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보게 되어 끄적여봅니다. 아래엔 영화 <스티브 잡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애쉬튼 커쳐의 잡스와 비교될 수밖에 없겠으나, 아이돌 무비로서 묶일 수 있을 뿐 방향성은 뿌리부터 다르다. 차라리 벨벳골드마인과 유사하달까. 커쳐의 그것이 통상적인 전기 영화라면 패스벤더의 이것은 모노드라마에 가깝다. 인물의 트레이드 마크인 프레젠테이션을 배경으로 화려한 발표장의 뒷면을 리얼타임으로 훑는데, 그 서사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영화라기보단 연극을 떠올리게 한다. 이 연극의 막(act)은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흥미롭게도 애런 소킨이 택한 잡스의 세 가지 순간은 성공이 아닌 실패의 찰나다. 감상자는 인물의 생애를 알고 있다. 앞의 두 막은 예정된 실패 앞에서 한껏 과잉된 자의식을 그린다. 아이맥을 발표하는 마지막 씬은 전의 둘 만큼 처참하진 않지만 애플 복귀 이후를 떠올려볼 땐 개중 가장 미약한 지점이며, 본격적인 성공가도를 앞에 둔 그의 자의식은 예전보단 제법 찌그러져 있다. 이전의 장면에서 그의 패악질에 한발 물러서던 주변 인물들은 이젠 마냥 쉽지만은 않고, 엔딩의 대사와 연출은 불한당의 한껏 누그러진 멘탈을 비친다.
잡스처럼 신격화된 인물을 이런 식으로 대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가 그리는 잡스와 주변 인물의 관계는 고인과 그의 신도들에겐 모욕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심지어 이 영화는 잡스의 공식 전기에 바탕을 뒀음에도 목적을 위해 사실을 왜곡한다. 배경은 실재했으나 그곳엔 그들이 없었고, 설령 있었다 해도 그런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그래서 이 극은 모노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스크린은 극 중 인물의 입을 빌려 말하는 ‘현실왜곡장’ 에 둘러싸여 있으며 인물들은 주인공의 내면을 그려내기 위해, 좀 더 정확히는 연출의 목적성을 위해 봉사한다. 모든 씬이 프레젠테이션 직전 잡스의 망상일지라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을 것이다. 이런 방식은 사업가보단 아티스트의 삶을 표현하는데 알맞고, 이는 영화가 연출하는 잡스의 모습이 예술가에 가까움을 방증한다.
문제는 그 필요성이다. 막이 넘어갈 때마다 화면은 질감을 바꾸고 미장센은 탐미에 가득 차 시대를 쫓는다. 여느 애런 소킨 작품이 그렇듯 대화는 정신없이 몰아치며 먹물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좋은 연출과 잘 직조된 시나리오가 영화가 만들어져야 할 당위를 주진 않는다. 연출을 위해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했다면 공식 전기를 원작으로 삼아야 할 이유가 없고, 예술적 특성에 주목하고 싶었다면 굳이 그 인물이 스티브 잡스일 필요가 없다. 왜 이 영화가 '스티브 잡스'여야 하는지 설득이 안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힘을 가진 영화들이 있다. 그 어떤 단점과 의문에도 마지막 씬이 흐를 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품들을 많이 보아왔다. (당장 애런 소킨의 전작인 소셜 네트워크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마무리는 뜬금없이 다가온다. 최고조에 다다른 갈등은 너를 위해 아이팟을 만들겠다는 스필버그식 가족애로 느닷없이 봉합되고, 희망찬 음악과 함께 블러처리 되는 잡스를 바라보며 드는 감정은 '심쿵'이 아닌 '뭥미'에 가깝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속이 텅 빈 성찬 같다. 정신없이 몰입하여 봤으나 남은 건 연출과 극본의 기교뿐이다. 기술의 목적이 예술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역이 성립하던가? 관객은 창작자의 허영을 감상하는 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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