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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9/24 20:41:40
Name 주홍불빛
File #1 지금도_마로니에는.jpg (63.7 KB), Download : 56
Subject [일반] 60년대를 오롯이 그린 드라마, 지금도 마로니에는


2005년. 돌이켜보면 벌써 8년이 지났군요. 지금도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이 방영되기 시작했던 그 해, EBS에서는 '지금도 마로니에는'(이하 마로니에)이라는 제목을 단 한 드라마가 방영됩니다.

마로니에는 1960년대를 살아가던 이들의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은 '타는 목마름으로'와 '오적'으로 유명한 시인 김지하,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을 지은 김승옥, 그리고 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기수 김중태, 세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5.16.으로 서울대학교에 군이 진주해 있는 모습으로 시작하는 드라마는, 세 사람의 시점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며 극을 진행시켜 나갑니다. 생에 대한 처절한 고민에 휩싸여 있는 김지하, 늘상 투쟁 속에서 살아가는 김중태, 그리고 그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지만 또 멀지 않은 곳에서 조용히 발을 디뎌 나가는 김승옥. 그런 세 사람의 모습이 마치 하나하나의 조각처럼 극을 채워나가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그 시대를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이서 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 사람만으로는 역시 드라마가 어딘가 부족하겠지요. 그것을 채우기 위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이 다양한 조연들입니다. 때로는 조연들의 이야기가 더욱 가슴에 와 닿고, 사랑스럽기도 한 법이지요.

그런 조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주인공 이야기 관한 여담 몇 가지 하고 지나가 볼까요.

- 김지하

예가 바로 제별(狾䋢), 국회의원(獪狋猿), 고급공무원(跍礏功無獂), 장성(長猩), 장차관(瞕矔)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하고 목질기기가 동탁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五賊)의 소굴이렷다.  / 오적 中

  사실 김지하에게는 큰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빨치산'이라는 거지요. 전향을 했다고는 하지만,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이름표는 결코 떨어져 나간 일이 없었겠지요.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이 지나지 않은 시대였으니까요. 그런 상황 속에서 김지하가 늘상 죽음을 고민했던 것은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게 되지요. 실상 그 누구보다 앞에 나와서 활동할 수 없는 위치였던 그가, 저항을 하겠다고 생각할 때까지 얼마나 깊은 고민을 했을까를 생각하면 문득 숙연해집니다.

- 김승옥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읍니까?"
"모르겠읍니다."라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깨끗한 음성을 지어서 대답했다.
그때 우리의 대화는 또 끊어졌다. 이번엔 침묵이 오래 지속되었다. / 서울 1964년 겨울 中

감수성의 혁명! 1960년대라 하면 해방이 된 지 겨우 10여 년이 조금 더 지난 시절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식민 지배를 받아왔던 탓에, 설령 문학가라 할지라도 한국어 문장을 아름답게 써내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혜성 같이 등장한 것이 김승옥이었습니다. 그의 문체는 지금 읽어도 세련되었다고 표현할 만큼 아름다웠으며, 소설 내용은 당대 도시민이 느끼던 고독과 소외, 소통의 부재를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70년대 이후에 들어서는 괜찮은 작품을 써내지 못하고, 마침내 종교에 귀의해 절필을 한, 아쉬움이 남는 작가이기도 하지요.

- 김중태

60년대 초 가장 핫한 이슈는 한일협정이었습니다. 이승만 시절에는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경제개발 등으로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과 한미일 공조를 원했던 미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한일국교 정상화가 비밀리에  추진되기에 이르지요. 협정을 추진한다는 것이 공개되자 대중들의 반발은 극심했으며, 그 반대의 선봉대에 서 있던 것이 김중태였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때의 한일협정으로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해 배상할 의무를 끝마쳐 버리게 되고, 덕택에 제대로 된 배상을 받지 못한 위안부 관련 문제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기도 하지요.

여튼, 이후 김중태는 무슨 일이 벌어지면 감옥에 들어가는 처지가 되게 되고, 결국은 박정희 정권의 권유로 69년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또, 이렇게 박정희 정권과 날을 세워가며 싸웠던 김지하와 김중태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이야기거리가 될 수 있는 재밌는 사실이지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는 짧게 쓴다는 게, 어쩌다 보니 길어졌네요. 마로니에에는 저 셋 말고도 유명한 사람들이 조연으로 잔뜩 등장합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전혜린, '귀천'의 시인 천상병, '한국문학통사'의 조동일, '록의 대부' 신중현, 영화감독 임권택, '고바우 영감' 김성환 등. 그 중에서도 제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법한 몇 명만 골라 이야기를 해보도록 할까요?

- 전혜린

먼 데에 대한 그리움(Fernweh), 어디론지 멀리 멀리 미지의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은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싹튼 것 같다.
그때부터 내 눈은 실향병(die Heimatlosen)의 눈, 슬픈 눈으로 된 것 같다.
어쩌면 내 천성에 유랑 민족 집시의 피가 한 방울 섞여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이국적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로 인해 눈뜨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 살고 싶었다. 내 일생을 바치고 싶었다. 자유롭게……..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中

1960년. 27살이 될 때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천재.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그녀 전혜린. 마로니에에서 그녀는 늘상 술에 취해 광설을 내뱉는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독일에서 아버지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을 하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 1년 전에 이혼을 해버린 그녀. 생에 대한 의지보다는 허무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그녀의 모습을 볼 때면 가슴 한 구석에 무거운 돌이 내려앉는 기분이 듭니다. 마로니에에서 그녀의 죽음을 다루었던 화는, 마로니에 내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화였습니다. 누군가를 갈구하는 모습과, 옷에 걸쳐진 어두운 코트가 묘하게 대비되며 그녀의 뒤에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그 화는 아마, 앞으로도 마로니에에서 가장 좋아하는 한 화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럴 때 어디로 떠났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출발을 생각하며 자기의 정해진 궤도 밖으로 튀어 나갈 생각에 몸부림친다. 이 결별과 출발의 집념은 매년 가을이면 나에게 다가오는 병마(새로운 빛과 음향 속으로의)로서 그 생각 끝에 결국 '죽음'이라는 개념에 고착해 버리고 마는 까닭에 몸부림치는 것이다.
긴 여행―돌아오지 않는 여행, 깨어남 없는 깊은 잠, 이러한 것들이 가을이면 매년 나의 고정 관념으로 되어 버린다. 여름의 모든 색채와 열기가 가고 난 뒤의 냉기와 검은 빛과 조락은 나에게 너무나 죽음을 갈망하는(Todessehnsuchtig)자태로 유혹을 보내 온다.
그래서 매년 가을이면 몇 주일이나 학교도 못 나오게 되고 앓아 눕게 된다. 의사는 신경의 병이라지만 나 자신은 내가 '존재에 앓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을 만큼 절실하고 긴박하게 생과 사만을 집요하게 생각하고 불면 불식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생과 사에 대한 생각이라기보다는 사에 대한 생각이 나를 전적으로 사로잡아 버린다.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中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 말하리라. / 귀천 中

천상병 시인은 순수와 천진난만의 결정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로니에에서 그는 기인으로 등장합니다. 거리에 서서 지인이 지나가면 손가락 5개를 폅니다. 오백 원을 달라고 하는 거지요. 지인이 고개를 저으면 하나씩 손가락을 접습니다. 그러다 결국 돈을 받게 되면 그 돈으로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십니다. 그런 주제에 공짜 술은 절대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의외일 수도 있는 사실 하나.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 출신입니다. 정확히는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었을 겁니다만... 아무튼 천상병은 그때의 인연이었던 동문 친구에게 술값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문 친구가 동독에 방문을 한 일이 생겼습니다. 덕분에 천상병도 소위 '동백림'이라 불리는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동독에 방문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세운 사건이었죠. 천상병은 이 사건으로 불구가 되었으며, 한동안 행려병자로 취급당해 세간에서는 행방불명 취급되었습니다. 주변에서는 그것도 모르고 천상병이 죽은 줄 알고 유고 시집을 내게 되지요. 우스개 소리로 살아서 유고시집을 낸 유일한 시인이 되었습니다만, 마냥 웃기만 하기에는 조금 씁쓸하긴 하지요.

이제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두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삶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 그날은 中


- 조동일

일반인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이 분은 국문학, 그 중에서도 고전문학의 대부라고 부를 만한 분입니다. 무려 불문과를 졸업하고, 다시 국문과에 들어올 만큼 우리 문학을 사랑했던 분이죠. 그가 쓴 6권으로 된 한국문학통사는 국문학도에게 꼭 읽어봐야 할 필독도서이자, 처음 읽는 사람을 질리게 하는 방대한 서적이기도 하지요. 그런 그가 구비문학 연구를 위해 시골을 발로 뛰어다니며 민요 등을 채록하는 모습이 마로니에에서 등장합니다. 마치 행방불명된, 향가 3000수가 실려 있다는 삼대목을 발견한 것처럼 행복한 표정으로 민요를 채록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르게 그... 그만 둬! 하고 외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게 마침 한국문학통사를 공부하기 시작하던 시절의 저였지요.

김지하의 오적은 조동일과의 만남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판문점 남북 학생회담에 둘이 같이 학생대표로 참석하자고 조동일이 꼬실(?) 정도의 사이였던 것 같으니 말이죠.


드라마에 대한 소개, 라기보다는 인물에 대한 소개에 가깝게 되어 버렸네요. 60년대를 다룬 이 드라마는 마지막을 김지하의 '오적'으로 장식하며 끝을 맺게 됩니다. 오적을 연출하는 게 참, 해학적 표현이 가득한 그 작품에서 '숭고'와 '비장'을 느끼게 할 정도로 대단합니다.

현재 EBS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만, DVD로는 출시가 되지 않았다는 게 아쉬운 작품입니다. 60년대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쯤 눈을 돌려도 괜찮은 작품 '지금도 마로니에는'! 그 기나긴 (절반 이상은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소개글을 여기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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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
13/09/24 22:21
수정 아이콘
사실 저 EBS 문학사 시리즈 자체가 모두 괜찮은 편이죠 지금도 마로니에는 의 이전 작품인 명동 백작도 추천할만 합니다.
13/09/25 06:57
수정 아이콘
저도 명동백작 무척 좋아합니다.
어강됴리
13/09/25 01:02
수정 아이콘
설마 저 김중태가 찬조연설때 "문재인 대선 패배하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릴까 걱정", 이라고 하던 그 김중태...
참 말년까지 변절하지 않는자를 찾는게 쉽지 않는거 같습니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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