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 뮤직에 재즈의 역사에서 장르별 대표곡을 수록한 플레이리스트를 제작해두었습니다. 들으시면서 이 글을 보면 좀 더 도움이 되실 겁니다.
- 재즈의 역사를 쉽게 이해하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가, 재즈의 장르를 즉흥성 정도로 구분하면 좀 더 편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재즈는 즉흥성이 커지는 방향으로 발전하다가, 너무 커지면 다시 줄어들었다가 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거든요. 그래서 그래프를 제작해 보았습니다. 아마 글을 읽고 나서 다시 보면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 재즈의 역사는 미국의 20세기 초중반 역사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1차 세계대전 직전, 걱정 없는 즐거움을 표현했던 뉴올리언즈 재즈. 광란의 20년대에 맞춰 활기 넘치는 시카고 스타일. 포디즘으로 규격화와 대형화의 미국으로 상징되는 스윙(빅밴드).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신경과민적인 불안감을 표현한 비밥. 냉전 시기 잘 살고 있으나 핵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체념을 담아낸 쿨 재즈. 민권운동과 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은 하드 밥. 비트와 히피 문화에 영향을 받은 프리 재즈. 테크놀로지에 대한 시대적 믿음과 사회적 통합의 단계를 상징하는 퓨전 재즈 등등. 아래에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죠.
Fig.1 반쪽짜리 재즈 - 랙 타임
‘재즈가 뭐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수십가지가 있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재즈의 요소로는 즉흥연주와 스윙이 있습니다. 이때 스윙은 스윙 리듬을 의미하기보다 좀 더 거시적인 의미에서의 즉흥적인 리듬, 즉 ‘그루브’와 유사한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스윙이 처음 등장한 음악은 19세기 말 세인트 루이스에서 시작된 랙 타임*Rag Time*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랙 타임이라는 이름도 불규칙한 리듬Ragged Time 이라는 표현이 변형된 것이죠. 랙 타임의 불규칙한 리듬은 주요 박자에 앞서 강세가 들어간 음이나 화음을 연주해 만들어 내거나, 긴 음과 짧은 음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었죠.
하지만 멜로디에는 즉흥성이 없었기 때문에 재즈로 보진 않고, 재즈의 전신으로 이야기합니다. 반면, 즉흥성이 없었기 때문에 랙 타임은 널리 인기를 얻을 수 있었기도 합니다. 즉흥적인 음악이 아니였기 때문에 인쇄되어 유통될 수 있었거든요. 랙타임은 특히 대륙횡단철도 건설 노동자들의 숙소에서 큰 인기를 끌며 미국 전역에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랙 타임의 표현 형식은 최초의 재즈 피아노 스타일로 발전했습니다. 바로 왼손이 '성큼성큼 움직인다*Striding*'는 뜻의 스트라이드 스타일이 등장한 것인데요. 이 스타일은 뉴욕의 할렘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가난한 임차인이 집세를 마련하기 위해 연 집세 파티에서 연주되었다고 알려져있죠. 그리고 일부 랙 타임에서는 블루노트*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곡에 재즈적인 특성을 불어넣었죠.
- 블루노트 : 재즈와 블루스 음악에서 사용되는 음계로, 제3음, 5음, 7음을 반음 낮춘 음정을 말한다. 정상 음계에서 벗어나 우울한 불협화음을 자아낸다.
이처럼 랙 타임은 점차 재즈로 발전되어 가는데요. 특히 젤리 롤 모턴*Jelly Roll Morton* 은 랙타임과 재즈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자신의 랙타임 곡을 주제로 즉흥 연주를 시도했죠. 이는 작품보다 연주자의 표현이 더 중요한 재즈의 본질이 드러나게 되는 전환점이 됩니다.
대표곡 - Maple Leaf Rag - Scott Joplin (1899) - Tiger Rag - Jelly Roll Morton (1905)
Fig.2 행진 밴드가 재즈가 되기까지 - 뉴올리언즈 재즈
바다와 미시시피 강이 인접한 항구 도시, 뉴올리언스. 이곳에는 아프리카, 영국, 프랑스, 독일, 에스파냐 등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정착했죠. 특히 서로 다른 두 흑인 집단인 크레올과 아메리칸 니그로가 공존했는데요. 크레올은 프랑스-에스파냐 문화와 깊게 연결된 자유 흑인 후손으로 유럽식 악기 연주에 능숙했고, 아메리칸 니그로는 아프리카적 음악 요소를 바탕으로 그들만의 열정적인 음악 스타일을 만들어냈죠.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재즈라는 새로운 음악이 탄생합니다.
뉴올리언스의 흑인 사회에서 음악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행진밴드였습니다. 남북전쟁 후 많은 군악대가 해산되었고, 이때 시장에 저렴하게 내놓은 금관악기들을 값싸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흑인 음악가들은 이러한 악기들을 사용해 자신들만의 행진밴드를 만들어 장례식을 비롯한 야외행사에서 연주했습니다.
초기 재즈는 이러한 행진 악대에 기반해서 탄생하다보니, 악기의 구성도 행진 악대와 비슷했습니다. 코넷, 클라리넷, 트롬본 같은 선율 악기와 기타, 벤조, 튜바 또는 콘트라베이스, 간단한 드럼 세트로 구성되었으며, 피아노가 포함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죠. 그리고 당시는 악보가 불완전했기 때문에 각 연주자는 자신만의 역할을 즉흥적으로 찾아가며 곡을 완성했으며(집단 즉흥연주), 코넷이 멜로디를 주도하며 전체 연주의 조화를 이끌었습니다. 참고로 연주자들이 각자의 악기와 개성을 살려 즉흥적으로 곡을 연주하며 청중과 교감하는 것을 ‘핫 플레이’라고 합니다.
초기 재즈 악단은 뉴올리언스의 홍등가로 알려진 스토리빌 또는 텐더로인에서 연주했습니다. 이곳은 1857년 이래 합법적인 매춘의 중심지로서, 인근 미국 해군 기지에서 오는 병사들의 욕구를 풀어주던 지역이었죠. 하지만 1917년 뉴올리언스가 1차 세계대전의 해군의 기지로 선정되며 이 지구는 폐쇄되었고, 음악가들은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했습니다. 당시 남부는 불경기였기 때문에 이들은 시카고, 뉴욕 등 북부쪽으로 이주했죠.
대표곡 - Livery Stable Blues - Original Dixieland Jass Band (1916) - Dipper Mouth Blues - Joe King Oliver (1923) - Panama - New Orleans Rhythm Kings (1923)
Fig.3 행진 밴드가 재즈가 되기까지 - 뉴올리언즈 재즈
당시 뉴올리언스에서 시카고를 우회해 세인트루이스까지 미시시피 강을 오가는 증기선이 있었는데요. 증기선에는 무도회장이 있어 많은 흑인 음악가들이 이 곳에서 연주를 하며 생활했습니다. 증기선 음악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페이트 매러블Fate Marable 이었는데요. 그의 켄터키 재즈 악단은 '떠다니는 음악학교' 라고 부를 만큼 음악가들의 존경을 받았고, 걸출한 뮤지션들이 그의 악단을 거쳐갔죠. 켄터키 재즈 악단을 거쳐간 가장 유명한 음악가로는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이 있습니다.
루이 암스트롱은 매러블의 켄터키 재즈 악단을 거쳐 1922년 시카고로 이주했습니다. 금주법 시대 시카고는 갱스터 조직이 운영하던 스피크이지의 주요 거점으로, 재즈는 이곳에서 불법 유통된 술과 함께 주요 엔터테인먼트로 자리 잡았습니다. 참고로 알 카포네는 시카고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갱스터였죠.
이곳에서 루이 암스트롱은 핫 파이브와 핫 세븐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며 재즈의 혁신을 가져옵니다. 그는 같은 멜로디도 악기의 풍부한 톤을 활용해 매번 새롭게 표현하며 재즈 표현력을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특히 집단 즉흥 연주를 개인 중심의 솔로 연주로 전환시켰는데, 이는 시카고 재즈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죠.
대표곡 - King Porter Stomp - Jelly Roll Morton (1923) - Hotter Than That - Louis Armstrong & His Hot Five (1927)
Fig.4 갱스터가 키운 스윙 재즈 - 뉴욕
1920년대 후반 갱스터와 정치권 간의 갈등이 커지고, 알 카포네의 몰락 이후 스피크이지 문화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피크이지가 사라지면서 재즈 뮤지션들이 설 무대도 줄어들게 되었죠. 새로운 재즈의 중심지로 부상한 곳은 할렘의 코튼 클럽*Cotton Club*, 새비 클럽*Savoy Club* 등을 중심으로한 뉴욕이었습니다.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한 시카고의 주요 재즈 뮤지션들도 뉴욕으로 활동지를 옮겼습니다.
당시는 대공황 시절로 우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입장료가 저렴하고 활기찬 댄스홀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댄스홀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스윙 재즈가 등장합니다. 넓은 댄스홀에서 춤을 추기 위한 음악으로 소비되었던 스윙 재즈는 큰 음량이 필요했는데요. 마땅한 음향장비가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음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연주자 수를 늘리는 수 밖에 없었죠. 이렇게 스윙 재즈는 빅밴드 형식으로 발전합니다.
스윙 재즈는 독특한 리듬감, 즉 스윙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스윙감은 싱코페이션*과 비정형적인 박자 분할을 통해 리듬에 긴장과 이완을 부여하며, 음악에 생동감과 활력을 더했죠. 특히 2비트 리듬에서 4비트 리듬으로 전환되면서 한 마디의 네 비트에 모두 강세를 주어 텐션과 리듬감을 강조하는 스윙 리듬이 등장했습니다.
- 싱코페이션 : 당김음. 한 마디 안에서 강박과 약박의 위치가 뒤바뀌는 연주법.
스윙 재즈는 여러 연주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만큼 어떻게 조화롭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내는가가 중요했습니다. 때문에 편곡이 작곡만큼 중요하게 여겨졌고, 즉흥 연주는 테마를 바탕으로 약간의 변주를 더하거나 테마와 관련된 프레이즈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자주 연주되는 스탠더드 레퍼토리가 확립된 시기이기도 하죠.
이렇게 전체적인 조화를 중시했던 스윙재즈였지만, 독주 연주도 발전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각 밴드의 수석 연주자들이 곡 중간 독주를 하며 연주 실력을 뽑냈거든요. 이러한 집단적이고도 개인적인 성격은 스윙 재즈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대표곡 - Sing Sing Sing - Benny Goodman (1937) - In the Mood - Glenn Miller (1939) - Take the "A" Train - Duke Ellington (1941)
Fig.5 재즈의 본질은 즉흥연주지! 비밥 - 할렘
스윙 시대, 빅밴드에 소속되어 있던 연주자들은 점점 상업화되고 획일화되어 가는 연주 방식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백인 중심의 음악 산업에 반기를 든 흑인 뮤지션들은 빅밴드 공연이 끝난 늦은 밤, 뉴욕 할렘의 민턴스 플레이하우스*Minton’s Playhouse* 같은 장소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스윙의 틀 안에서는 충족할 수 없었던 즉흥 연주와 격정적인 리듬을 탐구하며, 새로운 음악적 가능성을 모색했는데, 이 움직임이 비밥의 탄생으로 이어졌죠.
비밥은 단순히 음악적 혁신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사회적, 정치적 맥락과도 맞물려 있었습니다. 전쟁 중 흑인들은 국가를 위해 헌신했지만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여전히 견고한 인종차별과 사회적 억압이었습니다. 이러한 억압적 현실 속에서 비밥은 단순한 음악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복잡한 화성 진행과 빠른 프레이징은 흑인들이 겪었던 불안과 억압을 음악적으로 상징하며, 저항과 자긍심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비밥의 특징은 즉흥 연주입니다. 연주자들은 즉흥 연주의 자유를 극대화하기 위해 텐션 노트와 대리 코드를 도입해 기존의 화성 체계를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텐션 노트는 의도적으로 화성적 긴장을 만들어내고, 이를 해소하면서 독특하고 감각적인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창출했습니다. 대리 코드는 기존 화성의 경계를 확장하며 새로운 멜로디와 화성적 가능성을 열어주었죠.
비밥은 화성 구조뿐 아니라 연주 방식에서도 혁신을 이뤘습니다. 색소폰과 트럼펫 같은 관악기들은 비브라토, 벤딩, 글리산도 등의 기법을 활용해 표현력을 극대화했으며, 대규모 빅밴드 대신 소규모 콤보가 연주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는 연주자 간의 상호작용과 창의성을 강조하며, 비밥을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인 음악적 대화의 형태로 발전시켰습니다. 이처럼 비밥은 기교 중심의 음악으로 자리 잡으며 자연스럽게 템포도 빨라졌습니다.
이처럼 비밥은 재즈를 여러 방면으로 발전시키며 재즈를 댄스 음악에서 예술적 음악으로 격상시켰지만, 복잡성과 난해함으로 인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대표곡 - A Night in Tunisia - Dizzy Gillespie (1942) - ‘Round Midnight - Thelonious Monk (1944) - Ornithology - Charlie Parker (1966)
Fig.5 즉흥성 보단 대중성, 쿨 재즈 - 웨스트 코스트
비밥은 재즈를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켰지만 감상자에게도 연주자에게도 어려운 음악이었습니다. 비밥의 대표 아티스트인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의 색소폰 연주와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의 트럼펫 연주의 기교는 일반 연주자들이 따라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설령 따라한다 하더라도 이들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죠.
쿨 재즈는 이러한 비밥의 대안으로 등장하며, 비밥의 화성 체계를 계승하되 과격함을 줄이고 음들을 경제적으로 선택하며 여유롭고 부드러운 연주 스타일을 추구했습니다. 템포와 리듬 역시 안정적이고 차분한 진행을 보여 대중들에게 보다 친숙한 느낌을 전달했죠. 이러한 쿨 재즈의 부드러운 사운드는 대중들로부터 환영받으며, 많은 쿨 재즈 연주자들이 영화음악 작업에도 참여했죠.
쿨 재즈는 뉴욕과 LA 웨스트 코스트의 백인 연주자들에 의해 발전되었습니다. 특히 빅밴드 출신 연주자들이 많았던 웨스트 코스트 재즈는 스윙 시대의 조화를 중시한 편곡 방식을 유지하며 대위법과 유럽 클래식 요소를 도입했습니다. 이 스타일은 구조적 세련미와 선율적 직선성을 중시했으나, 일부에서는 재즈의 본질인 즉흥성과 열정을 희생했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대표곡 - Boplicity - Miles Davis (1949) - My Funny Valentine - Chet Baker (1954) - Take Five - Dave Brubeck (1959)
Fig.6 비밥의 순화판, 하드 밥 - 이스트 코스트
백인 중심의 쿨 재즈가 대중적으로 성공하자, 이에 자극 받은 흑인 중심의 비밥 연주자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죠. 이들은 비밥에 흑인 음악의 뿌리인 블루스, 가스펠, R&B의 강렬한 감정과 에너지를 더해 하드 밥을 탄생시킵니다. 하드밥이라는 이름도 단단한 뿌리가 있는 음악, 단단한 리듬과 구조를 가진 음악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하드 밥은 웨스트 코스트를 중심으로 발전한 쿨 재즈와는 달리, 필라델피아와 뉴욕과 같은 이스트 코스트에서 주로 형성되었습니다. 하드 밥은 비밥의 복잡성과 창의성을 계승하면서도, 리듬 섹션을 더 견고하게 만들고, 즉흥 연주를 보다 간결하고 개연성 있는 코드 진행 위에서 전개했죠. 이를 통해 하드 밥은 선명한 멜로디와 강렬한 그루브를 강조하고 비밥의 난해함을 덜어냈습니다.
특히 하드 밥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드럼과 베이스의 역할 변화였습니다. 기존에는 리듬만 뒷받침하던 드럼과 베이스가 하드 밥에서는 독자적인 악기로 부상했습니다. 자유롭고 리드미컬한 패턴을 구사하며 솔로 연주까지 펼치는 드럼과 베이스는 연주자 간의 긴밀한 상호작용, 즉 인터플레이*Interplay*를 강조했죠. 이는 즉흥 연주를 단순히 개인의 표현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음악적 대화로 발전시켰습니다.
1950년대 등장한 LP도 하드 밥의 형식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기존 SP 음반이 3분 내외의 제한적인 시간 안에 연주를 담아야 했던 반면, LP는 최대 25분까지 녹음할 수 있었는데요. 이로서 재즈 연주자들이 더 긴 호흡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되면서 속주 중심의 짧은 연주에서 벗어나 깊이 있는 음악적 탐구를 가능하게 했죠. 이러한 변화는 하드 밥이 복잡성과 감정 표현을 동시에 충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드 밥은 이후 블루스 기반의 펑키 재즈와 가스펠 기반의 소울 재즈로 분화되며, 재즈의 정체성을 확장시켰습니다.
대표곡 - Moanin’ - Art Blakey & The Jazz Messengers (1958) - Blue Train - John Coltrane (1957) - Giant Steps - John Coltrane (1960) - Song for My Father - Horace Silver (1965)
Fig.7 난해함의 끝을 보여주마, 프리 재즈
냉전 시기 억압적인 분위기와 기존 가치관의 한계에 대한 반응으로 기존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 정신적 풍요를 중심으로 한 비트 문화, 히피 운동이 등장하는데요. 이에 영향을 받은 재즈 문화가 프리 재즈입니다. 프리 재즈도 기존의 재즈의 틀에서 벗어난 자유를 추구했죠.
기존 재즈에서는 즉흥 연주를 한다고 해도 코드, 조성, 형식이라는 최소한의 틀 안의 자유였습니다. 이러한 틀마저 벗어나 모든 제약 없이 연주자 본인의 의지와 감정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프리 재즈이죠. 프리재즈 연주자들은 자신만의 독창적 방식으로 형식을 재창조했으며,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 음악, 유럽 클래식 등 다양한 음악 전통을 재즈에 접목했습니다.
더 나아가 곡은 더 이상 4/4박자나 8소절 단위 같은 고정된 구조를 가지지 않고 불규칙한 길이의 단락을 가졌습니다. 리듬의 변화도 예측할 수 없었고, 코드 진행 대신 연주자들의 순간적인 감정에 따라 곡이 진행되었죠. 악기도 피아노와 같은 코드 악기를 제거하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는 시도도 이어졌습니다. 또한 모든 연주자가 동시에 즉흥 연주를 펼치는 집단 즉흥 연주가 도입됩니다. 이는 한 연주자의 솔로에 의존하지 않고, 연주자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음악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었죠.
비밥과 하드 밥의 중심지였던 뉴욕은 자연스럽게 프리 재즈가 이어지며 기존 재즈 형식을 탈피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또한 1965년 설립된 AACM(창조적 음악가 협회)가 있었던 시카고도 프리 재즈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음악적 실험과 혁신에서 성과를 이룬 프리 재즈는 상업적으로는 실패합니다. 특히 1960년대 록 음악의 대중적인 성공으로 인해 재즈는 주류 음악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죠.
대표곡 - Free Jazz - Ornette Coleman (1961) - Ascension - John Coltrane (1966) - To Composer John Cage - Anthony Braxton (1968)
Fig.8 프리 재즈 이후의 재즈
재즈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중성과 예술성(즉흥성)을 오가며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프리 재즈 이후 재즈는 더욱 다양하고 다채로운 스타일로 분화되며 대중성 추구하는 재즈와 예술성을 추구하는 재즈가 공존하며 다양한 스타일로 발전합니다.
대중성을 추구한 대표적인 흐름은 록, 펑크, 소울 등 대중음악 장르를 융합한 퓨전 재즈와 팝, R&B를 융합한 스무드 재즈가 있습니다. 이들은 대중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냈지만 재즈 계에서는 비판을 받았죠.
반면, 프리 재즈의 실험성을 더욱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아방가르드 재즈는 형식과 규칙의 파괴를 통해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며 음악적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했습니다. 이는 연주자들의 개성과 감정을 더욱 강조하는 동시에, 대중적으로는 난해한 음악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전통과 실험의 균형을 추구하며 기존의 재즈 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포스트 밥도 등장했습니다. 포스트 밥은 비밥과 하드 밥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현대적 화성과 리듬을 도입해 재즈의 클래식함과 실험성을 조화롭게 담아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재즈 애호가와 실험적인 청중 모두를 만족시키는 음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재즈는 이러한 다양한 스타일의 흐름을 이어받아 전통과 혁신, 대중성과 예술성을 아우르는 복합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재즈는 단순히 과거의 음악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장르와의 융합을 시도하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화하고 있습니다.
대표곡 - 퓨전 재즈 : Birdland - Weather Report (1977) - 스무드 재즈 : Forever in love - Kenny G (1992) - 아방가르드 재즈 : Theme de Yoyo - Art Ensemble of Chicago (1970) - 포스트 밥 : Footprints - Miles Davis (1966) / Speak No Evil - Wayne Shorter (1965)
Reference. - 머빈 쿡. (2007). 자유로운 영혼의 울림 재즈. 시공아트 - 요아힘 E.베렌트. (1953). 재즈북. - 최규용. (2004). 재즈. 살림 - [Youtube] VOX - How smooth jazz took over the ‘90s URL: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