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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11/07 15:04:16
Name 글자밥 청춘
Subject [일반] 148, 요정들의 버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다. 대한민국은 지구에서 전교 15등 정도라고 얼핏 들었으니, 아마 우주에서도 15등 정도가 아닐까 싶다. 지구는 우주의 명문사학쯤 될걸? 하고 술기운에 헤롱거리는 혓바닥을 겨우 파닥인다. 그렇군.. 서울은 그런 대한민국의 1등 도시네. 하고 남이 들으면 얘들은 정신이 반쯤 나간게 아닌가 싶을 이야기를 가지고 새 장난감 앞에 쭈그려 앉은 아이들마냥 키득댄다. 서울, 대한민국의 수도. 메트로폴리스. 거대 도시. 중심도시와 위성도시.. 주변부와 중심.. 그는 몇 년전 대학교의 수업이 떠오른다. 수업 내용보다는, 교수님의 반쯤 벗겨진 머리가 먼저 떠오른다. 아마 지금은 다 벗겨지셨을거야. 그럼 교수님도 우주에서 15등 정도 아닐까..? 뭘? 자라나라 머리머리. 자라나라 머리머리!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가 끝나고 터덜터덜 버스를 타러 나왔다. 해장국집이 눈 앞에서 밝은 불을 켜고 꼬시는 것이 옛날 청량리 사창가를 지나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 강렬한 유혹에 한 번도 넘어가지 못했던 나는, 아무도 없는 해장국집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귤과 전을 뜯어먹으며 수다떠는 식당 노동자들의 평화를 탐닉하러 문을 밀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야들야들한 등뼈 고기를 쏙쏙 발라내서 와사비장에 찰싹 적신 뒤, 입에서 오물오물 굴리고는 얼큰하고 달달한 국물에 후추를 촥 뿌려 입에 쑤욱 넣는...침이 꼴깍하고 후두가 위 아래로 미끄럼을 탄다. 새벽 4시 20분, 그렇게 해장국과의 멋진 만남을 상상하는 내 앞에 버스가 온다. 148. 수유리에서 방배동까지.


4시 반쯤 시작하는 첫 차들은 의외로 꽤 많은 사람들을 태운다. 대체로 버스의 좌석 중에 2인석은 한 명씩 채워놓고, 튀어오른 맨 뒷자석은 비었지만 혼자 앉는 편안한 곳은 꽉 찬.. 그러나 148은 다르다. 148은 4시 반에도 가득이다. 어릴적 집에 있던 콩나물 기르는 기계가 생각난다. 홈쇼핑에서는 연신 물만 주면 멋지게 자라나는 콩나물들을 보여줬고, 그 때 집에서 기르는 콩나물은 어머니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아이템이었는지 우리집에도 밥솥 옆 자리를 차지했던 콩나물 키우는 기계. 실제로 콩나물 콩을 넣고 물을 주면 콩나물이 빽빽하게 자랐지만, 어머니께서는 콩나물들이 비리비리 시들시들 하다며 빽빽하게 찬 콩나물들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물만 주고도 저렇게 잘 살아남은 애들을... 그렇게 볼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어릴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리 없다. 빨리 밥먹고 축구하러 나갈생각이나 했겠지. 아침 첫 차의 148은 바로 그 콩나물들을 실어 나른다. 던져만 놨더니 살아남은 비루하고 수척한 사람들. 세월의 모진 풍파들에 쓰러지지 않고 결국에는 살아남은 시들시들한 사람들. 그들을 비루하고, 수척하고, 시들시들하다고 이야기 하는게 어떤....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들을.. 평소처럼 위대한 생존자, 영광스러운 노동자, 사회의 건강하고 활기찬 한 축이라고 하기에는 그것이야말로 기만이라는 생각도 든다. 보통 사람은 대부분 시들하지도 못하니까... 아니다. 살아남은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시들하지는 않을꺼야. 하고 나이브한 마음이 되어 버스카드를 찍는다. 그러나 결국 그 콩나물시루 사이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노라면, 귿쎄. 시들시들한건 시들시들한 것이다..



첫 차의 버스 창문은 누가 새까맣게 칠하기라도 했는지 바깥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버스는 멈췄다 서기를 반복하고, 창 밖으로는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탄다. 도시 어딘가에 숨죽이고 살던 소인족이나 혹은 요정같이..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148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 그들은 또 하나의 사람이 된다. 그렇게 버스는 터덜터덜 서울이라는 도시를 위 아래로 가로지른다. 수유리에서 방배동까지. 북단에서 남단까지. 버스 안에는 등산복, 패딩, 츄리닝.. 스카프.. 짙은 화장.. 백발.. 주름진 손.. 파마한 단발머리와..(펌이 아니라 파마이다) 마스크.. 속도방지턱에 흔들려 누군가 발이라도 밟을 새면 죽일것처럼 노려보는 악에 찬 눈빛과.. 쭈그러진 얼굴.. 듬성한 머리..대체로 그렇다. 말하자면, 나이가 꽉 차다 못해 넘쳐버린.. 늙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도시의 요정은 늙수그레하다.. 고 지구를 연구주제로 잡은 우주의 대학원생이라면 그렇게 자신의 논문을 쓰지 않을까. 모든 동화들의 요정들이 늙수그레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않는다면야.. 그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술에 취한 채 148 버스를 타는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피로는 쌓여있고, 자리에도 앉고싶지만 이 버스안에서 나는 가장 쌩쌩한 젊은이니까. 결국 한시간 동안 자리에 앉는 일은 언감생심 기대할 수도 없다. 가끔 몸을 밀치고 치면서 타고 내리는 요정들에게는 미운 시선도 날린다. 그러다보면 나는 이 요정들이 조금, 싫어진다. 아.. 인간은. 어쩌면 이리도 지독한지. 고작해야 손잡이를 잡은 손에 좀 걸리적 댔다는 걸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등을 좀 밀었다는 걸로, 발을 좀 밟고 지나갔다는 걸로, 의자에.. 앉아있다는 걸로 싫어진다는 것은.. 너무 지독하다. 악취가..나는 생각이다. 맨날 노동자가 어쩌니 민중이 어쩌니 해도 결국은 타인일 뿐이라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진다.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사탄이 머리속을 헤집어 놓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키 작은 할머니가 창문을 살짝 열어 들어온 찬 바람을 콧등에 쐬는 것 만으로도 그런 기분은 금세 사라진다. 사탄을 물리치는 것은 십자가나 기도보다는 속을 시원하게 해 주는 찬바람이다.



북에서 남으로 한강을 넘어가는 148의 버스는 몇 번의 토악질로 요정들을 쏟아낸다. 압구정 현대아파트에서, 압구정역 사거리에서, 신사동 고갯길에서, 신반포 자이아파트에서. 그 많은 요정들은 네온사인이 막 꺼진 칠흑같은 어둠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져간다. 하늘까지 솟은 아파트에는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고, 거대한 건물들은 모두 죽어있다. 요정들은 이제 재빠른 손놀림으로 능숙하게 도시에게 삶을 불어넣는다. 불을 켜고, 청소를 하고, 입구를 지키며.. 그렇게 서울의 한 쪽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며 요정이 되고, 또 요정이 되어 일을 시작한다. 미화, 경비, 도우미로 이뤄진 노동자들... 딱 봐도 나이가 환갑은 넘었을 도시의 요정들.. 은퇴는 대체 언제쯤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요정들의 춤사위가 서울을 깨운다. 그렇게 고속터미널을 지나고서야, 148은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텅 빈 차량이 되어 마지막 남은 사람들, 이를테면 논현이나 압구정, 신사동에서 요정들 대신 태운 술이 취해 멍한.. 동태눈 같은 눈깔을 한, 아직까지 요정이 되기에는 이른 젊은이들 몇을 태운채 방배동으로의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새벽같이 일을 하러 떠나는 숭고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집에 오는 것은 그래서 썩 달갑지 않다. 방금까지도 진보가 뭐니, 노동이 뭐니 하며 술잔을 앞에두고 뜨거운 숨을 토하던 사람에게 148은 그야말로 기만과 위선을 마주하는.. 염라대왕 앞에 나체로 선 기분이다. 자네의 몸뚱이는... 위선적이군. 염라대왕은 발끝에서 머리까지를 쓰윽 훑으며 그리할 것이다. 겨우 방배동에서 휘청거리며 내리고 나면, 요정들은 이미 온데간데 없다는 생각에 겨우 숨을 몰아쉰다. 술냄새가 날까 습습-후후, 습습-후후 하며 조그만 숨소리로 참은 한 시간은 길고도 괴로운 시간이었다. 새벽일을 하는 노동자 요정계급을 생각하며 그는 일 하는 것이 과연 숭고한 것일까, 꿈이라는건 뭘까. 마치 저 요정들은.. 일하는게 꿈이라도 된 사람들 처럼 새벽 4시 반의 버스를 타야하는게 서울인가. 서울에도 서울 안으로, 북에서 남으로. 그렇게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철새들처럼 쉼 없이 움직여야 하는 우리들은.. 내일 일하기 위해 오늘을 일하는 사람들의 삶이란..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유. 하고 순박하게 웃기에는,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기 보다는 내일 일하기 위해 오늘 일하는.. 일종의 모순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오늘 일하고 내일도 일하지만 모레정도는 일을 안해도 되는.. 그래서 환갑이 넘은 늙은 요정들이 더 이상 우주의 대학원생에게 '지구의 우등생들은.. 죽을때까지는 일을 놓을 수 없는 일벌레들이다' 같이 기록당하지 않는 세상은 올 것인가. 하고 마르크스를 떠올린다. 그들의 이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재생산은 어디에 있는가. 일 하기 위해 사는 삶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꿈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들대신 주어져야할 그들의 이윤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오늘도 온갖 뉴스에서는 취업난과 비정규직과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과 늙어도 늙어도 늙어도 은퇴할 수 없고, 아니 이제는 요정이 될 수 조차 없는 인간 군상들을 팔아먹지만.. 누구도, 누구도 이 요정들을 알아채지는 못한 채로.. 마르크스는 요정들에게 너무.. 너무나 멀다. 서울은 오늘도 서울일 뿐이고, 148은 148의 일을 할 뿐이다.



수유리에서 방배동까지. 요정을 실어나르는 148 버스. 가난한 자는 부유한 자들의 품으로, 부유한 자들의 때를 벗기러. 일해서 먹고사는 것이 신성하다는 환상위에서 일 하지 않아도 먹고살 사람들의 뒤치닥거리를 위해서. 요정들은 오늘도 부리나케 손을 움직인다. 그는 술기운에 지쳐 잠이든다. 아마 그가 잠이 든 동안에도 요정들은 도시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마르크스를 떠들고, 진보를 떠들고, 좌파를 떠들며 꼴딱이는 술잔 옆에도.. 어쩌면 그 요정들이 숨어 일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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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무무
15/11/07 15:46
수정 아이콘
148 진짜 많이 탔는데
학교 졸업하고 나니 탈 일이 없어진......그래도 배차 간격 짧은 건 꽤 좋았던 기억이네요
아케미
15/11/07 15:5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고맙습니다.
15/11/07 17:31
수정 아이콘
좋습니다.
15/11/07 18:25
수정 아이콘
추천합니다
채수빈
15/11/07 20:33
수정 아이콘
148 저도 진짜 많이 탔었는데...
15/11/07 22:51
수정 아이콘
노회찬 전 의원의 6411번 버스 이야기가 담긴 연설이 생각나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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