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2/10/20 14:19:40
Name 네로울프
Subject [잡담] 소년, 소녀 그리고 편지들...

.. 편지글을 남에게 보여준다는 게 썩 잘하는 짓은 아닌 것 같단 생각을 합니다. 특히 내 쪽에서 보냈던 것만 끄집어내는 것도 아니고 받았던 답장 까지 내보이는 게 과연 괜찮은 짓인 진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사실 친구들과 술 한잔에 기분이 흥건한 날이면 꼭 얼굴이 발그래해져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든여. 그냥 맞은 편의 술취한 친구 녀석이 들려주는 이야기 쯤으로 생각해 주시길.....

........................................

제목 절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보낸날짜 Fri, 11 Aug 2000 01:05:38 KST
보낸이 "zzt"
받는이 y*****@hanmail.net

아...정확히 제가 아는 분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아는 J씨는 일광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부반장을 했었던 사람이죠..
전 그 때 반장이었구요... 4학년 때 전학 간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천으로 전학을 간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이천리에 살았구요... 제 기억엔 바닷가 쪽인
흔히 비안물이라 불리는 곳과 한국유리 정문
근처의 두곳에 살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바닷가 시골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모두 까무잡잡하고 그랬었는데 J는
유달리 피부가 희고 이뻤으며 좀 성숙한 느낌의
도회풍의 이미지를 풍기는 아이였죠..
그 때 당시 일광초등학교의 분위기 뿐 아니라 주변
마을 전체의 분위기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서로
친하게 지내서는 안된다는 쪽이었죠. 그래서 아이들은
같은 반 친구이거나 같은 동네 또래이면서도 늘 따로
성별끼리 놀고 등하교도 서로 따로 뭉쳐서 떨어져
다니고 그랬었어요. 혹여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가
같이 다니거나 노는 모습이 보여지면 그 아이들은
각자의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심한 놀림을
당하곤 했죠.
그런데도 전 초등학교 3학년 때 J란 그 소녀와
점심시간에 함께 놀이를 하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어버렸었죠.
(그 놀이란게 운동장 한 귀퉁이에 있던, 콘크리트로
책걸상이 만들어진 야외 교실에서 그 돌책상 건너뛰기..
뭐 그런 것이었던 걸로 희미하게 기억되네요.)

그 전까진 도저히 여자아이와 함께 놀이를 한다는 걸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는데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
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정확한 되새김인지 모르지만
그 J란 소녀가 점심시간에 손을 내밀며 '같이 놀자' 라고
했었죠. 전 그 순간에 그녀를 따라 나서면 친구들로부터
숱한 놀림을 당할거란 걸 알고 있었죠. 그리고 짧은 순간
이었지만 엄청난 고민과 과감한 결단등이 내 머리속을 스쳐
갔었어요. 소녀가 손을 내밀었을 때 전 너무나 그 소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거든요. 아마도 그 j란 소녀를 무척 좋아
했었나봅니다. 아뇨 좋아했었죠. 초등학교의 그 때 이후로도
계속 그 이름을 잊어버린적이 없었거든요. 늘 가슴 한 켠에
남겨두었다 가끔씩 꺼내어보곤 흐뭇하고 아련한 추억에 젖곤
했었답니다.
늘 언젠간 한번쯤 우연처럼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전학을 간 이후론 그녀의 소식을 전혀 몰랐지만 말이에요.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떠올렸던 생각중 하나가
어쩌면 서울에서 j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였어요.
전 그 때 그 j란 소녀가 인천으로 전학을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아..그런데 확실치도 않은 데 제가 말이 너무 길어졌군요.
아이러브스쿨에 등록한 지 한 두달여쯤 됐어요.
그 두달동안 일광초등학교 동기들은 거의 아무도 없었는데
얼마 전에 두명이 새로이 등록을 했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살가웠던 친구들이 아니었는지 메일 한통 외에는
달리 연락을 주고 받지 못했죠.
오늘도 컴퓨터를 켜고 습관처럼 아이럽 스쿨에 들렀다가
잠시 둘러본 후 나가려다 '동문이 아닌 사람은 여기에 글을
남겨주세요.'란 제목의 계시판을 문득 보니 세개의 글이
등록되어있다란 표시가 떠있더군요. 그래서 동문이 아닌
사람은 어떤 이유로 여기에 와서 어떤 글들을 남길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 그 계시판을 열어봤죠.
아....그런데 거기에 그렇게 오랜 시절 따뜻하게 남아있던
이름이 눈에 띄더군요. j.*.*.!
가끔은 아이 럽 스쿨에서 j란 그 소녀를 만날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당장 그 이름과 부딪히니 너무 놀랍고
가슴이 떨리더군요. 그런데 남기신 글을 보니 4학년 때
전학간 것은 맞는데 그 곳이 구미라고 되어있더군요.
제가 잘못알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제가 기억하는 그 j가
아닌 다른 분인지 확신이 안서더군요.
그래도 행여나 하는 마음에 이렇게 장문의 메일을 보내게
되네요.
혹시 제가 기억하는 그 분이 아니라면 기분 상해하지 않으시길
부탁드리구요.
제가 기억하는 그 j라면 답장을 부탁드릴게요...

아...그런데 맞다고 해도 절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전 정진탁 입니다..
1983년에 일광 초등학교를 졸업했죠...(55회)
이천에 살았구요. 저희 집은 이천길과 노상길로 길이 갈라지는
초입에 있었죠..한국유리와 일광역 사이의 신작로 중간쯤이죠.
j란 소녀완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을 했었구요.
반장 부반장을 함께 했었어요. 그 때 선생님 성함이 남** 선생님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새 이름은 잊어먹어버렸네요..
기억이 실타래 풀리듯이 새어나오는 바람에 너무나 긴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주변머리 없음을 탓하지나 않으실까 걱정이네요.
네..그럼 안녕히....

...정진탁....


제목 [RE]절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보낸날짜 Fri, 11 Aug 2000 06:44:28 KST
보낸이 "j" [주소록에 추가] [수신거부에 추가]

받는이 "zzt"

예 맞아요. 그 j...
솔직히 님의 얼굴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고, 이름은 기억이 나네요. 모교사랑 사이트에서 님의 이름을 보고 편지를 써볼까? 생각을 했지만 절 기억 못하실 것 같아서 누군가에게서 편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국민학교 3학년때 담임 선생님은 남자 선생님이셨고, 굉장히 무서운 분이셨어요. 절 참 이뻐하셨어요.
구미로 4학년 1학기가 거의 마칠 무렵 전학을 갔지요.
아빠 직장관계상...
그리고 일광을 1번 가봤어요
전 구미에 살면서도 늘 일광을 그리워 했어요
뭐라고 해야하나?
어린시절 '김수영'이라는 다리가 불편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친구 손잡고 학교를 걸어다니고, 먼길 이긴 했지만 그때가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지숙, 이인숙(?) 친구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광에 한번 그러니까 고3때 한번 다녀 왔었는데, 그때 잠깐 지숙이와 수영이를 만났던 것 같아요. 혹시나 다른 친구들의 소식을 알까? 했었는데....
예 저는 그곳에서 쭉~ 부반장을 했었죠.
괜시리 떨리네요
맞아요! 제가 살던 동네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데, 바닷가 근처 였어요. 한국유리공장하고도 가까왔구요...
님의 편지를 받으니 괜시리 눈물이 나네요
난 그곳에 등록한게 막연한 어린시절의 그리움이었었는데, 이렇게 편지를 받으니 자꾸 눈물이 나요

처음 전학을 가선 시골에서 왔다고 친구들이 놀렸었어요
전학간 그날 시험을 봤는데 제가 배우지도 않은 범위의 시험문제라서 아마 70점을 맞았던 것 같아요.^*^
별얘기를 다하네요...
첨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많이 힘들었어요
꿈에(?) 그리던 도시의 생활은 제 기대를 무너뜨렸었죠.
물론 나중엔 친구들이 많아졌지만...
지금은 모교사랑 사이트에서 만나 연락을 하고 있어요.

님이 나를 인천으로 전학간 것으로 생각하는건 아마 친구중 다른 아이가 인천으로 전학 간 것을 착각하시는 것 같아요.
누구라고 이름을 들었었는데...

실은 처음에 모교사랑 사이트에 등록을 하고는 일광초등학교를 찾아봤는데 없어서 등록을 못하고 몇달 뒤에 등록을 한거예요
혹시나 하는 맘에... 근데 정말 편지 보내줘서 고마워요

너무 반가운 맘에 글을 써서 두서가 없죠?
미안해요... 날 기억해줘서 고맙구요...
자주 편지 왕래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어디에 살고 계신가요?
갑자기 궁금한게 참 많아 지네요

좋은 하루 되시구요... 그럼 답장 기다릴께요


친구라는 이름으로 j가.



제목 그래요..그립죠...
보낸날짜 Tue, 15 Aug 2000 00:23:27 KST
보낸이 "zzt"
받는이 "j"

그 바다, 그 초록의 들, 강둑을병풍처럼 두른 대나무 숲.
언제나 그 바다를 가슴에 품고 있죠. 육지 생활에 피폐해져
내 안의 바다가 조금씩 말라가면 난 또 아득한 그리움으로
심한 땅멀미에 시달리죠.
그러면 난 또 바다에 돌아가기를 음모하고, 콘크리트가 버거
운 얕은 나무들의 그늘에서 그늘만으로 다니며 늙은 승냥이처
럼 기회를 엿보죠.
이윽고 내가 바다에 다다르면 내 눈이 닫기 전에 내 맘이 먼
저 치달아 난 그 옅은 내음 훔치기도 전에 흠뻑 차 버리죠.
무엇을 하러 온 것인양 부산떨지 않아도 거기 바다앞에
서는 것만으로 내 겨드랑이엔 다시 날개가 돋고 내 등엔
번쩍이는 비늘들이 일어서죠.
아..나는 너무나 과밀한 바다의 태생이니...

그렇게 한번씩 다다랐다 멀어져 올 때엔 난 다시 가슴 한쪽에
조용히 일렁이는 그 일광의 바다를 한웅큼 떠 온답니다.
...........

전 지금 서울에 있어요...
대학을 서울로 왔었거든요...
졸업한지도 벌써 4년쯤 되었네요..
직장을 딱 1년 다니다가 내 속의 역린이 일어나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은 영화를 만들고 있어요..
아..사실 만들기 시작한 건 이제 1년 남짓 나네요..
아직은 영화의 초입에서 기웃거리는 자겠죠..
비디오 작품 두개 만들어 보고 6미리로 160분 짜리 다큐멘터리
제작해서 그저께 첫상영회도 가졌죠. 지금은 계속해서 첫 16미리
필름 단편영화의 제작 단계에 들어가 있어요...
아..또 주절 주절 말이 많아 지네요...

저희 집은 아직 일광에 옛날 그 곳에 그대로 있어요. 부모님과
여동생이 아직 거기에 살고 있죠. 명절 때나 겨우 두어번 내려
갈까 잘 내려가보지는 못하네요..

이인숙, 이지숙은 님한테서 이름을 들으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정확히 맞는지 희미해서 잘 맞추어
지진 않네요...

아..그런데..님의 이름은 한번도 잊어본적이 없었는데..
얼굴은 이제 전혀 기억이 안나요.
기억속에 소녀는 아직 저편에 그대로 서있는데
그 사이에 뿌옇고 두터운 안개가 서려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네요.. 한 20여년인가 오면서 어느 새 희미해져
잊어버렸나봐요...

저도 중학교 2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을 간 후론 고향 친구들을
그렇게 자주 보진 못했답니다.
그래도 집에 가면 가끔 술도 같이 한잔씩 하고 그랬는데..
그 것도 서울로 학교를 온 이후론 일광에 돌아가면 모두들
떠날 나이였던지 멀리들 가 있다는 말만 바람결에 얻어
듣게 되더군요.

저번엔 어찌나 우리 동기들이 없던지 모교사랑에서 72년생들
모임 계시판을 구경갔더랬었는데 거기서 잊어버렸던 너무나
예쁜 단어를 다시 찾았답니다.
'필기' 란 말이었죠.
님은 기억하는 지 모르겠네요...
학교 가던 길에 피어있던 이름 모르던 풀에 가을 쯤이면
두툼한 줄기 하나가 삐죽이 올라오고 그 것을 살짝 비벼
열면 마치 솜같은 하얀 알맹이가 돋아 나오곤 했죠.
그 것은 먹을 수 있어서 학교 오가고 들로 쏘다니고 할 때
심심찮게 뽑아서 먹곤했죠. 좋은 간식 거리였던 것 같은데..

필기,노상길, 이천길, 굴다리, 작은 물땅구,큰 물땅구, 공굴,
새살 돋듯 그 이름들이 다시 마구 가슴에 일어나네요.
지금 눈감고도 그 하얀 길 한발짝도 놓치지 않고 다 따라 나설
수 있을 것 같은데...

님도 그 황금빛 들의 기억에 한부분이랍니다.
...............

한 사흘동안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답장을 일찍 못드렸어요.
아..계속 답장써야지, 써야지 맘만 채근되고 시간이 여의치
못했더랬어요. 그래서 조금 늦은 답장이랍니다.

결혼하시고 캐나다에 계신다면서요.
이민을 가신건가요?
자라오면서 그 단면의 한 때 한 때 마다 그 순간 님은 어떤
모습일까를 궁금해했어던 것 같은데...
아..이젠 멀리 외국에 계시니 제 소원중의 하나는 어쩌면
풀지 못할지도 모르겠네요...
언제고 꼭 한번이라도 님을 보고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거든요..^^;;
영화 하나 잘 만들어서 몬트리올 영화제에라도 들고 나가든지
해야겠네요...하하...^^;;

초등학교 4학년 이후 님은 어떤 모습들이었는지 궁금하네요..
그럼 이만 줄이께요...
답장 기다려도 되겠죠?...^^;;


서울에서 친구 진탁이가....


제목 잘 지내셨죠?
보낸날짜 Tue, 15 Aug 2000 06:36:58 KST
보낸이 "j" [주소록에 추가] [수신거부에 추가]

받는이 "zzt"

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왠지 맘이 이상해 지는 것 아세요?
왠지 내가 그 어린 j라는 소녀로 돌아가 있는 것 같은 느낌!
잊고 살았던 것들이 하나씩 둘씩 뇌리를 스치고 지나면서 뭐라고 해야하나? 그동안 너무 잊고 살았구나....
괜시리 내가 너무 삭막하게 산 것 같아서 맘이 우울해 지네요.

"필기"정말 생각나요? 어렸을때 먹었던 그맛!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가끔 동네 친구들 모여서 숨박꼭질하고, 늦게 까지 모여 앉아서 얘기하고...
구미라는 작은 도시로 전학한 후 난 전에도 얘길 했듯이 잘 적응을 못했어요. 거의 1년이 걸렸던 것 같아요

그리곤 쭉 구미에 살았어요. 대학까지...
제 학창 시절의 모습은 어땠을 것 같아요?
상상 해 보세요...
님이 영화찍는 모습이 상상이 안가듯이 상상 하실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전 결혼하기전 간호사 생활을 했어요.
학교 다니면서 힘들어 포기 할까도 생각 많이 했었는데 그나마 신생아실, 소아과 실습을 많이 하는 바람에 견딜 수 있었죠
전 아직도 그렇지만 겁이 무척 많아요
그치만 저에게 입혀진 가운이 절 강하게 만든 것 같아요
환자를 대할때만...

종합병원에서 횟수로 5년 일을 했어요..
지금도 가끔 그때 모습이 그리워요.
여기오고 한국에 한 2번정도 다녀 왔어요.
아직 계획은 없지만 내년쯤 한번 다녀 올 생각이예요.
근데, 님은 결혼 하셨나요?
궁금해서요...

저의 결혼생활은 다음에 띄워 드릴께요
제 모습이요? 알려드리기엔 괜시리 겁이 나네요...
님의 모습을 뵙고 싶어요
그리고 나에겐 너무 생소한 영화 이야기도...
내가 이렇게 편지 쓰는 것 괜찮죠?
전 솔직히 너무 좋거든요...^*^

영화일 하신다니 무척 바쁘시겠네요...
좋은 하루 행복한 하루 되시구요. 건강 조심 하세요
그럼.....
다음에 또 편지 드릴께요...


친구 j가...


제목 이런..제목도 없이 편지가 가버렸네요...^^;;
보낸날짜 Sun, 20 Aug 2000 12:24:41 KST
보낸이 "zzt"
받는이 "j"

정확한 기억인지 모르겠네요..
님이 전학을 가던 날이요...
아니 전학을 가기 하루전이던가 이틀전이던가
님의 집을 찾아갔었어요.
비가 오고 있었죠.
난 낮은 우산을 받쳐들고 님의 집 앞을 찾아갔더랬어요.
잘가라는 인사를 하고 싶었거든요.
비가 올 때라 거리엔 사람들이 드악했죠.
하지만 전 결국 님의 집 문을 두드리지 못했답니다.
아마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죠.
그 때 님과 저는 같은 반이 아니었고, 그래서 굳이
찾아가 잘가라는 인사를 할 마땅한 명분이 없었을 테고
또는 같은 골목길 쯤에 살아서 찾아가 인사해도 어색하지
않을 사이도 아니었고, 그리고 3학년 때 같은 반을 했지만
그 이후론 친하게 지내본 적도 없었던 것 같고...
어쨌든 소년은 그 소녀의 집앞을 몇번이나 왔다 갔다 하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답니다.
돌아가는 길에 길바닥의 애꿎은 돌맹이만 걷어찼었죠.
조악한 우산틈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자꾸만 소년의 이마로
떨어졌지만 소년은 그 것을 훔칠 생각도 않고 계속해서
널려진 돌맹이들만 걷어찼죠.
아침 나절에 시작된 비는 좁은 골목을 따라 하얀 바다와 초록의 들길까지
이어져 저녁 늦게 까지 내렸습니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와 마루 아래의 작은 댓돌에 앉아 통통대는
빗방울만 헤이다 제풀에 지쳐 초저녁 아주 이른 잠이 들었답니다.
그리곤 며칠 뒤에 소녀의 집이 이사를 갔다는 말을 어깨너머로
얼핏 들었죠...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비가 오고 있네요.
서걱한 잠자리에 밤새 뒤척이다가 담배나 하나 물어야지 하고
자리를 떨치고 나섰더니 새벽부터 시작된 비인지 제법 흥건히
젖은 땅위로 비가 듣고 있었어요.
새벽 담배란게 그렇듯이 한모금 깊게 품어 물었더니 가슴 안쪽이
찡하고 아파오더군요. 새벽녘에 구태여 번잡한 일들 생각에
보태고 싶지 않아 멍하니 비만 보고 있었더니 아주 긴 빗길
너머로 그 소년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낡은 검정 우산을 드는 둥 걸치는 둥 하고 무에 그리 화가 났는지 빗물이 앉은 웅덩이를 철퍽대며 무언가엔지 모를 발길질을 하는 소년이 보이더군요.
소년의 어깨 너머로 섣부른 저녁 어둠이 내려앉는 신작로 길엔 왜 그렇게도 사람 하나 없는지..
왜 그렇게 비는 끈질기게 내리는지....

담배를 다시 아주 짙게 빨아들이니 두터운 연기 다발이 목구멍을 지나 가슴 한 복판으로 뿜어져 가고, 허파의 깊은 꽈리들이 물결에 일렁이며 일어나는 말미잘 처럼 아우성칩니다.
여린 빗줄기 아주 멀리 작은 소년의 모습은 하얗게 옅어져 가는데 그와 나 사이를 가른 것이 흐린 비안개인지, 이제는 나이를
먹어가는 내 눈에 낀 지저분한 백태인지 그도 아니면 때 아닌
아침 나절에 흘낏 엿본 어린 소년의 마음에 성급히 경도된 눈물인지...

이제 벌써 점심먹을 시간이 되어가는 데도 비는 여직 그칠 줄을 모느네요.

영화요...
저 아주 늦게 시작했어요...
스물 여덟의 봄에 갑자기 영화가 하고 싶어졌죠. 아..이 걸 하지 않으면 내가 기어이 살지 못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죠. 하지 않으면 못살 것 같은, 살아도 죽어있을 것 같은, 그런
불안감이 갑작스레 엄습해왔습니다.
그예 쓸만하다 싶은 직장, 다달이 통장에 찍혀 나오는 돈다발들,
다 버려도 내가 가야지 그 길을 가야지 싶었답니다.
그러고도 2년여를 폐악한 자욱에 시달리며 흘려 보내다가 1년 쯤
전부터 영화를 배우고 또 만들기 시작했답니다.
지금은 아..이제 내가 제 길에 들어섰구나 싶은 안도감과 영화속
에 있는 순간 순간 마다 느껴지는 행복감에 도취되어 산답니다.

결혼은 안했어요....
스무살 중간고개 넘어가면서 3년간을 한여자를 사랑했죠..
결혼을 한하면 그 여자와 하겠거니 생각을 했었더랬는데
3년만에..그 여자가 떠나갔죠. 왜 떠나가는 지를 몰라서 그리고
너무 슬퍼서 2년정도의 시간 속에서 죽어가다가 살고 싶었는지
다시 아득 바득 기어 올라와서 지금은 그저 버텨가고 있죠.
그 이후론 결혼이란 생각을 안해봤어요. 어쩌면 갑자기 하게
될 지도 모르고 어쩌면 안하고 그저 혼자 계속 살아갈 지도 모르죠. 결혼에 대해 어떻게 해야겠단 개념 자체가 없답니다.

아주 긴 시간을 지나서 님에게 이런 말들을 하게 된다는 게 일견
우습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괜히 이상하게 여겨질까 저어되기도 하고 그러네요.

모르겠어요. 저도 참 좋거든요. 님과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 말이죠. 내 속에 꼭꼭 접어 놓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조금씩 풀어내고, 다독여 가고, 잠시 담배 한대 물고 그리움에 젖고, 그냥 그런게 무지 좋아요. 그리고 어린 마음이었지만 그리
워했던 사람 다시 만나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구요.

오늘은 너무 넋두리가 많아져 버린게 아닌가 싶네요.
다음에 또 편지 드리께요...

참...거기도 비가 오나요?



......서울에서 친구 진탁..


제목 갑자기 비가 그리워 지는 날!!!
보낸날짜 Tue, 22 Aug 2000 07:13:21 KST
보낸이 "j" [주소록에 추가] [수신거부에 추가]

받는이 "zzt"
잘 지내셨죠? 솔직히 편지 기다렸었는데 답장이 늦어져서 무지 바쁘구나 생각 했어요.
저는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거의 매일 컴퓨터를 만져요.
그래서 메일도 거의 매일 확인을 하구요...

비가 내렸나봐요... 여기는 겨울이 아니면 거의 비 구경하기가 힘들어요.
그대신 겨울엔 지겨울정도로 비를 구경해요.
10월말이나 11월부터 내리기 시작하는 비는 거의 3월까지 내려요
거의 매일...
물론 추운날은 눈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작년 같은경우 눈을 보지 못한 것 같아요
아! 스키장에서 봤었다...
우리 신랑이 스키 광이예요.
시간이 없어서 자주 가진 못하지만, 저요? 전 못타요.
겁이 많아서...
배울 기회도 없었고,
신랑 타는 동안 혼자서 카페에서 놀곤 해요...

저 전학오던날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오랫동안 살았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해야 한다는 두려움만 가득했던 것 같아요. 떠나기 싫었던.....

갑자기 일광의 바다, 아니 한국의 바다가 그리워지네요
집에서 10여분 걸어가면 바다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 바다는 호수 같아요. 잔잔한 파도가 이는...
한국의 바다. 갑자기 그리워 지네요
한국도 가고 싶고,

계절이 바뀔때마다 향수병에 걸리곤 해요.
님의 편지를 받아서 그런지 한국이 무지 가고 싶은 것 있죠?
무지 보고 싶은 사람도 많고...

결혼을 안하셨다구요? 진실한 사랑은 믿으시는 군요?
저요??!!!!
님은 성격이 어떠세요?
궁금해 지네요...^*^

좋은 하루 보내시구요. 저의 편지로 잔잔한 미소를 지을수 있는 하루가 되셨음 좋겠네요. 그럼....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j가...

........................
몇통의 편지가 더 오고 갔었습니다.
그러다 별 이유없이 일방적으로 편지를 끊어버리고 1년이 지났네요.
왜 그리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힘든 시간을 지나오던 때여서 그랬었을까?
일요일 늦은 오후 문득 그 소녀에게 다시 편지를 띄워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zzt &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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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toss
02/10/2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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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추억을 가지고 계시군요^^
저두 이런 비슷한경우가 있었는데.. 그 소녀가 절 완전잊어버렸는지
알아보지 못하더라구요. 그러다가 한두번 정도했다가 연락도 끊기구..
문득 저두 가끔 그소녀가 보고싶구그리워지는데...(혼자 주절주절..;;;)
편지를 띄워도 보는것도 나쁘진 않곘죠^^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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