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게의 '눈치' 라는 글을 보고 글을 적어 봅니다.



예전에 이런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다.
외국에 나간 한국인이 외국에서 만난 사람과 친해진 후 헤어질 때 하는 말로 언제 한국에 오면 연락해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 이후에 출입국사무소에서 연락이 와서 봤더니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사람이 가족까지 이끌고 공항에 와서 연고자로 자기를 찾았다.
한국에 지인이 있다고, 오면 연락하라고 했다고 하더란다.
무심코 했던 그 한 마디를 진심으로 알아들은 그 사람 때문에 매우 난감했었다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야기.

항상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지인과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끝난다.
언제 한번 보자,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 언제 오면 연락해.
상대방도 나도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말, 껍데기만 있는 말.
그렇다고 진짜 연락해서 불러내면 아우 저 눈치없는 인간... 이라는 말을 들어 버리는
빈말로 끝나는 대화.

최근 마음에 없는 밥 약속을 두 번 했고, 마음에 없는 밥 약속을 한 번 들었다. 그래서 씁쓸하다.
정말 두 번의 밥 약속을 마음이 내켜서 한 것인지, 아니면 마음에 없는 말인데 그 사람과 좋게 연락을 끝내고 싶은 상황에서 한 말인지.
모두가 알고 있듯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또 나에게 다른 사람이 한 한 번의 밥 약속은 과연 진심이 있는 말인지 궁금하다.
그럼 언제 시간 괜찮으신가요? 하는 말에 답이 없는 걸 보면 아마 그 사람도 그냥 하는 말이었겠지.
아니면 속으로 어휴 이 눈치없는...하면서 투덜투덜대고 있을지도.
나도, 그리고 당신들도.
다들 언제 밥 한 번 먹자는 빈말을 얼마나 남발하고 있는지, 언어의 친교적 기능을 심하게 잘 써먹고 있는 건 아닌 건지 궁금하다.

'밥이나 먹자' 라는 마법같은 말.
완전 모른척 하기도 좀 애매하고 그렇다고 완전 친하게 지내기도 좀 애매할 때 쓰는 예의상 하는 인사말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한 존재라면 분명 혼자 독차지해야 할 식량을 상대방과 나눠먹는 행위는 '내가 너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 라는 신호의 발송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거기서 사주는 문화와 겹쳐진다면 호감은 두 배가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밥이나 먹자' 며 만난 사람은 그냥 정말 밥 한번 먹고, 나중에 연락하라는 마음에 없는 말로 헤어지는 사람이 되기 일쑤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했던 질문 중에 두 가지가 기억난다.
도대체 왜 뉴스에는 매일같이 좋지 않은 소식만 나오느냐는 질문과, 왜 어른들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걸까 하는 질문.
두 가지 모두 부모님은 '네가 어른이 되면 안다' 라고 넘어가 버렸고, 이제서야 조금은 그 답을 알 것 같다.
아마 부모님도 설명해 주시기 어려운 말이었을 것이다. 매일매일 하면서도 왜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는 어려운.
생각해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이 합리적인 근거에 의거해서 이루어진다면 심리학과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벌어먹고 살 방법이 없으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냥 지나가듯이 한 누군가의 언제 밥 한번 사줄게 라는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가
언제 밥 사주실 거예요? 날짜? 시간? 하면서 끝끝내 밥을 얻어먹은 나란 인간은
아직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진화하지 못한 '눈새'에 해당하는 종족임에 분명하다.
언제쯤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눈치빠른 인간으로 완전변태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