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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12/18 23:36:51
Name meson
Subject [일반] [무협] 구백오십검법(九百五十劍法)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1]
구백오십검법(九百五十劍法)의 비조는 31년 전의 인물인 겁혼도수(劫魂刀手)이다. 수공(手功)의 고수인 그가 무슨 이유로 검법을 창안했는지는 끝내 알려지지 않았고, 실은 알고자 하는 사람도 없었다. 겁혼도수는 제자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보(劍譜)는 남았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환란의 씨앗이 되었다.

겁혼도수가 죽고도 10여 년이 지나 그의 무덤을 찾을 친우조차 거의 사라졌을 때, 어느 여인이 비석을 들어내고 묘실을 파헤친 일이 있었다. 근래에는 그녀가 겁혼도수의 손에 멸문한 세가의 말예였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곤 한다. 그러나 단지 누군가의 청부를 받은 전문 도굴꾼에 불과했다는 후문 역시 만만치 않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결국 파묘를 실행했다는 점에서, 그 여인은 겁혼도수가 검보를 남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겁혼도수의 지음(知音)을 자처했던 무극일노(無極日老)가 나타난 것은 무덤의 석실이 이미 뚫리고 목관이 백일하에 열렸을 때였다. 무극일노는 한달음에 달려가 도굴꾼을 일 권(拳)에 죽여버렸고, 그래서 그녀가 누구로부터 검보에 대해 들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그 여인이야말로 구백오십검법이 낳은 첫 번째 희생자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얻지 못한 검보는 겁혼도수의 무덤을 수습하던 무극일노에 의해 마침내 세상에 알려지고 말았다.

[2]
무극일노는 뭇 사람들을 오시하기를 즐기는 노괴였으나 자신이 개세의 고수들과 비교해 어떠한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구백오십검법에 담긴 검리를 조금 엿보고 그 웅혼함을 깨닫자마자, 그것이 권사인 자신에게는 화만 불러올 요물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무극일노는 당대의 무림맹주였던 풍운검선(豊雲劍仙)에게 검보를 헌납했고, 풍운검선은 이를 다시 무상검룡(無上劍龍)에게 하사했다. 무상검룡은 검남(劍南) 출신의 청년 영웅으로 약관의 나이에 팔각신마(八角神魔) 토벌의 예봉을 맡아 명숙들의 상찬을 받았던 자였다.

당시 무림맹은 개창 이후 최대의 성세를 구가하고 있었다. 산마루의 구름을 담았다는 풍운검선의 칼날이 마치 태풍처럼 사방으로 벼락을 내리치며 사도(邪道)로 규정된 모든 무맥들을 휩쓰는 중이었다. 무림맹에 가맹하지 않은 방문파가는 명교(明敎)에 기대어 겨우 영역을 보존했고, 녹림(綠林)은 화친을 구걸하며 총표파자를 포로로 내줄 지경이었다. 자신의 무공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지니고 있던 풍운검선은 구백오십검법을 얻고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고, 단지 유망한 후기지수에게 내리는 신뢰의 징표로 삼았다.

모두가 간과했던 것은 그때까지 구백오십검법의 본색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풍운검선조차 한 번 읽은 것만으로는 그 진의를 다 파악하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검보 자체만으로도 이미 상승무공이었지만, 그 요체는 도해가 아니라 명칭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사파라기에는 모호했으나 손속이 잔혹한 것만은 분명했던 겁혼도수가 지은 그 이름은 사실 제물의 숫자였다. 구백오십(九百五十). 생령을 꺼뜨릴 때마다 위력이 강해져 950명을 죽이면 마침내 천하일절에 오르는 검법이기에 그 공능을 못내 이름에나마 적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구백오십검법의 전인(傳人)이 된 무상검룡이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놀랐고 그 다음에는 두려워했으나 이내 흡족해했다. 그러고는 즉시 폐관에 들어가 2년 만에 구백오십검법을 대성한 뒤 검보를 태워버렸다. 절정검수가 되어 돌아온 그에게는 무림맹 총순찰의 요직이 주어졌고, 무상검룡은 중원 각지에서 명교의 고수들을 추살하며 무림맹의 검으로 자리매김했다. 대찰과 도관까지 종횡하며 칼날을 들이대는 그를 강호인들은 무상검왕(無上劍王)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3]
명교와의 항쟁에 앞장서며 무림맹에서의 입지를 다진 무상검왕이 다음 목표로 삼은 것은 호법원이었다. 소싯적에 묘강(苗疆)을 평정한 효웅이었던 대호법은 오독문의 잔당에게 습격당한 후 폐인이 되어버렸고, 바야흐로 명교와의 결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곧 대호법이 교체되리라는 점은 분명했다. 그리고 신임 대호법에게 절세의 영약 육합심명단(六合心明丹)이 주어지는 것은 하나의 불문율처럼 굳어진 관례였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면 무상검왕은 천하제일의 검법에 걸맞는 내공까지 갖출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경쟁자가 있었다. 동쪽 낭야(琅邪) 출신의 기재 절검수사(絶劍秀士)였다. 그는 옥골선풍의 외모에 걸맞게 오른손으로 학우선을 들었으나, 왼손으로는 아홉 척이 넘는 대검을 쥐고 명교의 고수들을 무 자르듯 베어넘기곤 했다. 풍운검선과는 가문 사이의 친분이 있어 입맹하자마자 총군사로 발탁되었고 그 뒤로도 굵직한 장면마다 맹주를 보필한 자였다. 무상검왕 역시 맹주의 측근이었지만 절검수사와 총애로 겨룬다면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고, 아직 구백오십은커녕 삼백도 채 죽이지 못한 마당에는 일신의 무위로도 평수를 점칠 수 있을 뿐이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무상검왕은 고민했다. 고삐를 늦출 것인가, 아니면 맞서볼 것인가? 처음에는 전자로 기울어졌다. 세력을 다툰대도 풍운검선이 어디에 힘을 실어줄지는 명백했고, 그렇다면 굳이 흔단(釁端)을 만들어서 득이 될 것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큰 싸움을 앞둔 상황에서라면 대호법보다 총순찰의 역할이 더 빛나는 법이었다. 대호법이 총타를 지키는 동안 총순찰로서 명교를 격파하고 천산을 짓밟는다면, 그 대공에 힘입어 육합심명단은 물론이고 차기 맹주위까지 노려볼 만했다.

그가 오판했던 바는 절검수사가 대호법 자리를 원한 까닭에 대해서였다. 새로운 대호법은 육합심명단을 복용하자마자 호법원 산하에 집법당(執法堂)을 신설하고 동향의 무사들을 집법사자로 모집했다. 그들을 명교 토벌에 출전시키려는 의도가 선명했다. 총순찰의 영역을 침범하는 처사에 무상검왕은 이의를 제기했으나, 절검수사는 기다렸다는 듯 도찰당(都察堂)을 움직여 총순찰의 수족들을 뇌옥에 가두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동안 순찰대의 서슬에 원한을 품었던 자들이 호법원에 몰려와 밤낮으로 고변을 일삼았고, 대호법의 손아귀가 점점 총순찰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그것이 가시화되었을 때 무상검왕은 더 이상 자중하기를 포기했다. 천하제일의 검법을 지닌 채 백기투항하는 것은 호걸의 일이 아니었다.

[4]
군사부와 순찰대 사이의 알력은 그 연원이 제법 깊었다. 무림맹의 책사들은 당연하게도 문사(文士)였고 무공을 모르는 자도 적지 않았으나, 그래도 무사들이 자신들의 말에 따라 움직여주기를 바랐다. 반면에 무림맹의 호걸들은 천지를 떨어 울리는 자신들이 싸움에 있어서는 서생보다 더 낫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군사부가 암습을 계획하면 순찰대는 정면을 뚫어버렸고, 총군사가 일망타진을 주문하면 총순찰은 포위망의 한쪽을 열어두었다. 그러고도 이길 때가 많았기에 크게 불거지지는 않았으나, 무림맹의 검이 실은 총순찰의 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군사부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그러니 절검수사가 처음 집법당을 만들었을 때 군사부가 환호한 것이 비단 사적인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림맹의 언로를 틀어쥔 문사들이 대호법의 편에 서자 십대장로(十大長老)는 중립을 지켰고, 삼봉공(三奉公)은 호법원을 격려하기에 이르렀다. 내총관은 양비론을 취했고 외총관은 대호법의 사람이었기에 총순찰을 암묵적으로나마 지지하는 곳은 약왕당(藥王堂)이 유일했다. 그러나 순찰대가 합심하여 무상검왕을 따랐으므로 총타의 세력은 결국 양분되었고, 갈등의 기류가 감지되자 분타들 역시 양편으로 갈라져 분주히 서찰을 주고받았다.

무상검왕은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도찰당에 가득한 투서들은 진위와 상관없이 명분으로 작용했고, 이미 뇌옥으로 끌려간 측근들이 적지 않았다. 천하의 공론에 기대어 버티기에는 맹주의 개입이 두려웠다. 그는 마침내 구백오십검법을 믿기로 결단하고 만령검룡(萬靈劍龍)과 유성검존(流星劍尊)에게 밀지를 전했다. 보름달이 먹구름을 비추던 밤, 무상검왕은 양익만을 대동한 채 호법원으로 쳐들어가 하인들의 숙소를 도륙했다. 무공을 모르는 자들만 1백 명이 넘게 죽었고 절검수사가 당도했을 때는 이미 구백오십검법이 충분히 피를 마신 뒤였다. 대호법은 집법사자들이 시간을 끄는 사이 왼팔을 잃은 채 분분히 도주했다.

한번 살계(殺戒)를 연 이상에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무상검왕은 호법원의 뇌옥에 갇혀 있던 고수들을 전부 풀어주었고, 그중에는 철성냉월(鐵性冷月)과 망혼일검(亡魂一劍)를 위시한 명교의 요인들도 적지 않았다. 새벽녘에 상황을 알아차린 외총관이 가장 먼저 명교도의 손에 죽었고 내총관은 순찰대의 칼에 난자당했다. 무상검왕은 그들을 이끌고 피바다가 된 총타를 빠져나갔다가 사흘 만에 오백을 더 죽이고 돌아와 맹주에게 도전했다. 소성검후(昭星劍后)가 노호하며 막아섰으나 십여 합만에 패퇴했고, 구백오십을 죽인 구백오십검법은 마침내 풍운검선의 피를 세상에 뿌렸다. 무림의 하늘이 뒤집어졌다.

[5]
총타의 싸움에서 구백오십검법의 신위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것이 천하제일의 무공임을 부정하지 못했다. 공석이 된 맹주위는 자연스럽게 총순찰에게 돌아갔고 나흘 전과는 격이 다른 인물이 된 그를 사람들은 무상검제(無上劍帝)라 높여 불렀다. 확실히 그는 무공뿐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전과는 달라졌다. 둔천귀도(遯天鬼刀)와 복파낭군(復破囊君)을 비롯한 녹림의 투항자들이 군사부에 발탁되었고, 그간 정사지간의 인물로 치부되었던 환표도왕(喚飄刀王)이 명숙으로 인정받았다. 외총관을 살해한 명교 출신의 고수들도 뇌옥에 돌아가지 않았다.

명교와의 결전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양의천권(兩意天拳)이 주선한 화의에서 무상검제는 명교에 유리한 조건들을 전부 수용해냈다. 대신에 명교에서도 무림맹에 남은 고수들의 쇄환을 거론하지 않았다. 무상검제는 그들에게 아무 직책도 주지 않았으나 내쫓지도 않았다. 명교의 탈옥자들은 의뭉스럽게 총타를 배회하며 전임 맹주가 발탁한 인사들을 위축시켰다. 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인재들이 줄을 이었고 산재한 빈자리는 검남 출신의 신진들로 채워졌다. 삼봉공의 구성 역시 완전히 바뀌었다.

물론 머지않아 반향이 있었다. 해남도(海南島)에 내려가 있던 비각주 벽혈신군(劈血神君)이 무상검제를 맹주로 인정하는 대신 반기를 들었다. 남쪽의 1백여 분타와 그 안에 속한 방문파가들이 벽혈신군의 호령에 응하자, 무상검제는 적수낭랑(赤手狼娘)을 집법당주로 삼고 추살을 명했다. 추살대는 가는 곳마다 항복을 받았으나 남해에 다다를 무렵 궤산일표(潰山一鏢)가 적수낭랑을 쓰러뜨리자 더 진격하지 못했다. 때마침 바다를 건너온 벽혈신군은 추살대를 습격해 섬멸하고는 사방으로 격문을 돌리며 북진하기 시작했다.

벽혈신군의 일성이 천하에 뿌려지자 관서에서 소성검후가 호응했고, 맹 내에서는 장로들이 밀사를 보내왔다. 무상검제는 친히 강남으로 내려가 벽혈신군과 크게 싸웠으나 뜻밖에도 평수에 그쳤다. 벽혈신군은 무공으로는 열세였으나 내공에서 크게 우세였고 그 내공은 혈맥을 뒤틀어 억지로 타통시키는 압렬공(壓裂功)의 심법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심법과는 기연이 없었던 무상검제는 장강을 사이에 두고 벽혈신군과 대치하며 약왕당에 영단을 독촉했다. 그러나 육합심명단의 제조는 다그친다고 진척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무상검제는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의심을 하루가 다르게 키워나갔다.

[6]
강남의 싸움으로부터 백일이 채 되지 않아 무상검제는 총타로 돌아왔다. 장강의 전선은 만령검룡에게 일임했고 관서의 소성검후는 둔천귀도를 보내 막도록 했다. 급한 싸움을 뒤로하고 돌아온 그가 열중한 것은 영단의 제조였다. 약왕당주는 하루가 멀다하고 불려가 호된 질책을 들었는데 대부분 연단술의 이치에 맞지 않았다. 철성냉월과 망혼일검이 모습을 드러낸 채 약왕당 주변을 맴돌았고, 무공을 모르는 방사(方士)들은 야음을 틈타 자주 달아났다. 군사부에서 명교도의 거취를 명확히 할 것을 청하자 무상검제는 총군사에게 근신을 명했다.

그 즈음의 삼봉공은 무상검제에게 지명을 받은 뒤에도 한참 동안 총타에 오지 않았고, 십대장로는 있는 듯 없는 듯 칩거하며 저마다 누군가와 연통을 넣었다. 내총관은 무림맹의 장원을 매각하여 총타를 운영했고 외총관은 황문(黃門) 출신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녹림과의 밀월은 복파낭군의 근신과 함께 중단됐고 약왕당과의 우호는 무상검제 스스로가 깨뜨린 지 오래였다. 오직 순찰대만이 중원 전역에서 맹주의 검을 자처하며 시체를 만들었으나 벽혈신군이 추살되었다는 낭보는 오래도록 들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교착된 난국의 타개를 위해 무상검제가 선택한 행보는 수련이었다. 물론 그가 수련할 만한 무공은 예전에 대성했었던 구백오십검법이 전부였다. 하지만 적을 벨수록 강해지는 신묘한 공능은 여전히 무상검제의 마음속에 감명깊게 남아있었고, 겨우 구백오십 번으로 그 공능이 한정되어 있다고는 거의 믿을 수 없었다. 예컨대 천 번까지일 수도 있어 보였다. 그리하여 그는 눈먼 검으로 날마다 누군가를 베어나갔다. 그것이 구백 번째쯤 되었을 무렵 마침내 이변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에게 좋은 이변은 아니었다. 왼팔과 함께 무공을 잃은 줄만 알았던 절검수사가 돌아온 것뿐이었다. 학우선을 들었던 오른손에는 삼척검이 들려 있었고 독심이 담긴 칼날은 예전과 비슷하게 매서웠다. 그가 산동에서 모습을 드러낸 다음 크고 작은 일곱 차례의 생사결에서 승리하자, 동쪽의 분타들은 모두 절검수사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순식간에 천하가 모두 그의 이름을 외쳤고 강호가 네 개의 세력으로 나뉘는 듯하다고 떠드는 호사가가 있었다. 동요의 바람에 맞추어 그 달에 벽혈신군이 만령검룡을 대파하고 장강을 넘었다. 소성검후와 절검수사는 재빨리 벽혈신군의 양익을 자처했고 풍운검선의 원수를 갚겠다는 무사들이 구름처럼 그 휘하에 모였다.

[7]
세 방향에서 치고 들어오는 효웅들을 무상검제 홀로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참패해 돌아온 만령검룡은 더이상 신뢰의 대상이 아니었고 벽혈신군이 장강을 넘을 무렵 둔천귀도가 소성검후의 칼날에 쓰러졌다. 유성검존은 벽혈신군의 북진을 막지 못하고 도망쳤으며, 복파낭군은 동쪽으로 출정하라는 맹주의 명령을 거절한 채 산중에서 할거했다. 무상검제는 결국 망혼일검을 좌순찰로 삼아 동쪽을 막고 철성냉월을 우순찰로 삼아 서쪽을 막았다. 명교도를 양익으로 삼은 처사는 정종의 명숙들을 실망시켰다.

급기야 십대장로 중 하나였던 태청신검(太淸神劍)이 공개적으로 맹주를 비난하자 무상검제는 진노했다. 태청신검은 그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양 사임해 잠적했고 다섯 명의 장로가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무상검제가 가장 공들인 남쪽의 전선은 회하까지 밀려났으며 후방의 분타에서도 무상검제를 성토하는 괘서가 끊이지 않았다. 다시 수련에 열중하려는 맹주에게 외총관이 찾아온 것은 그 즈음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원 미상의 무사 타천패검(打天狽劍)이 장로로 지명되었다.

칩거를 유지하던 다른 장로들과는 달리 타천패검은 황하의 남북을 분주히 오가며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안면이 생소한 고수들이 무림맹 총타에 모여들었고 그중 몇몇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당시 무상검제는 막대한 내공의 벽혈신군만 사라지면 누구든지 구백오십검법으로 참살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무림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설령 대도(大都)의 한(汗)이 잠시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무방하리라고 여겼다. 혹은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이윽고 대계가 무르익었다.

무상검제가 수련을 서둘러 두 번째로 구백오십의 생령을 삼켰을 때, 검은 깃발을 든 기병들이 벽혈신군에게 성지(聖旨)를 전했다. 황실의 초청을 경시하지 못한 벽혈신군은 친왕을 만나러 떠났다가 습격을 받았고 북명뇌엄공(北溟牢掩功)을 극성까지 익힌 호인(胡人)이 압렬공의 진기를 얼려버렸다. 타천패검과 함께 등장한 무상검제가 구백오십검법을 펼칠 때까지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러나 벽혈신군의 목으로 짓쳐든 칼날은 느닷없이 기울어지며 털끝 하나 잘라내지 못했고, 황망해진 무상검제는 허우적대며 세 번이나 허공을 찔렀다. 다음 순간 태청신검이 그의 손목을 베어버렸고 단천사도(斷天死刀)의 칼이 옆구리를 깊숙이 쑤셨다.

그렇게 하늘이 다시 뒤집어졌다. 맹주가 거꾸러진 자리에서는 황군도 타천패검도 살아나갈 도리가 없었다.

[8]
태청신검과 단천사도는 물론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벽혈신군조차 무엇이 무상검제의 검로를 흔들었는지는 확언하지 못했다. 천하일절의 검법으로 알려졌던 구백오십검법의 이변을 두고 수많은 무림인이 조사에 나섰으며 그들의 탐문은 하나같이 무극일노에서 멈췄다. 결국 무극일노가 풍운검선에게 검보를 바치기 전에 요결(要結)을 기록해 두었다는 것이 드러나자 구백오십검법은 기어이 그 발견자를 잡아먹었다. 혈겁이 지나간 뒤에 요결은 벽혈신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열두 명의 검호가 궁구한 결과 마침내 그 검리에 숨겨진 독수가 공표되었다.

검결을 짜맞춘 바에 따르면 구백오십검법은 초승으로 시작해 그믐으로 끝나는 무공이었다. 구백오십을 죽여 극성에 이른 뒤에는 오직 구백오십만 더 죽일 수 있는 검법이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손속이 잔혹할지연정 사파라기에는 모호했던 겁혼도수가 패도의 말로를 전시하고자 그런 살검(殺劍)을 만든 것이었다고들 했다.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들 모두가 구백오십검법이 마공이라는 데에는 동의했다. 무상검제는 맹주위를 어지럽힌 마인으로 기록되었고 명교에서도 북적(北敵)과 결탁했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하는 자들이 많았다.

무상검룡이 검왕을 거쳐 검제로 스러지기까지 직접 죽인 사람은 구백오십의 갑절인 일천일백이었으나 휘말려 죽은 사람은 열 배가 넘었다. 강호 전역에서 벌어진 상잔으로 현문정종의 후기지수들 중 기업을 잇지 못한 자들이 많았고 검남 출신의 고수 중 상당수는 사문에서 용납되지 못해 추방당했다. 중원 천하에 원한이 넘쳐흘렀으며 천산에서는 무상검제의 휘하에 있었던 명교도들을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추살은 추살을 부르고 복수는 복수로 뒤덮여 대혈사 이후로도 2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혈사가 무림을 적셨다. 강호에 평화로운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명숙들이 거의 사라질 때쯤에야 그것이 멈췄고 그 뒤로는 마침내 비사(秘史)에서만 일의 시종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무상검제가 검마(劍魔)로 공인된 뒤 벽혈신군이 구백오십검결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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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네트
24/12/19 00:3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4/12/19 01:14
수정 아이콘
재밌습니다.
마술의 결백증명
24/12/19 01:18
수정 아이콘
구백오십의 갑절이면 일천구백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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