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에 들어선 주찬이와 눈이 마주쳤다.
주찬이는 내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여어. 현우야. 있었냐?"
놀란 기색도 잠시 평소처럼 능글맞게 주찬이가 아는 체 해왔다.
수영이 앞이 아니라면, 번쩍 소리를 질러줬겠지만, 아쉬운대로 귓속말로 주찬이를 채근했다.
"너 뭐야? 오늘은 안 된다며. 다음 주 시험 공부 한다며?"
"음. 살다보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거지... 그렇게 됐다."
"왜? 예쁜 후배가 그렇게 좋냐! 그리고 은성이랑 연주는 왜 달고 오는건데?"
"그냥 도중에 만나서 우연히 목적지가 같았을 뿐이라고. 그리고 현중이 때문에 온 거지
여자 후배 때문에 온거 아니거든?"
뭐랄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찮고 찜찜했다.
거기에 현중이 때문에 왔다니. 내가 아는 주찬이는 남자때문에 제 일을 미룰 위인이 결코 아니었다.
"니가? 현중이 때문에 시험 공부도 미루고 왔다고?"
"뭐 일생일대의 기회가 온 것 같다고, 이거 좀 만들어보겠다는데 어쩌겠어."
주찬이가 씩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현중이의 연애 지원 사격을 위해 나왔다는 건가.
"그건 그렇고 옆에 있는 분은 누구야?"
주찬이가 더 작게 소곤거렸다.
아직 관계가 확실해지기도 전인데 , 이렇게 내가 아는 사람들과 엮여서 좋을 것 같진 않았다.
수영이와 지금 내가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나 역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주찬이에게 고개를 슬쩍 까딱거리며 저리로 가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눈치가 제법 빠른 주찬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현중이 쪽 테이블로 갔다.
후 이제 남은 건 연주랑 은성인데... 쉽게 넘어갈 수 있을까. 게다가 여자 후배들이라 그런지 괜히
수영이의 눈치가 더 신경쓰였다.
"오빠 여기서 뭐!....읍..."
여기서 뭐하냐며 금방이라도 추궁할 것 같았던 연주가 오히려 은성이의 입을 틀어 막았다.
이어서 연주는 은성이에게 몇 마디 중얼거렸는데, 그 말을 듣고 은성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둘이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잘 넘어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할 걸까.
"후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숨이 절로 쉬어진다.
"괜찮아요?"
"응?"
"그냥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보여요."
한숨 쉬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찰나에, 수영이가 쓰윽 얼굴을 들이밀며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수영이의 얼굴에 왠지 온도가 후끈해지고, 심장도 빨라지는 것 같았다.
"응? 아냐아냐."
애써, 내 어설픈 소년스러움이 티가 날까 손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 아는 분들 맞죠?"
"응. 한 명 빼고는 다 후배야. 근데 어떻게 하다보니 대학로의 많고 많은
술 집중에 여기서 다 만나네. 하하. 미안. 불편했지?"
진심으로 당황했다. 아무리 좋은 술집이라고 소문이 났어도 그렇지
이렇게 바글바글 만날 줄이야. 하필이면 그것도 수영이와 데이트 중에.
"쿡쿡. 오빠 저 괜찮아요. 오히려 오빠 아는 분들 이렇게 연속으로 만나니까
재밌고 신선한데요?"
"그래?"
불편한데도 나를 생각해서 그렇게 말해준 건지, 아니면 정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수영이가 정말 성격까지 좋다는 건 잘 알겠다. 외모를 떼고 보더라도 수영이는 정말 매력적인 여자였다.
##
"오빠!"
수영이와 한참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은성이가 드르륵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제와서 갑자기 나한테?
지레 뜨끔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은성이의 오빠는 내가 아닌 주찬이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같은 과 사람들끼리 같이 좀 웃게 자리 합쳐요. 네?"
"야, 얘가 왜 이래 은성아, 정은성! 주찬 선배 죄송해요."
벌써 술을 꽤 마셨는지 취기가 감돌아 빨개진 얼굴로 은성이가 주찬이에게 투닥거리고 있었다.
그런 은성이를 연주가 만류하며 주찬이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음. 이거 돌아가는 꼴을 보니 주찬이와 현중이는 우연찮게 만났다 치더라도, 은성이와 연주는 아무래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얼추 머릿속으로 상황이 그려진다.
시험 끝나고 연주와 은성이는 술을 마시기로 했는데, 여차 저차 주찬이가 여자 후배들과
술을 마신다는 얘기를 은성이가 들었고, 그걸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은성이가
우연을 가장해 주찬이를 따라온거겠지.
크 뻔한 스토리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신빙성이 꽤 높아 보였다.
"연주야 놔 바. 나 안 취했거든? 그냥 같은 과 사람들끼리! 어!
선후배 간에 친목을 다지면 좋아 안 좋아?"
"그래 좋은데..."
"어!? 그래 좋지!? 오빠 연주도 좋데요. 헤헤."
음. 귀엽다면 귀엽게 봐줄 법한 행동이긴 한데.
주찬이가 어떻게 반응할 지 모르겠다.
주찬이는 자기만 관련이 있는 문제라면 한 없이 쿨하지만
남이 관련되면 조금 까탈스러워지는 녀석이었다.
지금은 특히 현중이의 연애(?)가 걸린 자리다 보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음... 글쎄. 솔직히 현중이만 괜찮으면 난 상관없어."
음. 의외로 그냥 넘어갔다. 하긴 은성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거절도, 승낙도 하지않는 녀석이 무슨 낯짝으로 은성이에게 화를 내겠나.
"그래요? 흐흐흐. 현중아, 괜찮지?"
"아, 누나 제발."
현중이는 지금까지 내가 봤던 그 어떤 눈빛보다도 간절한 빛을 뿜고 있었다.
그러나 현중이의 연애보다 제 연애가 급한 은성이에게 그 간절함이 먹힐리가 없다.
"그래? 우리 옛날 얘기좀 할..."
"그래요 그래. 같이 앉아요! 애들아 괜찮지?"
"네."
"아.. 네."
음, 다민이는 은성이와의 합석이 썩 반갑진 않은 모양이다.
하긴 선배이기 이전에 라이벌(?)이기도 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나저나 현중이 녀석 뭔 약점을 잡혔길래 은성이에게 꼼짝을 못하는 거지?
"어이, 거기 현우 오오옵빠!"
순간 소름이 온갖 곳에 오소소 돋아났다.
그 첫째는 은성이의 혀말린 애교소리를 들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목소리가 찾는 대상이
나였기 때문이다.
"이리와요. 같은 과 여기 다 모였는데, 오빠도 좀 오죠?"
설마 이런식으로 불똥이 튈 줄이야.
주찬이에게 그럴 떈 한사코 말리던 연주가 이번에는 아주 조용히 가만있는다.
주찬이와 현중이는 악마같은 미소를 씩 짓고 있었다. 나만 당할 수 없지. 라는 표정.
미치겠군. 수영이가 있어서 진지하게 화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거기에 이미 판 깨진거, 더 개판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건지 현중이 녀석의 서포트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