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무협소설에서의 강호는 본래 현실 역사와 유리된 공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소위 ‘정통’으로 인정할 법한 양우생이나 김용의 시절까지는 그런 기풍이 남아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절정에 달했고, 풍부한 문화적 맥락과 역사와의 유려한 밀착이 김용 소설의 정전(canon)화 과정에 기여한 바는 단연 명확합니다.
그러나 좌백의 평을 빌리자면 와룡생 이후로는
“무협에서 역사가 제거”되었고, 무협이라는 세계가 가운데땅을 넘어 차리리 D&D를 방불케 하는 장르적 관습의 템플릿으로 기능하게 된 데에 이 가상공간화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변용의 장르적 흐름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중국식의 선협이나 한국식의 무협 웹소설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협에서의 협사(俠士)가 오늘날에는 ‘선(仙)의 길에서 아주 뛰어난 성취를 보이는 자’에 불과하거나, 무협에서의 천마(天魔)가 오늘날에는 ‘매우 강력한 무공을 지닌 자’를 간편히 부르는 호칭에 불과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한국이 사이다라면 중국은 염산이라는 밈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작금의 세태에 개탄할 법합니다.
그런 독자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낸 작가가 바로
견마지로입니다.
1.
견마지로의 무협에서 중첩하여 느껴지는 감각은 둔중하면서도 치밀한 문체, 예스러운 어휘, 역사성 짙은 용어들과 문장들 사이에 숨은 고적함을 제외하더라도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그 주인공들의 정서, 깨어지고 퇴락했더라도 결국은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不忍人之心]’을 놓을 수 없는 한 줄기의 붉음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을 둘러싼 말들이 그 시대의 유자나 도인이 말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질박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글은 왜 견마지로의 작품 중 유독
『추구만리행』을 꼽았을까요? 이것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추구만리행이 유료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복잡하게 말하자면 추구만리행이 유료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잘못 쓴 것이 아니라, 견마지로라는 작가의 문체와 강점을 정말 염치 없이 만끽할 수 있음에도 또 웹소설로서는 한계를 드러내는 작품이 바로 추구만리행입니다. 게다가 견마지로의 정수는 「부지사부지생」에 있고, 정점은 『흑야에 휘할런가』에 있다지만, 또한 가장 견마지로스럽다고 느껴지는 글이라면 역시 추구만리행입니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추구만리행이 무엇을 포기했고 무엇을 성취했는지, 그리고 왜 제목에 가능성이라는 말이 들어갔는지를 조금이나마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무료 소설인 만큼, 이 글이야 제쳐두고 부담 없이 소설 정주행부터 하고 오시겠다면야 더욱 좋습니다.)
2.
이 소설을 처음 클릭했을 때 독자가 마주치는 것은 벽돌, 그것도 메이지 슬레이어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벽돌들의 향연입니다. 한림원의 젊은 문사가 구중궁궐을 가로질러 황제에게 직언을 고하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합니다. 시산혈해도, 반로환동도, 회빙환트도, 하다못해 무림인이나 무투 따위도 없는 담백한 처음입니다.
이것은 분명 견마지로를 모르거나 추구만리행의 명성을 듣지 못한 사람이라면 벽돌이 세 개쯤 반복되었을 때 뒤로가기를 눌러도 이상하지 않은 1화입니다. 하지만 이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문화적 맥락과 역사와의 밀착이란, 심지어 김용의 그것보다 더한 면모까지도 보입니다. 사서에서 튀어나온 듯한 현지의 언어들과 과감한 한자병기, 주책처럼 보이는 괄호와 더불어 탄성이 나올 정도로 고풍스러운 한문체의 미감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있습니다.
명나라 가정제, 명나라의 암군 중 첫 순번에 위치한 그 가정제가 황색 용포를 입고 등장합니다. 정작 황제가 등장하는 것은 작중에서 이 장면이 유일하며, 그렇기에 1화의 내용은 주인공(들)은커녕 악당조차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 기이한 프롤로그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1화에서 2화로, 또 그 다음으로 넘어가며 드러나는 위계의 층위는 이 첫 장면의 함의가 무엇인지를 점차 깨닫도록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간단한 먹이사슬입니다. 내각수보 엄숭은 황제 앞에서 무력하고, 좌도어사 강철경은 엄숭 앞에서 무력하며, 다른 대소신료들은 강철경 앞에서 무력합니다. 대쪽 같은 선비의 직언으로도, 당당한 협의지사의 일갈로도 깨어지지 않는 간신의 철면이 오로지 한 계단 위의 천적에게만 허물어진다는 것이죠. 유형을 선고받은 강철경이 관료를, 신사를, 민초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이내 엄숭 앞에서 엎드려 빌던 그의 모습은 잊혀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1화에서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저 자조차, 수괴는 아니었다고요.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소설의 심지는 강철경
[狗]을 쫓아 만 리를 갈 수 있느냐가 아니라, 과연 개
[狗] 한 마리를 죽인다고 견주까지 쓸어낼 수 있느냐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그것이 가능할 때 독자가 얻을 것은 개운함이며, 불가능할 때 얻을 것은 씁쓸함이지요.
[ 아래 사람들만 처벌하고 꿀바른 혀로 사람들을 속이면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 정치 (3 中) ]라는 말이 3화에서부터 이미 나온다는 것은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던져주지만,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것은 여러 개의 대답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으로 읽힙니다.
그것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보이는 행로들입니다.
3.
개를 쫓아 만 리를 달린다는 소설에서, 쫓는 사람들은 차례대로 제시됩니다. 동창의 백면자, 만려일발 하무린, 노독당 기유태, 하북삼기, 그리고 반경. 이렇게 다섯이죠. 또 한편으로는 개를 감싸고 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별자리에 맞추어 이십팔수, 그리고 금의위 강무천호 황자형. 강철경의 첩 유백영까지. 합하면 꼭 서른이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완연한
무협입니다. 이런 무협을 어디서 찾느냐고 묻는다면야 얼른 생각나지는 않겠지만, 기이한 군상과 번뜩이는 무공이 웅혼한 필치로 수놓아져 있다면 무협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섯 추적자가 한데 모이기까지의 여러 장면들은 단아한 문장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일화마다 주인공을 정한 듯이 조명하는 연출은 무위의 멋을 묘사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절정은 덕주 이둔령입니다.
그러나 물론 완연한 무협이라고 말하며 스포일러를 생략해 버리기 전에, 소설을 읽다 보면 보이는 아쉬운 점들에 대해서는 조금 말해야겠습니다. 예컨대 후반으로 가면서 이십팔수가 콩가루일 뿐 아니라 모래성처럼 보이는 것이나, 황자형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듯 보이는 강동의 대협이나, 아무리 불인인지심이라고는 해도 갑작스러웠던 귀라창의 선택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비단 이 작품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저작에서도 심심찮게 보이는 견마지로 스타일의
작위입니다. 한 길 사람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좋은 기회라고나 할까요.
다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뒤로 갈수록 처절해지는 싸움에 막막해지던 기분이 어느 순간 검천의 초식으로 환해지고, 뇌검의 용틀임으로 날아지고,
[ 내 명이다. 물렀거라. (66 中) ]로 두근댄다는 것 말입니다. 황자형의 서사가 마음에 썩 드는 것은 여전히 아니지만, 금위위 천호가 칼을 뽑는 장면은 참 귀하긴 하더군요. 천붕지괴, 만족스러웠습니다.
4.
그런데 그래서 개를 죽이고 나면, 이제 처음의 화두에 답할 시간이 찾아옵니다. 과연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못했는가. 바야흐로 무협의 역은 지나가고
역사의 장이 그 답을 들고 찾아오는 것이죠. 네 갈래로 이루어진 답을 말입니다.
첫째는 호면호입니다. 강철경의 비기를 모아 엄숭에게 일격을 가하는 것. 그것이면 머리까지는 아니더라도 몸통은 치운 것이 아니냐는 것. 서계를 믿고 또 그가 키워낼 장거정을 믿으라는 것. 혁명은 아니되 경장, 안전한 희망입니다.
둘째는 만려일발입니다. 무사로 스러질지언정 문사는 못 하겠다는 체념, 불가능한 충에 투신하기보다는 백성의 곁에서 강역을 지키겠다는 다짐. 그러다 전대처럼 역적으로 몰린다면 그저 칼로 답할 뿐이라는 선언. 문파로 돌아온 유사가 되찾은, 유협의 방법입니다.
셋째는 검궁쌍천입니다.
[ 가진 자에게는 도적의 괴수요, 포악한 적도에게는 명부의 사신이며, 없는 자에게는 활빈의 미륵이라 불리는 (75 中) ], 조정의 재분배가 뒤틀렸을 때 나타나 새로운 질서를 주창하는 자들. 백안시와 경멸을 지고 산령에서 출도하는, 유협보다 한발 더 나아간 녹림의 방법입니다.
넷째는 반연성입니다. 기별도 늦고 탐관도 없는, 적막한 한촌에서 웅크린 채 새 시대를 바라보는 것. 아픔이 느껴질 때면 아이들을 보며 내일을 살아내는 것.
[ 때가 되면 그리될지니 그때는 내 아이들에게 말하는 교훈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리라. (75 中) ] 그러나 너무도 오래 반복되어 누구나 알고 있는, 개인의 희구입니다.
분명 주인공들의 목표는 이루어졌음에도 소설의 결미에서
허무가 느껴진다면, 이들 때문이겠지요.
[ 하지만 우리는 강동의 호수를 끼고 살던 무지렁이였지. 황제의 황성이 얼마나 높은지, 얼마나 넓은지, 그리고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을 터, 황제는커녕 대학사의 손끝도 대지 못하였소. 황도 문 앞에서 금군에게 잡혀 좌도어사에게 끌려갔다 하오. 오십여 명을 베고 잡혀갔다고 하더군. (49 中) ]
5.
...하지만, 그런데 말입니다.
1990년대부터 중국에서 불붙은 김용 문학의 위치 논쟁에서, 신문학파의 세례를 받은 일단의 연구자들은 무협의 한계를 매섭게 비판했습니다. 충효절의의 옹호, 봉건사상의 주입, 대중에 대한 마취, 자본 논리의 개입을 근거로 장르 자체의 저속성을 설파하려 시도한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서야 그런 반발과 상관없이 김용은 추앙받고 있고, 그의 소설에 대한 연구와 강의도 활발하지만, 그것은 중국 전통문화를 매력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측면에서 인정받은 것이지 신문학파의 관점에서 제기한 일반론적인 비판 전체가 논파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김용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 궁리가 닿은 바로는, 추구만리행은 무협이라는 관습을 빌려와 무로써 협을 이루나, 그 파급은 역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영향은 사회를 뒤흔들지 못합니다. 벗어나지도 뒤흔들지도 못한다는 진실은 서장부터 결미까지 모든 행간에서 이미 예고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명멸의 아름다움은 어쩌면 역사무협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 풍년이건 흉년이건 배에 꽉꽉 눌러 담지 않는 물산이 없었건만, 사람들의 의복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낡고 헤어지는 것이 똑같았다. 오직 관리들과 물건을 부려 황도까지 올리는 상인들의 옷차림만 갈수록 호화찬란해질 뿐이었으니, 높은 사람들은 이것을 일컬어 태평성대라 하였다. (36 中) ]
허무에서 생겨나는 그런 벼락같은 가능성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허무란 마냥 나쁜 것은 아니며, 추구만리행의 협행은 보통과는 다른 의미에서조차 상당한 함의를 던져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견마지로의 작품에 주제의식이 흐른다는 것이야 주지의 사실이니, 이런 테마를 찾아내는 것도 해봄직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