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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11/07 04:33:25
Name 이치죠 호타루
Subject [일반] 불행했던 대통령 - 1865년 미국 대통령 승계
호타루입니다.



약 한 달 정도 댓글이나 달면서 눈팅을 했던 것 같네요. 그간 PGR도 어지간히 많이 불타올랐던 것 같습니다. 사건이 없는 나날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니... 그런 와중에 한가로이 역사를 논한다는 게 좀 그렇긴 합니다만, 그냥 가볍게 한 번 써 보겠습니다. 물론, 내용은 전혀 가벼운 게 아니지만요. 별개로 요즘 글을 쓰면서 비문이 이전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나는 바람에 개인적으로 좀 골치입니다. 제가 재검 삼검은 하겠지만 그래도 놓치는 게 좀 많을 텐데, 문맥으로 파악해서 읽어 주셨으면 하네요.

오늘은 링컨이 죽은 직후의 미국 대통령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아마 미국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링컨이라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죠.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리더십의 표본. 비참한 운명의 구렁텅이에서 흑인들을 구원해 낸 미국의 성자. 그리고 그에 걸맞는(?) 비극적인 암살까지. 정치 분야에서, 미국의 위인들을 논하면서 링컨이라는 이름을 빼먹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조사하는 단체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순위가 엎치락뒤치락하지만 보통 탑 3을 꼽을 때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그리고 16대 대통령인 바로 이 링컨을 세 손가락 안에 꼽고는 합니다. 여기에 조사에 따라 가끔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과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끼어드는 정도죠.

헌데 기막히게도... 아니, 어쩌면 그렇게 위대한 전임자를 두었기 때문에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링컨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었는고 하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누구지?" 하고 물어봅니다. 정확히 하면, 링컨의 인지도는 아주 크고, 매킨리 대통령은 들어본 사람은 들어본 정도고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한 번쯤은 들어본 사람이 많은 정도인데(여담입니다만 미드 빅뱅 이론 오프닝 컷씬들 중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팔을 들고 열광인지 환호인지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매쓰 싸이언쓰 히스또리 언래블링 더 미스떼리할 때쯤일 겁니다), 링컨이 사망한 연도가 1865년이고 매킨리가 대통령이 된 게 1896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1년. 그러니까 거진 30년 이상의 기간 동안을 "저때 대통령했던 사람이 도대체 누구야?"라고 물어보게 되는 상황인 거죠.

그 첫번째 대통령, 링컨이 죽은 직후 미국의 법에 따라 그대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사람이 바로 오늘 이야기할 앤드류 존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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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이전까지 - 앤드류 존슨은 누구인가

음, 정치적인 행보라던지 사상이라던지 이런 걸 다 떠나서, 저는 앤드류 존슨과 가장 가까운 정치인을 한 명 꼽고 싶군요.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입니다. 최고의 장점이건, 최악의 단점이건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꽤 닮았고 그래서 어쩌면 정치적으로 비슷한 길을 걸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렇게 종종 생각하고는 합니다. 읽으면서 한 번 비교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어이없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앤드류 존슨은 재봉사 출신이었습니다.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어떠한 공식적인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죠. 대체 어떻게 이런 촌구석의 재봉사가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는 정말 의외이기는 합니다. 하여간에 영문 위키피디아를 좀 따라 보자면, 어려서 견습 재봉사 노릇을 하면서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문자를 배웠다는군요. 그리고 테네시 주로 가서 결혼한 아내에게 수학과 글쓰는 법을 배우면서 그렇게 학문을 익혔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고학이었죠.

자신이 이사를 갔던 도시인 그린빌(Greenville)의 시 의원으로 정치 커리어를 시작해서, 하원의원을 거쳐 상원의원 자리까지 거머쥐는 거물이 되는 데 성공합니다. 보통 여러 책들에서는 그냥 앤드류 존슨이 어렸을 때는 그런 일이 있었다 뭐 그런 정도로 대충 어린 시절을 간단하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와중에서 앤드류 존슨을 옹호하는 책이건 비판하는 책이건 한 가지 짚고 넘어가는 게 있긴 합니다. 바로 말, 변론술에 뛰어났다는 점이었죠. 아마도 그 점이 앤드류 존슨을 거물급의 인물로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태어난 곳은 노스캐롤라이나였습니다만 이사를 갔던 주는 테네시였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기반은 테네시라고 해야 옳겠죠. 실제로 앤드류 존슨은 테네시 하원 의원, 테네시 상원 의원, 그리고 테네시 주지사를 모두 경험해 보게 됩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남북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어이없는 행동을 하는데... 이 때의 테네시 주는 미합중국에서 떨어져나간 미국 맹방(CSA,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에 가입했던 주 중 하나였습니다. 전쟁 이전에는 연방에 있었지만 전쟁이 터지자 탈퇴를 선언한 것이죠. 그런데 그 탈퇴를 선언한 주의 상원의원으로써 남북전쟁 기간 동안 의회에서 활동한 겁니다. 개인적으로 그는 자신에 대한 신념이 매우 확고한 인물이었나봅니다. 그 행동이 딱히 정치적으로 득이 될 것도 없었는데도 말이죠. 그렇다면 뭐 링컨이 수장으로 있는 공화당에 있었냐,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앤드류 존슨의 소속은 야당이며 핵심 인원 대다수가 미국 맹방에 가입해 버린 민주당이었습니다. 한 자리 해먹으려고 연방에 남아 있었다? 각 주에 둘밖에 없는 상원의원쯤 되면, 그리고 정말로 한 자리를 해먹을 심산이었다면, 그냥 미국 맹방으로 들어가버리는 편이 훨씬 나았습니다. 실제로 앤티텀 전투와 그 유명한 셔먼의 바다로의 진군까지 전황도 영 지지부진했구요. 게다가 테네시가 탈퇴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테네시는 노예제를 옹호하는 주라고 해석해야 하는데 그런 주의 사람들의 지지를 버려 가면서까지 연방에 남는다? 이건 득실을 따진다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행동이죠. 결국에는 "연방을 유지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신념이 그를 연방에서 떠나지 못하게 막았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저는 해석합니다. 뭐 많은 말이 있습니다만, 책에서 출처를 표시하지 않은 관계로 소개해도 되나 싶네요. 아무튼 두 개만 소개해 봅니다.

일단 출처가 분명한,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 1866년 5월 7일 연설 중에 했다고 하는 그의 말입니다.
"Honest conviction is my courage; the Constitution is my guide."
해석 - 정직한 신념이 나의 용기이고, 헌법이 나의 인도자입니다.
연방에서 탈퇴한다는 건 헌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그의 신념을 잘 설명해 주는 발언이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1860년에 그가 했다는 (〈위대한 대통령 끔찍한 대통령〉에 따르면) 명쾌한 발언입니다.
"탈퇴는 지옥행이다."

1862년에 링컨은 그를 테네시 주의 군정지사로 임명하기 위해서 육군 준장의 계급을 수여합니다. 그리고 군정지사로써 그는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해 주의 법을 뜯어고쳤고, 결과적으로 테네시 주는 탈퇴 주이면서 주의 법으로 노예제를 박살낸 굉장히 특이한 이력의 주가 되죠. 이런 행적으로 인해서인지 앤드류 존슨은 1864년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의 지명을 받아서 부통령 후보가 됩니다. 이건 미국 "러닝메이트" 역사상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의 당적이 달랐던 유일한 케이스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링컨의 선거는 좀더 까다로워졌죠.

아무튼 링컨이 선거에서 이기고, 부통령 취임식 때 긴장을 풀기 위해서 위스키를 마신다는 게 그만 너무 마셔버리는 바람에 취한 모습을 보이면서 술고래라는 비웃음을 받게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야 야당에서 물고 늘어지기 꽤나 좋은 구설수가 되겠습니다만 그 때는 전쟁중이라...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넘어가게 되죠.

사실 미국의 부통령이 뭐 그렇게까지 강력하냐,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애초에 유고시에 권한이 인계되는 일종의 얼굴마담에 불과한 자리인지라... 다만 그래도 얼굴마담은 얼굴마담이라서 그런지 의외로 부통령 자리를 놓고 벌이는 일화가 많기는 했습니다. 훗날 20대 대통령에 오르는 제임스 가필드의 경우 부패한 뉴욕의 공화당 일당인 로스코 콩클링 파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 각료 몇 자리 및 부통령직을 콩클링 파의 사람으로 채우기로 했다거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매킨리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선발되자 그걸 지켜보던 원로 공화당 상원의원인 시어도어의 정적 마크 한나(Mark Hanna)가 "이 양반들아, 이 카우보이 하나가 대통령직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 뭔가 께림칙하지 않느뇨?" 하고 일종의 예언적인 불평을 한다던가(애초에 부통령으로 시어도어를 지명했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권한이 좀 셌던 뉴욕 주지사 자리에서 시어도어가 공화당과는 좀 거리가 먼 개혁정책을 펼치자 그를 몰아내고 별 실권 없는 자리로, 일종의 표면만 승진에 사실상 좌천을 노리고 공화당에서 벌인 짓이었는데...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버렸죠. 그리고 그렇게 되자 던졌던 마크 한나의 말이 압권입니다. "보시오! 저 망할 놈의 카우보이가 미국의 대통령이라니!!!")... 아무튼 그래도 얼굴마담이라서(그리고 링컨은 분열된 나라를 합치기 위한 제스쳐의 하나로 써먹기 위해서) 존슨이 부통령으로 지명되었고 당선된 것이었죠. 다시 말하지만 별 실권이 없는 게 부통령이고, 자기 힘으로 당선됐겠다, 국민들 지원도 빵빵하겠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겠다, 별 일이 없는 한 대통령 링컨이 존슨을 내세우면서 "서로 당적이 다른 우리도 이렇게 힘을 합치고 있으니 너님들도 그만 싸우고 전쟁의 아픔에서 해방됩시다" 정도의 메시지를 내면서 링컨 자신이 구상하는 유화정책을 세우고 진행하는 데는 딱이었을 텐데...

그런데 그 별 일이 1865년에 실제로 일어나버린 겁니다.



대통령 재임기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앞서 언급했는데, 여기에서 분명한 차이는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힘으로 대통령직에 오른 사람이었고, 앤드류 존슨은 어쩌다 보니 대통령직에 오른 거죠.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후의 정치적인 행동이나 그 결과에서 저는 이 둘이 서로 닮은 점이 있지 않나, 그렇게 보는 겁니다. 이제부터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일단 앤드류 존슨은 당적은 달랐지만 전후에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링컨의 이상과 공명하고 있었습니다. 남부가 다시 연방의 손으로 들어왔을 때 재건정책을 펴서 남부를 일으켜세우기는 해야겠는데 그 방식을 어떻게 할 것이냐, 여기에 대해서 존슨은 "노예제 및 남부의 주가 미국 맹방에 빌려주었던 전쟁 빚을 포기하고, 연방에 충성하기만 하면 연방의 일원으로 받아주겠다"는, 총 들고 싸운 상대치고는 상당히 관대한 정책을 폅니다. 그러니까 나는 미국에 충성한다는 충성 서약 한 번이면 다시 미국의 시민이 된다는 대단히 관대한 조건이었던 거죠.

앞서 이야기했던 과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존슨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그래서 그 개인적으로 그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그는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귀족과 같은 남부 백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를 지켜본 미국 맹방의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는 말하기를 "자신의 출신성분과 신념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부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칭찬과 비난에도 무감각한 인물"이라고 존슨을 평합니다. 이 책에서는 존슨이 노동자 운동을 이끈 바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그게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여간 이러한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존슨이 남부의 백인들, 특히 흑인을 노예로 부려먹으면서 자기는 살찐 채로 정치판에 나서는, 심지어 자신의 강한 신념과는 정 반대로 헌법을 무시하고 미국 맹방에 소속되어서 총을 들고 싸웠던 그런 남부 귀족들을 매우 싫어했으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걸 무시하고 관대한 정책을 폈다는 거죠. 그렇게 안 할 수 있는 권한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러나 이런 행동은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큰 무리수였습니다. 일단 민주당 자체가 대부분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이라서 존슨의 정치 기반은 취약하다못해 아예 바다 위의 모래성 수준이었고, 더군다나 몇만도 아니고 몇십 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 전쟁으로 죽고 부상당했습니다. 양군 합쳐서 전사 및 전상(戰傷)의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만 20만 명이 넘어가는 참혹한 전쟁이었고, 그러니 승리한 북부에서 "우리가 할 일은 얼마 전까지 같이 식사했던 우리의 형제와 토끼 같은 자식놈들을 전쟁터에서 총 맞아 죽게 만든 이 나쁜 놈들을 벌주는 것이다"라고 이를 득득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만일 이 관대한 처분의 진행자가 링컨이었다면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라는 명분까지 있으니 (쉽지는 않았겠습니다만) 그래도 설득을 해 가면서 충분히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습니다만, 문제는 앤드류 존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도 않은(기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육군 준장의 신분으로 테네시 주에서 군정지사를 했던 경력이 있어서), 당적도 공화당이 아닌, 남부 출신의 대통령이었다는 거죠.

게다가 한 가지 사실이 더 발목을 잡는데, 유화책을 세운 것은 취지는 좋았습니다만 문제는 의도는 좋았는데 그게 흑인들의 인권 향상에는 영 도움이 안 되더라는 거였죠. 무슨 소리냐면, 유화책을 세운 것까지는 좋지만, 그건 바꿔서 말하면 차별대우를 한 번에 근절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정부의 유화책을 보면서 남부의 백인들은 정부가 조금이나마 우리 편, 즉 흑인은 백인과 동등하지 않다는 우리의 생각을 받아들이는구나 싶었을 것이고, 실제로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안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출처 〈이야기 미국사〉).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대통령편〉에서 이야기한, "백인 우월주의자라는 앤드류 존슨"은 바로 이런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해야겠습니다.

하여간 이상과 현실이 괴리가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은 없어서, 급진파들의 먹이감이 되기 딱 좋은 행동이었죠. 간단하게 말하면 이겁니다. "니가 그러고도 평등을 주장하는 미국의 대통령이냐." 정치적으로는 국민들이 급진파를 지지하고 또 급진파에게는 평등 사회 건설이라는 그럴듯한 명분까지 있는 상황에서 존슨이 이들과 대립각을 세운 것은 어마어마한 실책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죠.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정책의 방향이 옳았냐, 이것은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유화정책은 차후에 공화당이 정권을 거의 농단하다시피하면서 강경책으로 뒤바뀌었고, 강경책이던 유화책이던간에 남부를 통제할 만한 큰 임팩트는 남기지 못했으며, 어느 쪽이든 자체적인 결함(유화책은 앞서 이야기한 의식 변화의 지지부진, 강경책은 KKK단으로 대표되는 백인들의 큰 반발)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시간이 너무 짧았던 탓에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죠. 방향이 옳았다고 하는 쪽이건 아니었다고 하는 쪽이건간에 결과적으로 남부에 대한 공화당의 군정은 실패했다고 보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대통령의 옹고집과 민주당에 대한 최악의 여론이 겹쳐서, 결국 1866년 선거에서 상원 42 : 12, 하원 143 : 49라는 어마어마한 대승을 공화당에 안겨줍니다. 당적이 민주당인 만큼 존슨도 선거연설 등을 하기는 했을 텐데(물론 직접적으로 개입한 건 아닐 테고 당 차원에서의 나아갈 방향 등을 홍보하는 선이었겠죠),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에서는 존슨의 그러한 행동이 도움은커녕 오히려 손해만 되는 방해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론은 강성 정도를 넘어서 아예 금강불괴 수준이었고, 그러니 급진파의 행동은 더더욱 큰 힘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철과 강철이 부딪히다

압도적인 승리를 얻은 공화당은 앤드류 존슨의 손발을 묶어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발동해도 강제로 법안을 통과시킬 화력이 있었던 거죠. 그렇게 통과된 법안이 몇 가지가 있는데, (이건 선거 전이긴 합니다만) 우선 1866년의 Freedmen's Bureau Bills, 일명 해방노예국(局)법이 있습니다. 해방노예국을 신설하여 남부의 흑인들에게 각종 권리를 제공함은 물론이고 나아가서 토지, 교육 및 권리를 지키기 위한 군사법원을 제공한다는 내용이었죠. 아마 문제가 되었던 게 군사법원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어느 책이나 위키피디아 등에서도 뭣 때문에 존슨이 이 법안을 반대했는지는 알려 주지 않고 있습니다), 여하간 대통령의 거부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고 이 법안이 통과됩니다. 〈위대한 대통령 끔찍한 대통령〉에서는 이 법안을 언급하면서, "고귀한 목적 뒤에 감춰진 이 법안의 이면에는 4백만 명에 달하는 해방노예들을 친유권자로 양성하기 위한 공화당의 시도가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에서는 그렇게 토지를 얻은 흑인들이 금융과 신용에서 발생한 당국 차원의 문제로 인해서 빚더미에 올라앉아버렸다고 지적하고 있죠. 이래저래 강경한 법안이었지만 별 효과는 없었던 재건 정책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흑인들에게 자유는 주었으되 주어진 자금은 형편없었고 적대적인 시선까지 있는 상황에서 니가 얻을 만치 얻었으니 알아서 잘 살아라 하는 꼴이 된 거죠. 더욱 골때리는 것은, 그렇게 자유를 외치던 공화당 측에서, 남부에서 다시 발호하는 인종 차별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들었느냐,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멀리 갈 것 없이 그랜트 행정부만 봐도 딱 나옵니다). 〈위대한 대통령 끔찍한 대통령〉에서 법안의 이면이 저런 것이었다고 할 만한 것이죠.

그 외에 몇 가지 법안이 더 있는데 재건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어지는 감이 없잖아 있는 관계로. 그냥 강경한 재건책, 징벌적인 재건정책을 공화당이 입안했고 존슨이 반대했으며 다수당인 공화당이 그걸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별로 좋은 평가를 못 받고 있는 것도 알아두시면 되겠구요. 효과가 없을 만도 한 것이 남부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건 그 때까지도 남부의 백인들이었는데 그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박살내기에만 열중한 데다가 KKK단의 발호까지 있었으니 제대로 성공할 리가요.

근데 여기까지는 그렇다치는데, 의회에서는 그 실패의 책임을 엉뚱하게 거부권까지 행사했던 대통령에게 돌려버립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저놈이 유화책인지 뭔지를 펴는 바람에 우리가 옳은 정책을 펼 시기를 놓쳤고 그 외 기타등등 이러쿵저러쿵해서 결국 그 때문에 남부에서 저 삐리리가 나는 거다, 그러니까 이건 모두 존슨의 탓이다!" 뭐 대략 이런 이야기들이 오갔을 겁니다. 원래 실패의 책임을 물으려고 하면 별 이유를 갖다대는 게 사람이니... 하여간 안 그래도 거부권 때문에 갈등이 심했던 대통령과 의회의 사이는 공직보장법(Tenure of Office Act)으로 인해 최악으로 치닫습니다.

이 공직보장법이라는 것이, 의회의 동의 없이는 각료를 해임할 수 없다는 내용이에요. 당연히 대통령의 거부권은 이미 무시당한 지 오래였고 이것도 거부권을 무시하고 통과됩니다. 먼 훗날에야 위헌판정을 받게 되기는 합니다만 그건 앤드류 존슨 사후의 일이었고... 딱 봐도, 대통령의 내각 조각권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거든요. 일 생기면 각료가 갈리는 게 순서인 우리 나라로서는 다소 이상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이, 앤드류 존슨은 민주당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화당원인 링컨의 러닝메이트였고, 링컨이 살아 있을 때 각료로 등용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공화당원이었죠. 게다가 그의 인사정책은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수위권을 다툴 정도로 역사가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분야인데, 그 말인즉슨 개개인의 면모가 대단히 뛰어났다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전쟁장관으로 있던 에드윈 스탠턴(E. Stanto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양반이, 그래도 군 통수권자는 대통령일진대 아예 의회에다가 충성서약을 해 버린 겁니다.

사실 스탠턴의 행동도 아주 이해가 불가능한 건 아닌 것이 일단 스탠턴 자신이 공화당원이었으니 존슨이 아니꼽게 보일 만도 했고, 결정적으로 스탠턴이 이런 짓을 저지를 만한 배경이 있었습니다. 공직보장법이 통과되기 전에 육군통솔법(Command of the Army Act)이라고 해서 육군의 명령은 육참총장에게서 나오며, 육참총장의 해임이나 교체는 상원의 동의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규정한 법안이 통과된 거죠. 딱 봐도 육참총장을 교체할 권한을 대통령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결과적으로 군 통수권이 의회로 넘어간 겁니다. 물론 이 법안도 거부권 행사를 무시하고 통과됩니다. 존슨의 거부권 행사는 그야말로 요식행위에 불과한 게 된 거죠.

어쨌든 스탠턴이 그런 배경을 믿고 의회에다가 충성 서약을 하니까 "통수권자는 나다 이 자식아!" 하면서 법을 무시하고 존슨이 스탠턴을 해임해 버립니다. 이게 바로 스탠턴 사건(Stanton Affair)이죠.

이전까지 안 그래도 벼랑 위의 얼음길을 걷는 듯했던 대통령과 의회의 사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폭발하고 맙니다. 의회는 대통령이 의회를 무시하고 대통령으로써의 품위를 잃었다면서(여기에 여러 가지 죄목(?)들이 추가됩니다.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책에 의하면 존슨이 했던 연설 등도 "연단에서 민중들을 선동했다"라는 죄목으로 끼어들어가게 되죠) 탄핵안을 발동합니다.

탄핵안이 가결되는 조건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의회의 2/3 이상의 동의를 얻을 것. 다시 말하지만 상원 42 : 12, 하원 143 : 49로 하원에서만 벌써 70% 이상, 상원은 아예 80%에 육박하는 의원 수를 확보하고 있던 공화당으로서는 탄핵안의 가결 정도는 너무나 쉬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원에서 하이패스로 통과하고 이제 마지막 상원에서의 표결만 남았죠. 1868년의 일입니다. 그렇게 탄핵이 되나... 싶었는데.

상원 표결 결과, 찬성 35 : 반대 19, 단 한 표 차이로 탄핵안이 부결됩니다.

공화당 쪽에 있던 온건파 인사들(공화당이라고 무조건 강경파는 아니었으니) 7명이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꿨는데, 이원복 교수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함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면 의회가 대통령의 발목을 사사건건 잡아버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존슨을 지지하지 않음에도 탄핵안은 찬성할 수 없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이 결과를 본 스탠턴이 스스로 육군장관직에서 사퇴하면서 스탠턴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이 역시 당대 만평에서 의회와 싸움질만 하는 대통령으로 그려졌던 것처럼 존슨 개인에게 있어서는 큰 실책이라 아니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부결되긴 했습니다만 안 그래도 나쁜 상황에서 대통령 개인이 자신의 고집만을 내세워서 의회와 각을 세우고 결국 그 자신의 대통령직까지 잃게 만들 뻔했던, 간단히 표현하면 경거망동이었죠. 몰리는 상황일수록 처신을 조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겁니다. 뭐 결과적으로 탄핵안이 부결되면서 나름대로 처신을 조심했을 때를 가정할 때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어간 것 같기는 합니다만... 하여간 이 사건으로 존슨이 리더십에 엄청난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했습니다. 당장 의회로부터 탄핵안이 올라간 것 자체가 존슨이 처음이었으니.

그런 불명예를 업고, 수정헌법 13조 노예를 금한다, 수정헌법 14조 모든 미국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에 서명하고 존슨은 한 많은 대통령의 임기를 마칩니다. 임기를 마친 7년 후에(1875년) 그는 테네시 주의 상원의원으로 다시 당선되어서 남부에 공화당이 저지른 일을 폭로할 기회를 갖게 되지만, 5개월 만에 급사하면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고 말죠.



총평

뜬금없지만... 군사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전쟁이라는 것에 있어서, 단 한 번의 전투로 나라가 망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있다면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박살났던 살수 전투 정도랄까요.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은 단 하나의 전투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건곤일척의 전투도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대개 많은 수의 전투를 통해서 승패의 균형추를 서서히 한 쪽으로 몰아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면, 전쟁은 결코 한타 싸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때로는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알아야 하고, 이득이 없으면 지키려고 들지 말아야 하며, 명분이든 실리든 어느 쪽으로도 이득이 없으면 공격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이게 전쟁에서의 금언 중 하나거든요. 그래서 이곳저곳에서의 전투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벌어지다가 그 전투 결과가 쌓이고 쌓이면서 그로 인한 실리가 최대가 되는 시점에서 바로 건곤일척의 승부처가 발생합니다. 그런 식으로 전쟁을 이해하는 것이 전투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되죠. 예컨대 독소전이 그렇습니다. 겉보기에는 스탈린그라드 한 방으로 끝난 것 같지만, 소련이 애초에 스탈린그라드까지 밀리지 않았거나,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좀더 빨리 가동했거나, 1942년 하계 공세에서 독일군이 남부가 아닌 모스크바를 집중적으로 노렸거나 했다면 스탈린그라드에서 건곤일척의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 때까지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인한 키예프 전투, 민스크 포위전, 스몰렌스크 포위전, 모스크바 공방전, 세바스토폴 공방전 등의 결과로 독일군이 우크라이나 일대를 점령하고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 갈 석유 자원의 확보를 위해 그 길목인 스탈린그라드를 공략했던 것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시작이고, 소련으로서도 전쟁을 계속할 자원을 지키고 반격의 실마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스탈린그라드를 절대 사수해야 했던 입장이기 때문에 건곤일척의 승부가 발생했던 것이지, 그냥 스탈린그라드에서 거하게 한 판 붙어보자 이렇게 해서 발생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건 한타 싸움"은 겉보기에는 그냥 막 일어나는 듯이 보여도 실은 그 때까지의 전투 결과와 전황이 백 퍼센트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죠.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느냐... 그건 정치와 군사가 이런 측면에서 매우 크게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 역시 한 방에 모든 것이 결정나는 시스템은 아닙니다. 간간히 승부를 걸어야 할 매우 큰 한 방(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등)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한 양자간의 공방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시스템입니다. 기브 앤 테이크로 물밑에서는 끝없이 협상을 벌이면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토론과 홍보와 공방이 이어지고 그 결과는 다음 전투, 나아가서 예정된 큰 싸움에 영향을 분명히 줍니다.

근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게 있어요. 군사적으로 모든 것을 지키려고 하면 박살나기 딱 알맞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폴란드가 그랬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상당 부분 작용하기는 했습니다만) 모든 영토를 지키려다가 독일군을 상대로 개활지에서 별다른 천연 요새도 없이 차례차례 폴란드 군이 각개 격파당했고(전사가들은 폴란드 군이 전방 배치한 병력을 빼서 비스와-오데르 강 쪽에 배치했으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 지적합니다), 결국 나라가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되죠. 스탈린 역시 후퇴불가 현지사수 명령을 초반에 남발하다가 몇백만 명의 병력 손실을 입고 나중에는 운전할 사람보다 전차가 더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까지 핀치에 몰렸고, 히틀러도 현지를 사수하겠답시고 버티다가 그대로 병력을 모조리 잃고 베를린까지 밀렸습니다(역시 정치적인 이유가 상당 부분 끼어 있습니다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하긴 너무 기니까 생략합시다).

묘하게도 정치가 바로 그렇습니다. 받을 게 있으면 줄 게 있죠. 명분을 내줬으면 실리를 챙겨가야 하는 법이고 실리를 내줬으면 명분이라도 얻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 식으로 정치는 진행됩니다. 근데 여기에 개인의 신념이 관여해서 아무리 그 개인의 신념이 옳다고 한들 아무것도 못 주겠다고 강하게 버티면 필연적으로 반발이 나오게 되죠. 자기가 강하면 상관없습니다. 근데 자기가 약하면 그때는 이야기가 심각해지죠.

예컨대 삼면이 포위되고 적 부대가 뒤쪽을 기습하리라는 첩보까지 오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부대를 뒤로 빼서 병력을 온존한 후에 기회를 봐서 카운터펀치를 먹일 생각을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군대이니 일단 닥치고 여기를 사수해야 한답시고 뻗딩기는 건 일본군의 자살특공대와 다를 바 없는 정신나간 짓이죠. 정치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자기가 강하면 상관없는데, 약할 때는 때로는 신념을 굽히고 구부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때나 신념을 세우면 칭찬은 들을 수 있을지언정 실리를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 제가 정치에 대해서 가진 생각입니다(이건 어느 정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또 헨리 키신저식 외교의 파워 게임 이론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인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비굴해지는 게 정치인이다. 아니, 정치인은 비굴해야 하고 비굴할 수밖에 없다.

단, 이건 정치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지, 정치인이 아닌 일반적인 사람에게 있어서는 절대 적용하면 안 될 원칙이기도 합니다. 모순 같지만 간단히 말하면 이겁니다. 개개인의 병사는 용맹하고 적을 만났을 때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군을 지휘하는 사람이라면 필요할 때는 적을 피해서 뒤로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작전지휘부에서 내리는 작전상 후퇴는 인정되지만 개인이 전투 중에 지가 무기를 놓고 도망가는 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모든 일반인이 비굴한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죠. 일반인은 용감하게 자신의 생각을 논해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가 혹은 당의 지도부가 "작전상 후퇴"를 재고하게 만드는 그런 사회가 정치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만 현대 정치는 매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서 "작전상 후퇴"를 포장하기가 크게 어려워졌다는 것이 정치인들의 고민을 더욱 자극할 겁니다.

하여간에 제가 보는 정치 이론은 이렇습니다. 정치술이라고 하는 건 이런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죠.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으며, 모든 것은 주고받는 협상 중에서 내가 조금 더 얻어낼 수 있느냐, 내가 더 중요한 것을 얻어낼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는 게 제 이론이죠.

꽤 길게 이야기했는데, 앤드류 존슨은 제가 보는 이러한 "정치 이론"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발언했던 것처럼 그는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고, 그 신념은 옳은 방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글을 앤드류 존슨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시선으로 적었는데 그것은 그의 신념과 그의 이상, 그리고 그가 나아가려 했던 온정주의에 저 역시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앤드류 존슨은 결코 능력있는 좋은 정치가는 아니었습니다. 일반인이었다면 찬사를 받아 마땅했을 용기였겠습니다만 정치인으로서는 내세우지 말았어야 할 그런 용기를 앤드류 존슨은 적절하지 못한 때에 내세웠고 그로 인해 그는 그의 명성에 엄청난 손상을 입어야 했습니다. 완고하고, 자신의 옳은 신념을 관철하려는 강한 의지는 개인의 행동으로서는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받기 위해서 뭔가를 줘야 하는, 게다가 그 자신이 강자도 아니고 한없는 약자 신세인 그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정치인의 행동으로서는 가히 최하에 가까운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는 조사를 통틀어서 항상 하위권, 특히 정치력에 있어서는 완전히 바닥에 위치합니다. 몇 번을 이야기하지만 고집이 센 건 개인으로서는 옳은 행동이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최악의 실책이었고, 지도력과 정치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물론이고 투쟁적인 성격만을 가진 나머지 민주주의의 본질인 화해와 양보의 미덕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들 평하죠. 다만 그러한 "개인의 고상한 이상과 신념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옳은 방향이었다고는 인정받는지 성격과 도덕성 면에서는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고는 합니다. 실제로 그는 정직했고, 타락하지 않은, 가난한 재봉사에서 대통령직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어떠십니까. 존슨 대통령에게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이 보이시는지요.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그에 대한 〈위대한 대통령 끔찍한 대통령〉에서의 한줄 평가를 끝으로 글을 마칩니다.



다만 불행하게도, 존슨은 자신의 원리에 대한 둔감하고 완강한 고집불통 때문에 대통령으로서는 최하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것이다.



참고문헌
〈위대한 대통령 끔찍한 대통령〉, 윌리엄 J. 라이딩스 외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앨런 브링클리
〈미국의 대통령〉, 제임스 터랜토 외
〈이야기 미국사〉, 이구한
https://en.wikipedia.org/wiki/Freedmen's_Bureau_bi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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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ohny=쿠마
15/11/07 07:45
수정 아이콘
우와 재밌게 읽었습니다!
15/11/07 07:52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15/11/07 08:28
수정 아이콘
추천!!
다음 글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Finding Joe
15/11/07 08:3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앤드류 존슨 입장에서는 가만히 앉아서 손발이 서서히 잘려나가는데 차라리 스탠턴 사건이 터진게 나았단 생각도 드네요. 어차피 이미 식물대통령이었는데.

지금이야 노무현 대통령이 뭔가 보수의 박정희 대통령과와 대립되는 진보의 표상처럼 묘사되곤 합니다만, 먼 훗날 더 많은 대통령이 나오면 그땐 진보의 이미지도 사라지고 존슨처럼 그저 실패한 대통령의 이미지만 남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이치죠 호타루
15/11/07 10:21
수정 아이콘
역사는 사람에 따라서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그런 해석이 나올 수도 있죠.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권위주의 타파라는 업적만 해도 앤드류 존슨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업적이고 이미지에 대한 큰 자산이라, 실패한 대통령의 이미지'만' 남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고 봅니다. 이것이 떽떽거리기만 했다는 앤드류 존슨과의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구요. 다만 글을 적기 위해 몇 가지 측면을 고르다 보니 노무현 대통령의 그런 업적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뿐입니다.
15/11/07 08:41
수정 아이콘
선추천 후감상하려고 추천을 누르긴 했는데 왜 이렇게 졸립죠 ㅠㅠㅠ
밴가드
15/11/07 09:00
수정 아이콘
정성을 들여서 장문의 글을 올려주신 수고에 감사를 드립니다만 호타루님의 앤드류 존슨이란 인물에 대한 해석은 동의하기 힘드네요. 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과정과 존슨의 탄핵과정을 비슷한 관점으로 보시다 보니 존슨을 동정적인 인물로 여기게 된것인지 아니면 남북전쟁 후 재건시기의 일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둘다 일수도 있겠고요.

우선적으로 보면 흑인인권 문제에서 앤드류 존슨을 온건주의적인 인물로 평하셨는데 그건 잘못된 시각입니다. 앤드류 존슨을 링컨의 온건적 재건계획을 이어받은 후계자로 보면 그렇게 해석을 할수도 있겠지만 저는 재건과 흑인인권 문제에서 존슨이 온건 재건주의자였던 링컨과는 다른 유형에 들어가는 연방주의적인 민주당원의 정치관를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노예제를 반대한 링컨과는 달리 앤드류 존슨은 민주당 의원이었을때 노예제 유지를 옹호하는 정치인이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가 남부의 탈퇴를 반대한 연방주의자이기는 했지만 흑인들은 백인과 동등해질수없고 동등해져서도 안된다는 전형적인 남부 백인들의 인종관을 가지고 있었죠.

윗글에서 호타루님은 존슨이 수정헌법 13조와 14조를 서명했다고 적으셨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영화 링컨에서 다루는 수정헌법 13조(노예제 폐지)는 미국 하원이 통과시킨 후 관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악관으로 보내져 링컨의 서명을 받았고 수정헌법 14조(해방노예들에게 시민권 부여)는 존슨이 반대했습니다. 공화당 의회는 남부주들에게 그들이 박탈당한 의회내 대표권을 되찾고 싶으면 수정헌법 14조를 비준하라며 촉구했고 존슨은 남부주들에게 비준을 하지말라고 말렸습니다. 이보다 앞서 공화당 의회는 미국내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은 미국시민으로 견주하고 그들의 시민적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불법화하는 민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존슨은 민권법이 백인들에게 주어지지도 않는 특별한 권리와 보호를 흑인들에게 부여한다면서 거부권을 행사했죠. 수정헌법 14조와 민권법 모두 존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어 버립니다.

호타루님은 또한 그랜트 행정부를 예로 들며 공화당이 남부에서 발호하는 인종차별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표현하셨는데 저는 이 역시 동의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그랜트의 임기 시기 공화당에 의해 헌법조항 15조(인종과 관련없이 투표권 보장)와 공공장소와 공공서비스에 있어서 흑인들의 차별을 금지하는 1875년 민권법이 통과되었죠. 남부에서 일어나는 KKK같은 무장세력들의 준동을 진압하기 위해 의회는 집행법을 통과시켰고 이를 이용해 연방정부는 사우스 캐롤리나의 내륙지역에서 본보기로 9개 카운티를 선정하여 계엄령을 내리고 그랜트의 법무부가 수백명의 KKK 조직원들을 기소함으로써 KKK의 조직활동을 사실상 분해시켜 버렸죠. 미국 역사에서 KKK는 3차례의 주요활동 기간이 있었는데 남북전쟁 이후의 이때가 가장 위협적이었죠. 하지만 이를 무력화 시킬수 있었던 건 KKK 진압과 남부 흑인들을 보호하는 필요성에 대해 그랜트 행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남부의 지속적인 저항과 그랜트 측근들의 부패 스캔들,경제적 불황으로 인한 공화당 행정부의 지지율 폭락으로 북부는 흑인인권에 대해 관심을 버리게 되었고 남부에는 거의 100년간 지속되는 짐 크로우 시대가 열리게 되죠. 결과물이 처참했기 때문에 급진파 공화당의 방식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고 링컨이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더 잘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충분히 던져볼수 있겠죠. 하지만 이런 역사적 가정에서 앤드류 존슨은 급진파 공화당의 대안으로 여길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연방정부의 불가결성에 대한 믿음을 빼면 앤드류 존슨은 전형적인 남부 백인인들의 사고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미국은 백인이 주도해야하고 흑인들은 시민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누려서는 안되는 나라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비교한다는 것은 후자에게 커다란 실례가 된다고 봅니다.
이치죠 호타루
15/11/07 10:13
수정 아이콘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대체로 제가 읽었던 책들은 대통령의 권위라는 측면에서, 또 남부에 대한 공화당의 재건정책이 가혹했다는 것을 들어서 앤드류 존슨에게 우호적으로 기술하고 있었기에 본문에서 전반적으로 우호적이었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쪽의 의견을 가진 책도 있었죠. 출처가 된 책 중 하나인 <미국의 대통령>이 그 책인데 그 책에서는 밴가드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온정주의를 내세운 건 좋은데 그가 바로 남부의 백인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입장에 경도된 잘못된 온정주의를 수립했다는 의견이죠. 아무래도 해당 책을 늦게 접했다 보니 다른 우호적으로 기술된 책보다는 그리 제게 와닿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KKK단의 발호에 계엄령 등을 내리기 이전에 온건한 재건정책을 폈으면 굳이 저런 단체가 발호할 여지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던 것이고, 또한 흑인이 해방된 시점에서 그들이 억압받는 것에 대한 북부의 관심이 줄어든 것 역시 사실이라 보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위대한 대통령 끔찍한 대통령>에서는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을 평가하면서 언급하기를, 열렬한 노예제 지지자도 열렬한 노예제 폐지론자도 다같이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라 적고 있습니다. 제가 인종차별주의자의 면모를 가졌던 존슨을 옹호하는 일정 이유가 되기도 했죠. 당대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에서 당장은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없다는 사람이 남부에는 특히 많았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의 의식 개혁을 위해 흑인들의 지위를 한 번에 지위를 격상시킨다면 반발이 극심할 것은 뻔한 이야기 아니었을까, 그래서 점진적이고 유화적인 정책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존슨이라는 사람의 정책을 본 시점이 그 당대의 피해자 쪽에 치우쳐 있다 보니 이런 해석이 나온 것 같구요. 무엇보다 제가 읽었던 다수의 책에서 백 년간 이어진 흑인 인권 탄압의 책임을 강경파의 강한 군정에 돌리고 있었거든요. 결과적으로 반감만 산 정책이었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는 언급과 함께요.

전반적으로 평가가 아주 낮은 앤드류 존슨이 백인우월주의자였고 또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의 비교는 실례일 것이라는 말씀에는 저 역시 동의하고 있습니다만, 두 사람 모두 (그 방향이 옳건 그르건간에) 정치적으로 계속된 실책을 범했고, 또 그로 인해 결국 의회에서 고립된 채로 대통령직을 마무리해야 했던 인물이었기에 비교해 볼 만한 가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인에게 결과적으로 상당한 실례가 되는 글을 투고했습니다만 여러 측면에서 이 관점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연필깎이
15/11/07 18:1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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