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영국은 인도를 오랜기간 식민지로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이 인도 전역(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포함)을 직접 통치한 것은 아닙니다. 지도에서 보듯 노란 영역, 전체 강역의 약 40% 가량은 수많은 토후국, 혹은 번왕국(Princely states)의 통치 아래 간접통치했습니다.
우리는 대충 식민지라 퉁치지만 번왕국에는 각자의 왕이 있고 일정부분 자치를 누렸습니다. 물론 군사력과 외교권이 제한되고 영국이 파견한 고문이 내정을 간섭하는 등 멀쩡한 독립국이라고 보긴 힘들었으나 어쨌든 국체 자체는 보존했고 인도 독립 시까지 남아있었습니다. 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 생각하면 딱 들어맞습니다. 사실상 식민지에 가깝지만 직할령은 아닌 보호국.
식민지를 직할령으로 두고 수탈하는 것은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내정, 조세권 등을 가지지 않은 채로 어떻게 번왕국에서 이득을 얻어낼 수 있었을까요?
2. 수많은 방법1) 종속 동맹(Subsidiary alliance)
Subsidiary alliance의 명확한 번역어를 찾기가 어려워 '종속 동맹'으로 번역하겠습니다.
종속 동맹은 영국의 인도 번왕국 통치의 핵심이었습니다. 종속 동맹을 통해 영국의 군대가 번왕국 수도에 주둔하며, 유지비는 번왕국이 냅니다. 번왕국의 군대는 유명무실화되고 독자적인 외교권을 제약당합니다. 그리고 영국이 파견하는 고문이 궁정에 머무르게 되어 내정을 감시하게 됩니다. 대신 영국은 번왕국의 국체를 보호합니다.
2) 통상조약
영국에게 유리한 통상조약을 맺습니다. 번왕국의 원자재는 무관세로 영국이 수입하며 반대로 인도의 제조업 생산물은 관세를 부과받습니다. 이를 통해 영국은 필요한 원자재를 확보하고 물품 판매 시장을 얻었습니다.
3) 금융
번왕국의 금융 또한 영국에 종속 돼 있었습니다. 영국에 보호비 및 조공을 바쳐야하는데다 통치자가 영국에서 들어오는 사치품을 쓸수록 재정은 압박을 받습니다. 이때 영국의 선진적인 은행들에 돈을 빌리고 이자를 냈습니다.
4) 기타
가끔 조공을 바치거나 철도, 항구 등 주요 인프라를 영국이 장악하여 이를 토대로 이익을 얻었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종속 동맹으로 뜯는 보호비와 조공, 기타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다른 유럽 국가를 배제하고 독점적으로 원자재 및 시장에 접근하여 자유로운 상행위를 통해 이득을 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경제적 이득만 본 것은 아닙니다. 인도를 통치함으로써 '인력'이라는 귀중한 자원 또한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은 인도에서 돈 주고 고용한 용병들을 1, 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서 수많은 전쟁에서 쏠쏠히 써먹게 됩니다.
3. 현대에의 함의
영국은 직할하지 않은 보호국에도 정치적인 영향력을 통해서 수많은 이익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에는 이러한 '정치적 영향력'을 통한 경제적 이득은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물론 옛날처럼 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불평등조약을 맺어서 독점적으로 이권을 빼먹는 건 불가능합니다(트럼프는 그걸 원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은 경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특히 자유무역 시대가 저물어가는 지금에는 더더욱이요.
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장'과 '돈'입니다.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에도 한한령 당시 중국에 보복하지 못했거나 지금도 보조금 관련으로 대놓고 차별하지 못하는 것도 중국이란 시장이 너무 크고 거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도 일부 분야에 쿼터를 두고 방위비를 인상하라는 등 강짜를 부리지만 우리가 대응하기 힘든 것 역시 미국의 시장 때문이지요.
'돈'도 중요합니다. 미국의 대외원조, 중국의 일대일로 등은 겉으로는 인도적 지원일지 몰라도 실질적으로는 공여국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IMF에서 돈을 받고 싶으면 그쪽이 요구하는 조건(구조조정, 시장개방 등)을 맞춰야했고, 일대일로의 투자는 중국 업체의 진출을 의미하며, 일본의 원조를 통한 사업은 사실상 일본 업체를 쓰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꼭 얻는 게 경제적 이익일 필요도 없습니다. UN 등 국제기구에서의 표도 우호국이 많으면 유리한 구조입니다.
결국 현대에도 정치적 영향력은 경제에 매우 중요합니다. 단지 그 방향성이 군사력으로 압박하기에서 돈, 시장으로 사기로 바뀌었을 뿐이죠.(사실 군사력도 중요한데 여기선 논외로 두겠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미국, 중국, 유럽같은 큰 국가만이 가능한 거 아니냐고요? 시장은 그럴지 몰라도 '원조'를 통한 협력 강화는 우리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동남아 원조 사례에서 보듯 원조는 단순한 적선이 아닙니다. 원조는 경제적, 정치적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는 수단인 것입니다. 원조를 통해 자국 업체가 진출하고, 진출한 기업과 개발 정보를 통해서 더더욱 시장에 원할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지요.
많이들 간과하지만 시장에 원활하게 들어가는 것은 공짜가 아닙니다. 국가는 외국 기업이 마음에 안들면 얼마든지 여러 방법으로 괴롭힐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단순히 기업이 경제만 잘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외교, 정치적 영향력이 경제적 성공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자유무역 시대가 저물어가는 지금은 더더욱.
흔히들 한국을 '제국을 경영해보지 못한 국가'라서 외교적 시야가 좁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정치적 영향력, 세력권이 경제적 번영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도 좀 더 거시적인 시야에서 국제정세에 한 몫 거들어야 합니다. 무슨 원대한 꿈이 있어서가 아니라 시장을 지키기 위해서요.
꼭 거창한 걸 하란 게 아니라 좋은, 무해한 이미지도 때로는 좋은 카드가 될 수 있는 법이죠. 뭐가 됐든 잘 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