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9/06 23:46:23
Name ItTakesTwo
Subject [일반] 애플망고주스와 아인슈페너
이 글은 아내의 카카오톡 메시지에서 시작된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상상 이상의 고난을 겪는 경우가 있다.
오늘 하루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나는 병원에서 뇌와 척수 손상 환자들을 14명 치료하고 있다.
그리고 물리치료실의 최선임으로 치료 일정을 편성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고난은 그 일정을 편성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단 1주일 사이에 2명의 치료사가 휴직했다.
한 명은 출산휴가를 떠났고 아마 육아휴직까지 포함하면 내년 연말에나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 명은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더니 우측 5번째 손가락과 중수골이 골절되는 낙상을 했고 응급 수술을 했다.

치료사가 총 24명에 연차를 사용한 치료사가 2명, 그리고 저 휴직자 2명.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봐도 도대체 치료 일정을 다 메꾸기는 힘들 것 같았다.
결국 몇몇 환자의 치료는 시행되지 못할 것이 확실했기에 그 명단을 추려서 병동에 공지하고 담당 주치의에게도 알렸다.
그리고 그 환자에게 가서 이러이러해서 치료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라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환자들의 반응은 참 싸늘했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일정을 담당하는 최선임이기에 환자들의 불만을 듣고 죄송하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했다.

출근하자마자 환자들에게 싫은 소리를 잔뜩 듣고 시작하는 하루이기에 힘이 빠진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내가 사과해야 하는 상황은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많아져간다.

이른 아침 출근하여 열심히 환자들에게 불만을 듣고 이제 내가 담당하는 환자들과의 시간이 시작된다.
많은 환자분들은 치료사에게 정말 정중하게 대해주신다.
물론 치료사들 역시 환자들에게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하지만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환자가 있으니 치매환자들이다.
14명의 환자 중 5번째 위치하는 환자는 72세 할머니다.
뇌출혈로 인한 수술 후 편마비가 왔고 인지저하도 극심해진데다 언어장애까지 발생했다.

마비된 우측 상하지를 운동시킬 때 왼쪽 손으로 때리고 할퀴고 발로 걷어찬다.
30분 내내 환자에게 내가 받는 공격은 말로 다 하기에 모자라다.
할머니가 건치이신지 한 번은 정말 쌔게 깨무셨는데 잇자국 그대로 멍이 들어서 다른 환자들에게 민망할 정도였다.

치매를 겪으시는 분이니 내가 참아야지 하지만 나도 가끔 이성의 끈을 놓을 때가 있다.
할머니의 보호자인 딸이 전후사정은 모른 채 왜 할머니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냐고 말하더라.
화를 삭이고 삭이며 내 팔을 조용히 보호자에게 보여주었다.
할머니가 할퀴고 때려서 상처가 많이 남아있는 내 양쪽 팔을 본 보호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내 옆에서 치료를 받던 다른 환자분이 내 편을 들어주신 덕분에 놓칠 뻔 했던 이성의 끈을 겨우겨우 붙잡았다.

정신없는 오전 근무시간이 이렇게 지나갈 때 즈음 카카오톡 메시지가 와있다.
평소 워낙 무덤덤하고 먼저 연락하는 성격이 아닌 아내의 메시지였다.

[애들이 애플망고주스가 먹고 싶다는데 사올 수 있어?]

우리 집 쌍둥이들은 아파트 아주 가까이 위치한 투썸플레이스의 애플망고주스를 정말 좋아한다.
먹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어보면 항상 제일 먼저 나오는 게 애플망고주스니깐..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근무가 시작된다.
내 고난은 오늘 오전 오후를 가리지 않고 오는구나.
1년차 치료사가 보행훈련을 시키던 환자가 낙상했고, 환자는 우측 고관절 부위에 통증을 호소했다.
치료사는 사색이 되어 있었고, 넘어진 환자 주변으로 무수한 시선이 꽂히기 시작한다.

나는 얼른 그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병동에 연락하여 활력징후를 검사해달라고 했고, 주치의에게 낙상이 발생했음을 알렸다.
치료실장님께 연락해서 환자가 낙상했음을 보고하고 낙상에 관련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다행히 낙상 환자는 골절을 피해갔다.
나는 환자를 넘어뜨린 치료사를 데리고 환자와 환자 보호자에게 낙상에 대한 사과를 드리기 위해 병실로 들어선다.
내 잘못은 아닌데 왜 내가 더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는지 모르겠지만 이러라고 월급을 더 받는 것이기에 쉽게 수긍한다.
다만 낙상을 일으킨 치료사의 부주의는 쉽게 수긍이 안되기에 따로 불러서 주의를 준다.

나는 다른 동료들보다 월급이 더 많은 편이다.
동료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라고 월급을 더 받는 혹은 내 잘못이 아닌 것을 수습하라고 월급을 더 받는 것일테다.
그냥 저런 것 안하고 월급 덜 받는 게 더 속이 편하겠다 싶다가도 지난 달 빠듯했던 생활비에 마음을 다잡는다.

폭풍같던 치료시간이 지나가니 정신없이 치료실 일정을 짜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그래. 이제 다 끝나간다. 조금만 더 버티자.

겨우겨우 하루를 마무리하고 병원에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와 집 앞의 투썸플레이스로 들어간다.
요즘은 모든 주문을 키오스크로 받다보니 기계 앞에 우두커니 서서 애플망고주스를 찾는다.
6300원. 봐도봐도 참 비싸네.

결제를 하려는 찰나 아내가 좋아하는 음료도 하나 가져가기로 생각했다.
아인슈페너. 6100원. 얘도 참 비싸네.

아내는 아인슈페너를 참 좋아한다.
난 먹어도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던데 그녀는 아인슈페너를 참 좋아한다.
연애할 때도 그랬고, 결혼하고도 그랬고, 임신했을 때도 그랬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언제나 없다라고 대답을 한다.
그 없다는 대답을 무시하듯 나는 아인슈페너도 구매목록으로 올린다.

12400원. 생각보다 비싸네 혼자 중얼거리면서 삼성페이로 결제를 한다.
그래도 주문이 많이 밀려있진 않은지 금방 내가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12400원짜리 음료를 사들고 터덜터덜 걸어 집에 도착하니 쌍둥이들이 내 손에 들린 애플망고주스를 보고 기뻐한다.

아내는 내게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주고 나는 그녀에게 아인슈페너를 건내주었다.
이걸 뭐하러 사왔냐는 그녀의 책망에 애들 것만 사오긴 그래서 사왔다고 대충 얼버무린다.
입가에 미소를 띄며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 애플망고주스를 보며 깔깔거리며 웃는 쌍둥이들의 웃음.

오늘 하루 나를 괴롭혔던 고난들은 내 앞에 펼쳐진 가족들의 모습에 깨끗하게 잊혀진다.
많이 힘든 하루였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행복해하는 웃음이 내 하루를 위로해준다.
12400원에 내 힘든 하루가 다 보상받는다.

* 지난 번에 쓴 글에 많은 댓글들 감사합니다.
   그 글을 쓰고 급성 바이러스성 장염(!!!)에 걸린 덕분에 댓글에 답변 할 시간을 놓쳤습니다. (- _-)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자유형다람쥐
23/09/07 00:02
수정 아이콘
물리치료사 선생님들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ItTakesTwo
23/09/07 21:0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
애플프리터
23/09/07 00:28
수정 아이콘
역시 금융치료가 빠르게 치유되네요. 작은 행복 많이 누리세요.
ItTakesTwo
23/09/07 21:0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
돈이 최곱니다?!
23/09/07 07:24
수정 아이콘
투썸은 애플망고주스가 맛있다..메모메모
좋은 상사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시네요 존경합니다
ItTakesTwo
23/09/07 21:08
수정 아이콘
좋은 상사도 좋은 남편도 좋은 아버지도 아니지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닉언급금지
23/09/07 07:32
수정 아이콘
힘든 하루 보내셨네요. 고생하셨습니다. 그 일상에 감사드립니다.
ItTakesTwo
23/09/07 21:08
수정 아이콘
하루하루 일상을 보내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이를 먹으니 더 확 와닿네요.
저 역시 감사드립니다. :-)
23/09/07 08:33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따뜻한 좋은 글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ItTakesTwo
23/09/07 21:09
수정 아이콘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저 또한 감사합니다. :-)
감자크로켓
23/09/07 09:1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같은 의사분께 진료를 받고, 혹은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복일 것 같아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ItTakesTwo
23/09/07 21:09
수정 아이콘
의사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파고들어라
23/09/07 09:20
수정 아이콘
헐 14명...
예전에 제가 있었던 병원에서는 시간표가 12칸? 13칸으로 나뉘어 있던데 14명을 보시는거면 완전 힘드시겠습니다.
단순 계산으로도 35학점짜리 시간표 아닌가요.
ItTakesTwo
23/09/07 21:10
수정 아이콘
원래 15명이었던게 2년 전부터 14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실 예전에 15명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나고, 지금 하라고 하면 못하겠습니다. - _-

나름 빡쌔게 재활병원에서 열심히 구르다보니 어느 덧 10년이 넘게 이 일을 하고 있네요;;;
구렌나루
23/09/07 09:26
수정 아이콘
가족 생각이 나면서 힘을 내게 하는 글이네요 하루하루 화이팅입니다
ItTakesTwo
23/09/07 21:10
수정 아이콘
하루하루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
Valorant
23/09/07 09:33
수정 아이콘
글에 흡입력이 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마셔봐야겠어요 애플망고주스와 아인슈페너
ItTakesTwo
23/09/07 21:11
수정 아이콘
사실 애플망고주스보단 스트로베리 피치 프라페가 더 맛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흐흐.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더히트
23/09/07 09:49
수정 아이콘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언제나 없다라고 대답을 한다. 그 없다는 대답을 무시하듯 나는 아인슈페너도 구매목록으로 올린다. 캬~ ㅠ_ㅠbb
ItTakesTwo
23/09/07 21:11
수정 아이콘
저 대답에 진짜 안 사들고 가면 내심 서운해 하기도 합니다. - _-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퍼시픽뉴캐슬
23/09/07 10:50
수정 아이콘
투썸플레이스의 메뉴가 힐링이 된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9월말이후로 단종되니 참고하세요(소곤소곤)
Valorant
23/09/07 12:09
수정 아이콘
서둘러야겠어요
ItTakesTwo
23/09/07 21:07
수정 아이콘
(수정됨) 9월이 되기 전에 한번 더 사와야겠네요. 감사합니다. :-)
아기호랑이
23/09/07 21:31
수정 아이콘
저도 다음에 힘든 날이면 애플망고주스를 먹어보고 싶게 만드는 필력이시네요.
힘든 하루 고생 많으셨습니다. :)
ItTakesTwo
23/09/07 21:32
수정 아이콘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는 애플망고주스보단 위에 댓글 달았듯이 스트로베리 피치 프라페를 더 추천드립니다. 흐흐.
콩탕망탕
23/09/08 17:22
수정 아이콘
덕분에 아인슈페너가 어떤 음료인가 찾아봤네요.
미소짓게 하는 글입니다.
ItTakesTwo
23/09/08 20:44
수정 아이콘
저도 콩탕망탕님 댓글 덕분에 기분이 좋아지네요.
감사합니다 :-)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9743 [일반]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단상. [40] 세인트9528 23/09/08 9528 21
99742 [일반] 이틀만에 253조 증발 [54] 안아주기14104 23/09/08 14104 0
99741 [정치] 홍범도 장군에 대한 전한길 선생님의 9.5일자 근현대사 강의 [120] 바밥밥바15150 23/09/08 15150 0
99740 [일반] 뉴욕타임스 8.28. 일자 기사 번역(물부족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조사) [16] 오후2시7975 23/09/07 7975 13
99739 [일반] (스포 유)영화 '잠' 보고 왔습니다. [9] 계란말이8049 23/09/07 8049 0
99738 [정치] 국무위원, 야당에 총공세 … 윤석열 대통령 "싸우라" 주문 효과 [167] 베라히17674 23/09/07 17674 0
99737 [정치] [단독]‘채상병 사건’ 이후… 해병대 지원율 0.2 대 1 역대 최저 [63] 기찻길12686 23/09/07 12686 0
99736 [일반] 10대 재수생이 스터디카페 알바 미끼에 속아 성폭행 당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83] qwerasdfzxcv17020 23/09/07 17020 9
99735 [정치] 이종섭 국방장관과 박주민 의원의 법률 설전 [61] Croove14520 23/09/07 14520 0
99734 [정치] 2년 전 '대선후보 윤석열'과 싸우는 尹대통령 [262] 베라히20035 23/09/07 20035 0
99732 [정치] JTBC가 대선 직전 조작뉴스를 내보낸 것을 사과했습니다. [157] 아이스베어20217 23/09/07 20217 0
99731 [일반] 애플망고주스와 아인슈페너 [27] ItTakesTwo7710 23/09/06 7710 54
99729 [정치] 김기현 "유재수·조국 유죄면 김태우는 무죄‥강서구청장 후보 내겠다" [125] 톤업선크림15669 23/09/06 15669 0
99728 [정치] 방통위, '가짜뉴스 근절TF' 가동…원스트라이크 아웃제 추진 [64] 간옹손건미축11813 23/09/06 11813 0
99727 [정치] 해군은 육방부의 제안에 반대한다. [86] 기찻길18123 23/09/06 18123 0
99726 [정치] 지난 9월1일 조용히 경기도 양평군 군의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 여현정 양평군의회 의원을 제명했습니다. [65] 유목민15413 23/09/06 15413 0
99725 [일반] 여자가 살기 좋은 세상 [92] 레드빠돌이16156 23/09/06 16156 13
99724 [일반] [역사] 치커리 커피를 아시나요? / 커피의 역사 [22] Fig.19318 23/09/06 9318 17
99723 [정치] 콘크리트가 깨지지 않는다면 다이너마이트를. [330] 스토리북25216 23/09/05 25216 0
99722 [정치] 보고있는가 니시다 군... [88] 인간흑인대머리남캐12326 23/09/05 12326 0
99720 [정치] 강서구청장 재보궐 소식 [49] 기찻길13688 23/09/05 13688 0
99718 [정치] 1602개 직장어린이집 설치 대상 업체중, 미설치 업체는 27개밖에 없다 [47] Leeka12045 23/09/05 12045 0
99717 [정치] 무신사 임원이 어린이집 반대 논리를 내세우면서 벌금이 싸게 먹힌다는 주장을 했네요. [124] petrus14210 23/09/05 14210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