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본성을 논한다면, 대체로 이기적이지만 때때로 이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찍이 하이트(Jonathan Haidt)는 인간이 9할은 이기적이지만, 1할 정도는 이집단적(利集團的, groupish)이라고 주장했다. 개인 간의 경쟁에서는 이기적인 자가 유리하지만 집단 간의 경쟁에서는 이집단적인 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기심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인 면모들은 그래서 이집단성의 발현이다. 인간은 모두 양면적인 존재인 셈이다.
제도와 윤리는 기본적으로 이 양면성을 관리하려는 기제로서 성립된다. 사회마다
원칙이 있고, 거기서
관습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양심이 빚어진다. 인간은 9할이 이기적이고 1할만 이집단적이니 사회의 원칙은 이집단성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집단적으로만 살 수는 없으므로 현실과 타협해 관습을 만들고 그것으로 사회를 운용한다. 다만 관습을 내버려두면 원칙과 너무 멀어지기에, 양심을 두어 때때로 관습에 경종을 울리도록 한다.
이것이 이기심을 본성으로 인정하면서도 이집단성을 적절히 독려할 수 있는 최대한의 틀이다. 관습을 지키는 중이라면 원칙을 어겨도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 하지만 양심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원칙에 비추어 관습을 문제삼으며, 문제제기가 성공한다면 관습은 시정된다. 이것이 인류사적으로 양심이 가지는 기능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양심에 민감한 사람은 적고, 문제제기에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지만, 그럼에도—
─어디에서나 그렇듯, 남보다 이집단성이 더 강한 사람들은 존재한다. 이기심이 약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다. 물론 존재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관건은 그런 사람들이, 늘 손해만 볼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이 결국은 타락한 관습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데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당연히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통계가 아닌 예술의 영역에서는 가능태를 보여줄 수 있다. 그것을 시도한 드라마가 바로
『미지의 서울』이다.
드라마의 중심에는 남을 탓하기보다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고, 비극을 조롱하기보다는 자기 일처럼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인물상은 전형적이지만 동시에 낡은 것이기도 하다. 답답하기 때문이다. 고구마 없는 사이다로도 족하다는 정서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답답함을 배우의 매력으로 어느 정도 상쇄해낼 수 있는 드라마라는 매체에서는 여전히 『미지의 서울』이 지향하는 종류의 서사가 성공할 여지가 남아 있다.
이 작품의 선악구도는 명확하다. 대별하자면 유미지·유미래·이호수·김수연은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반면에 최태관·신경민·박상영·이충구는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금융관리공사 직원들을 비롯해 서울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양편을 구분하는 기준은 자기합리화의 강도에 있다. 그렇기에 한쪽이 양심에 눈감지 못한다면 다른 한쪽은 관습을 방패로 삼는다.
예컨대
유미지는 자신을 유미래와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고 할머니의 사고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유미래는 가족들의 기대에 부담감을 느끼고 회사 차원의 따돌림과 누명에도 스스로를 의심한다.
이호수는 주변인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관계가 엇나갈 때면 자책을 일삼는다.
김수연은 유미래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고 내부고발로 인해 압박을 받은 것은 똑같음에도, 회사의 압박을 받는 유미래에게 오히려 미안함을 느낀다.
반대편은 그렇지 않다.
최태관 국장은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비리를 감추기 위한 음모에 여념이 없다.
신경민 팀장은 불순한 의도로 하급자를 모욕하고 따돌림을 유도하면서도 자신의 치부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박상영 수석은 좋은 평판을 무기로 삼아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유미래에게 역으로 누명을 씌운다.
이충구 변호사는 악인들을 대변하면서도 냉정한 직업정신을 강조할 뿐 문제의식은 느끼지 않는다.
유미지·유미래·이호수·김수연이 자존감이 낮고 자기기만에 미숙한 사람들이라면, 최태관·신경민·박상영·이충구는 자신감이 충분하고 책임전가를 꺼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전자는 자신의 잘못에 민감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후자는 자신의 잘못에 둔감하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에도 능숙하다. 극이 시작하기도 전에 상성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이것만으로 보면, 이 드라마에서 사이다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난다. 유미지와 유미래가 서로의 삶을 바꾸면서부터다. 유미지는 유미래를 연기함으로써 이호수와의 오해를 풀고 유미래의 고충을 이해하게 된다. 유미래는 유미지를 연기함으로써 한세진을 만나 책임감의 정체를 직시하고 꿈을 쫓을 용기를 가지게 된다. 연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이호수의 첫사랑은 그대로이고, 유미래의 책임감이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기 위해서는 우선 물어야 했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는 먼저 다가설 과감함이 없었던 것이다. 홀로 일어설 자신감이 부족했던 것이다. 양심에 민감한 사람들은 으레 본인에게 더 박하다. 자기 스스로는 자신을 용서하기가 어렵고, 다른 누군가가 지지해 주어야 진전이 가능하다. 피곤하고 답답하다고 여겨질 만하며 실제로도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불평이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를 보듬을 때 약점이 메워질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극중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갈등은 크게 시한건설 비리의 내부고발, 박상영의 유미래 성추행, 이충구의 로사식당 압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전선에서 피해자들은 늘 조력자를 얻고서야 자책을 멈춘다. 유미래는 유미지에게 이해받고 김수연에게서 자신을 발견한 뒤에야 회사와 싸울 결심을 할 수 있었다. 현상월 역시 유미지·이호수의 옹호가 없었다면 사회의 난도질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생각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지의 서울』의 의도가 드러난다. 양심적인 사람은 자신감이 없고,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양심적이지 않다. 따라서 자기합리화에 미숙한 사람들이 자책을 그만두도록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은
똑같이 양심에 민감한 사람뿐이다. 그런 사람이라야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는 대신 타인의 눈으로 그 가벼움을 밝히고 대신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구원의 서사이고, 연대의 힘이며, 양심의 해법이다.
쌍둥이 자매가 삶을 바꾸어 산다는 핵심적인 소재, 주요 인물들 사이에 산재한 오해와 상처, 그리고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며 힘을 합쳐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서사의 큰 줄기는 모두 위 같은 주제에 전반적으로 조응한다. 물론 이러한 구성은 초반의 신선함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것이며, 말맛 없는 대사와 갈수록 조잡해지는 전개는 몰입감과 설득력 모두를 배우에게 빚지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배우의 힘으로나마 지탱은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미지의 서울』은 분명 호평을 받을 만한 드라마다. 진행이 매끄럽지 못하더라도 구도는 좋다. 개연성이 치밀하지 못하더라도 매력은 있다. PC적인 소재를 너무 당연하게 활용하고 사이다를 터뜨려야 할 시점에 문득 주저하는 것은 극본의 문제겠지만, 이야기의 큰 흐름은 제대로 직조되어 있고 흡인력의 감소는 박보영이 방어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매력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며, 통찰이 진실이기에 파급력에도 가치가 인정된다.
오늘로 말하자면, 10화는 끝났고 11화는 멀었고 『미지의 서울』의 결미는 아직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이 정도만으로도 평가받을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수작인지 평작인지는 다음 주에 판가름나겠지만, 정해지지 않은 것을 가지고 정해진 것을 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기에 오늘만 가능한 일들이 있다. 좋은 드라마에서 의미를 찾아보는 것은 그런 일들 중 하나다.
본작이 성황리에 마무리되어 박보영이 백상예술대상이라도 받는다면, 그야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