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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2/08 18:03:26
Name meson
Link #1 https://cafe.naver.com/bloodbird/75934
Subject [일반] 『눈물을 마시는 새』 재론 - 눈부시게 잔혹한 이야기
※이전 글(https://pgr21.com/freedom/102740)만큼 스포일러가 강한 글입니다. 이 글(https://cafe.naver.com/bloodbird/75422)을 읽고 나서 보시면 더욱 좋습니다.


0. 『독마새』는 나올 수 있을까?

새 시리즈에서 언급되는 [ 네 마리의 형제 새 ]를 다른 소재들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나가에게 눈물이 특별하다느니, 소드락이 독약일 수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그 연장선상에 있지요. 그러나 오늘날에 돌아보자면 네 마리의 형제 새를 네 선민 종족과 결부시키는 방법은 해석의 여지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눈물, 피, 독약, 물은 네 마리의 형제 새 이야기에서만 병렬적으로 제시될 뿐 그 뒤에는 [ 두 개의 쌍 ]으로 묶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눈물과 피, 독약과 물은 각자 쌍을 이루어 상보적인 의미망을 형성할 뿐 다른 대립쌍과는 큰 연관성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눈물과 피는 몸에서 나오는 것인 반면 독약과 물은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이 때문에 눈물을 마시느냐 피를 마시느냐의 문제는 [ 타인에 대한 태도 ]와 연결되는 반면, 독약을 마시느냐 물을 마시느냐의 문제는 자신에 대한 태도 - 더 정확히는, [ 변화에 대한 태도 ] - 와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가 연작으로 나온 것은 [ 타인을 대하는 두 가지 입장 ]에 대해 서로 다른 강조점을 두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고 여겨집니다. 단지 [ 강조점 ]이 다른 것이고 입장 자체는 두 소설 모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확실히 제목을 그렇게 지은 이유는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죠. 그런데 그렇다면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독을 마시는 새’로 언급되기에 흔히 『독을 마시는 새』로도 불리는) 『독약을 마시는 새』는 어떨까요? ‘독약을 마시는 것’과 ‘물을 마시는 것’이 변화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타자(打者)는 이 두 가지 입장에 대해서도 두 질의 소설을 써서 논할 예정인 것일까요?

그러면 좋겠습니다만(진심입니다), 주제적으로 보면 사실 거기에 새로운 소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이미 이 문제를 다루었고, 그 결론은 아주 [ 냉혹하면서도 준엄 ]하기 때문이죠. 얼마나 준엄한가 하면, 어떤 면에서는 그 결론을 전제한 뒤에 닥쳐오는 ‘눈물을 마시는 것’과 ‘피를 마시는 것’ 사이의 길항이 새 시리즈를 관통하는 물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까지의 경위는, 이제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멸망은 완성의 귀결: 종말의 동력으로서의 나늬

『눈물을 마시는 새』에는 [ ‘완전성’ ]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 실체는 불분명하게 제시되지만, 출처가 화신들의 입인 까닭에 존재 자체는 확실하죠. 게다가 명칭이 ‘완전성’이므로 이걸 얻는 것이 선민 종족들의 최종 목표처럼 생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첫째로, 완전성을 얻었다는 첫 번째 종족은 “빛이 되”(4권 395쪽)었다고 묘사됩니다.
둘째로, 선민 종족이 완전성을 얻기 위해서는 신이 “영원히 소멸”(4권 278쪽)해야 한다고 언급됩니다.
셋째로, 네 신들 중 하나라도 소임을 다할 수 없다면 선민 종족들은 “변화 없는 정체”(4권 396쪽)에 빠진다고 언급됩니다.

이러한 정보를 인정할 수 있다면, 선민 종족들이 모두 완전성을 얻을 경우 신들은 모두 소멸해야 하며, 선민 종족들은 어떤 원소(그럴듯한 추정에 따르면, 자신들의 신이 관장하던 원소)로 변신해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이 소멸하는 순간 선민 종족들은 변화의 동력을 잃어버리므로, 선민 종족이 원소로 변신한들 신의 역할을 대체할 수는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 네 선민 종족이 모두 완전해질 경우 세계에는 사람도 신도 사라질 것이며 자연만 남을 것 ]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완전성의 결과가 이것이라면 완전성이란 사람도 신도 없던 상태로 회귀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물론 지구과학의 관점에서는 실제로 사람도 신도 없던 상태가 매우 길었고 사람이 있는 상태가 특이한 것이기는 하죠.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는 신이 있는 세계관을 가지고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이건 결국 새 시리즈의 신들에게는 [ 원대한 목표나 구원의 계획이 없고, ] 선민 종족들이 원소로 변신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멸하기 위해 선민 종족들의 변화를 옹호하고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볼 때 나늬가 “모든 종족들을 따라오게”(4권 348쪽) 한다는 설명은 마침내 명확하게 이해됩니다. 나늬가 단지 ‘사랑’이나 ‘다름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의 상징이라면, 종족들은 나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늬를 매개로 서로에게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늬에 대한 가장 신빙성 있는 설명은 아주 명확하게, 나늬 자체가 앞장서서 [ 모든 종족을 어디론가 운동시킨다 ]고 말하고 있죠. 다시 말해 나늬는 사랑을 퍼뜨릴 수도 있고 다름을 긍정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을 부단히 변화시키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 변화의 맨 마지막은 아마도 신들이 소멸하고 사람들도 원소로 변신한 적막한 미래일 것이고요.

이러한 해석은 완전성이 “최소한 불완전성의 반대 개념이 아”(4권 398쪽)닐 것이라는 라수의 견해까지 손쉽게 포괄합니다. 화신들이 말하는 완전성이란 기실 귀결점이며, 삶으로 말하자면 죽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죠. 모든 사람은 마지막에 죽습니다만 그렇다고 삶의 목표가 죽음이 되지는 않는 것처럼, 선민 종족들의 귀결이 완전성이라고 해서 선민 종족들의 목표가 완전성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 ‘완전성’은 절대적인 가치판단을 내포한 개념이 아니며, ] 따라서 흔히 쓰이는 용례로서의 ‘불완전성’과 반대되는 개념도 아니게 됩니다.

유해의 폭포가 통찰했고 라수 또한 지적했듯이,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의 완전성은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작자들”이 전제하는 완전성과는 “전혀 다른 것”인 셈이죠(4권 398쪽).


2. 허무주의와 그 대응: 삶의 긍정, 혹은 인정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눈물을 마시는 새』가 보여주는 세계는 일견 무상합니다. 천국의 약속도 없고, 완전성은 종말의 이칭이고, 신도 소멸을 기다리는 이런 세계는 작중에서도 언급된 “신은 죽었다”(4권 279쪽)는 선언이 절로 나올 만큼 절대가치가 부재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바꿔 말하자면 각자가 가치를 창조하기에 적합한 곳이기도 하죠.

그래서 화신들은 계율을 내리거나 예언자를 임명하는 대신, 선민 종족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4권 157쪽)라고 말합니다. 내키는 대로 살면서 일어나는 대로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유롭기는 해도 위험한, 나도 자유롭지만 남도 자유롭기에 [ 기쁨만큼이나 고통도 넘쳐나는 세계 ]를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는 해도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진리를 정하고 선악을 규정하며 사람들을 지도해 줄 절대자는 없고, 신들은 단지 4원소를 움직이며 사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도록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선후를 규명하자면 삶의 긍정을 촉구하기 위해 신들이 절대가치를 두지 않은 것이 아니라, [ 본래 절대가치가 없기에 신들이 삶의 긍정을 조언하는 것 ]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눈물을 마시는 새』는 아주 명확하게 기독교적이거나, 헤겔적이거나, 마르크스적인 관점을 거부합니다. 이미 수차례 지적되었듯이, 그보다는 스피노자와 니체와 들뢰즈의 방향으로 더 기울어져 있는 것이죠.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니체이고요.


3. 그러면 죽어요: 왕이 눈물을 못 마시면

물론 이렇게 모든 것을 풀어놓는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 ‘무섭다, 이러다가는 다 죽는 것 아닌가’ ]라는 의문 말이죠. 하지만 『피를 마시는 새』의 종반부에서 재확인되는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는 그 까닭도 이야기된다는 것입니다.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기 때문에, 피를 마시는 새가 있어도 괜찮다.’

직접적으로 나오다시피, 사회적 차원에서의 ‘눈물을 마시는 새’는 왕입니다.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 눈물을 마시는 사람은 곧 “다름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4권 316쪽)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이들의 출현을 [ ‘피를 마시는 새’의 출현과 똑같은 정도로 ] 긍정하고 옹호합니다. 그리고 ‘피를 마시는 새’에게 “가장 오래 사는” 이점이 있다고 밝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물을 마시는 새’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이점이 있다고 인정합니다(1권 366쪽).

카시다 암각문의 빈칸이 결국 빈칸으로 남는 것에서 다시 강조되듯이, 『눈물을 마시는 새』는 둘 중에 무엇이 더 낫다고는 끝내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눈물과 피 사이의 선택은, 개인 차원에서는 [ 선호의 문제 ]가 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눈물을 마시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눈물은 결국 주기적으로 소멸하는데, 그 까닭은 물론 사회적으로 눈물을 마시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를 케이건은 왕이라고 불렀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눈물과 피 사이의 선택이 선호의 문제라는 입장이 장기지속성을 얻습니다. 눈물을 마실 최후의 보루는 왕이며, 왕에 이르러서는 어쨌든 눈물이 사라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왕을 하든, 군중이 강제로 누구 하나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왕으로 죽이든, [ 집단은 지도자를 배출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 그리고 일단 지도자가 나타나면 사회의 시급한 문제는 실제로 해결되거나, 아니면 지도자가 책임을 지고 희생됨으로써 미봉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이 다 죽는 일은 차단되는 것이죠.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왜 『눈물을 마시는 새』가 제왕론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그리고 케이건의 제왕론이 왜 집단에 의해 희생양이 살해되는 원리와 그 효과를 면밀히 묘사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4. 인정할 수 없다: 뇌룡공과 군령자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예컨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는 타인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면 이런 정글과 같은 세계를 긍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극연왕의 오라비”(4권 209쪽)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죠. ‘피를 마시는 새’를 금지하는 절대적인 규율이 설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빨리 죽”(1권 366쪽)는다는 것은 과연 부당해 보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사람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끊임없이 나타나며, 울부짖고 한탄하며, 슬퍼하고 저주합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눈물을 마시는 새』의 입장은 아주 준엄하여 냉혹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입니다.

“영웅왕은 결국 망해 버릴 나라를 세운 거냐? 극연왕은 결국 사토 속에 묻혀버릴 길을 건설한 거냐? 너는 세상을 비웃으며 입매가 매서운 학자로 살았다. 그것은 세상 속으로 나가기 두려웠던 네가 선택한 타협안이고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네 방식이니 누가 너를 탓하겠느냐. 결국 끝까지 그 타협안을 지킬 수 없어 세상에 나왔지만 얻는 건 실패와 좌절뿐이니 죽어버리려고까지 했지. 그만둬라. 실패도 네 실패고 좌절도 네 좌절이라는 것을 인정해라.
“그 때문에 너무 많은 자들이 죽었습니다.”
“그건 그 자들의 것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 4권 168쪽. 강조는 인용자.)

“흥! 죽을 필요가 있어서 죽는 사람도 있느냐? 삶을 인정한다는 것은 삶의 기쁨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들만 취사 선택하여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급작스러운 사고와 황당한 죽음도 모두 인정한다는 것이다. 윷가락 네 개는 한꺼번에 던져져야 한다. 그중에서 배를 보이는 것, 혹은 등을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겠다는 것은 윷놀이를 할 줄 모르는 자의 말이다. 페로그라쥬 사람들과 악타그라쥬 사람들이 분노한다면, 그 놈들은 놀 줄 모르는 자들이다. 그런 얼간이들에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눈물을 마시는 새, 4권 169쪽. 강조는 인용자.)

“이 빌어먹을 자식아! 그러면 내가 모든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이 길로 가라, 혹은 저 길로 가라고 가르쳐줘야 한다는 거냐? 나는 그러지 않아! 너 정말 끝까지 살 줄 모르는 놈처럼 굴 테냐!”
(눈물을 마시는 새, 4권 169쪽. 강조는 인용자.)

평등은 자신이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가 공평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증명에 성공하지 못한 자까지 살려주는 것은 이미 불평등한 일입니다. 대수호자님. 신 아라짓은 자신을 증명할 것입니다. 증명하지 못한다면 사라질 뿐입니다. 그들에게 살짝 전달하십시오. 지나가는 니름처럼, 혹은 암시적으로, 그러나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게 전하십시오. 5년 전, 그들이 완전히 이겼다고 생각했을 때 라수 규리하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상기하라고. 나, 라수 규리하는 키보렌의 심장에 작살검을 겨누었고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 4권 380-381쪽. 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 ‘고통도 죽음도 인정해야··· 못하면 살 줄 모르는 것’ ] 식의 일갈을 보고 나면, 논리야 매끄러운 원환처럼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다소 가혹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통을 단지 감내하라는 말이 아니라, 삶의 고통에 직접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일부로 긍정할 때 정신적으로 더 건강해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받은 고통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를 다룬 것이지, 모든 고난에 수동적으로 대처하라는 뜻은 아니라는 말이죠. 삶의 적극적인 개척과 제한 없는 행동의 옹호는 여기서도 유지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요청이 있더라도, 모든 사람이 정신적 ‘강자’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서로 상처입히는 세상을 견딜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끝내 스스로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죽는 순간까지 절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이들에게도 목소리를 낼 기회를 할애하기에 전자는 용인으로, 후자는 군령자의 군령들로 형상화되어 있지요.

용인은 극도의 예민함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이해하기에 자신을 희생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용인은 [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자아내는지를 ] 고발하는 증언자와도 같으며, 『눈물을 마시는 새』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론이 바뀌지도 않습니다.

륜은 결국 나무가 되기를 택했고, 그를 끝으로 용인은 사라졌으며, 용근을 먹지 않은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지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합니다. “어느 정도의 둔감함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가르쳐드리고 싶”(3권 53쪽)다는 륜의 토로는 사람들이 “둔감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인지 알지 못하고 있”(3권 8쪽)다는 카시다 암각문의 통찰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둔감함, 혹은 “잔학한 경험들이 사람들을 상처 입히면서 동시에 선물하곤 하는 단단한 껍질”(4권 17쪽)의 존재는 곧 사람들이 잔학한 세상에서도 용인처럼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결국 『눈물을 마시는 새』는 사람들에게 [ 둔감함이 있기에 타인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 ]고 보는 것이죠.

한편 군령자는 극도의 회한으로 사라지기를 거부하고, 남의 육신에 기생하여 세상에 남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군령자는 [ 삶이 더할 나위 없었다고 긍정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 예시하는 산증인(혹은 죽은 증인)이며, 『눈물을 마시는 새』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론이 바뀌지도 않습니다.

주퀘도는 결국 자신의 삶이 완전무결했다고 선언했고, “전령하지 말고 죽”으라고 부탁했으며, 제발 “죽을 때까지만” 마음껏 살라고 말했습니다(4권 33쪽). 이러한 주장은 육신이 죽은 이후 영혼으로만 이어가는 군령의 삶이 자신의 것일 수 없다는 자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가의 육에 깃든 이상에는 도깨비도 도깨비불을 일으킬 수 없고, 레콘도 계명성을 내지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적 잡종”(3권 110쪽)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상태는 “역사는 절대로 역사가의 것이 아니”(3권 114쪽)라는 언급에 의해 한계를 노정하게 되죠. 간명히 말하자면 죽은 뒤에 군령이 되어서 무엇을 하든, 죽기 이전의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과거에 대한 본인의 인식뿐이며, 이 견지에서 삶의 긍정을 강조하는 『눈물을 마시는 새』의 입장은 다시금 공고해집니다.

그리하여 『눈물을 마시는 새』가 제안하는 준엄한 이치에 대한 반발의 여지라 할 만한 용인과 군령자는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 모두 [ 주제적으로 진압당하는 ] 궤적을 그립니다. 용인은 뇌룡공이 나무가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탈출함으로써, 군령자는 주퀘도가 유료도로당 파괴를 후회하며 뒤늦게 삶을 긍정함으로써 그렇게 되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꽤 섬뜩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5. 당의정: 물론, 사랑할 수도

『눈물을 마시는 새』의 매력과 작품성은 아마도 이처럼 면밀히 살펴보면 결코 부드럽지 않은 주제의식을 서사적으로는 굉장히 아름답게 펼쳐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수려한 묘사와 상징의 심오함, 대화의 원숙함과 잘 설계된 반전에 이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사실 제대로 와닿는 메시지라고는 [ 세리스마의 마지막 연설 ][ 카시다 암각문에서 ‘미움’을 지우는 여행자의 선택 ]밖에는 없으니 말이죠. 이러한 선후 배열은 아주 영리한 수법이고, 같은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서라면 누가 쓰더라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이 드는 대목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번 재독하면서 의미를 길어내고 본다면, 결국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독자를 어딘가로 이끌어가려는 면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자각이 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주제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란 굳이 규정하자면 [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 ]이며, 그런 큰 찬성 속에서는 피를 마시든 눈물을 마시든 모두 긍정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눈물을 마시는 새』의 다른 부분들은 어째서 이런 큰 찬성이 가능한지를 논증하고 해명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에, 그것까지 전부 고려하여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면 이 작품은 특정한 주장보다는 세계에 대한 관점 내지는 인식론을 제공하는 성격이 강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카시다 암각문에서 ‘미움’을 지우는 선택은 거기에 ‘사랑’이 들어갈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고, 『눈물을 마시는 새』는 사랑 역시 큰 찬성 속에서 긍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긍정이나 허용의 수준이라면 몰라도 [ 미움보다 사랑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거나, 피를 마시는 것에 대한 눈물을 마시는 것의 우월성을 주장한다고 말하기에는 ] 그렇게 보기 어려운 근거들이 산재해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잔혹한 부분이며, 동시에 뛰어난 부분이고, 이런 관점을 서사적으로는 교묘히 배치하여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희망찬 이야기에 이목이 쏠리도록 만든 솜씨는 가히 눈부십니다.

당의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눈부시게 잔혹하다고 표현하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죠.

그리하여 저는 여전히 『눈물을 마시는 새』가 [ 변화를 긍정할 수 있는 이유 ]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동시에 [ 변화를 맞이하는 고결한 방법 ]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하는지에 관해서는 요즘 들어 부쩍 자신감이 없어진 관계로, 이렇게 재론해 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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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레인
25/02/08 18:44
수정 아이콘
구질구질하게 왜 이러시오
담배상품권
25/02/08 19:20
수정 아이콘
일필휘지
자급률
25/02/08 19:45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다만 새 세계관에서 완전해진다는게 '원소가 되어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지는 잘...

피마새에서 명백하게 '영에 간섭하고 이끄는' 하늘치의 기능이 나오고 그것이 완전성을 향한 여정에서 중요한 디딤돌(작중 시점에선 아직 도달하지 못한)로 서술되는 것을 보면, 첫번째 종족의 정신은 어떤 정신적이고 고차적인,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영역에 가 있을 확률이 더 높다고 봅니다. 이 부분에선 오히려 니체 사상보다 신플라톤주의적인 어떤 이상향이 상정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패트와매트
25/02/08 19:50
수정 아이콘
독마새가 못나오는 이유는 그냥 레콘이 오버파워로 세서 그런거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같이걸을까
25/02/08 20:16
수정 아이콘
드래곤라자와 퓨쳐워커를 국민학교때 재밌게 봤었는데, 마흔 아재의 눈으로 눈마새 피마새 읽어도 재밌을까요?
Ashen One
+ 25/02/08 20:39
수정 아이콘
재미있을 겁니다. 피마새는 안 봤지만, 눈마새는 드래곤 라자보다 한 등급 수준이 높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에이치블루
+ 25/02/08 21:15
수정 아이콘
재밌습니다!!!! 안보셨다니 부럽습니다. 이제 읽으시면 재밌게 볼 수 있으니까요!!!! ㅠㅠㅠ
+ 25/02/08 20:25
수정 아이콘
하다못해 세마리라도...
원시제
+ 25/02/08 20:50
수정 아이콘
어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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