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처음 봤던 날이 선명해. 그 익숙하던 공간이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 내 시야가 너만으로 채워지는 듯한 일. 네게선 빛이 났다. 그 순간 네가 삶에 들어올 것을 직감했어. 그건 인연이었다. 너무 깊어 차라리 없는 게 나았을 인연.
그 이후 5년, 단 하루도 널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꿈 같은 나날이었지. 그건 차라리 마법이었어. 마법처럼 악몽이 되어버렸지만. 함께 손을 잡고 걸을 때도, 공부를 핑계로 헤어졌을 때도, 다시 만남을 약속했을 때도, 시험이 끝나고 모든 것이 기만이었음을 알았을 때도, 편지를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이와 함께 걷는 널 봤을 때도, 그런 네게 떠올리기도 싫은 말들을 들었을 때도, 본인은 남자의 조건을 보고 난 조건이 안 좋았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도, 후에 널 다시 찾아갔을 때도, 네가 다시 날 지독하게 속였을 때도, 어제 사랑을 말하던 자리에서 경찰이 날 찾을 때도, 마주친 네게 분노를 쏟아낼 때도, 왜 그랬냐는 물음에 네가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도망칠 때도, 매일을 취해 연명할 때도, 약에 기대 생을 유지할 때도, 가만히 누워 가능한 죽음의 가짓수를 세던 때도, 빚을 피해 집을 팔 때도, 두 번의 학사경고를 맞을 때도, 병신이 된 나를 견디다 못해 선배도, 친구도, 후배도 날 떠날 때도, 이름 모를 누군가와 살을 섞을 때도, 애인의 침대 위에서도,
너를 생각하는 건 일어나 밥을 먹는듯한 일상
‘망가진 날 믿을 수가 없어 갈피를 못 잡았던’ 시절. 삶을 살긴커녕 살아내기조차 힘들어 부유하던 때. 죽음의 의지조차 잃고 떠돌았다. 무너진 내 세상을 건사해야 했지. 20대 중반 가장 중요한 시기를 그렇게 날렸으니. 모든 네 흔적을 지우고, 소식조차 듣지 않으며 버텨왔다. 이전의 내 모습을 찾는 데 2년쯤 걸린 거 같아. 사실 ‘이전의 모습’은 이제 없지. 사람의 본성을 바꾸는 건 경험이라던가. 본성이 바뀌었어. 나를 의심하고, 세상을 냉소하고, 사람을 믿지 않게 됐지. 약은 날 유물론자로 만들었어. 사람이 참 별거 없지. 작은 알약에 슬픔도 기쁨도 잃어버리니까. 그렇게 감정을 수비하며 나를 다시 조립해나갔다. 우습지, 사랑을 거두니 여자가 꼬였어. 믿음을 버리니 상처도 없었고. 참 좋은 여자들을 많이 만났다. 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 가진 것 하나 없는 내게 애정을 주던 이들. 그들에게 자존을 취하며 더 완전한 나를 향해 갔지. 아이러니하게도 연애상담의 현자가 되었어. 매일 같이 바닥을 확인하다 보니 이제 사람 본성이 보인달까. 난 단단해진 지금의 내 모습이 제법 맘에 들어. 직업도 돈도 미래도 없는 취준생 나부랭이지만 뭐 어때, 그 어디라도 네가 처박았던 그 시궁창보단 나은데.
이건 삶을 긍정하기 위한 나만의 변증.
‘사랑을 잃은 자 다시 사랑을 꿈꾸고, 언어를 잃은 자 다시 언어를 꿈꿀 뿐’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이쯤 되니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그토록 사랑한 사람이 그 맑은 눈으로 날 두 번이나 속여냈는데 다시 누굴 믿을 수 있을까. 적당히 만나고 적당히 도망친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면 참 서글프지. 사랑 받지 못하고 자라 꿈이 없던 내겐 네가 꿈이었다. 네가 꿈꾸게 만들던 스물여덟은 이런 게 아니었어. 그래서 내 생은 이미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망가진 날 고쳐 끌고 나갔지만 상흔은 그대로니까. 완전한 사랑을 꿈꾸었으나 내 사랑은 이미 끝났으니까. 그렇게 지나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고통스럽기만 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으니까.
사실 며칠 전 네 사진을 봤어. 마지막으로 널 본 지 3년이 지났으니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지. 교만이었다. 순간 심장이 내려앉고 피가 식는 그 느낌. 길에서 널 닮은 이를 보기만 해도 버티질 못하는 주제에 무슨 깡이었을까. 난 쓸데없는 걸 참 잘 기억해. 그날 이후 공감각이 생겼다. 허공에 네 얼굴이 떠있어. 묻어놨던 기억들이 하나하나 떠오르지, 그때의 공기와 대화와 표정과 감정이. 하루아침에 멀쩡하던 일상이 그 지옥으로 돌아갔어. 그렇게 며칠을 술로 보냈으니 이젠 돌아가야지. 다시 생을 놓기엔 좋은 때가 아니니까. 그래서 한참은 지나버린 연애에 편지를 쓴다. 이렇게라도 감정을 배설하면 조금 나아질까 하고.
그때 그렸던 많은 시나리오를 다시 되뇌고 있어. 너와의 모든 가능성들. 아마 네가 연락하는 일은 없겠지. 세상 참 좁아. 우연히 만난, 널 깊게 알던 다른 이는 널 소시오패스로 묘사했다. 내 생각도 그래. 최소한의 공감능력이 있다면 내게 그럴 순 없었겠지. 넌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내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을 거야. 그냥 내가 미친놈이겠지. 뭐,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고. 네 삶은 대충 행복할 거야. 너 정도 예쁜 애는 흔치 않고, 화무십일홍이라지만 젊고 예쁜 여자의 삶은 화려하니까. 물론 추문은 끊이지 않겠지. 너와 헤어진 자들이 날 찾는다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 아니겠니.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생은 약간의 변주를 거쳐 반복되는 법. 넌 계속 그렇게 살아갈 거야. 혹여나 네가 날 찾아 미안하다고, 그때 내가 너무 나빴다고, 잘못했다고 울며 빈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지. 이미 너무 먼 길을 돌아와 버렸고,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 이젠 네 눈물 따위 믿을 수도 없고. 뭐, 네가 말하던 ‘조건’이 더 안 좋아지기도 했어. 차비가 없어 너의 집에서 두 시간 반 거리를 걸어왔던 그때보단 좀 낫긴 하지만, 서른이 넘기 전까지 내 빚이라도 다 갚아낼 수 있을까. 허무하지, 이런 몽상을 적어 내린다는 건.
‘그 여자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고 생각해봐. 불쌍하지 않냐?’
‘그래, 불쌍하네…… 근데…… 보고 싶다.’
첫 연애편지 또한 너를 위한 것이었지. 이건 아마 내 마지막 연애편지. 다시금 이토록 감정을 소모하는 일은 벌이지 않을 거니까. 나도 참 병신이지, 굳이 이 기억을 들추며 바보 같은 웃음을 짓기도 해. 그때 느꼈던 행복의 편린이 떠올라서. 너와 함께한 시간은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너무 행복해 모든 고민이 사라질 정도로. 그 몇 배는 되는 지옥에 처박혔음에도 ‘행복’이란 수사를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너를 사랑한 건 내 삶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 넝마가 된 채로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겠지. 그렇게 일상처럼 너를 떠올리며 기도한다. 네 삶이 불행하길. 내가 겪었던 불행의 절반이라도 불행하길. 잘 지내지 마라.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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