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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6/08/24 04:48:45 |
Name |
이치죠 호타루 |
Subject |
[일반] 바르바로사 작전 (6) - 남부 집단군 (3) |
이전 글 보기 [데이터 주의]
"전쟁에 있어 미흡하더라도 속전 속결로 싸우라는 말은 들어 봤어도, 교묘한 계략으로 오래 끌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 손자병법, 작전편
Previously on Barbarossa...
남부 집단군이 첫 일 주일 동안 얻은 전과는 북부 집단군의 그것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으나,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엄청난 피를 흘려야 했고, 여기에 교리와 제공권이라는 문제까지 곁들여져서 결국 소련군은 상당 부분 약체화될 수밖에 없던 운명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선은 계속해서 뒤로 밀려가기 시작했고, 여러 전선에서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의 돌파(Breakthrough)가 발생함으로써 격렬한 전투 끝에 소련군은 영토를 내주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공격군이 수비군보다 손실이 크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부코비나와 베사라비아를 루마니아가 되찾았고, 전열을 한 번 가다듬은 독일군은 계속해서 적의 방어선 돌파 - 급속한 기동으로 적의 부대 포위 시도라는 공식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측면 방어를 죄다 제6군에 맡겨버린 제1기갑집단군이 키예프를 치는 척하다 핸들을 꺾고 드네프르 강을 따라 급속하게 기동했고, 여기에 예비대로 써먹어야 할 병력을 무리한 반격 작전에 투입했다가 잃어버린 남서부 방면군 사령관 부됸니의 실책과 무의미한 현지사수 후퇴불가 명령을 내리던 스탈린의 판단 미스가 겹쳐졌습니다. 결국 우만에서 소련군은 제6군, 제12군 전체와 제18군 일부가 포위 섬멸당하는 대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순손실된 병력만 무려 20만. 독일군 한 명이 죽거나 다칠 때 소련군은 열 명이 사로잡히거나 죽는 엄청난 패배였습니다. 이 때문에 방어선에 큰 구멍이 뚫리게 된 소련군은 9월로 접어들 때쯤 오데사를 제외하고는 전부 드네프르 강 너머로 밀려나야만 했습니다.
공성전
지엽적인 전투를 보면, 고작 도시 하나만 남겨놓은 상황에서 왜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고 그렇게 있느냐 생각하기 쉽습니다. 도시가 차지하는 공간은 매우 좁고, 보통 적군을 도시에 몰아넣은 경우 그 포위망은 물샐 틈이 없으며, 그보다 훨씬 넓은 공간을 다 차지해 놓고 마무리를 못 해서 쩔쩔매는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죠. 그러나 실은, 전투에서 가장 까다로운 게 도시 공략입니다. 이는 현대전 이전의 고대나 중세 시절에도 예외가 없었고, 바로 이 때문에 공성전(Siege)의 개념이 생겨난 것이죠. 오죽하면 손자병법 모공편에서 이리 길게 이야기하겠습니까. (출처 《도해 손자병법》, 노병천 저, p. 82 ~ 83)
故上兵伐謀, 其次伐交, 其次伐兵, 其下攻城. 攻城之法爲不得已. 修櫓轒轀, 具器械, 三月而後成, 距堙, 又三月而後已. 將不勝其忿, 而蟻附之, 殺士三分之一, 而城不拔者, 此攻之災也.
고(故)로 가장 뛰어난 병사(上兵)는 상대의 계략(謀)을 치며(伐), 그 다음(其次)은 상대의 동맹(交)을 치며(伐), 그 다음(其次)은 상대의 병사(兵)를 치며(伐), 최하(其下)가 성(城)을 치는(攻) 것이다. 성을 공격하는 것(攻城之法爲)은 부득이(不得已)한 경우에만 사용한다. 방패(櫓)와 병거(轒轀)를 수리(修)하고 기계(器械)를 갖추는(具) 데 석 달은 있어야 하며(三月而後成), 흙산을 쌓는(距堙) 데 또다시(又) 석 달이 걸린다(三月而後已). 장수(將)가 그(其) 마음(忿)을 이기지 못하여(不勝) 이에(而) 성벽을 기어오르게(蟻附) 하면(之) 병사(士)의 1/3을(三分之一) 죽이고(殺) 그럼에도(而) 성(城)을 빼앗지(拔者) 못하니(不), 이것(此)이 공격의(攻之) 재앙이다(災也).
쉽게 말하면, 이겁니다. "요새화된 적을 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고, 정 부득이하면 최대한 준비하고 싸울 것.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병사를 밀어넣는 건 미친 짓이야. 그러니까 공성전 하지 마. 진짜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아예 할 생각을 하덜 마."
독소전쟁에서는 공교롭게도 아예 도시를 못 빼앗은 경우, 도시를 빼앗기는 했으되 피해가 컸던 경우, 충분히 기다려서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경우가 모두 있습니다. 오데사 공방전이 어느 쪽에 속할지는 천천히 이야기를 보시면서 직접 느끼시는 게 좋겠군요.
오데사 공방전
우선 정치적인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왜 굳이 정치 이야기를 하냐면, 전쟁에는 항상 정치가 관여하기 때문이죠. 전쟁 자체가 정치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라는 건 국제정세라는 분야에서도 예외없이 적용되죠. 히틀러는 루마니아군 총사령관인 이온 안토네스쿠(Ion Antonescu)에게 편지로, 부크 강 서안의 영토는 죄다 루마니아에게 넘겨 주기로 약조한 바 있었습니다. 부크 강은 현재의 우크라이나 중서부를 흐르는 강인데, 가뜩이나 영토 회복을 위해 이를 갈고 있었지만 딱히 소련에게 깽판칠 힘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독일군 편에 끼여든 루마니아에게 있어서 본전을 넘어서 더 많은 영토를 갖게 한다는 히틀러의 제안은 확실히 구미가 당겼을 겁니다. 이게 7월 27일의 일이었죠. 히틀러 입장에서는 동부의 적을 몽땅 밀어붙이기도 바쁜데 '코딱지만한' 오데사 같은 도시에 신경쓸 여력 따위는 당연히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 오데사의 적을 루마니아 손에 맡긴 거죠. 그래서 이번 전투의 주공도 루마니아군이 담당하게 됩니다. 루마니아는 핀란드와는 달리, 영토를 되찾은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히틀러의 공수표가 먹힌 셈이죠.
문제는 이 오데사가... 아 글쎄, 루마니아군이 아니라 독일군이 와도 점령하기 빡센 곳이었다는 겁니다.
이전 글에서 오데사라는 도시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 설명해 드렸으니 패스하고, 오데사의 방어 태세를 점검해 보자면, 일단 오데사는 탈린과 비슷하게, 아니 탈린보다도 더 까다로운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도시의 25 ~ 30 km 밖에서 응전할 수 있는 약 80 km 길이의, 최외곽 방어선이 있었고, 그 안쪽으로 도시의 6 ~ 8 km 밖에서 응전할 수 있는 30 km 길이의 방어선이 있었으며, 마지막 방어선은 오데사 그 자체였습니다. 여기에 소련군 흑해 함대의 지원포격이 있기 때문에 해안선을 차단하는 것은 흑해 함대를 아예 박살내거나 방어선을 밀어넣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 이래저래 골치가 아픈 문제였던 셈이죠.
다만 그렇다고 난공불락 수준까지는 아니었는 것이, 무엇보다 소련군 자체의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본래 소련군 사단 병력은 7월 10일에 스타브카 예하 3개 방면군을 창설하기 이전에 정원이 1만 4천 5백 명이었는데(출처 《독소전쟁사》 p. 98),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서 아주 심각한 수준으로 약화되어서 공방전 개시 당시 초기 병력이 3만 4천 5백 명에 불과했다는 거죠. 제9군의 전부가 아니더라도, 영문 위키백과에 따르면 최소 4개 사단(제25소총사단, 제95소총사단, 제421소총사단, 제2기병사단)이 오데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사단 정원은 적어도 5만 8천 명이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60% 가량이라면, 전투원 손실이 심각한 상태라는 이야기죠.
이런 문제 때문에 - 아무리 방어선이 훌륭해도 인력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으니 - 점진적으로 루마니아 제4군은 방어선을 조금씩 잠식해 가면서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습니다. 이게 8월 10일에 공격이 시작되었고, 루마니아 공군의 집중된 폭격과 흑해 함대를 향한 견제로 인해 격렬한 저항과 반격에도 불구하고 약 2주 후인 8월 22일에는 오데사 외곽의 많은 호수(즉, 소련군이 자연 방어선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선) 안쪽으로 전선을 좁힐 수 있었죠. 이 과정에서 루마니아의 함선 두 척이 소련군의 구축함을 상대로 어뢰를 쏘아서 파손시킨 사례가 발생했는데요, 루마니아가 거의 해군이 없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드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죠.
전투 자체는 이러한 양상의 반복이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의 몰아넣기 시도 -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과 반격 - 차츰차츰 방어선은 안쪽으로 밀리는 그런 양상이었죠. 이 과정에서 루마니아군의 손실도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루마니아군의 도움 요청이 있었는지 8월 28일에는 독일군 소속 10개의 포병대대가 지원 사격을 퍼부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까지는 8월 22일까지의 성과와 비교해보았을 때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이에 관해서 히틀러와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루마니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나 쓰이던 참호전 방식의 공격을 고수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죠. 그런 방식으로는 고작 몇 km를 나가는 것조차 수만 명의 목숨이 희생되면 큰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판이었으니, 독일군 사령부가 얼마나 어이없고 짜증이 났을지 알 만하죠.
급기야 이온 안토네스쿠가 독일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아무리 루마니아 공군이 좀 성공적으로 활약했기로소니 루마니아 공군은 애초에 그 자체가 약체였고, 전투도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판이라 병사들이 모두 지쳤으며, 소련군은 루마니아의 항공지원을 그런대로 몸으로 버텨 가면서 크림 반도에서 계속해서 병력을 수송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래저래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했죠. 얼마나 병사들이 지쳤는지 공격을 주도하던 니콜라에 치우페르커(Nicolae Ciupercă) 루마니아 제4군 사령관이 상부에 재편성을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비록 실패로 끝났습니다만) 소련군에 의한 루마니아군 포위 섬멸 시도가 벌어지기도 할 정도였죠. 독일군 포병이고 루마니아군이고 탄약이 바닥날 정도로 최대한의 공격을 퍼부어댄 끝에 드디어 시가전에 돌입합니다. 그나마도 파르티잔이 카타콤 - 지하 터널을 말합니다 - 을 통해서 저항하고 있었죠.
이렇게 잘 싸우던 소련군이었는데, 아무래도 포위 섬멸의 위협이 크기는 컸는지 스타브카에서는 결국 오데사에서 병력을 물리기로 작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 및 시민들 35만 명이 철수에 성공하는데... 거 왜 6.25 전쟁 당시의 흥남 철수라고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빼돌린 병력과 시민이 20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그보다도 규모가 큰, 그리고 성공했던 철수 작전이었던 셈입니다.
결국 오데사는 루마니아군 손에 떨어집니다. 10월 16일에서야 말이죠. 공방전 개시가 8월 8일이었으니 두 달 하고도 8일 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적을 섬멸하지도 못하고 제 발로 물러선 적의 땅을 얻는 데 그친 것입니다.
죽어라 공격해서 간신히 오데사를 점령했지만 루마니아군은 그 과정에서 얻어맞을 것은 죄다 얻어맞았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피로스의 승리일 따름이었죠. 당장 초기 병력이 루마니아군 16만 대 소련군 3만 5천 가량, 총 동원 병력이 루마니아군 34만 명 대 소련군 약 12만 명(육로가 아닌 이상 당연히 수송에는 장애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인 상황에서 루마니아군의 손실이 9만 명을 넘어가는 동안 소련군의 손실은 아무리 많이 쳐 줘도 6만을 넘지 못했습니다. 공격측이 수비측 병력의 세 배 가량 되는데 손실이 공격측이 1.5배 가량 된, 그야말로 피를 잔뜩 뿌린 끝에 딱히 적의 섬멸이라던지 하는 건 이루지도 못하고 간신히 도시만 꼴랑 점령한 승리였으니 이쯤되면 사실상 패배라고 할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참고로 개전 전 1939년 독일 인구는 8천만이었는데, 루마니아 인구는 2천만. 가뜩이나 독일군도 인력 부족에 시달리던 판이었는데 루마니아군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상황이었죠. 근데 여기에 외려 수비군보다 더한 손실을, 그것도 9만 명이 넘는 군사를 잃었다는 것은...
이런 꼴이 났으니 루마니아군에서는 당연히 계속되는 참전을 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이 오갈 정도였습니다만, 이온 안토네스쿠가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참전 안 하면 부코비나고 베사라비아고 다 독일에게 내줘야 할 판이었으니까요. 애초에 독일에 얹혀서 전쟁한 건데, 독일을 상대로 붙을 힘이 있었겠습니까? 자기들이 독자적으로 소련군과 싸울 수 없다는 건 오데사 전투로 증명되고도 남았구요.
손자병법에서 "포위하려면 상대 병력의 열 배는 있어야 하고, 일방적인 공격을 하려면 다섯 배는 있어야 하며, 두 배 많으면 적절히 분할해서 운용하며, 수가 같으면 능력껏 싸우고, 수가 적을 때에는 능히 지킬 수 있으되 만일 지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교전을 피한다"라고 되어 있는데(《도해 손자병법》 p. 85), 이 문구를 제대로 따른 것은 루마니아군이 아닌 오히려 소련군이었던 셈이죠. 물론 소련군 사령부가 손자병법을 읽었을 리는 없었겠지만.
영웅 저격수
그리고 이 전투에서 활약한 유명한 스나이퍼가 있는데, 바로 우크라이나 출신의 류드밀라 미하일리비나 파블리첸코(Lyudmila Mykhailivna Pavlichenko, Людмила Михайловна Павличенко)였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 스나이퍼였는데, 킬마크 15위이자 전세계에서 가장 적을 많이 저격한 여성 스나이퍼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별명이 Lady Death, 즉 죽음의 여인. 놀랍게도 오데사 공방전 당시의 그녀의 나이는 겨우 만 25세였습니다. 제25소총사단 소속으로 복무하던 그녀는, 더욱 놀랍게도 간호원으로의 복무제의를 받았으나 그것을 거절한 여인이었습니다. 본인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 당시 여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군대에 복무했다"고 밝힌 바도 있죠. 이 오데사에서만 무려 187명을 사살한 그녀는 이후에 세바스토폴 공방전에도 참여해서 122명을 더 사살하여, 총 309명의 적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립니다. 박격포의 포격으로 부상을 입자 전선에서 물러난 그녀는 이후에 소련 시민으로서는 처음으로 백악관에 초청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여담인데, 사람 생각하는 게 다 비슷했던 모양인지, 일부 기레기들 클라스 어디 안 갔던 모양입니다. 질문인지 뭔지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는군요. "미국에서는 그렇게 긴 치마 안 입어요. 그리고 유니폼이 사람을 너무 뚱뚱하게 보이게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모독(질문의 내용이 저열했던 점이나, 대놓고 소련 시민을 무시한 것, 전투 중인 동맹국 내지는 자국의 병사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한가해빠진 내용 등등, 이런 질문은 최전선에서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싸워 왔던 그녀에게 있어서 모독이라는 표현이 전혀 지나치치 않는 것이었습니다)을 감수해 가면서 시카고에 도착해서 한 연설에서 그녀는 지금까지 받은 모독의 배는 되는 당찬 표현으로 되갚아주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는 스물다섯 되었고 309명의 적을 사살했습니다. 신사분들, 제 뒤에서 너무 오래 숨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참으로 기개있는 당찬 여인다운 발언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이후에 소령 계급으로 후방에서 저격수들을 양성하는 역할을 종전까지 맡았고, 이후로는 역사학자의 길을 걷습니다. 이 글을 빌어 파블리첸코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러한 영웅과 더불어 끝까지 루마니아군을 상대로 선전에 선전을 거듭했던 오데사는 전승기념 20주년을 맞아 선정된 여섯 영웅 도시(Hero City, Города-герои) 중 하나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마지막으로 오데사가 루마니아군에 떨어진 10월 16일 이후에 대학살이 일어나는데, 루마니아군이 어지간히 눈이 뒤집히긴 뒤집혔나 봅니다. 수많은 유대 인들은 물론이고 일부 루마니아 인들까지(!) 살해당하면서 합쳐서 무려 10만에 달하는 - 일부 자료에서는 13만에 달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 대학살이 벌어졌고, 이게 전후에 당시 루마니아군 사령관이었던 이온 안토네스쿠에게 직통으로 문제가 되어서 그를 사형대로 올려놓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키예프 포위전에 대해서는 전황도, 전투 전 상황, 전투 결과, 이후의 파급력, 총평 등등 이것저것 쓸 게 많아서(쉽게 말해 각 잡고 써야 할 판이라는 겁니다), 내일 심야 과외 끝나고 하루나 이틀 정도 시간 좀 들여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자료출처
《도해 손자병법》, 노병천 저 《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Odessa_(1941) - 오데사 공방전 https://en.wikipedia.org/wiki/Lyudmila_Pavlichenko - 저격수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https://ru.wikipedia.org/wiki/%D0%93%D0%BE%D1%80%D0%BE%D0%B4%D0%B0-%D0%B3%D0%B5%D1%80%D0%BE%D0%B8 - 영웅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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