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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8/06 19:18:37
Name leeve
Subject [일반] 나의 왕따 이야기 - 3 (完)
사실 처음 하는 도둑질은 아니었다.

처음은 당시 살던 동네로 이사를 오기 전 동네에 살았을 적에 조금 떨어진 구멍가게에서였다.

욕심이 나서였는지 너무 허술해서 모르겠다.

가게 아주머니가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껌 하나를 손에 쥐고 내리막길을 냅다 뛰었다.

가게 아주머니의 욕지거리가 섞인 고함이 뒤에서 들려왔다.

한동안 경찰이 날 잡아갈까 무서워하면서 그 후로 그 가게 근처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두 번째는 초등학교 1, 2학년 때로 우연한 계기였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슈퍼마켓은 꽤 컸었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슈퍼마켓에 갔다가 상자가 뜯긴 초코하임을 본 나는 과자만 쏙 빼가면 모르겠지 하는 생각에 내용물을 빼내다 직원 아저씨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아저씨 어깨에 매달려 끌려간 사무실에서 나는 한참동안 두 팔을 들고 벌서면서 정말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났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한 행위에 대해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돈으로 피시방에 가서 그렇게 원하던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쉽게 얻은 열매였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달았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나는 또 아버지가 씻으러 간 사이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댔고, 그 이튿날에도 손을 대었다.



인디언의 속담 중에 양심의 모양은 세모라고 했던가.

내 양심은 빨리도 닳아서 원래 동그라미인 양 얼마 가지 않아 도둑질은 일상이 되었다.

더는 가슴이 콩닥콩닥하지도 않았다.

주머니에 든 천 원짜리가 열 장이면 서너 장만 훔쳐서 눈치채지 않게끔 조심했다.

만원 지폐는 아버지가 세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손대지 않았다.



그렇게 훔친 돈은 그날그날 다 썼다.

당시 어머니는 알고 지내던 동생이 사장으로 있는 작은 회사에서 드레스 만드는 일을 도왔다.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서 혼자 전부 만들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수능준비를 하던 형은 SKY에 입학하기 충분한 성적표를 매번 들고 왔다.

그래서 더 바쁜 것 같았다.

항상 일곱 시까지는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돈을 쓸 시간은 충분했다.

어느 날은 피시방에서 쓰고 또 어떤 날은 인형 뽑기 하는 데 썼다.

만화책도 많이 빌렸다.

책 대여점은 두 곳이 있었는데 좀 더 멀었지만 조금 예쁜 알바누나가 있는 곳엘 매일 들렀다.

어느 정도 친해졌을 때 누나는 만화책 말고 책을 많이 읽으라고 했고 그때부터 소설을 많이 읽었다.

지금은 과수원 하시는 분의 책을 특히 많이 읽었다.



도둑질은 생각지 못한 면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여름방학 기간이 되자 시간이 정말 남아돌았다.

최선을 다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여름방학이 끝나갈 땐 인형 뽑기에 심취해 있었다.

심심할 때마다 문방구로 가서 인형 뽑기에 이삼천 원씩 쓰곤 했다.

하다 보니 실력이 많이 늘어서 인형이 쌓이면 들키지 않게 문방구에서 다른 걸로 바꿔가곤 했다.

하루는 인형 뽑기를 하던 중 평소 나를 못살게 굴던 아이가 구경만 하고 있길래 너도 해보라며 몇백 원씩 쥐여줬더니 조금씩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내가 틈을 보이면 탁 치고 도망가면서 내가 싫어하는 별명으로 놀리는 걸 자주 하던 아이였는데 그때부터 더는 나를 괴롭히거나 하지 않았다.

이 돈의 새로운 활용 방법을 깨달았다.



인형 뽑기 기계는 문방구 앞에 설치되어 있었고 그 문방구가 있는 상가 2층에는 태권도장이 있었는데, 날 괴롭히던 애들이 많이 다녔다. 그 애들의 수업은 다섯 시에 시작해서 여섯 시에 마쳤다.

날 괴롭히는 애들과 학교 밖에서 마주치는 건 심장이 덜컹하는 일이어서 그 시간대에는 문방구에
가지 않았지만, 그 날은 인형 뽑기를 하면서 태권도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애들이 나오는 걸 보고 떡볶이를 같이 먹자고 권유했다. 내가 사겠다고 하니 잘도 얻어먹었다.

떡볶이로 시작해서 하굣길에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도 했고 돈을 많이 빼낸 날엔 피시방 비도 대신 내주었다.



이것저것 돈을 잘 쓰는 애가 되었다. 매일 같이 피시방에서 함께 게임을 하는 친구도 생겼다.

같은 학년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던 아이와도 피시방을 다녔다.

안심하고 학교 복도를 걷는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행복했다.

물론 물주 역할인 것은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여전히 날 꺼렸지만, 초등학생 여자애쯤이야 아무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여자애들한테는 말 한마디 못 걸었다.

괴롭힘당하지 않는 거로 충분했다.



그 애들에게 들어가는 돈이 커지면서 내 손도 점점 커졌다.

이삼천 원씩 사라지던 아버지의 돈뭉치는 육천 원, 칠천 원을 거쳐 어느새 만 원씩 사라지고 있었다.



더위가 물러가고 제법 시원해지던 어느 날 밤이었다.

책을 빌리고 돌아가던 길에 인형 뽑기를 하고 가려고 문방구로 갔는데 문방구 벽에 걸린 커다란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은 미니카나 비비탄 총 따위가 걸려 있었는데 그 날 걸린 상자에는 댄스댄스레볼루션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평소에 해보고 싶었지만 나 같은 몸치가 했다가는 한 곡도 끝나기 전에 끝날까 봐, 그 모습을 오락실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 시도를 못했었다.

그런데 저 상자를 사면 집에서 컴퓨터를 연결해서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주인아주머니에게 가격을 물어보니 삼만오천 원이라고 대답해주었다.

이불 속에서 며칠을 모아야 할지 속으로 셈해보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아버지는 늘 씻던 시간에 욕실에 들어갔고 나도 언제나처럼 그 시간에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 날따라 바지 주머니의 돈뭉치가 두꺼웠다.

천 원짜리만 해도 오십 장이 넘었다.

웬 재수냐 싶어 그 중 사십 장을 꺼내 내 주머니에 넣었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피시방을 마다하고 문방구로 달려가 댄스댄스레볼루션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상자를 열어보니 네모난 장판에 화살표가 네 개 그려져 있었다.



그 장판처럼 생긴 컨트롤러를 컴퓨터에 꽂으려는데 잘되지 않았다.

프린터를 꽂는 시리얼 포트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뭔가 좀 달랐다.

두 시간쯤 낑낑대며 매달려도 잘 안되었다.

세상은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할 수 없이 장롱 위에 숨겨놓고 나가서 놀다가 저녁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웬일로 형이 일찍 와 있었다. 어머니도 와 있었다.

형은 굳은 얼굴로 안방으로 가보라고 말했다.

안방에는 아버지가 빗자루를 쥐고 앉아있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앉으라고 말한 뒤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다 알고 있으니까 바른대로 말하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봤지만 사실 고민 할 것도 없었다.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고 죄송하다고 빌었다.

돈을 다 어디에 썼느냐는 말에 사실대로 말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머니도 아버지 옆에 앉아있었다.

많이 맞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한 대도 때리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못된 행동은 하지 말라고만 하셨다.

그 날 밤 내 머릿속엔 온갖 고민으로 가득 찼다.

혼났다는 사실보다는 이제 피시방은 어떻게 가지, 돈이 없으니 애들이 날 다시 괴롭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였다.



종례가 끝나고 피시방을 가자는 말에 오늘부터 학원에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으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컴퓨터를 켜기 싫었다.

소파 앞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니 외국영화가 하고 있길래 멍하니 보았다.

브라운관 속 주인공은 계속 뛰기만 했다.



여섯 시도 안됐는데 어머니가 돌아왔다.

들고온 검은 비닐봉지에는 과일이 들어있었다.

어머니는 가방과 과일 봉투를 식탁에 내려놓고는 소파에 앉아있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대로 달려와 덥석 나를 안았다.

계속 계속 미안하다고 하셨다.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자꾸 듣다 보니 눈에 눈물이 막 고였다.

눈가에 맺힌 눈물 삼키는 방법을 몰라서 자꾸 뺨 위로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내 손바닥 위에 백 원 동전 열 개를 쥐여주시고는 용돈이 부족하면 말하라고 하셨다.



며칠 뒤에 난 작은 사고를 당해 몇 달간 다리에 깁스를 하게 되었다.

날 괴롭혔던 애들과는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는데 다시 괴롭히지는 않았다.

나처럼 약해서 날 괴롭힌 적도 없고 대신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친구들이 손을 내밀었다.

6학년 교실은 4층에 있었는데 교대로 날 부축하거나 업어서 등하교를 도와줬다.

초등학생의 마지막 학기는 빠르게 지나갔다.



겨울방학이 되자 다시 엄청나게 심심해졌다.

어느 날 밤에 어머니는 가족을 모아놓고 적금이 만기가 되었다고 하셨다.

대부분은 형이 서울에서 살게 될 원룸 전세금과 대학교 등록금에 쓰였지만,

나에게는 새 컴퓨터를 한대 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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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우야
15/08/06 19:30
수정 아이콘
이렇게.. End....시즌2 ..
tannenbaum
15/08/06 19:5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저 어린 시절도 생각나고 그랬습니다. 단, 외모가 출중하시다니 그건 저와 극과 극이구요. ㅜㅜ
15/08/06 19:5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그리고 역변한지 오래됐습니다ㅠㅠ
15/08/06 20:20
수정 아이콘
와 정말 재미있는데요..
15/08/07 10:29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birkenau
15/08/06 20:21
수정 아이콘
느낌 좋네요.
Jon Snow
15/08/06 20:2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비둘기야 먹자
15/08/06 21:17
수정 아이콘
좋습니다. 급 마무리 된 감이 없지 않아 있어서 아쉬운데 계속 써주셨으면 좋겠네요
15/08/07 10:30
수정 아이콘
네 개로 나누려다가 조금 줄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여유 있으면 다른 것도 한번 써보고싶네요
김솔로
15/08/06 22:15
수정 아이콘
담백하고 좋네요..
cottonstone
15/08/07 00:46
수정 아이콘
T.T
15/08/07 00:49
수정 아이콘
오오..
김촉수
15/08/07 00:54
수정 아이콘
저도 스타가 하고싶어서 도둑질한 적 있는데.. 원인은 다르지만 도둑질이라는 점이 같네요.
대문과드래곤
15/08/07 06:12
수정 아이콘
담백하면서도, 작성자님이 더 나쁜길로 빠지지 않아 안심이 되었고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하니 또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그러네요.
15/08/07 10:34
수정 아이콘
누구나 그렇겠지만 부모님 생각을 하면 항상 가슴 한켠이 시리죠..
15/08/07 09:16
수정 아이콘
저 디디알.. 저도 있었습니다만 컴퓨터에 안되서 한참을 고민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장난감을 평생 안사주시던 부모님께서 딱 한번 사오셨던 놈인데..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15/08/07 10:25
수정 아이콘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문엔 쓰지 않았지만 저 놈이 아마 플레이스테이션 ddr전용 컨트롤러였을 겁니다...
15/08/07 10:52
수정 아이콘
당시면 플스1이겠죠? 크크
그래서 저희 부모님도 환불을 해오셨었죠 아마....
목화씨내놔
15/08/07 11:0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과정을 겪은 터라 감정이입이 심하게 되네요.

아버지 지갑에서 훔친 돈으로 오락실 가고 친구들하고 불량식품 사먹는데 다 쓰고요.

처음엔 무섭고 떨리다가도 나중엔 무덤덤하게 아버지 양복 주머니를 뒤지고요.

걸려서 따끔하게 훈계를 들었지만 앞으로 오락실 못간다는 생각에 더 침울해졌던 것도 똑같네요. 크크

아이들은 생각하는게 다 비슷한가봐요.

뭐 그 다음부터 돈 훔치는 건 딱 없어지고 일다니시던 어머니가 잔업은 절대 안 하고 저녁 때는 들어오셔서 꼭 제 저녁을 챙겨주셨죠.

그리고 일주일에 천원이라는 공식적인 용돈도 생겼고요.

옛날 생각도 나고 그래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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