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다룬 억조 조(兆)에서 파생된 한자들 중에 그윽할 조(窕)가 있다. 고요할 요(窈)와 함께 '요조'라는 단어를 이루며, 이 단어를 쓴 '요조숙녀'는 보통은 정숙한 여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옛날 죽간에서 요조를 요적(要翟)이라고 쓰기도 했고, 이 글자는 '허리가 날씬하다'라는 뜻의 요조(腰嬥)로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윽할 조(窕), 꿩 적(翟), 날씬할 조(嬥)는 음이 비슷해서 서로 통하는 글자로 쓰일 수 있다. 날씬할 조(嬥)는 계집 녀(女)가 뜻을 나타내고 꿩 적(翟)이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다. 실은 그래서 요적(要翟)이라는 표현에서 꿩 적(翟)을 뜻이 통하는 날씬할 조(嬥)로 바꿔 읽었을 것이다.
여자의 몸매가 꿩 같으면 날씬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쨌든, 이 글에서는 요조(窈窕)를 요조(腰嬥)로 바꿔쓸 수 있다는 점에서 兆를 대신할 수 있는 꿩 적(翟) 이야기를 하겠다.
왼쪽부터 꿩 적(翟)의 갑골문, 금문, 초나라 간독, 소전체.
翟은 위에는 깃 우(羽)가 있고 아래에는 새 추(隹)가 있는 글자다. 새의 깃이 매우 길어서 돌출되어 있는 새니, 원래의 의미는 꼬리가 긴 꿩을 가리킨다. '적' 외에도 '책'이란 음이 있는데, 성씨나 지명으로 쓰이며, 용례로는 중국 위저우시의 옛 이름인 '양책(陽翟)이 있다. 翟은 성씨로는 '적', '책' 두 음이 모두 가능하다.
최근에는 깃 우(羽)의 갑골문이라고 생각한 문자가 원래 의미는 빗자루인 살별 혜(彗)를 가리킨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 翟 역시 위에 깃이 아니라 빗자루를 지고 있는 꼴이다.
살별 혜(彗)의 갑골문.
이를 해명하는 방법으로, 옛날에는 새의 깃털로 빗자루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翟(꿩 적, 적거(翟車), 묵적(墨翟) 등. 어문회 준특급)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翟+手(손 수)=擢(뽑을 탁): 발탁(拔擢), 탁과(擢科) 등. 어문회 1급
翟+日(날 일)=曜(빛날 요): 요일(曜日), 흑요석(黑曜石) 등. 어문회 5급
翟+木(나무 목)=櫂(상앗대 도): 계도(桂櫂), 노도(櫓櫂) 등. 어문회 준특급
翟+水(물 수)=濯(씻을 탁): 세탁(洗濯), 탁족(濯足) 등. 어문회 3급
翟+火(불 화)=燿(비칠/빛날 요): 요요(燿燿), 병요(炳燿) 등. 어문회 준특급
翟+竹(대나무 적)=籊(가늘고길 적): 적적(籊籊), 적적죽간(籊籊竹竿) 등. 어문회 특급
翟+米(쌀 미)=䊮(곡식 적): 급수 외 한자
翟+光(빛 광)=耀(빛날 요): 요도성(耀渡星), 조요(照耀) 등. 어문회 2급
翟+走(달릴 주)=趯(뛸 적|뛸 약): 적필(趯筆) 등. 어문회 특급
䊮(곡식 적)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䊮+入(들 입)=糴(쌀사들일 적): 적미(糴米), 조적(糶糴) 등. 어문회 특급
䊮+出(날 출)=糶(쌀내어팔 조): 조적(糶糴), 진조(賑糶) 등. 급수 외 한자
翟(꿩 적)에서 파생된 한자들.
꿩의 길고 화려한 깃털은 눈에 띄는 특징이라, 이에서 눈에 띌 만큼 '빛을 비추다'나 '빛나다'라는 뜻이 나왔으며, 옷감을 빛나도록 물에 '빨다'는 뜻이 나왔을 것이다.
擢(뽑을 탁)은 手(손 수)가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꿩 깃처럼 눈에 띄는 것을 손으로 뽑는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曜(빛날 요)는 日(날 일)이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햇빛이 눈에 띈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燿(빛날 요)는 火(불 화)가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불빛이 눈에 띈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濯(씻을 탁)은 水(물 수)가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눈에 띄도록 옷을 빤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耀(빛날 요)는 光(빛 광)이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빛이 눈에 띈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또 날씬하고 잘 뛰는 꿩의 모습에서 뜻을 가져오기도 한다.
嬥(날씬할 조)는 女(계집 녀)가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여자가 꿩처럼 날씬하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櫂(상앗대 도)는 木(나무 목)이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나무로 만든 날씬한 것이라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상앗대는 배질을 할 때 쓰는 긴 막대를 가리킨다.
籊(가늘고길 적)은 竹(대 죽)이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대나무가 꿩처럼 가느다랗고 긴 모습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趯(뛸 적|뛸 약)은 走(달릴 주)가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꿩처럼 잘 뛴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한편 翟은 원래 의미와는 관계 없이 가차되어 '곡식을 사고 팔다'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이 글자가 나중에 糴(쌀사들일 적)과 糶(쌀내어팔 조)로 발전했다.
糴과 糶는 곡식의 매매를 가리키는 한자로 糴이 買(살 매), 糶가 賣(팔 매)에 해당한다. 원래는 買가 사고파는 행위를 모두 가리켰는데 둘을 구분할 필요가 생기면서 買에 出(날 출)을 덧붙여 만든 한자가 賣다. 이처럼 䊮(곡식 적)에 出을 덧붙여 만든 한자가 糶고, 이 한자의 반의자로 出의 반의어인 入을 덧붙여 만든 한자가 糴이다. 우리말에서는 '사고 팔다'지만, 한자로는 '팔고 사다'의 순서인 매매(賣買)로 쓰는데, 곡식을 사고 파는 것 역시 같은 순서인 조적(糶糴)으로 쓴다는 것이 흥미롭다.
전국시대 초나라 죽간인 포산초간에서는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곡식 종자를 사들인다는 글이 있는데, 이 '사들인다'를 표현하기 위해 翟을 썼다. 형성자 중에서는 성부만을 가차해 쓰다가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의부를 덧붙이는 경우가 있으니, 糴도 처음에는 翟으로만 쓰다가 '곡식'을 나타내기 위해 米를, '사들이다'를 나타내기 위해 入을 덧붙였을 것이다. 그리고 買가 본디 매매를 같이 나타내는 한자임을 고려하면 翟이 糴뿐만 아니라 糶도 같이 가차했을 것이다.
한편 䊮은 설문해자에서 잘못 풀이한 한자일지도 모른다. 전래되는 선진·양한 시대 문헌에서 용례가 설문해자밖에 없기 때문이다. 翟으로만 곡식의 매매를 나타내다가 糴과 糶로 동시에 분화했는데, 허신이 이를 보고 入+䊮, 出+䊮으로 잘못 분석해서 䊮이라는 한자가 있었다고 한 것이 아닐까. 혹은 䊮이라는 한자가 買처럼 원래는 '곡식을 사고 팔다' 양쪽을 모두 뜻하다가 糴과 糶로 나뉘었을 수도 있다.
전래되는 문헌이 아닌 출토된 대나무 쪼가리나 나무 쪼가리, 즉 간독에서 䊮의 용례를 찾아본 결과, 이 추측을 입증하는 자료가 나왔다. 이야진간에 나온 “현에서 곡식을 사들이도록 명령한 바(縣所以令䊮粟)”란 문구가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䊮을 정리자가 糴의 의미로 추측한다는 주석을 남겨놓은 것이다. 거연한간에서도 “곡식을 사들이도록 하다(使䊮粟米)”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의 䊮 역시 糴로 해석해야 뜻이 통한다. 포산초간에서도 䊮이 나오는데 糴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䊮의 의미는 설문해자에서 말한 대로 곡식이 아니라, '곡식을 사고 팔다'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翟과 翟에서 파생된 한자들의 의미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翟과 파생자들의 의미 관계도.
요약
翟(꿩 적)은 꿩의 긴 깃털과 몸체를 본뜬 한자다.
翟에서 擢(뽑을 탁)·曜(빛날 요)·櫂(상앗대 도)·濯(씻을 탁)·燿(비칠/빛날 요)·籊(가늘고길 적)·䊮(곡식 적)·耀(빛날 요)·趯(뛸 적|뛸 약)이 파생되었으며, 䊮에서 糴(쌀사들일 적)·糶(쌀내어팔 조)가 파생되었다.
翟은 파생된 한자들에 '눈에 띄다', '가늘다', '뛰다' 등 꿩의 특징을 부여하며, '곡식을 사고 팔다'로도 가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