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이 온통 공부였다. 반대로 입시 공부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대학을 가는 것이 당장의 나에게는 너무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남들이 눈이 벌개져서 달려들던 일을 한 순간에 우스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모종의 쾌감을 주기 때문이기도 했다. 손에서 절대 과학 책을 놓지 않았다. 앞으로 뭐 할래? 라는 질문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천문학자요, 라는 답이 튀어나왔다. 그 후에는 백이면 백, 똑같은 반문이 따라붙었다. 뭐 해먹고 살라고?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웃었다. 금수저는 아니었지만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지갑엔 늘 만원 한두장이 들어있었고, 세상은 나한테 너무 우스웠다. 밤에 하늘을 바라보면 눈 안에 별이 가득 들어왔다. 별 대신에 다른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은, 포스터를 보자마자 지원한 천문 동아리 이후였다.
동아리에는 뭔가 특이한 선배들이 있었다. 이것이 내가 어느 정도의 환상을 덧칠해 만든 가상의 선배인지 혹은 진짜 그들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내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현명하고, 학문적 조예가 깊으며 유쾌하던 사람들이었다. 선배들과 별을 보고, 하늘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늘 한편으로는 버겁지만 즐거운 일이었다. 선배들의 수준을 헉헉대며 쫓아가던 그 시간 속에서, 동기들과의 추억은 애석하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누군가는 나와 한바탕 싸웠을 테고, 누군가는 나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해왔을 테지만 그것이 나한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반하는 것은 그리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첫 시간부터 그저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던 부장 선배에게 언제부턴가 반해 있었다. 기억을 열심히 헤집어 보면, 선배의 필기 노트를 우연히 펼쳤을 때 보이던 하늘의 별 지도부터였을 게다. 그 시점부터 나의 사랑은 두 갈래로 쪼개졌다. 당시에는 절대 알지 못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 하지만 아쉽게도 선배와 나 사이에 어떤 일이 생기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지나가던 선배한테 유독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던가, 친구들과 함께 있던 선배한테 장난삼아 큰 소리로 ‘선배 매력있어요!’ 하고 외치면 선배가 양 손을 내저으며 푸스스 웃어버린다던가. 선배가 그 때 나에게 지었던 모든 말과 표정과 행동이 하나하나 생생한 것과는 별개로 나와 선배 사이의 관계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나는 그 해 말에 애인이 생겼다. 이성을 처음 만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던 그 아이와 몰래 만난다는 건 충분히 정신을 빼 놓을 만한 일이었다, 라고 애써 기억해낸다. 일 년을 좀 넘게 만났지만, 그리고 만나는 동안 분명히 최선을 다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애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연애를 한답시고 성적이 곤두박질치지는 않았다. 원래 낮았으니까. 그래서 아무한테도 들통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일이라고는 장난처럼 주고받은 말장난 몇 마디와 대략적인 타임라인이 전부다. 녀석은 내가 제 첫사랑이라 말하곤 했는데, 지금의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불현 듯 궁금해졌다. 하지만 물어볼 길이 없으니 부질없는 생각은 관두기로 한다. 그 때 나의 선배는 고3이 되었고, 10개월여가 흘렀고, 선배는 내로라하는 대학에 당당히 입학했고, 나는 예비고3이 되었다.
동아리 선배들이 밥을 샀다. 이 당시 나는 선배에 대한 호감-이성적으로 옮겨붙지 않았던-을 숨기지 않았고, 나의 선배의 옆자리에 딱 붙어앉아 얌전히 중국 요리를 먹었다. 선배들은 한 명도 재수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초라했다. 나는 학교 성적이 그닥이었고, 한층 더 초라해졌다. 한숨을 내쉬며 나는 선배님께 무언가를 물었다. 아마 대학 얘기였겠지. 선배는 뭐라뭐라 조언을 계속하다가 마지막 한 마디에 힘을 주었다. 도망가지 마.
도망가지 마.
식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도 나는 끈덕지게 선배 옆에서 걸었고, 선배가 아까 말했던 한 마디는 계속 귀 어딘가에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가로등 불빛에 선배의 얼굴이 비추어 빛났다. 나는 예비 고3이었고, 선배는 명문대생이었다. 나는 그 다음 주에 애인과 헤어졌다. 넌 너무 네 기분을 못 숨겨. 원망인지 비꼼이었을지 모를 말과 함께 일 년의 시간은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아주 없는 일은 아니었다. 제일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우리는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인사하지 못했으니.
얼마간의 시간과 몇 개의 인터넷 강의가 지난 후 선배를 다시 만났다. 졸업식장에서였다. 전날 밤에 선배를 위해 간식거리를 잔뜩 샀고, 편지를 다섯 번 고쳐 썼다. 룸메이트가 편지 검토를 그만 시키라면서 짜증을 냈다. 그래도 선배에게 줄 간식을 나눠 주지는 않았다. 선배는 공부를 잘 한 덕에 받을 상이 많았다. 선배가 단상에 계속 올라와 나는 너무 좋았다. 졸업식 중간에 선배한테 편지와 간식을 주고 사진을 같이 찍었다. 나는 그 때, 전 애인의 마지막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너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졸업식이 끝났다. 동아리 선배들이 낄낄대며 우리를 놀렸다. 이제 고삼이네, 부럽지? 우리는 축 늘어진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 선배들은 남은 짐을 마저 들고 학교를 떠났다. 나는 선배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선배는 나를 보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도망가지 말고!
선배한테 의외의 카톡이 하나 도착한 것은 새 학기가 지나도 꽤 지난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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