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 부리는 것에 영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더니 몇 년 전부터 팔자에 없는 편집샵에서 일하게 되어 제법 사람처럼은 꾸미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책과도 통 담을 쌓고 살았더니 이번 6월달부터 도서관에서도 일하게 되어 요샌 제법 책도 빌려서 읽게 되는 걸 보면 참 감사한 일이다. 학교 다니며 아르바이트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지만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에게는 원래 직장만큼이나 이보다 열악한 환경이 또 없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것 말고는 별로 비슷한 구석이 없어 보이는 잡화점과 책방이지만, 두 곳에서 나는 꽤나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숫자를 메기는 일.
두 곳 모두 보편적인(Universal) 바코드를 사용한다. 보통 어디에서나 쓰이는 바코드를 UPC라고 부르는데 Universal Product Code의 약자라서 풀어서 쓰면 바로 그 뜻을 알 수 있다. UPC는 말 그대로 유니버셜해서, 똑같은 바코드를 어디서든 찍어보면 같은 물건이 나오게 되어있다. 똑 같은 컨버스화를 가지고 백화점에 가던, 편집샵에 가던, 컨버스 직영매장에 가던 신발 상자에 붙어 있는 바코드를 찍어보면 그 박스 안에 어떤 신발이 들어있는지, 사이즈가 어떻게 되는지, 무슨 색깔인지, 가격은 얼마인지를 알 수 있다. 바코드가 겉으로 보기엔 그게 그거 같아 보이지만 그 모양과 담겨있는 숫자가 물건마다 모두 조금씩 달라서, 같은 컨버스화라고 하더라도 색상과 사이즈에 따라 다른 바코드를 가지고 있고 찍어보면 다만 한 자리수라도 다른 숫자가 나타난다. 모든 물건들은 각자 자기의 유니크한, 즉 자기만의 고유한 바코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책들도 마찬가지로 ISBN이라는 고유 바코드를 가지고 있는데, 책들은 한술 더 뜬다. ISBN은 무려 International Standard Book Number의 약자인지라 국제표준으로 사용한다. (UPC는 국제표준은 아니라 여러 다른 종류의 바코드가 존재한다.)
바코드를 사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더 쉽게 그 물건을 특정하기 위해서이다. 바코드라는 것 자체부터가 바(Bar)에 코드(Code)를 담고 있는 것이라서 여러 자리의 숫자를 일일이 누르지 않고 스캔 한 번으로 쉽게 입력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 물건의 브랜드는 무엇인지, 이 모델의 이름은 무엇인지, 이 색깔은 무어라 부르는지, 이 사이즈의 기준이 무엇인지 등을 일일이 찾아보지 않아도 되도록 10~15자리 숫자 하나로 그 모든 이름을 대신한다.
숫자로 이름을 대신하는 일을 하다 보아하니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게 꼭 그러하다. 사람은 그 자체로 유니크 하다. 그 유니크 함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과 그 안의 소회, 그렇게 쌓여온 인격과 길러온 소양, 그 위로 내뿜는 감정과 몸짓들로 자서전 한 권이나 일대기 한 편으로는 써 내려갈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스토리를 담고 있다. 나 자신조차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내 안에 담겨 있기에, 우리는 다른 이들의 편의를 위해 겉모습이란 바코드로 자신을 포장하여 보여준다. 유니버셜하게.
허나 사람이라는게 얼마나 게으르면 이 마저도 그대로 못 받아들이고 또 한 번을 줄여낸다. 같은 컨버스화의 같은 바코드라도 매장마다 전용의 바코드를 따로 만들어서 관리한다. 편의를 위해 숫자 자리 수를 줄이고 추가 정보를 더해서. 편의점 다르고 백화점 다르고 온라인 쇼핑몰 다르고 다 다르다. 같은 사람을 보더라도 보는 눈마다 다 다르게 받아들인다. 이미 단편적인 모습만을 스캔하면서도 편협한 생각의 뭉치로 편집해낸 다음 내 편견을 더해 더 편할대로 받아들인다. 이게 끝이 아니다. 심지어 카테고리로 분류하기까지 한다. 락포트 셰익스피어와 콜한 제로그랜드라는 이름들을 단화 카테고리 밑에 두고 뭉뚱그리듯, 우리 회사 매니저나 교회 그 장로의 인생들을 꼰대라는 꼬리표 아래 제멋대로 요약해버리고 뒤에서 욕하는 맛으로 산다.
직장에서야 줄이는 게 메기는 게 일이라지만 삶에선 사람들을 마냥 줄여 버리기만 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이란 보편적으로 고유하니까. 그 고유함으로 아름다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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