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2/02 16:28:40
Name 범이
Subject [일반] C의 죽음에 대한 것 (수정됨)
* 검사기를 가볍게 돌리긴 했습니다만 오탈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감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C의 죽음에 대한 것

어디서부터 서두를 떼어야 할지 의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이야기를 열어보겠습니다.

올해 2023년 1월 31일 아는 대학 후배로부터 C 선배 작가의 죽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배는 얼굴도 같이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나는 친구였어요. 그 친구가 제게 연락해 등록된 연락명이 핸드폰 화면에 떳을 때 누군인가 하고 받았었습니다.  제 연락처에 등록되어 있지만 기억이 않는 사람. 그저 저는 "여보세요?"라고 의뭉스럽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기억이 못하는 걸 눈치챈 그 후배는 자신이 누군인지 간략하게 설명하고는 C가 죽었다고 이야기 하더군요. 1년 넘게 시간만에 듣는 C에 대한 소식은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였습니다.

그가 죽었다던 소식에 대한 제 반응은  철렁이는 가슴도 아니고 울렁이는 머리도 아닌 당황스러움이 제 안에 가득차기 시작합니다. 그러고서는 머리가 하애지더군요. 후배에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하고나서 왜 나에게 연락해줬는지 물어봤습니다. 그 후배는 제가 본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짧은 인연입니다만 C와 저와의 관계가 깊어 보여서, 제가 알아야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렇죠. 저는 C와는 인연이 작지 않아요. 1학년 학부생으로 들어와 말더듬고 성급한 제게는 대학교는 자유롭되 외로운 곳이 였습니다. 그 때는 미술로 먹고 산다는 생존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든 게 의뭉스러운 때입니다. 하루 500원짜리 샤니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버티다가 밥사주는 선배들을 따라다녔어요. 그 형들을 따라다니다 알게된 게 C입니다.  제가 20살 남짓 차이나던 C는 대뜸 제게 처음 존대를 하던 사람이였습니다.  이후 편해져서 형동생 하며 말을 놨습니다. 이렇게 그와 연이되어서 거의 제가 취업하기 전까지 8년간 종종 보게되었습니다.

미술계통에서 작가의 생존과  삶, 주류와 비주류, 돈과 일 등의 일들을 겪어가가고 배워 갔습니다.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계속  C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당신의 나이에 따라 요구받는 것들에 계속 불안해 하면서 또한 인정받으려고 발악하던 사람입니다. 호구와 속물 사이에서 속물에 가까운 사람이였죠. 그래도 저의 20대 초중반까지는 그냥 따라가보고 싶은 사람이였습니다.

그의 집에 놀러가면 유리 진열장에 레고와 마블코믹스 시리즈 피규어가  가득 차있습니다. 그리고  C는 쉬는 날이면 맛난 음식을 시켜놓고 오래된 노트북에 자신이 좋아하던 과거 명작영화나 신작 영화를 봅니다.  그리고 그를 보여주는 건 '허세'. '성장하지 못한', '맞추려는' 등의 묘한 성질들이 기억납니다. 40대 중반 남성의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의 부조리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관계하는 새로운 세대와 일하기 위해서 서로 편하게 대하려는 태도를 가집니다.   
그의 집에서 밥도 잠도 자면서 놀며 보냈던 시간이 적지 않습니다. 참 이상한 사람이였습니다. 제 기억에 따르면 "작가하려면 속내드러내지말아라, 네 감정 잘 삭히고 기회를 얻어라" 등으로 말하면서 정작 나와 다른 후배에게는 그런 속내를 한없이 드러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선배에게 용돈이나 햄버거를 얻어내는 견적법과 같은 속물적인 방법으로요. 매번 햄버거는 "맥도널드 와퍼"가 진짜라며 주장하면서요. 그가 40 중반에 들어서면서 세단차를 몰며 원룸에서 사는 자신을 한탄하다가 자신의 두려움을 말합니다. "나는 노후에 폐지주우며 팔게 될까봐 무섭다. 야"라고 말하면서도 다시금 작업과 일을 하기위해 차를 팔고 트럭을 사고 그럽니다.

그러나 저는 C와 정말 사적으로 관계하다가도 공적인 일과 돈 문제를 깔끔하지 못하게 하는 면이 있더군요. 물론 제가 미숙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선배나 선임자로서 명확하게 짚어주는 면도 있으면서도, 일로서 연계해주는 대선배는 그다지 신뢰가 가는 인물도 아니였습니다. 소개해준 대선배가 저는 부조리하다 여기고 관계를 마무리했습니다. 그 이후 C는 곤란하기만 하고 중재는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후배들이 사적으로 빨리 친해지나 그는 오래 볼수록 사람들이 떠나가는 사람입니다. 저도 그 떠나가는 사람 중 한 명이였구요.
그렇게 취업 후에는 가볍게 전화정도 연락을 하다가 아예 미술과 연관없는 곳으로 가게되면서 그와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의 소식은 가끔 올라오는 SNS에서 여행 간 것, 개인 전시, 에이전시, 음식 등으로 접할 뿐이였네요.

그런데 이틀 전, 후배로부터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연탄불을 피워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2022년까지 지역 소재의 에이전시에서 공간도 얻고 지원도 얻으면서 작가생활을 잘 유지해 가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왜? 왜 죽었을까요?
또 기가 막힌 것은 이미 그가 죽은지 한 달 전입니다. 왜 부고가 안 전해졌을까요? 저와 연관된 C 당사자가 죽었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지만, 그와 저사이에 있는 사람들이 전해줬을 텐데요.

그의 부고가 전해지지 않은 이유는 그의 부모가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C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장례조차 하지 않고 부고도 없이 그를 지웠습니다.
여기서 죽음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진짜 그는 언제부터 죽었을까? 죽음이라는 건 뭔가? 저는 후배로부터 그의 죽음을 듣기 전 그가 어련히 ‘살아가고 있겠지’라고 염두하고 잊은 채 그를 기억 할 것 없이 제 할 일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듣는 순간 C는 ‘죽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그가 가버린게 한 달이 되었다니. 그가 숨이 멎은 순간 그는 차가워졌겠지요. 하지만 그 순간에 저는 그가 숨을 쉬고 따뜻하게 외로워하며 작업이나 하고 있겠지. 내 안에 깊이 어딘가 던져둔 그였는데. 후배가 그 사람을 말하고 그의 죽음을 말하는 순간 무언가 끊어집니다. 라디오의 수신과 송신사이에 잡음이 증폭되는 느낌. 노이즈가 커져서 내게로 생기는 생각과 감정을 들어오는 소리를 가립니다.

흔들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후배에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전화를 마무리를 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슬픈 척을 해야 하나 괜찮은 척을 해야하나. 누구한테 이야기를 해야하나.

그냥 저는 담배만 줄줄이 폈습니다.
담배를피는 내내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더군요. 왜 C가 죽었는가? 그렇다면 C가 죽게 된 역사는 무엇인가? 죽음은 뭔가?

제가 기억하는 C는 ‘로보다치 No. 03 보물섬’ 완구를 가지고 놀던 부유한 의사의 막내아들입니다. 강남 8학군 K기고를 나오고 졸업 동문들은 전부 기업대표, 기업사장, 대기업 임원 등을 하던 사람들이구요. 그는 학업에 충실하지 않았으나 미술에 재능이 있었고 강원도에 소재한 미대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러다 군대에 들어가서 대통령 경호실 부대에 소속되서 군복무를 하죠. 그런데 그가 전역할 즈음 가세가 기울고 미술을 그만둬야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그가 30살이 넘어서 까지 그의 아버지의 정신병원에서 간호원로 일하게 됐죠. 그 정신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해서 그런지 C는 제게 항상 같이 술 먹을 때 마다 말했습니다. “혼자 술 먹는 것 부터가 알콜중독의 시작이다.”라며 말이에요.
인생사 새옹지마. 그 말처럼 그의 부모가 분당에서 사둔 땅이 개발되면서 C는 경제적으로 자유로워 집니다. 그 다음 그는 30살 초반에 미술을 다시 시작합니다. 제가 다니는 미술대학 학부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동대학에서 석사, 박사를 마치면서 작가 생활을 유지해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또래나 고등학교 동창들과 끊임없이 비교 했습니다. 그래서 더 빨리 더 젊을 때 작가로서 성공하고 싶어 했어요. 그 조급함이 문제였을까요. 저는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 있어도 그가 진정 말하고 싶은 건 안 보입니다. 주제는 거대하고 팔릴 것 같은 것, 대단해 보이는 것으로 계속 작업을 합니다. 작업 기술은 향상되지만요, 그 이야기는 더 메말라가는 것 같고 그가 작품을 할수록 더 스스로에게 소외되어 보였어요. 이를테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자기 속내는 꺼내지 않고 잘 사는 것, 가지고 있는 것, 앞으로 가지게 될 것을 이야기하는 것처럼이요. 그의 불안, 아픈 것, 혹은 그가 공유될 수 있는 이야기들은 그저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운 좋게 나올 뿐.
그 불안한 마음은 여행, 여자친구, 차, 술, 영화, 진열대에 늘어가는 PG건담, 핫토이 피규어로 해소합니다. 그래서 그게 완전히 해소해주었나요? 그가 끝에 가서 한 것은 매케한 연기를 마시고 맞이한 죽음입니다.
돈이 문제 였다면 정신과 병원장이던 자기 아버지, 대기업 임원이던 자기 형에게 말할 수 있지 않나요? 차라리 쪽팔리는 것보다 사는 게 낫지 않나요? 마음 문제였다면 전문가인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할 수 있지 않나요? 만약 C가 자기 가족에게 돈 빌리는게 부담되서 말 못했다고 해요. 만일 돈 문제가 아니고 마음 문제라면 아무리 자기 가족이 전문가여도 불화가 있고 갈등이 있다면 말하지 못 할 수 있었다고 합시다. 왜 아무도,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을까요? 오지랖 넓은 동네 주민이나 상인이라도 한 명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까요?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넘어가서 저는 그의 부모에게 화를 느낍니다. 그들 스스로에게도 그의 자식인 C에게도 말입니다. 그렇게 조용히 처리하고 삭히면 다 해결됩니까. 장례식은 실상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의례에요. 죽은 이에 대한 슬픔을 드러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 조문객들 자신의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들로 채우며 다시 삶으로 환원하는 자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신병원장 아들이 자살로 죽었으니 그게 소문이나 병원이 망할 것 같았을까요. 아니면 그들도 당황스러워서 급하게 처리한 것일까요. 제가 감히 자식이 죽은 것이 무엇인지 겪지도 알지도 못하는 채로 막말을 하는 것일까요.

아, 이리도 두서없는 글을 썼습니다. 쓸수록 격해지네요. 여기서 멈춰야 할 것 같아요.
여기서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막상 쓰기 시작할 때는 몰랐지만요. 제가 C의 이러한 죽음과 그 죽음을 다루는 일들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미 제 지인과 이리저리 이야기하며 위안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 한 켠에 남은 짜투리를 글로 쓰고 누군가에게 공유하고 싶었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말하자면
그의 장지에 가고 싶긴 하지만, 장례를 하지 않아서 장지 주소가 공유가 되지도 않았네요. 그의 묫자리가 어딘지 알아서 일품진로나 한 병 부어주고 오고 싶은데 말이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담배상품권
23/02/02 16:45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바를 실천했다 하더라도 보답받지 못했을 수도 있고, 어둠에 묻힌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이 글로서 소리없는 곡이 잘 닿았기를 바랍니다.
23/02/02 22:3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하종화
23/02/02 17:16
수정 아이콘
죽음이라는게 텍스트로 보면 가볍지만,실제를 겪으면 그보다 더 무거울수가 없지요..
얼마나 어두웠을지 얼마나 무거웠을지 짐작도 할 수 없지만..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3/02/02 22:3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23/02/02 18:59
수정 아이콘
범님께서 pgr에 열어주신 C의 장례식에 저도 술 한잔 올리고 갑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3/02/02 22:34
수정 아이콘
장례식이라고 하시니, 이렇게도 위안을 공유가 가능하겠구나 싶네요.
말씀이 생경하게 받아들여집니다.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7830 [일반] 7900X3D/7950X3D 2월 28일, 7800X3D 4월 6일 출시 [12] SAS Tony Parker 10684 23/02/02 10684 0
97829 [일반] 완결웹툰 추천 - 태백 : 튜토리얼맨 [18] 휴울10984 23/02/02 10984 2
97828 [정치] 대통령 관저 천공 관여 의혹 일파만파 [126] 빼사스19056 23/02/02 19056 0
97827 [일반] C의 죽음에 대한 것 [6] 범이8753 23/02/02 8753 31
97826 [일반] 버거 예찬 [61] 밥과글14638 23/02/02 14638 53
97823 [정치] 김기현, '가세연' 김세의 최고위원 선거 출정식에 참석 [107] 맥스훼인17965 23/02/01 17965 0
97822 [정치] 尹대통령, 박정희 생가 방문…"위대한 지도자가 이끈 미래 계승" [187] 덴드로븀19089 23/02/01 19089 0
97821 [일반] 1883 미드 감상기 [8] 만득13475 23/02/01 13475 4
97820 수정잠금 댓글잠금 [정치] 현직자가 알려주는 가스요금 인상 이유.jpg [268] dbq12328541 23/02/01 28541 0
97819 [일반] "더 퍼스트 슬램덩크" 200만 관객 돌파 [63] Rorschach13922 23/02/01 13922 3
97818 [일반] "나는 이미 치매 걸렸는데~" [13] 김승구15413 23/02/01 15413 5
97817 [일반] 급증하는 길고양이 문제에서 생각해 봐야 할 TNR [155] VictoryFood19777 23/02/01 19777 22
97816 [정치] 국힘 당대표는 당연히 김기현 아니냐? [93] 스토리북19863 23/02/01 19863 0
97815 [일반] 웹소설의 신 [19] 꿀행성13467 23/02/01 13467 36
97814 [일반] 60년대생이 보는 MCU 페이즈 1 감상기 [110] 이르14849 23/01/31 14849 86
97813 [일반] 도사 할아버지 [29] 밥과글13520 23/01/31 13520 86
97812 [일반] IMF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 [46] 크레토스16706 23/01/31 16706 4
97811 [정치] 유승민, 당대표 선거 불출마…“인내하며 때 기다리겠다” [151] 카루오스18633 23/01/31 18633 0
97810 [정치] 여기가 민주주의 병기창이라면서요? [58] 어강됴리17708 23/01/31 17708 0
97809 [정치] 연금특위와 민간자문위원, 오건호씨 [29] 로크15066 23/01/30 15066 0
97808 [일반] 전직자가 생각하는 한국 게임 업계 [82] 굄성16802 23/01/30 16802 46
97807 [일반] 괴담이라기엔 이상하지만 [39] 상록일기12959 23/01/30 12959 6
97806 [일반] 아파트 경매 데이터로 서울과 강남3구 살펴보기 [6] 민트초코우유13826 23/01/30 13826 1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