 보는 것이, 그래프의 가독성이 떨어져 보이므로 다른 형식의 그래프도 고려해 보심이, 디자이너께서 폰트 변경을 포함하여 좀 더 퀄리티 작업을 추가해야 될 거 같은...
그리고 사장님께서 정리하시죠. '오케이~ 지금까지 나온 사.소.한. 사항들을 좀 더 보완하셔서 내일 다시 봅시다.' 우와, 씐난다.
8. 배째라형
어떤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견적은 부가세별도 300만원(=부가세포함 330만원)이라고 칩시다. 이상 없이 해 달라시는 거 다 해드리고 완료했습니다. 그러면 돈을 받아야겠죠. 담당자분께 전화를 드립니다. 전자세금계산서 발행 관련 몇 마디 여쭙고 견적을 확인합니다. '부가세 포함 330만원에 하기로 한 거 맞으시죠?'
예상하셨다시피,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저는 분명히 시작 당시 부가세별도라고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포함인 줄 알았다고 나올 경우 답이 없습니다. 견적서? 계약서? 이미 사전에 다 보냈고 그쪽에서도 오케이 한 다음입니다. 그렇다면 법으로 갈까요? 계약서에 견적서까지 있으니 관할법원에서 봅시다? 30만원 때문에? 이미 작업 파일은 다 넘어간 상태인데다가 무조건 안 된다고 하면 답이 없습니다.
더 지능적인 핑계도 있습니다. 돈 달라고 하는 순간 '죄송하지만, 저희가 자체 지급 가능한 예산(내부 규정 등)이 부가세포함 300만원입니다. 300만원이 넘어갈 경우 다음의 서류가 필요합니다. 입찰참가신청서, 인감증명서 및 사용인감계, 계약부서와 날인된 정식 계약서, 사업자등록증 및 최종 견적서, 직원현황 및 경력사항 증빙서류, 최근 3년간 동종업체 프로젝트 수행실적 증명서를 포함한 계약실적 증빙서류 및 포트폴리오, 입찰이행보증보험증권(10%, 보증기간 60일)... 등등 이렇게 각 3부씩 직접 대표자가 내방하셔서 결재담당부서에 제출하셔야 하고, 이 때 별도로 UBS에 해당 서류를 스캔, 또는 복사한 것을 함께 제출(USB 반환 안 됨)하시면 되고, 통상 결재까지는 2~3개월 정도 소요됩니다. 근데 지금 가격 조정 해 주시면 약식절차로 다음주에 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넵, 닥치고 그냥 주시는대로 감사히 받아야 됩니다. 처음 협의 되었던 견적이나 발송한 서류 따위는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니 제가 뭔가 잘못했겠죠.
그리고 끝.판.왕.입니다. 결재를 받기 위해서는 프로젝트 종료 후 관련 서류를 들고 그 회사를 직접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찾아갔더니 저와 일했던 담당자가 없습니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결재건은 자기가 승인하는 게 아니라 결재부서로 가야 된다고 합니다. (진작 좀 말해주지) 친절하게도 이미 서류는 다 올렸으니 그 부서 아무개님(당연히 처음 듣는 이름)을 찾아가 도장 몇 번 찍으시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부서에 올라가서 나이가 좀 지긋하신 아무개님을 찾아서 서류를 냈습니다. 그걸 스윽 보시던 그분의 첫마디는 이랬습니다.
'부가세포함 250만원에 합시다.' '????????'
오늘 처음 본, 이번 프로젝트에 일절 참가하지도 않은 계약담당자의 이 말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습니다. '저기, 이 프로젝트는 이미 OO부 OOO님과 이야기가 다 된 건데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깍자고 하시면...' 이에 대한 그분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그럼, 그 분한테 가서 돈 받으시던지요.' 그리고 헛기침 후 자리를 떠나시더군요.
사업하면서 끝판왕 케이스를 딱 2번 당해봤습니다. 그리고 그 2번 모두 사기업이 아닌 '공기업'이었습니다. 넵, 국가에서 하는 기업이요. 어디라고 확 까발리고 싶지만 너무 옛날 일이라 이젠 그냥 덤덤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서 협력(하청)업체들이 뭔가 들고오면 그걸 전문적으로 깍는 사람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게 주업무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그렇습니다. (물론 공기업이라고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누구나 다 아는 대응 방법은 있습니다. 해당 공기업 홈페이지나 청와대 신문고, 각종 민원사이트 등등을 도배하거나 계약서가 있으니 그냥 지급명령신청으로 가는 것도 좋겠죠. 그런데 공기업을 상대로(게다가 단골), 정식 계약서가 아닌 담당자 사인만 달랑 들어간 계약서(정식계약서 쓰자고 하면 거래 안 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런 거 쓰자고 할 엄두가 안 납니다) 따위로 그분들을 이겨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GG치고 도장 찍자고 하면 그제서야 싱글벙글 웃으시며, '어이구, 아까는 제가 좀 실례했네요. 집안에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요. 하하. 여기, 여기 도장 찍으시고, 오늘 일은 기분 나쁘게 생각 마시고 조심히 들어가세요~' 라고 합니다. 어이구, 친절하셔라.
9. 거지형
샘플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미 만들어 놓은 포트폴리오를 보냅니다. PDF 파일인데다가 워터마크까지 찍은 거라서 수정이 안 됩니다. 그러면 방문 요청을 합니다. 제시한 견적도 마음에 들고, 디자인도 잘하는 업체 같다며 살살 저를 꼬드깁니다. 그리고 '오시는 김에' 참고할 만한 타업체 결과물 좀 보여달라고 합니다. 가지고 가서 보여드립니다. 몇 개 대충 보다가, 이번에 PPT를 하나 만들면 매년 자기들이 수정해서 업그레이드 하기 좋도록 가급적 포토샵 같은 건 적게 쓰고 수정하기 용이한 파일 위주로 보여달라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낌새가 이상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보여주고 나면 이번엔 그 파일을 통째로 달라고 합니다. 근데 이건 당연히 안 되죠. 저작권이나 비밀유지 계약을 떠나서 상도덕의 문제입니다. 타 업체의 소중한 노하우가 담긴 결과물을 그렇게 쉽게 드리는 건 누가 봐도 아닐 겁니다. (국방부쪽 일이나 대기업의 사업계획서 같은 프로젝트는 아예 가지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행여나 털려서 유출되면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중요한 내용이 들어간 페이지는 제외하고 3, 4장만 뽑아 달라고 합니다. 이유인 즉, 이 양식에 맞춰서 원고도 쓰고 내용도 정리해서 저희에게 보다 친절하게 자료를 보내주겠다는 거죠. 더 이상 거절하거나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가는 프로젝트가 날아가는 분위기인데다가 '이걸로 너희들이 직접 만들려고 그러는거지?' 라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몇 장 드립니다.
네, 연락 안 옵니다. 대충 3년 전이었던가요, 모 유아교육 관련업체에서 이 방법을 썼는데 나중에 혹시나 해서 그 회사 홈페이지에서 회사소개서를 다운 받아 보니 저희가 디자인한 폼을 바탕으로 다소 조악하나마 글씨와 이미지를 넣어서 어찌저찌 완성해 놨더군요.
10. 등가교환형
일반적으로 여러 직종에서 볼 수 있는 케이스죠. 수 년 전에 지방에 있는 식품원재료 및 가공식품을 만드는 공장의 프로젝트를 하나 수행했는데, 완료 1주일 즈음 후 오피스텔 1층에 회사 수신으로 거대한 택배(정확히는 화물)가 왔습니다. 이게 뭐지? 진짜 회사로 온 게 맞나? 결국 개봉해 봤더니 이상하고 무거운 것들이 말통 째로 들어있더군요.
액상포도당, 무수결정포도당, 물엿, 맥아물엿, 저당물엿, 액상과당, 콜라당, 프락토올리고당, 말토올리고당, 이소말토올리고당, 화이바올리고F.... 응?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충격과 공포.
당연히 이걸 만드는 공장 일을 했던 게 기억나서 전화를 걸었더니 그냥 선물이랍니다. 다른 뜻은 없고, 프로젝트 잘 수행해 줘서 고맙다는 뜻의 뭐 그런 감사의 선물. 그래서 별 생각 없이 그 괴상쩍은 이름의 이과 망했으면, 우리 와이프님도 어디에 쓰는 건지 몰랐던 그 원재료들을 직원들과 분배했습니다.
뭐, 검색 좀 해봤더니 대충 어떻게 써야하는 건지는 알겠더군요. 그래서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달 결재일에 50만원이 빠진 채로 입금될 때까지만요.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