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내의 카카오톡 메시지에서 시작된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상상 이상의 고난을 겪는 경우가 있다.
오늘 하루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나는 병원에서 뇌와 척수 손상 환자들을 14명 치료하고 있다.
그리고 물리치료실의 최선임으로 치료 일정을 편성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고난은 그 일정을 편성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단 1주일 사이에 2명의 치료사가 휴직했다.
한 명은 출산휴가를 떠났고 아마 육아휴직까지 포함하면 내년 연말에나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 명은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더니 우측 5번째 손가락과 중수골이 골절되는 낙상을 했고 응급 수술을 했다.
치료사가 총 24명에 연차를 사용한 치료사가 2명, 그리고 저 휴직자 2명.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봐도 도대체 치료 일정을 다 메꾸기는 힘들 것 같았다.
결국 몇몇 환자의 치료는 시행되지 못할 것이 확실했기에 그 명단을 추려서 병동에 공지하고 담당 주치의에게도 알렸다.
그리고 그 환자에게 가서 이러이러해서 치료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라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환자들의 반응은 참 싸늘했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일정을 담당하는 최선임이기에 환자들의 불만을 듣고 죄송하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했다.
출근하자마자 환자들에게 싫은 소리를 잔뜩 듣고 시작하는 하루이기에 힘이 빠진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내가 사과해야 하는 상황은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많아져간다.
이른 아침 출근하여 열심히 환자들에게 불만을 듣고 이제 내가 담당하는 환자들과의 시간이 시작된다.
많은 환자분들은 치료사에게 정말 정중하게 대해주신다.
물론 치료사들 역시 환자들에게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하지만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환자가 있으니 치매환자들이다.
14명의 환자 중 5번째 위치하는 환자는 72세 할머니다.
뇌출혈로 인한 수술 후 편마비가 왔고 인지저하도 극심해진데다 언어장애까지 발생했다.
마비된 우측 상하지를 운동시킬 때 왼쪽 손으로 때리고 할퀴고 발로 걷어찬다.
30분 내내 환자에게 내가 받는 공격은 말로 다 하기에 모자라다.
할머니가 건치이신지 한 번은 정말 쌔게 깨무셨는데 잇자국 그대로 멍이 들어서 다른 환자들에게 민망할 정도였다.
치매를 겪으시는 분이니 내가 참아야지 하지만 나도 가끔 이성의 끈을 놓을 때가 있다.
할머니의 보호자인 딸이 전후사정은 모른 채 왜 할머니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냐고 말하더라.
화를 삭이고 삭이며 내 팔을 조용히 보호자에게 보여주었다.
할머니가 할퀴고 때려서 상처가 많이 남아있는 내 양쪽 팔을 본 보호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내 옆에서 치료를 받던 다른 환자분이 내 편을 들어주신 덕분에 놓칠 뻔 했던 이성의 끈을 겨우겨우 붙잡았다.
정신없는 오전 근무시간이 이렇게 지나갈 때 즈음 카카오톡 메시지가 와있다.
평소 워낙 무덤덤하고 먼저 연락하는 성격이 아닌 아내의 메시지였다.
[애들이 애플망고주스가 먹고 싶다는데 사올 수 있어?]우리 집 쌍둥이들은 아파트 아주 가까이 위치한 투썸플레이스의 애플망고주스를 정말 좋아한다.
먹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어보면 항상 제일 먼저 나오는 게 애플망고주스니깐..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근무가 시작된다.
내 고난은 오늘 오전 오후를 가리지 않고 오는구나.
1년차 치료사가 보행훈련을 시키던 환자가 낙상했고, 환자는 우측 고관절 부위에 통증을 호소했다.
치료사는 사색이 되어 있었고, 넘어진 환자 주변으로 무수한 시선이 꽂히기 시작한다.
나는 얼른 그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병동에 연락하여 활력징후를 검사해달라고 했고, 주치의에게 낙상이 발생했음을 알렸다.
치료실장님께 연락해서 환자가 낙상했음을 보고하고 낙상에 관련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다행히 낙상 환자는 골절을 피해갔다.
나는 환자를 넘어뜨린 치료사를 데리고 환자와 환자 보호자에게 낙상에 대한 사과를 드리기 위해 병실로 들어선다.
내 잘못은 아닌데 왜 내가 더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는지 모르겠지만 이러라고 월급을 더 받는 것이기에 쉽게 수긍한다.
다만 낙상을 일으킨 치료사의 부주의는 쉽게 수긍이 안되기에 따로 불러서 주의를 준다.
나는 다른 동료들보다 월급이 더 많은 편이다.
동료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라고 월급을 더 받는 혹은 내 잘못이 아닌 것을 수습하라고 월급을 더 받는 것일테다.
그냥 저런 것 안하고 월급 덜 받는 게 더 속이 편하겠다 싶다가도 지난 달 빠듯했던 생활비에 마음을 다잡는다.
폭풍같던 치료시간이 지나가니 정신없이 치료실 일정을 짜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그래. 이제 다 끝나간다. 조금만 더 버티자.
겨우겨우 하루를 마무리하고 병원에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와 집 앞의 투썸플레이스로 들어간다.
요즘은 모든 주문을 키오스크로 받다보니 기계 앞에 우두커니 서서 애플망고주스를 찾는다.
6300원. 봐도봐도 참 비싸네.
결제를 하려는 찰나 아내가 좋아하는 음료도 하나 가져가기로 생각했다.
아인슈페너. 6100원. 얘도 참 비싸네.
아내는 아인슈페너를 참 좋아한다.
난 먹어도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던데 그녀는 아인슈페너를 참 좋아한다.
연애할 때도 그랬고, 결혼하고도 그랬고, 임신했을 때도 그랬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언제나 없다라고 대답을 한다.
그 없다는 대답을 무시하듯 나는 아인슈페너도 구매목록으로 올린다.
12400원. 생각보다 비싸네 혼자 중얼거리면서 삼성페이로 결제를 한다.
그래도 주문이 많이 밀려있진 않은지 금방 내가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12400원짜리 음료를 사들고 터덜터덜 걸어 집에 도착하니 쌍둥이들이 내 손에 들린 애플망고주스를 보고 기뻐한다.
아내는 내게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주고 나는 그녀에게 아인슈페너를 건내주었다.
이걸 뭐하러 사왔냐는 그녀의 책망에 애들 것만 사오긴 그래서 사왔다고 대충 얼버무린다.
입가에 미소를 띄며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 애플망고주스를 보며 깔깔거리며 웃는 쌍둥이들의 웃음.
오늘 하루 나를 괴롭혔던 고난들은 내 앞에 펼쳐진 가족들의 모습에 깨끗하게 잊혀진다.
많이 힘든 하루였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행복해하는 웃음이 내 하루를 위로해준다.
12400원에 내 힘든 하루가 다 보상받는다.
* 지난 번에 쓴 글에 많은 댓글들 감사합니다.
그 글을 쓰고 급성 바이러스성 장염(!!!)에 걸린 덕분에 댓글에 답변 할 시간을 놓쳤습니다. (-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