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적으로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고대 제정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 콘스탄티누스와 더불어 중요한 황제 중 한명이나 어떻게 되면
과소평가되는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그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몇가지 개혁 방안을 내놓습니다.
일단 심플하게
안보가 위험하다- 군대를 늘린다.(2배에서 4배가량 확 늘림)
그럼 돈이 없는데?- 군대 일부는 둔전 시켜!(국경으로부터 상당한 폭의 지역이 군단병들의 농사지역이...)그리고 세금을 올린다!
경제가 안좋은데?- 세율은 높이고 세목(인두세, 토지세)은 단순화 시킨다. 세금 내기 싫어서 직업 바꾸는 거 금지. 직업은 앞으로 세습이다.
그리고 인플레 심하지? 기존 은화 데나리우스를 폐지하고 저가 은화와 동화 사용. 그리고 가격은 앞으로 통제된다.
마지막으로 공무원 많이 뽑아. 세금 잘 걷고 이러한 시책을 잘 시행할 수 있도록
늘어난 군대 통제는?- 문무관을 나눈다.(이때까지는 문무관이 나뉘지가 않음) 각 군대는 신설된 제국을 네개의 관구로 나눈 다음 그것에 군대를 배치한 다음 문관(비카리우스)의 통제 하에 있게 한다. 즉 황제의 대리인인 문관이 무관들을 통제한다.
군대와 관료조직이 너무 커져 황제 혼자서는 통제 불가능일 텐데요?- 제국을 넷으로 나눈다. 일단 양분하여 동방 정제와 서방 정제가
동서를 관할하고 다시 남북으로 나누어 정제와 부제가 각각을 맡는다. 총 4분할제다.
사실상 이와 같은 정책은 후의 중세 로마제국(비잔티움)으로 이어지고 로마제국 자체가 붕괴한 서유럽에서도 직업 세습이나 군사체계의
잔해가 중세 서유럽에 큰영향을 미칠 정도의 중요한 조치들이 행해 졌습니다.
군사적으로 한정하면 일단 6000명 가량의 군단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는 천명 수준으로 줄입니다. 한명의 군단장이
배신해도 겨우 천명 정도 밖에 동원할 수 없게 말이죠. 그리고 기존 100명인 센츄리는 80명으로 줄이고 500명 수준의 트리부누스란 연대 체제를 만듭니다.
사실 이런 체제는 국경 지역을 지키는 리메스의 포기는 아니었습니다. 예전은 그냥 선을 지킨다면 이때는 국경에서 상당폭을 지니는 면을
지키는 것이었죠. 즉 폭을 두껍게 해서 파고드는 사산조와 이민족을 막을 작전이었습니다. 이런 조치 덕분에 군단체계는 토착민화 되기
시작합니다. 즉 거기에서 농사 짓고 살다가 전쟁나면 싸우는 시스템으로 말이죠. 이런 상태에서 질적하락은 필연적이었습니다.
만약 제국 경제가 그나마 이 대군을 유지할 정도였다면 뭐 나름 질적 하락은 막았을지도 모릅니다만 제국의 하락은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위로부터 지원이 줄어 들면 줄어 들수록 제국군은 방어보다는 농사에 전념했고 싸우는 이유도 제국이 아닌 자기 농지를 지키기 위해서가
점차 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나중의 콘스탄티누스 시절이 되면 이게 보다 극명해지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어느 정도 안정은 가져왔지만 그의 뜬금없는 양배추 농사를 짓겠다 드립 후 은퇴 때문에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집니다. 그야 자신의 시스템이 자기 없이도 통제 가능하다는 걸 보고 싶어서 했다는 추측은 있지만 결국 그는 이게
실패했다는 걸 두눈으로 본 상태에서도 이 혼란을 통제하지 못했고 거의 실패자처럼 생을 마감했습니다.
결국 이 혼란의 승리자는 대제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누스였죠.
그가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 공인도 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하다 만 리모델링을 결국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 덕에 수많은 악재에도
제국 자체는 다시 천년을 갈 수 있었고 서로마만 해도 140년 즈음을 더 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시절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이 개혁을 통해 그나마 후퇴는 잠시나마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일단 군사적인 부분만 말하자면
거기에 군대는 완전히 두개의 집단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국경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상대방의 침입에 대해 시간을 끌거나
소규모 침입군을 처리하는 리미타네이(Limitanei)
그리고 황제 휘하 기동부대 코미타텐스가 대규모 침입자들을 빠르게 쫓아가 영내에서 박살냅니다.
이 때문에 각군단은 리미타네이가 되든지 코미타텐스가 재편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개 군단은 훗날 동로마의 테마제도의
테마까지 이어지게 되죠.
아무튼 이 기간 동안에도 군사력 증강은 계속되어 60만까지 로마군은 증원되었지만 이게 로마 경제력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습니다. 이후 로마군은 꾸준히 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더욱 큰문제는 제국의 인구 감소와 더불어 일어난
군대 기피 문제였습니다. 사실 세상이 혼란 스러워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군대가서 죽느니 안 가고 농사 짓는게
군대에 가서 봉급 받는거보다 훨씬 유리해진 상황에서 군대를 간다면 이건 바보 짓이었으니까요. 그나마 국경 가까이에
있으면 아르바이트 식으로 농사 지으면서 하지만 코미타텐스 같은 경우에는 그마저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먹고 살려고 국경을 넘는 이민족 부족 전체를 모병하는 일도 비일 비재해진 거죠.
결정적으로 아드리아노플 전투때 군사력 상당수가 박살나자 별 수 없이 제국군은 이런 이민족 부족 전체 모병을 더 늘렸습니다.
이걸 포이데라티(Foederati)라고 부릅니다.
기존 보조군과 다른 건 보조군은 개인 입대지면 이건 부족 전체의 입대라서 통제가 힘들다는 거...
도시 로마를 제정 이후 최초로 턴 알라릭도 이 포이데타리 지도자였습니다.
고대 로마군 후기에는 워낙 사람이 없다 보니 이런 포이데라티에 많은 의존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거에만 의존한 건 아니고
앞서 말한 리미타네이나 코미타텐스 같은 군사 체제도 존재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근대 로마사 학자들에게는 참담한 실패로 여겨졌습니다. 결국 476년 서로마는 망했으니까요. 하지만 로마제국 전체로 보면
글쎄요? 스럽죠. 일단 결국 제국 동쪽은 헤라클레이오스 시절 사산조와 혈투, 그리고 이슬람 발흥 전까지는 아주 안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을 통해 슬라브의 침입, 그리고 이슬람 제국 침입, 불가르족 침입등을 막아내고 10세기에는 다시
중흥을 이루었으니까요. 그리고 다시 제국은 천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사실 서로마에서 망한 가장 큰 이유는 빈약한 경제력과 인적 자원이었습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 패배시기 사실상 모든
야전군을 말아 먹은 동방보다 사정이 나았던 상태에서 결국 동방은 이 위기를 극복하고 군대를 재건했지만 서로마 군대는 손실이 발생하면
보충이 돈과 인원 부족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주 국방이 취약해졌고 사실 가까운 동로마가 아닌 서로마로 게르만 민족들이
향한 이유로 이러한 맥락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무능한 황제들이 스틸리코나 아에티우스 같은 제국의 구심이 될 유능한 명장들을 의심병 때문에 죽였으니 더 막장으로
흘렸습니다.
그럼 군제보다는 군대의 특성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일단 말의 비중이 크게 늘었습니다. 최소 중세만큼 기병의 시대는 아니었지만 말 타고 이동하는 보병까지도 늘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예전처럼 무거운 네모방패(스쿠툼)이나 여러개의 필룸, 그리고 기타 많은 물건을 가지고 다니기 힘들었습니다.
말도 생물인데 그냥 발로 걷던 시절 만큼 들고다니면 안되니까요.
이렇게 된 이유는 침입자가 빠르게 침입해서 털고 튀기 때문입니다. 이러다보니 아무리 발로 걸어도 상대를 못쫓아 갔습니다.
그래서 말에 의존해야 했고 이 때문에 무기도 상당히 간략해 집니다.
<우리가 알던 시대에 비해 가벼움은 느껴지죠?? 사실 갑옷 때문에 별차이는 없지만>
그리고 이 때문에 병사 수는 늘었다지만 개별 전투에 동원되는 병력 역시 압도적인 숫자를 자랑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한명이 커버해야 할 공간의 크기는 옛날에 비해 늘어 났죠. 이 때문에 점차 검의 길이가 길어 집니다.
예전처럼 글라디우스를 쓰면 그 공간을 커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등장한게 글라디우스가 점차 길어져서 생긴 스파타입니다. 물론 이는 점진적이라 당대인들은 어느 순간까지 글라디우스와 스파타란
말을 혼용해 썼지만요.
그리고 다시 창이 로마군에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토탈워 게임만 봐도 로마2에 정말 창병 고자였던 로마가 아틸라 시기에 수많은 창병이 생긴 걸로 확인 가능할 겁니다.
<테오도시우스 시절 로마군. 확연히 창병 수가 늘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를 입은 병과는 궁병이었습니다. Sagittarii라고 불린 이 병과는 잘나갈 때는 그냥 시리아 같은데 현지인들을 몰빵해서 보조병으로
입대시키고 별 신경도 안쓰는 병과였습니다. 하지만 활이 발달하고 보다 빠른 이동이 가능한 경무장 보병, 그것도 무거운 제블린 같은거
말고 좀 가벼운 걸 들고 다니는 병과가 절실하다 보니 이 병과 육성이 진지하게 이루어진 것이죠.
심지어 제국 후반에는 석궁의 선배인 Ballistarii까지 생겨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기병의 시대 중세로 이어지는 시대 답게 기병도 많이 변화했습니다.
페르시아랑 싸우다 보니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카탁프락토이 같은 기병이 점차 제국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Equites Sagittarii 같은 궁기병도 등장했습니다. 또한 많은 기병들이 필룸에서 기원한 다트 같은 무기를 사용한 것도 이시절입니다.
이런 걸 근대 서구 학자들은 야만화라고 까긴 하지만 애초 이렇게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 남기 힘든 시대였다는 걸 생각해야 합니다.
일단 상대방 속도에 맞추어 빠른 기동력을 갖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면 필요가 없거나 전에 설명했던 발렌티아누스 황제 처럼
적의 기동력에 휘말려 참패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또한 예전처럼 투창 같은거 가지고 다니기에 제국의 보급사정이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고 필룸 같은건 무겁기 이를데 없는 물건이니
성능이 좋아 졌다면 활을 들고 다니게 나았습니다.
또한 상대의 강력한 충격기병에 상대하기 위해서는 제국도 중기병이 있어야 했고 적 보병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도 이건 필요 했습니다.
결국 로마의 변화는 환경에 맞는 진화라고 봐야 합니다. 물론 서로마야 고대 말이라는 가혹한 환경 변화에 못이기고 사라졌지만
동로마는 결국 살아 남아 중세 로마 제국으로 진화하니까요. 물론 그 동로마도 중세에서 근대로 흐르는 잔인한 변화에 못 진화하고
사라지긴 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