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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9/29 11:37:03
Name 새님
Subject [일반] [이해] 강릉기행 (수정됨)







강릉기행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 무렵 나는 십 대의 허물을 벗고 성인이 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고작 술집에서 신분증 검사를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갈증이었다. 훌쩍 자전거를 기차 칸에 심은 것도 그런 충동이었다. 한겨울 청량리에서 출발한 열차는 흰 입김을 뿜으며 영동선을 따라 구불구불 동으로 흘렀다. 나는 시린 차창에 뺨을 부비고 앉아 스치는 모든 것에 시선을 집중하려 애썼다. 어깨를 움츠려 태백의 농밀한 숲과 계곡을 비껴 지나다 문득 하늘을 보면, 어느새 훌쩍 내려다보는 잊힌 산 거인과 눈이 마주치고, 아, 하고 절로 오래된 탄성이 내뱉어졌다. 침을 삼키니 모르는 새 뭉툭해진 열차 바퀴 소리가 먹먹한 고막을 요란하게 열고 들어왔다. 산 끝에 걸린 구름이 미끄러져 내려와 안개가 되었다. 굽어진 고갯길과 컴컴한 터널을 여러 번 지나 산 노인의 마당 끝에 이르니, 강릉이 있었다.


  나는 대학 친구 김의 집에서 하루 신세를 지기로 했다. 김의 집은 기차역보다 북쪽으로 이십여 리 떨어진, 솔숲을 따라 호수를 끼고 도는 유원지 뒤편의 이층집이었다. 김과 그의 가족이 나를 환대해 주었다. 저녁을 먹고 깊어진 밤 작은 술상을 앞에 둔 김의 아버지가 소주 한 잔에 얹어 말씀하시길, 자정이 지나면 예서 강릉역까지 이르는 도로의 가로등이 모두 꺼진다 하였다. 안개가 지면 위험하니 밤이 더 짙어지기 전에 가게. 그렇습니까, 그럼 저는 곧 일어나봐야 하겠습니다. 잔을 비워 인사하고 대문 밖을 나서는 나를 김이 배웅했다.


  보름이었던 것도 같고 그믐이었던 것도 같다. 산과 바다에서 흘러들어온 습기가 뭇 사물의 형태를 가렸다. 지독한 안개였다. 나는 자전거 바퀴를 구름질하여 먼 곳으로 부지런히 밤을 밀어냈다. 발 구름에 자전거 사슬 감기는 소리가 차르륵 차르륵 가는 길로 흘렀다. 허나 은밀한 독재자처럼 내려앉은 안개는 읍내 건물 사이 사이를 점령하고 어둠 속으로 세상을 유배시키고 있었다. 강릉역으로 향할수록 나는 점점 체온을 잃어가는 착각에 빠졌다. 조급함을 비웃듯 안개는 자정이 가까워져 올수록 서서히 만조로 치달았다. 황색 신호등 하나 흔들리는 사거리에 거꾸러진 자전거 그림자가 달렸다. 맺힌 안개가 싸늘한 부슬비로 내리기 시작했다.


  길목에서 만난 철로를 동앗줄 삼아 강릉역에 이르렀다. 납작한 단층의 역사는 도축된 고래처럼 허연 등을 내민 채 우울한 눈을 감고 있었다. 가스등이 안개에 묻혀 웅크린 역사를 희부옇게 밝혔다. 두꺼운 잠바에 거멓게 파묻힌 사람 몇 명이 역사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역무원에게 쫓겨나는 노숙자 무리를 지나쳐 벽에 붙은 시간표를 올려다보니 기차 시각은 네시 반 즈음이었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비로소 몸과 마음이 곤해졌다. 허나 동해의 겨울밤을 얕보고 젊음을 맹신한 탓에 나는 역사 구석에서 남은 세시간 여를 고양이 새끼처럼 오들거려야 할 판이었다. 녹다 만 눈이 운동화 코에 스며 발이 지저분한 잿빛으로 얼었다. 추워서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지만, 그저 제자리에서 동동 발을 구르며 애먼 입김으로 손끝을 녹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이 든 여자 몇 명이 웅크린 팔짱을 끼고 역전 광장을 얼쩡이다 손짓했다. 학생, 학생. 아주 할머니라기도 아주 아주머니라기도 애매한, 지금의 내 어머니 나이쯤 되는 아주머니였다. 학생, 자고 가. 쉬고 가. 이모, 이따 기차 타려는데 잠깐 눈만 붙일 수 있습니까. 눈만 붙여? 네, 날씨가 너무 추워서요. 얼마예요? 만 원만 받을게. 그런데 잠자기 힘들 텐데. 나는 추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념으로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아주머니의 표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잊히지 않는 것은 모닥불 건너 지구대의 밝은 불빛과 등 뒤에 와르르 쏟아지던 낯선 억양의 웃음소리, 아주머니의 이끄는 손 주름 사이사이 배겨 있던 안개 조각 따위다.


  강릉역의 왼 지느러미 아래에 여인숙 몇 개가 옹송그려 앉았다. 아주머니는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모퉁이 골목의 그림자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허름한 이 층 건물은 천장이 낮았다. 눅진한 문손잡이를 당기자 벌건 정육점 불빛이 좁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복도 양쪽으로 예닐곱 개쯤 되는 합판 문짝이 어깨를 지그재그 붙여 마주 보는 것이 영락없는 고시원의 모양새였다. 그제야 나는 아, 여기가 말로만 듣던 곳이구나 싶어 뒤늦게 부끄러워했다. 아주머니는 나를 훌쩍 앞서 팔 번 숫자가 붙은 문을 열었다. 씻고 싶으면 화장실은 이쪽 끝이고, 그 맞은편 방은 빨래하는 방이니까 헷갈리지 말고. 그는 탈취제인지 향수인지 모를 것을 몇 번이고 뿌려 주었다. 인공의 향이 흩어지는 소리와 시큼한 곰팡내 틈에서 아주머니가 짧게 혀를 찼다. 등기구에 달린 끈을 당기자 빨간 불이 희게 변했다. 아주머니가 나가면서 말했다. 자는데 신경 좀 쓰일 거다. 어느새 문이 닫히고 나는 한 평 반의 신세계에 우두커니 남았다. 나이가 든 촌스런 모란무늬 이불과 두루마리 휴지가 정적 속에서 수군거렸다. 전등 끈을 한 번 더 당기자 여관장의 손톱만 한 창문에 낯선 얼굴이 비쳤다.


  아주머니의 말은 사실이었다. 담요로 추위는 녹였으나 피로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애처로이 잠의 언저리를 맴돌기만 했다. 가운데가 꺼진 낡은 매트리스 위로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진한 안개처럼 고여 들었다. 나는 옷소매 끝으로 파고드는 소리를 막으려 안간힘을 썼다. 아, 아, 흥, 좋아, 더, 더, 아. 애정보다 비명에 가까운 신음에 얼굴이 달아올라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한 꺼풀 너머로만 관음해왔던 에로티시즘이 베일을 벗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잘 배워 자란 청년답게 얌전하고 매사에 엄숙하였고 그리고 가난하였던 나는 이 모든 소용돌이 앞에 무력하게 내팽개쳐졌다.


  몽롱한 뇌리에서 옆 방의 불꽃이 금세 고요해졌다. 허나, 깨진 자리를 테이프로 바른 유리창 너머 봉고차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시 문이 드르륵 닫히고, 잠시 후 뾰족구두 몇 켤레가 또각 또각 건넛방 문을 열었다. 손잡이 잠그는 소리가 달카닥, 마침내 침대로 허물어 스러지는 신음이 기어코 문틈을 비집고 기어 들어왔다. 귓불의 솜털이 곤두설 만큼 메말라 찢어지는 소리, 소리, 소리. 다시 문이 열리고 닫히고 네가 들어오고, 아, 아. 얇은 컨테이너 벽을 꿰뚫은 소리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나를 올라타 허리를 흔들었다. 나는 언젠가의 검은 풍경 속에서 하얀 모습으로 바라보던 너의 얼굴을 애써 떠올렸다. 지우고 떠올리고 지우고 종내 모진 이별의 말을 떠올리고도 홀려서 못 견디어서 했다. 그냥 차마 그렇게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청각의 이미지를 이기지 못한 나는 돼지처럼 밖으로 도망쳤다.


  여인숙 벽에 기대 얼음 같은 숨을 헐떡였다. 골목길로 이어지는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나이 든 여자가 내게 손짓했다. 광장 왼편 꺼진 가로등 아래에서 아주머니 몇 명이 기름통에 불을 피워놓고 수다를 녹이고 있었다. 이상한 우울에 빠져 불자리 곁에 앉으니 아주머니들이 까르르 웃었다. 거 봐 내가 잠 못 잔다 했잖아. 너 심심하면 오늘 나랑 얘기하자. 나를 들이밀었던 아주머니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 너는 몇 살이야. 어디서 왔는데, 어데로 가는데. 나는 가볍디가벼운 짐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스무 살이에요. 서울요, 해 보러 가요, 이모는 어디서 왔는데요. 나는 한 평 반 가득 메우던 소리가 마침내 메아리치지 않을 때까지 그저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싶었다.


  역전 광장 구석에 잠시 섰다 떠나는 봉고차를 애써 외면하며, 주고받는 얘기들만 귀에 새기려 애를 썼다. 파출소 앞에서 남자 셋을 붙잡아 온 이모가 꾸민 목소리로 전화를 돌렸다. 엄마보다 고작 몇 살 더 많아 보였다. 여기 선생님 셋 오셨는데 얼른 와. 그녀 뒤의 아버지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리자 하얀 강릉역이 짙은 안개에 잠겨 찰랑이고 있었다. 주홍 털조끼를 입은 아주머니가 내게 너 대학은 다니냐, 물었다. 나는 진 반 거짓 반을 섞어서 대답했다. 어디 어디서 뭐 공부해요. 공부 잘 했네, 우리 아들도 그 나인데 군인에 가 있어. 지금 군대에서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겄다, 그러면서 휴대폰에 있는 까까머리 사진을 보여주어 나는 놀랐다.


  뒤에서 젊은 여자 하나가 아스팔트를 눌러 밟으며 다가왔다. 몇 걸음 뒤 따라 나와 담배를 입에 문 남자를 보니 일을 막 마친 모양이었다. 담배 연기처럼 밤 안개를 두른 그녀는 흔한 청승맞음도 없이 예뻤다. 난생처음 보는 까만 원피스가 갸름한 몸매가 주는 인상을 더욱 강하게 했다. 얼굴도 예쁜 편이고 화장이 화려했다. 그때는 교복을 입지 않은 여자 나이란 것도 가늠할 줄 모를 때라 무표정한 얼굴도 그저 곱고 빠알갛게 달싹이는 입술만 눈에 들어왔다. 어느 아주머니가 말했다. 돌아온다고 차 늦는대. 누나가 내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누나가 대뜸 물었다. 야, 너는 안 해? 아니, 저는 안 할 건데요. 나는 불 곁을 내주며 당황하여 웃었다. 왜 안 하는데. 누나가 싱글싱글 묻자 말문이 트였다. 또록또록한 강원도 말에 이상하게 경상도 말이 섞여 있었다. 나는 대답했다. 아는 형님이 해준 말이 있는데요.


  열여덟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뼈저린 실패를 맛본 겨울의 일이었다. 나는 경주 산기슭 공사판에서 아찔하리만치 늙은 나무를 베고 지고 나르고 있었다. 철학에 취해 정신의 덧없음을 자조하며 앞에 내던져진 어두운 사상들을 억센 힘으로 누르고 후비었다. 그러던 한 날에 대목과 오야가 햇볕에 새카맣게 탄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다방을 불렀다며 나를 데려가 컨테이너 문을 열었다. 한 번도 불러본 적 없었지만 대충 알기로 그 근방의 다방이란 죄다 보온병에 뜨거운 물과 커피 프림 설탕을 담아오는 그런 다방이었다. 예상했듯이 오야 삼촌의 컨테이너에는 짧은 치마 오토바이를 타고 온 티켓 아가씨가 있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퉁퉁하고 예쁘지 아니했다. 그녀는 가져온 보자기를 풀더니 뜨거운 물이 든 보온병과 커피 프림 설탕 유리병을 가지고 커다란 종이컵에 느리게 커피를 탔다. 숟가락을 쥔 새끼손가락이 야릇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오빠 티켓 끊을래요? 아니, 표 안 끊어, 오늘은 그냥 얘기하려고 했어. 오야 형이 내 허리께를 아프게 쳤다. 잠시 심드렁해진 티켓 아가씨는 큰 컵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몇 번이고 맞장구를 치다가 십오 분을 채워 컨테이너를 떠났다. 나는 감히 끼어들 이야기가 아니라 바닥 장판의 눈금과 그녀의 벗겨진 손톱칠만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 명에 이만 원을 냈다.


  오야 삼촌이 물었다. 니 저 여자랑 하고 싶드나. 장판 색깔 같은 그녀의 노리끼리한 살결과 두툼한 입술을 떠올리며 아니 나는 하기 싫어요, 대답하자 삼촌이 씩 웃었다. 야 이 새끼야, 니는 처음은 무조건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라, 첫 여자는 기억에 남는데 남들한테 말 못할 사람이면 내처럼 평생 후회한다. 나는 불타 들어가는 담배꽁초 연기에 눈물을 찔끔 흘리며 그러고마 했다. 너로부터 모진 말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이야기를 마치자 아주머니들과 예쁜 누나는 굉장히 우스운 얘기를 들었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오랫동안 깔깔 웃었다. 모닥불 멀어진 역 그림자 아래서 눈을 가늘게 뜨고 웃던 남자 두엇은 근방의 삼촌들이었을 것이다.


  뭐 시발 니는 내 보고 안 꼴린다는 거네. 한숨 놓으려던 차 누나가 내 사타구니를 덥석 붙잡았다. 꼴렸네 이 새끼. 나는 당황하여 머뭇거렸다. 늙은 여자가 웃는다. 야야 애 너무 놀리면 못쓴다. 누나도 약간 취했던 것 같다. 모닥불 건너부터 종이컵에 소주가 한 순배 돌았다. 익숙지 않은 떨떠름함이 울젖을 타고 몸을 뜨겁게 달구는데, 누가 나무젓가락으로 불붙은 기름통 가장자리를 장단 맞춰 두드리며 흥얼거렸다. 대관령 재를 넘어 떠나오던 날.... 꺾이고 갈라지며 어깨춤을 잇는 생경한 노랫가락에 나는 태연하게 꾸민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누나,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누나는 이 일을 왜 해요.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누나는 높은 소리로 웃었다. 뭐? 아 씨바 이 얘기 백 번 천 번 넘게 들어봤다, 시벌놈들이 어차피 나랑 떡칠 거면서 동정하는 척 그라는데, 팁도 안 주면서 이런 얘기 맨날 물어 싸는데 니도 글나. 누나가 검지와 중지를 벌리며 까닥이는데 흔들리는 불길 너울에 손마디 그늘이 선명하게 깊었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순간 속에서 광장 건너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그 길이 그리도 멀었다. 형, 여기서 제일 맛있고 잘 나가는 담배 주세요. 그거 두 갑 주세요, 민증 여기 있어요.


  마일드세븐 두 갑을 내미니 쪼그려 앉아 있던 누나가 엉덩이를 두드려 주었다. 내 취향 어떻게 알았는데. 강원도 말이었다. 아 어린놈이 사회생활 잘 하겠네. 대학생이야? 어디 다니는데. 모모 대학교요. 니 존나 공부 잘했네. 그녀의 막말에서는 진득한 경상도의 기억이 말라붙어 소금처럼 배어 나왔다. 야 시바 내가 니 따먹으면 미래 의사 선생 따먹는 거네. 누나는 손아래 형제가 하나 있다고 했다. 나는 금마가 공부 그마이 안 하더니 대학 갈 줄을 몰랐는데 어디 모모에 합격장 받아왔데. 질퍽한 억양이나 몸짓이 꼭 괄괄한 누이 같았다. 나는 갑자기 누나와 친해진 것 같아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금마는 모르지. 밤에 어디 알바 하는 줄 안다 아이가. 저저번 달에 등록금 삼백 나왔는데, 졸업은 시켜줘야지. 근데 니 같은 애도 머뜩카니 오락하러 다니고 그러나. 학교 갔다 오면 맨날 뭐 하고 있는데, 지 친구들이랑 무슨 유행이라 그러는데, 내 이렇게 벌러 다니는데 그거하고 앉은 거 보면 확 죽여버리고 싶더라. 니는 그래도 공부 열심히 했으니까 부모님 좋아하시겠네. 나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야 너 내가 몇 살 같아 보이니. 누나가 묻기에 솔직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스물여섯 일곱이오. 누나가 무릎을 치며 웃자 추위로 발갛게 튼 허벅지가 드러났다. 내 등짝을 탕 치고 한편으로 다른 아주머니 옷자락을 잡고 흔든다. 야야, 엄마, 들었어 들었어? 얘가 뭘 좀 아네. 야야야야 너 나중에 오면 나랑 연애하자. 누나는 유쾌해 죽겠다는 듯이 웃어댔다. 한개비 담뱃불을 댕기는 그녀의 벗겨진 손톱이 시선 끝에서 가물거렸다. 취기 오른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투르게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파출소 앞에 봉고차가 섰다. 곧 골목을 따라 늘어선 여인숙에서 여자들이 하나둘 빠져나와 봉고차에 올라탔다. 누나는 겨울 입김처럼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니는 누나 연락처나 이름 안 궁금해. 재가 털어질수록 짧아져 가는 담배 한 까치가 침묵을 애태웠다. 물어봐도 어차피 가짜로 알려줄 거잖아요,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는데,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누나가 놀라는 체 씩 웃었다. 처음 왔으면서 그런 건 또 잘 아네.


  니, 다시 올 일 있으면 와서 은비 누나 찾아라.


  그렇게 여관바리 하나가 갔다. 나는 등이 브이 자로 파진 드레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밤새 익숙해진 소리를 다시 들었다. 뾰족구두 소리가 또각이고, 봉고차 문이 열렸다 닫히고, 텅 빈 광장에 모든 소리가 되감아 지며 나는 의미 모를 신음을 흘렸다. 봉고차가 그 밤을 떠나도 내 귓가에는 여전히 소리가 멍멍히 반복되었다. 십오 분에 오만원짜리 신음소리와 모닥불에 종이 소주잔 타다 스러지는 소리 속에서, 나는 어느 불란서 소설의 첫 구절처럼 은비 누나라는 이름만 혀끝에서 작게 소리 내어 굴렸다. 얼큰히 취한 역전 아주머니가 구성진 한 곡조를 뱉듯이 꺾어 씹었다. 출구 없는 미로 고개 이젠 간다 봇짐 싸도 갈 길이 멀구나….


  네 시 반 첫차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아랫도리를 추스른 사내들이 담배 연기를 몰고 어슬렁 광장으로 기어 나왔다. 대부분은 아직 잠 깨지 않은 역사 벽에 기대서 그저 담배만 물었고 그중 몇이 불 앞에 앉아서 아주머니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몇 대 섞어 피웠다. 개중에는 오가며 벌써 낯익어진 골초도 몇 있었고 아줌마와 인사하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나는 채 가시지 않은 아쉬움과 혼란 속에서 강릉역을 올려다보았다. 하나둘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고 어느새 잠에서 깬 커다란 고래가 회색 눈을 끔벅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유 모를 뿌듯함과 서러움에 나는 안개 속에 고개를 숙이고 자전거의 자물쇠를 풀었다. 곱은 손이 흔들리고, 구석에 쌓여 녹다 만 눈이 잿빛으로 부끄러웠다. 기차 들어오는 소리가 고래 울음처럼 새벽을 불렀다.


  그 어느 연초 정월 초하루가 지나 나는 뒤늦게 해돋이를 보았다. 가슴이 답답해 동이 트는 바다에서 춤추고 날뛰다 얼음 진 바람에 몸을 덜덜 떨며 주저앉았다. 준비되지 않았던 시간에서 벗어나 억눌린 감정들을 토해내자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왜 그렇게 뒤죽박죽이었는지 왜 못 견디어서 했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아침 햇살이 선명해질수록 혼란은 더해갔다. 해가 안개를 밀어내고 찰박이는 파도가 발끝을 적실 때까지 나는 무언가를 인정하지도 내려놓지도 못한 채 해변을 헤매었다. 누이도 너도 아니었다. 철로를 따라 돌아오는 길 정신없이 자전거를 달리다 스물 네시간 국밥집 한 켠을 빌어 쪽잠을 잤다. 꿈속에서 찰박이는 안개가 발 끝에 고여 명랑한 소리를 내었다. 나는 안개 바다를 가로지르다 고래의 뱃속에 잠겨 온몸을 버둥거렸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태백산 등어리를 바라보며 다시 알 길 없는 만남을 아쉬워하다가, 차갑게 바랜 손끝으로 산신에게 말 못 할 기원 하나를 올렸다. 산이 멀어지며 서울이 선명해질수록 나는 호흡이 가빠오고 두근거려 이마가 아프게 쑤시었다. 마음이 서럽고 선득하여 너의 손톱 반틈 남아 있던 봉숭아 물이 떠올랐다. 죽어 더 이상 끔벅이지 않는 고래의 눈동자와, 열리고 닫히고 또각이는 규칙적인 소리들과, 비명과, 버려진 것들을 태우고 덥히던 모닥불과, 멀거니 바라보다 마주친 열여덟 눈동자와, 비쩍 마른 여관바리의 등과 안개를 뒤로 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고개를 저었다. 나는 거짓말로써 나를 위로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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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ENE_ADLER.
17/09/29 11:55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저도 스쳐 지났을 공간의 이야기라 그런가 마치 제 이야기처럼 읽었습니다. 하고픈 말이 많은데 풀어내기가 몹시 어려워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 이 글 보고 나니 지난 번 질게글에서 강원도 사투리 능력자를 구하신 이유를 알겠네요. 작게나마 도와드릴 걸 그랬어요.
17/09/29 14:23
수정 아이콘
그 질문글이 이 글을 위했던 것은 맞습니다. 사실 저는 모르는 동네인데 이렇게 직접 아시는 분을 만나니 또 기분이 묘하네요...
17/09/29 11:59
수정 아이콘
우와, 단숨에 읽었습니다!
좋아요
17/09/29 12:01
수정 아이콘
시작부터 너무 센게 나타났다
자판기냉커피
17/09/29 12:03
수정 아이콘
몇줄 댓글쓰는것도 어려워하는 저같은사람은
이렇게 글 잘쓰시는분들 보면 부럽네요
글 잘쓰시네요 진짜
문정동김씨
17/09/29 12:16
수정 아이콘
글 좋네요. 추천드립니다.
양념반후라이
17/09/29 12:20
수정 아이콘
강릉역 근처 유명했죠. 강릉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벌써 그런데 다녀온 놈들도 있었고.
17/09/29 14:41
수정 아이콘
원래 유명한가요? 꿈에도 몰랐네요; 세상 좋아져서 저는 스트리트뷰 서비스로 강릉역을 배웠습니다.
미나가 최고다!
17/09/29 12:25
수정 아이콘
감각적 언어의 사용과 주인공의 모호한 심리를 적절하게 표현한 수작이네요. 주변에 대한 묘사와 비유도 좋았습니다.
17/09/29 15:52
수정 아이콘
저도 제가 뭘 썼는지 모르는 중인데 감사합니다.
살려야한다
17/09/29 13:01
수정 아이콘
초보방에 이영호 들어왔네요 크크 잘 읽었습니다
17/09/29 13:08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이긴 한데, 이 글이 왜 '이해' 카테고리이지? 했다가 예전글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여성분이신데 남자에 대한 심리묘사가 정말 대단하시네요.
17/09/29 14:28
수정 아이콘
(수정됨) [이해] 말머리를 단 것은 주인공이 다른 형태의 삶을 만나 그걸 이해했거나/못했기 때문인데, 사실 이 이야기에는 누군가의 경험과 허구가 9대 1쯤의 비율로 섞여 있습니다. 말 해주던 사람도 그땐 그런 것인줄 몰랐었다고 했구요. 글을 위해 이야기 나누면서도 지금 와 돌이켜보니 그랬구나...했습니다 흐흐흐


그러니 칭찬은 제 몫이 아닌 걸로...
17/09/29 14:32
수정 아이콘
그런데 구글 애드 센스 차단에 체크한 것 같은데 수정하러 들어갈 때마다 언체크 되어있네요ㅠ 확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17/09/29 22:49
수정 아이콘
예 수정했습니다
싸이유니
17/09/29 13:11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벤트를 꼭 해야하는 이유가 이글에 있는것 같네요.
사조영웅전
17/09/29 13:26
수정 아이콘
무진기행을 읽는 듯한 느낌이네요.
17/09/29 14:29
수정 아이콘
잘 짚으셨네요. 오마쥬이자 모티브가 맞습니다.
Neanderthal
17/09/29 13:36
수정 아이콘
신춘문예 당선작 읽는 기분이네요...
17/09/29 13:4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거 초반부에 너무나도 강려크한 글이 나왔네요. ;)
유지애
17/09/29 14:08
수정 아이콘
너무 잘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강려크하네요
17/09/29 14:18
수정 아이콘
글퀄이... 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바보미
17/09/29 14:30
수정 아이콘
오우야 잘 읽었습니다
17/09/29 14:48
수정 아이콘
실화인줄 알았습니다.
17/09/29 15:09
수정 아이콘
실제로 실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연애왕스토킹
17/09/29 15:58
수정 아이콘
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요 강릉 출신이라 무심코 들어왔는데
빠나나
17/09/2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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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문단 첫 구절에서 김의 집에서 하루를 신세진다고 했는데, 바로 아버지가 일찍 출발하라고 종용하네요. 설정 오류인가요? 아님 다른 뜻이 있는건가요?
제랄드
17/09/2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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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 부분이 궁금
미나가 최고다!
17/09/29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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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오류가 아니고 해뜨는걸 보려 새벽에 길을 나서려고 하였는데 새벽에 자전거를 타기엔 위험하니 일찍 가는게 낫겠다고 조언해주신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무슨말이지 했네요.
17/09/29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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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게 맞습니다. 표현이 애매했나 봅니다. 대신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7/09/2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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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이 피지알의 존재이유죠 !
Quantum21
17/09/29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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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어... 아.... 아마추어가 아니신듯 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클릭했다가 한숨에 읽고 할 말을 잊었습니다.

언제적이더라.. 군복입고 낡은 거리 앞을 지날 때의..
이제는 잊고 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네요.
BibGourmand
17/09/30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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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년대 감성으로 새로 쓴 무진기행이랄까요. 글에도 놀랐습니다만, 여성분이시라는 것에서 두 번 놀라고 갑니다.
특히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로 시작해서 담배 사러 뛰어가는 장면하고 스물 여섯 일곱 운운하는 장면요. 사실 흔하다면 흔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조금은 찌질하고 약간은 주눅든 젊은 남성의 정확한 심리묘사가 여성작가님의 손끝에서 나왔을 줄은 생각 못 했습니다. 감사히 보고 갑니다.
17/09/30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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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고 삼등을 노리기로 했습니다 요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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