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대학 동기들과 술자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요즘 스타1 리그가 다시 인기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와 추억을 되새기다(요즘 주변에 이런 사람이 꽤 됩니다.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진 듯)
제 대학 시절 스타대회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술기운과 새벽이 부른 하수의 심경변화죠.
1. 1학기
저의 모교는 매년 1학기에 개인전, 2학기에 팀전을 치릅니다.
배넷에서 그냥 어느 정도 하는 수준의 저그였던 전 군대가기전이었던 2004년 1학기에 당당히 개인전에 출전합니다.
결과는 16강 탈락! 그것도 저저전에서 저글링히드라 타이밍러쉬에 털리는 허무한 패배였죠. 제 실력이 시원치 않았기도 하지만, 상대는 대회 우승자이기도 했습니다.
소소한 기억으론 제 대학동기인 여자사람 친구와 제가 학교 PC방에서 팀플을 하던중 주최측이 제 친구를 결승전 이벤트에 섭외합니다. 베르트랑과 장진남이 각각 여성 유저 한명씩을 달고 랜덤으로 로템 2:2 팀플을 펼쳐 여성 유저의 본진(커맨드 넥서스 해처리)이 먼저 깨지는 쪽이 지는 '공주를 지켜라'였죠.
장진남 팀 여성유저는 전형적인 남친에게 배운 로템 팀플용 토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8시가 나오자 2겟을 짓고 질럿을 적당히 수비적으로 생산한 다음 언덕에 포톤을 깔더군요. 랜덤 테란이 나온 장진남(6시)은 1팩1스타.
제 친구도 토스(12시)를 골랐고, 역시 랜덤 테란이 나온 베르트랑(2시)은 무난한 2팩 메카닉을 선택합니다. 제 친구는 팀플 물량은 왠만큼 뽑던 친구라 정석적인 팀플 토스를 준비했죠. 가볍게 8시 토스를 압박했지만 언덕 캐논 확인하고 후퇴, 베르트랑은 빠른 타이밍에 앞마당 선택.
장진남은 초반 빠른 2드랍쉽 4탱크 드랍을 시도했지만, 제 친구는 아무 피해없이 완벽하게 막았습니다(상대가 나올 생각을 안해서 병력이 다 본진에 있었음). 이어 3드랍쉽 6탱크 드랍으로 넥서스 일점사를 했는데, 약간 위험했지만 이것도 막아냈습니다.
베르트랑은 헬프 오려다가 제 친구가 의외로 잘 막자 장진남에게 역러쉬를 가는게 아니라 그답게도 섬도 먹고 미네랄 멀티도 먹습니다;; 하지만 베르트랑의 물량이 폭발했음에도, 장진남의 4드랍쉽 8탱크가 다시 넥서스를 일점사해 제 친구 팀이 지고 맙니다. 제 친구는 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우리 진거에요?ㅠㅠ"라고 물었는데 베르트랑이 "이교써 이교써~ 우리가 이교써~"라고 답해줬다는 후문이...
2. 2학기
군대 가기전 마지막 추억으로 2학기 팀전(우승상금 100만원)을 준비합니다. 교내 고수 테란 둘(동아리 동기, 과 동기)을 섭외하고, 저는 팀플로 빠지고, 실력은 좀 떨어지나 무난한 팀플 토스 유저 선배를 섭외해 팀플을 준비했죠. 두 테란 모두 저그전에 강점이 있고 토스전엔 좀 약했습니다. 전 저그와 토스 실력 차이가 제법 났는데, 저그로는 전패하지만 토스론 가끔 이길 정도...
전력에 아쉬움을 느끼고 당시 송병구(갓 데뷔) 등과 연습한다던 고수 저그를 섭외했지만, 그는 이미 다른 팀으로 출전하기로 정해져있어서 아쉬움을 삼켰죠(이 선배는 1학기 개인전 8강(저저전 패). 이 팀전에서도 8강에 그칩니다).
당시 저희 학교는 팀에 본교 학생 2명 이상만 있으면 학교 외 사람도 함께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전 그리 인맥이 넓진 않아서 딱히 이 규정을 이용하지 못했지만, 위에 말한 제 친구는 자기 지인들로 초강팀을 결성해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게 됩니다.
3. 전 프로게이머의 등장
동방에서 밥을 먹던 중 학교 선배의 군대 후임이 다름아닌 전 프로게이머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온게임넷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토스전에 특히 강력했던 유명 테란이었습니다. 선배는 '이번주에 술한잔 하기로 했다'고 했고, 전 그 자리에 무작정 따라나갔습니다. 은퇴한지는 몇년 됐지만, 틀림없는 개고수 아니겠습니까.
전 안면 몰수하고 사정을 설명한 뒤 출전을 간청하고, 그는 의외로 선선히 수락합니다. 은퇴한지도 몇년 됐고, 심심했고, 친분도 있고, 대학 대회 쯤이야 하는 생각이었겠죠. 집이 저희 학교에서 엄청 멀었지만 기꺼이 경기 때마다 오겠다고 했습니다. 개인전 출전 선수가 3테란이라 좀 불안했지만, 나름 제 주변 최고수들을 모았기에 자신감이 생겼죠.
4. 대회 시작
총 24팀이 출전, 예선전은 3팀1조로 1위팀만 8강에 진출하는 시스템. 전 프로게이머 형님의 나태한 준비상태는 명색이 프로 출신인 분이 예선전 현장에 마우스와 키보드조차 챙겨오지 않은 데서 드러납니다(나도 챙겨 다니는데!). 당시 대회 개인전 맵은 로템, 엔터더드래곤, 노스텔지아 등이었는데(팀플은 헌터-라그나로크), 그는 엔터더드래곤은 맵을 전혀 모른다며 로템과 노스텔지아에만 출전하기로 합니다.
운명의 예선 첫 경기 맵은 노스텔지아. 우린 개고수님을 믿고 출전시킵니다. 게다가 상대는 토스! 심지어 상대팀은 우리측 출전 선수가 전 프로게이머임을 알아보고 경악합니다.
그런데... 물량에서 꾸준히 밀린 끝에 예상외로 허무하게 패배!ㅠㅠ 벌쳐 흔들기가 거의 통하지 않은 게 컸습니다. 상대는 환호 작약, 우리는 멍... 전 프로님은 멘붕... 저그전도 아니고 자신있는 토스전에서 일반인에게 무난하게 졌으니 어처구니가 없었겠죠. 시뻘개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더군요. 그래도 팀플과 개인전을 이겨서 2-1로 승리.
다음 경기 저그가 굉장히 가난하고 공격적인 폭풍저그를 펼쳤는데, 실력차이도 나고 막으면 이긴다 싶자 우주방어테란(로템 12시 본진 미네랄 양쪽에 벙커+터렛을 박았던 기억이...)을 구사합니다.
흔들기 끝에 폭탄드랍을 온 저그 유저의 멘붕한 표정을 뒤로 하고 완승. 팀플도 이겨서 2승으로 전 프로 형님을 제외한 모두가 가볍게 승리를 거두며 8강에 진출합니다.
5. 8강전
8강에는 자기 마우스와 키보드를 챙겨왔더군요(크크). 하지만 지각-_- 결국 우린 전 프로 형님의 감각을 믿고 가장 마지막 경기이자 그가 맵을 모른다던 엔터더드래곤에 출전시키게 됩니다. 경기는 2vs2에서 5경기 돌입!
4경기 도중 도착한 그는 경기 직전 싱글로 들어가서 black sheep wall 치고 생전 처음 엔터더드래곤을 살펴봅니다(...) 상대가 교내에서 나름 이름이 있던 꽤 하는 토스였는데, 엔터더드래곤 특유의 돌아가는 길을 잘 활용한 무한 벌쳐 게릴라로 승리! 저희 팀을 4강에 올려놓습니다.
6. 4강전
4강전은 동아리 사람들이 대거 응원전을 펼쳐줍니다. 사실 별 기대를 안했는데 의외로 오오 4강?! 하면서 와준...
이날도 전 프로님은 지각합니다-_- 원래 저희는 3경기 로템에 출전시킬 예정이었으나...결국 또 5경기(노스텔지아)에 배치.
1경기(엔터더드래곤)에서 테란1(동아리 동기)이 50여분의 혈전 끝에 상대 에이스 저그를 잡고 승리! 전 그 친구를 격하게 포옹합니다.
하지만 헌터 2경기에서 저는 상대보다 3해처리가 늦고, 토스 형은 상대보다 3게이트가 늦는 그야말로 무난하게 밀리는 경기가 펼쳐지고... 하필 옵저버가 제 본진을 비춘 순간 저는 짓던 3해처리를 실수로 취소하는등-_- 무난한 패배.
3경기(로템)에 나선 테란2(과 동기)는 토스를 상대로 영 자신없어 하더니 바카닉을 시도, 무난하게 막히고 패합니다. 이날따라 차가 안 막혔다며 2경기 도중 도착한 전 프로님은 자신있는 로템 토스전에 나가지 못하고, 우리팀이 지자 매우 애석해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자기가 늦은 걸-_-
운명을 건 4경기, 저는 테란1과 테저 조합으로 나섰고, 상대는 1저그 1랜덤을 선택합니다. 저는 드론 정찰까지 보내 빠르게 확인을 했는데, 무려 2저그가 나옵니다.
2색 9드론 저글링이 제 본진으로 뛰고, 저는 피해는 컸지만 가까스로 막았습니다. 테크가 너무 늦어 챔버를 짓고 3크립콜로니를 짓고 스포어를 변태시키는 순간, 2컬러 3+3뮤탈이 제 머리위에...ㅠㅠ 이 장면은 아직도 제 머리에 스크린샷처럼 찍혀있습니다.
테란1은 상대가 가난하게 뮤탈을 갔으니 가볍게 한 명을 밀었지만, 이 저그를 버리고 빠르게 확장을 늘린 또다른 저그(아까 1경기의 에이스 저그)와 맵을 반띵하며 또다시 50여분의 처절한 사투를 벌이지만 아쉽게도 패하고 맙니다. 제가 살아만 남았어도 이겼을 텐데ㅠㅠ
7. 에필로그
전 프로님의 지각이 원망스러울 뿐 ㅠㅠ 결국 이 분의 우리학교 스타대회 전적은 2승1패로 마무리됩니다. 그래도 참 좋은 형이었습니다. 먹을 것도 잘 사주고(...) 엄청 느긋한 성격인데 마우스만 잡으면 눈빛부터 달라지는게 캬~ 나이 차이도 5살이나 나서 함부로 친한 척도 못했지만, 선배 말론 사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며...
3-4위전에는 아예 일이 있어 오지 못했고, 멘탈이 깨진 저희 팀은 0-3으로 완패해 결국 4위에 그칩니다.
우승은 앞서 언급한 제 친구의 슈퍼팀이 차지했습니다. 그것도 4강은 3-0, 결승은 4-0으로 압도적인 우승. 대회 전 서로 우리팀이 우승할 거라고 심리전 걸었었는데, 내기 안걸길 다행이었죠;; 초고수들만 모아왔더군요(그리고 그중 한명과 커플로 쨘! 군대 간 사이 연락이 끊겼는데, 요즘 뭐하고 사나 궁금하네요).
아직도 그때 같이 학교 다니던 선배나 동기들 만나면 가끔 이때 이야기를 합니다. 100만원 받았으면 동아리에 안 쏘고 잠적했을 거다, 의외로 4강까지 가서 놀랐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등등...
참 순수했던 시절입니다 크. 이게 벌써 13년전이네요 후덜덜... 신새벽에 두서없는 글 두드려봅니다.
* kimbilly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7-01-14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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