텀이 조금 길었습니다. 추석 연휴는 잘 보내셨는지요. 사실 그동안 뭐 적당히 덜 알려지고 들어 있는 건 많은 나라 어디 없나 하고 휘휘 둘러봤는데 하나같이 마이크로국가 아니면 관광하기는 좀 까다로운 뭐 그런 나라들뿐이라 이번에는 나름대로 메이저한 영역에 손을 대 봤습니다.
보통 체코슬로바키아로 통합해서 알고 계시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로, 한데 묶여 있던 세월 자체는 의외로 정말 짧았습니다. 하도 유럽의 역사가 복잡다단하고 길다 보니 붙어 있는 기간이 한 몇백 년은 되겠지 싶으신 분들이 많으시겠습니다만, 전혀요.
두 나라가 같이 묶인 게 1918년입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무려 9백 년 동안 딴집살림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9백 년이지 우리 나라로 치면 한창 고려 목종이 개정 전시과를 들이대던 시기쯤입니다. 이쯤되면 이 둘이 붙어서 같은 나라로 독립한 게 신기할 지경이죠. 하긴 그러니까 철의 장막이 걷히자마자 바로 딴살림 차려서 나갔지...
그래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묶어서 이야기하기에는 좀 무리수죠. 그래서 오늘은 체코만 따로 다룹니다. 단, 제가 보기에는 이 체코와 슬로바키아에 있어서 현대사가 가장 중요하고 극적이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겠네요. 우리 나라도 일제 강점기 35년 억압의 세월이, 심지어 그것이 친일파가 되었건 민족주의파가 되었건간에 참 강렬하게 다가오듯이 말이죠.
본격적으로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름을 좀 보면, 체코라는 나라의 이름은 폴란드 어에서 유래했다고 해요. 폴란드나 체코나 서슬라브계인지라... 전설에 따르면 체코 땅에 사람들을 데려온 게 체흐(Čech)라서, 여기에서 체코라는 국명이 유래했다는군요.
유럽의 고대사를 보면, 제가 간단하게 이렇게 구분하고는 합니다. 라인 강 서쪽과 도나우 강 남쪽은 로마권. 그 위는 게르만 내지는 슬라브권. 즉 라인 강 서쪽과 도나우 강 남쪽은 어느 로마사연의 쓰신 여사님 말마따나 "로마화"되어 길과 도시 등의 사회간접자본이 깔리고 발전의 수혜를 입었다면, 그 너머는 상대적으로 좀 늦게 유럽사에 등판했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할게요. 유럽의 고대사를 놓고 보면
라인 강 서쪽과 도나우 강 남쪽은 메인 무대. 나머지는 아직.
아 물론, 예외는 있어요. 루마니아가 그 예외인데, 지고의 황제(Princeps Optimus)라 불리는 오현제 중의 두번째, 트라야누스 황제가 도나우 강을 넘어서 카르파티아 산맥을 이용한 자연방벽을 치고 다키아 속주를 만들어서 얼마간 통치한 전례가 있거든요. 고작 2백 년도 못 가서 군인 황제 시대의 아우렐리아누스가 철수시켜 버리지만...
그러면 체코는 어디에 있는가? 지도를 보면, 도나우 강이 체코 남쪽의 오스트리아를 관통하죠. 즉 체코는 도나우 강 북쪽에 있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체코는 고대 유럽에서는 로마 영역 밖에 있었다는 이야기고, 이는 다시 말하면 로마의 입장에서는 이민족들의 땅이었다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이 당시 체코는 마르코만니(Marcomanni)족을 주로 하여 콰디족 등의 게르만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미지는 260년경이긴 합니다만... 오른쪽 부분을 잘 봐주세요. 노리쿰(Noricum)이라 되어 있는 부분이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입니다. 그러니까 그 북쪽이 오늘날의 체코 지역이었던 셈이죠. 그 오른쪽의 판노니아(Pannonia)가 오늘날의 헝가리입니다. 그 북쪽은? 슬로바키아죠. 대충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어디쯤에 있으며 그 땅에 어느 이민족들이 있었는지 감이 잡히시는지요.
언제고 그렇듯이 이미지와 사진의 출처는 항상 위키미디어입니다.
자 그런데... 사실 지금까지 제가 연재했던 도나우 강 이북의 나라 - 에스토니아, 몰도바 - 에 대해서는 거의 그냥 "이민족의 땅이었수다" 하고 휙 지나갔는데... 체코는 그러기에는 좀 할 이야기가 있단 말이죠. 여러 모로. 특히나 오현제 중 마지막 황제, 철인(哲人) 황제라 불리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마지막 14년이 바로 이 마르코만니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둘이 아주 지독하고 지겹게 싸운 이 전쟁을 가리켜 마르코만니 전쟁(Marcomannic War)이라 하는데, 2세기의 로마 국경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 와중에 전염병까지 돌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결국 전선에서 최후를 맞은 최초의 황제가 되죠. 전사가 아니라 병사이긴 했지만.
이게 말입니다... 좀 나비효과스러운 면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는데 제가 이야기하는 나비효과의 시작점은 거의 200년 전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오늘내일 하고 있을 때 토이토부르크 숲, 소위 말하는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에서 바루스의 군단이 문자 그대로 개박살이 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만일 바루스의 군대가 박살나지 않아서 엘베 강까지 밀고올라갔다면, 오늘날의 체코-폴란드 국경지대의 구릉지대 내지는 최소 프라하를 관통하여 흐르는 블타바 강(Vltava)까지 전선을 밀어붙일 수 있었을 것이고,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은 로마 인에게 무릎을 꿇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철인 황제가 최전선에서 병사하는 일도 없었겠죠. 아마도. 아 물론, 체코 땅도 엔간히 평탄한지라 다키아 내지는 몰도바 꼴이 났을 가능성도 높긴 합니다만...
하여간 의미없는 가정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계속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로마와 마르코만니족 둘 다 결과적으로 14년간 헛심 쓴 꼴이 되었습니다. 로마는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을 접수하여 로마 영토로 두려는 계획이 실패했고, 마르코만니족도 로마로의 침공이 실패했죠. 다만 이 때 헛심을 좀 많이 쓰긴 했는지... 로마-게르만 전쟁이라 불리는, 로마 제국의 탄생부터, 아니 그 이전인 공화정 시대부터(BC 113) 700년을 서로 지치지도 않고 질기게 싸운 일련의 전쟁에서 50년간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건 당연히 패권국인 로마에게 유리한 결과였죠. 그 뒤에 싸운 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지 한참 뒤인 55년 후(235), 군인 황제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제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Maximinus Tracus) 때인데... 이게 그동안 사료로만 전해져 오다가 드디어 유물이 독일에서 발굴되면서 현재 연구가 진행 중이라 합니다.
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거의 즉시 로마와 마르코만니족은 휴전을 하게 되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즉위한 콤모두스의 평가가 워낙 안 좋고 또 실제로도 막장이었던 터라 그냥 지가 빨리 황제 되고 싶어서 아부지 죽자마자 강화한 거 아니냐 하시는 분들도 많은 걸로 압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콤모두스의 나이가 고작 만 16세였기 때문에 성년식을 치르니 마니 할 때였고 그렇다면 군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충신들에게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거든요. 이 사람들이 다 놀고 싶은 건 아니었을 테고, 더욱이 전선의 장병들과 자신들의 그 14년의 고생을 무위로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즉 이 때의 철수는 양쪽이 서로 군사/경제적으로 핀트가 맞아서 강화하고 철수한 게 맞다고 봐요. 콤모두스의 삽질이라기보다는. 사실 삽질인지도 의문이지만 일단 그 평가는 제껴두고서라도 말이죠.
딴소리가 조금 길었네요. 하여간 체코의 고대사는 이것만 기억하시면 될 것 같아요. 마르코만니족이 거기 살았다. 로마와 대판 싸운 기록이 있고, 그 상대가 그 유명한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였다.
중세의 체코는 좀 애매해요. 나라 자체는 합스부르크니 오스트리아 헝가리니 여기저기 좀 끌려다니는 모양새가 맞기는 한데, 잊을 만하면 한 건씩 대형사고 한 번씩 쳐 주시면서 유럽사에 존재감을 제대로 어필하는 나라거든요. 바로
보헤미아(Bohemia)가 여기 체코입니다. 잊지 마셔야 할 것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슬로바키아는 중세 시대에는 이미 체코와 딴 데서 노는 나라였기 때문에 슬로바키아에서 "여기가 보헤미아였다면서요?" 하시면 큰 코 다치신다는 거... 심지어, 정확히 말하면 보헤미아 = 체코도 아닙니다. 보헤미아 + 모라비아 + 체코령 슐레지엔(실레시아) = 체코죠. 보헤미아는 체코의 서쪽 부분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가뜩이나 딱히 서로 상관없는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는 더더욱 서로 상관없는 격인 거죠.
보헤미아는
갈리아족의 일파인 보이족(Boii)이 산다고 보헤미아입니다. 위키피디아 보고 저도 눈을 의심했는데 알프스 너머 게르만 땅에서 동으로 동으로 이동하다가 보헤미아 땅에 정착한 모양이더군요. 아무튼 이 체코에도 중세는 찾아왔고, 초기 시작은 대 모라비아 왕국으로 시작했습니다. 이 대 모라비아 왕국은 오늘날의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를 아우르는 슬라브 족의 왕국이었는데 이게 얼마 못 갔어요. 처음 세워진 게 820년경인데 백 년도 못 가서 907년에 박살이 났습니다. 그리고 다양하게도 찢어지는데...
이 때 무려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데 체코 지역은 보헤미아 공국(Duchy), 슬로바키아 + 헝가리는 헝가리 공국(Principality), 북쪽은 폴란드 왕국의 전신인 치비타스 스키네스게(Civitas Schinesghe), 서북쪽은 동독의 슬라브 인들의 공동체였던 루티치(Lutici), 그리고 나머지는 동프랑크 왕국으로 아주 잘게도 찢어졌죠. 덤으로 이 때가 슬로바키아와 체코가 갈라지는 기점이기도 합니다.
일단 보헤미아 공국은 모라비아 왕국이 박살난 지 대충 백 년이 지난 1002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하에 있었는데, 처음 보헤미아 공국을 통치하던 가문 이름이 프셰미슬 가(Přemyslid dynasty)입니다. 프셰미슬이라는 이름은 체코 남자 이름이라는데요, 이게 하필이면 폴란드의 도시에 진짜 이름이 비슷한 게 있어서 헷갈리기 매우 딱 좋습니다. 저걸 폴란드 어로 바꾸면 프셰미수(Przemysł)가 되는데, 폴란드 동남쪽 구석탱이에 오늘날 인구 6만 6천 명짜리 조그마한 도시인 프셰미실(Przemyśl)이 있거든요... 로마자가 아니라 ´ 표시가 어느 문자에 되어 있는지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 뭐야, 체코를 통치하던 사람들이 폴란드계였단 말야?" ...이렇게 생각하기 딱 좋죠. 아닙니다. 프셰미슬 가는 그 출발이 프라하였어요. 절대 제가 헷갈려서 이걸 특기하는 건 아니에요. 저~얼대.
그리고 프셰미슬 가의 대가 끊어지자 우리를 통치해 주십시오 하고 초대장을 보낸 상대가...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룩셈부르크 가(House of Luxembourg)였습니다. 생각하시는 그 룩셈부르크 맞아요. 대체 이놈의 유럽사는 뭐 어떻게 되어먹었길래 왕관이 무슨 투포환 던지듯 이리 날아가고 저리 날아가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게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단 그 아내가 프셰미슬 가였고, 그 아버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으니 보헤미아의 귀족들이 왕관을 이 사람에게 바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짱짱한 집안을 배경으로 한, 프셰미슬 가의 피가 이어진 사람으로 이 사람이 적합하다 하여 왕관을 바친 겁니다. 덤으로 말하면 이 룩셈부르크 가는 실제로 이 때도 룩셈부르크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룩셈부르크도 통치하고 있었는데 여차저차 어찌저찌하여 쪼그라들어서 오늘날의 룩셈부르크만 남은 격이랄까요. 이건 체코 이야기에서 할 내용은 아니라 패스.
아무튼 이 보헤미아의 존 - 체코식으로 하면 얀 루쳄부르스키(Jan Lucemburský) - 이 보헤미아 왕이 되고, 이 얀 루쳄부르스키의 아들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보헤미아와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가 얽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보헤미아에서 한 위대한 인물이 첫 번째 대형사고를 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얀 후스(Jan Hus).
종교 개혁에 불을 당긴 인물입니다. 마르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보다 백 년은 앞선 사람이니 가히 종교 개혁의 선구자라 할 만하죠. 사실 얀 후스보다도 더 먼저 종교 개혁을 부르짖은 인물이 있는데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그렇지만 후스가 훨씬 스케일이 크다고 할 수 있는 게... 보헤미아에서 이 후스를 따르는 사람들, 후사이트(Hussite)들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무려 15년간이나 보헤미아 전역을 뒤집어놓았거든요. 바로 후사이트 전쟁(Hussite War)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후스의 파급력이 더 크다고 해야겠네요.
후사이트 전쟁의 배경은 상당히 복잡합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발발한 건 아니에요.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바츨라프 4세(Václav IV)가 후사 없이 죽자 그 동생인 지기스문트(Sigismund) 독일,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왕이 왕관을 요구했는데, 이를 보헤미아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거죠. 간단히 말하면 이겁니다. "야 우리가 지난번에 프셰미슬 가가 후사 없을 때 딴 집안인 니네들을 들여보낸 거 아니니? 이번도 후사 없지? 우린 니네 필요 없어.
나가." 그리고 그렇다고 나가라고 나갈 지기스문트가 아니었죠. 여기에 가뜩이나 복잡한 종교 문제에서 지기스문트가 바츨라프 4세를 부추겨 후사이트들을 탄압하는 와중에 사건이 터집니다.
보통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라 하면 30년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된 1618년의 사건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199년 전인 1419년에도 비슷한, 아니 거의 똑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프라하 거리를 행진하던 후사이트의 종교 지도자 얀 젤리브스키(Jan Želivský)를 향해 누군가가 돌을 던졌고, 열 받은 군중이 돌을 던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마침 그 안에 있던 판사와 프라하 시장 등 총 7명을 창문 밖으로 던져서 죽인 사건이 터지거든요. 그래서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은 2개입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바츨라프 4세는 충격으로 그대로 몸져누워 골골대다가 얼마 안 가 세상을 떴고, 아까 그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의 왕관을 요구하자 보헤미아 전체가 들끓은 거죠.
그리고 이 후사이트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이...
이 분...이 아니라
이 분. 체코의 전설적인 명장인
얀 지슈카(Jan Žižka)입니다. 후사이트 전쟁이 터진 게 1419년인데요, 이 전쟁에서 그는 농민들을 최대한 빨리 훈련시켜서 잘 훈련되고 장비도 잘 갖추어진 정예 병력을 상대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게 아주 특기할 만한 일입니다. 그것도 신성 로마 제국과 헝가리의 병사들을 상대로요. 게다가 종종 소규모 포와 머스킷을 무장한 철수레(Armoured Wagon)를 앞세우기도 했는데, 역사가들에 따라서 이를 수백 년 후 등장하는 전차(戰車, Panzer)의 시초로 보기도 합니다.
얀 지슈카는 불패의 명장이었는데, 최초로 전장에서 피스톨(권총)과 화약을 제대로 써먹은 장군이라는군요. 계속해서 적군을 박살내다가 1424년에 전염병으로 사망했는데(당시 나이 63~64였다 하니 가히 노익장이 따로 없습니다) 그 장병들이 스스로를 고아(체코어로 sirotci)라 부르면서 애통해했다는군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얀 지슈카를 상대하던 적군은 "그 어떤 필멸자도 그를 파멸시킬 수 없었지만, 그는 신의 손가락에 의해 죽었다."라고 말했다는군요. 신의 뜻이 자기들에게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신을 믿지 않는 저로서는 적군이 내뱉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은 얀 지슈카 사후로도 10년을 더 끌었고, 결국 교황의 십자군 - 독일군 - 헝가리군 - 튜튼 기사단 - 영국군(!) 및 후사이트 온건파들의 연합에 의하여 후사이트 강경파들의 패배로 막을 내립니다. 온건파들은 교황과 타협하여 그들의 방식을 교황에게 인정받았고, 그제서야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의 왕으로 인정받게 되죠. 그리고 지기스문트가 4년 뒤에 사망하고, 1437년에 합스부르크 가의 알베르흐트 2세(Albercht II)가 보헤미아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가와 얽힙니다. 사실 이 때 바로 합스부르크와 통합된 건 아니고 또 왕관이 여기 굴렀다 저기 굴렀다 하기는 한데 1526년에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의 왕관을 가져가면서 완전히 합스부르크의 역사에 편입되죠.
이후 막시밀리안 2세를 거쳐 루돌프 2세(Rudolf II)가 합스부르크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데, 이 당시 유럽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카를 5세와 제후간에 맺어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Peace of Augsburg)로 잠시 잠잠했을 때였습니다. 루돌프 2세는 체코의 신교도들의 권익을 증진시킨 인물이었는데... 문제는 이 루돌프 2세가 점차 통치자로는 답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그 동생인 마티아스가 대안으로 떠올랐던 거죠. 결국 마티아스가 1612년에 황제 자리를 가져가는데 마티아스가 이미 그 당시 나이가 55세. 그래서 마티아스의 사촌동생인... 30년 전쟁 이야기에서 반드시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가 마티아스의 뒤를 잇습니다.
아직은 마티아스가 살아 있을 때인 1617년에 이미 늙고 병약한 마티아스는 사촌동생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로 보내는데, 그래서 30년 전쟁의 시작보다 페르디난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즉위가 조금 늦습니다(1619). 아무튼 이 페르디난트는 반(反)종교개혁의 선두주자였다는 게 보헤미아의 90%를 차지하던 신교파(후사이트 온건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죠. 과연 페르디난트는 지속적인 탄압 정책을 펼쳐서, 아예 자기 땅에 신교도 교회가 서지 못하게까지 하죠. 이에 반발한 신교도들이 항의 끝에 황제의 대표들이 살아 있으면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이유로 섭정관들을 창밖으로 던지는 게 두 번째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30년 전쟁의 발단.
일은 터졌고 양쪽에서 서로 군대를 모으는데 페르디난트 2세는 마티아스가 죽고 정식으로 합스부르크 및 신성 로마 제국의 왕관을 얻어서 보헤미아를 박살낼 힘이 더 커진 반면, 신교도들은 정식으로 왕의 자리에 올렸던 페르디난트 2세를 자기들이 버렸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지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명분 싸움에서 밀린 거죠. 팔츠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5세(Frederik V of the Palatinate)가 이들을 도왔습니다만 뭐 어디 싸움이 되어야 말이죠. 신교도들은 요한 체르클레스 백작, 일명 틸리에게 완전히 박살나고 프리드리히 5세는 망명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주동자들이 처형되면서 보헤미아가 완전히 평정됩니다. 30년 전쟁 잘 생각해 보시면 시작은 보헤미아였는데 어느새 보헤미아라는 단어가 사라져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 페르디난트가 신교도들을 가만히 놔뒀을 리는 없고, 결국 이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아예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후 보헤미아는 완전히 신성 로마 제국 및 그 뒤를 이은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역사에 편입됩니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글쎄요, 일제 강점기를 한 300년은 겪은 격이랄까...
1910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역인데요, 굵은 적색 선으로 오늘날의 체코 경계가 표시된 게 보이실 겁니다. 보시다시피 슬로바키아는 헝가리(16)에 편입되어 있었죠. 오늘날의 체코는 보헤미아(1), 모라비아(9), 체코령 슐레지엔인 슬레즈코(Slezsko, 11)가 합쳐져 있습니다.
이걸 보니 보헤미아는 한창 이야기해 놓고 모라비아와 슐레지엔에 대해서는 거의 일언반구도 없는 게 궁금하실 수도 있는데... 그게 사실 정말 이야기할 게 없어서 그렇습니다. 모라비아는 1526년에 보헤미아와 같이 합스부르크에 편입된 이후로 엄청 잠잠했거든요. 슬레즈코는 슐레지엔이라고 했잖아요. 이 슐레지엔은 전체가 원래 합스부르크령이었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이 마리아 테레지아를 상대로 슐레지엔 전쟁을 벌여서 다 삥뜯고 생선 껍데기마냥 합스부르크에 약간 남겨놓은 지역이 체코와 묶여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겁니다.
크게 특기할 만한 건 없고 트리비아식으로 슬쩍 찔러넣어 보면,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대전투 중 하나인 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가 바로 체코 땅에서 일어난 바 있습니다. 오늘날의 브르노(Brno) 인근.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박살나면서 체코 독립 운동이 시작되죠. 사실 1866년에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게 완전히 박살나고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면서 보헤미아에 자치권이 보장되리라는 기대가 컸는데,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이걸 헝가리에게만 줘 버리면서 보헤미아의 실망이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아예 독립해버리자는 여론이 우세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내리막길을 걷자 본격적으로 독립전쟁이 개시된 겁니다.
물론 보헤미아는 전쟁 당시 제국령이었기 때문에 무려 140만 명에 달하는 체코 인이 차출되고 그 중 무려 15만 명이 죽었습니다만, 9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Czechoslovak Legion, Československé legie)에 자원하여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편에서 싸웠습니다. 특히 러시아에서 많이 싸웠는데 이게 또 이야기가 복잡해져요. 하필 한창 싸우고 있을 때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맺어지면서 러시아가 전열에서 이탈하게 되고, 러시아 제국을 도와서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게는 청천벽력이었거든요. 그래서 이 군단이 어이없게도
적백내전에 휘말립니다. 당연히 이 꼬라지를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수장 토마시 마사리크(Tomáš Masaryk)는 이들을 프랑스로 돌아오게 해서 싸울 계획을 세우는데, 그 계획이...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던 군단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동해서 수송선을 타고 프랑스로. 그야말로 거의 지구 한 바퀴를 돈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가 얽힙니다(한 가지는 출처가 좀 불분명하네요). 철수작전 자체는 꽤나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순조롭게 이루어졌는데, 일단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확보한 건 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베리아 횡단철도상에 있는 도시로 예카테린부르크(Yekaterinburg)가 있는데... 바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이 갇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예카테린부르크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접근해 오자 이들이 황제를 구출할 것을 두려워한 적군은
즉시 니콜라이 2세의 가족을 처형하고 곧 자기들도 빠져나갑니다. 그러니까 로마노프 왕조의 최후에 체코슬로바키아가 간접적으로 관여한 셈이죠. 이후 1924년에 예카테린부르크는 혁명가 야코프 스베르들로프(Yakov Sverdlov)의 이름을 따서 스베르들로프스크(Sverdlovsk)로 개칭됩니다. 오늘날 스베르들로프스크 주(Sverdlovsk Oblast)의 어원이 되죠. 이 주의 중심 도시가 예카테린부르크고.
그리고 하나는... 이게 좀 출처가 불명확해서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의심이 심하게 가는데,
북로 군정서에게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무기를 팔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청산리 전투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전 솔직히 출처가 없어서 못 믿겠지만, 일단 그런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라서 소개해 봅니다. 뭐 하긴 어느 안전이라고 - 하필이면 일본도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죠 - 이걸 공개적으로 팔았을 리는 없으니 설령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증거를 파기해야 할 판이었겠습니다마는.
아무튼 이들이 돌아온 것은 1920년, 즉 이미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한 이후였습니다. 슬로바키아가 슬그머니 끼어들은 느낌인데 이들은 전쟁이 지속되면서 헝가리 정부 및 마자르인들에게 괴롭힘을 받고 있었고, 이에 반발해서 체코와 같이 독립해 버린 거라고 하네요.
이후 다들 아시다시피 잘 지나가다가 뮌헨 협정, 아니 차라리 뮌헨 늑약(Mnichovský diktát 또는 Mnichovská zrada, zrada는 배신이라는 뜻입니다)으로 인해서 주데텐란트가 독일의 손으로 넘어가고, 이어 반 년도 못 가서 아예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협박해서 히틀러가 즉각 체코 전역을 독일령으로 편입한 후 슬로바키아는 따로 떼어 괴뢰국으로 만든 다음... 예.
다만 주데텐란트(Sudetenland) - 이게 사실 체코 지방이니까 수데텐란트라고 해야 맞다는군요 - 에 대한 건, 독일의 주장이
당시로서는 아예 틀린 건 아니었어요. 이건 다음 지도를 보셔야 이해가 빠릅니다.
1935년의 체코슬로바키아인데, 적색이 독일계가 사는 땅이고, 보시다시피 75% 이상이 독일계인 곳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저게 다 주데텐란트에요. 이러니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요구할 때 국제사회가 꼼짝하지 못했던 겁니다. 바로
민족자결주의 때문이었죠.
평소에는 나무위키 꺼라, 꺼무위키 소리 듣는 나무위키입니다만 이 뮌헨 협정에 대해서는 기가 막히게 한 줄로 비판을 가하고 있어요. 그 문구를 소개합니다.
"민족과 국가가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튼 주데텐란트의 독일인은... 전쟁이 끝난 후... 음... 우리 나라가 광복했을 때 일본인들이 겪은 걸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아니 그보다 더했을 거에요. 영어가 되시는 분들은 Expulsion of Germans from Czechoslovakia 문서를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해 드리면, 5월에 전쟁이 끝나고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서 독일인들을 국경 밖으로 밀어내다가, 아예 1945년 10월 28일에 대통령이 나서서 독일인들을 몰아내기 시작했죠. 지역적으로 무장한 자경단이 독일인들을 몰아냈지만 일부에서는 아예 군대가 몰아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이 폭력으로 인해 죽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으며, 무려 240만 명(서독 쪽으로 160만 명, 동독 쪽으로 80만 명)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는 좀... 뭐랄까 글쎄요...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과 친일파를 생각해 보면 체코인들에게 심정적으로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어쨌거나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굶어죽었던 터라 그걸 가리켜서 잘 했다고 박수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전쟁으로 인한 크나큰 비극의 단면일 뿐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네요. 고구마 한 백 개는 먹은 느낌. 아니 고구마가 아니라... 당의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겉보기에는 일종의 사이다지만 실제로는 엄청 쓴 이야기.
이후 스토리는 다들 아실 것 같기도 하고, 또 이걸 이야기하면 아예 책이 한 권이 나올 정도니 과감하게 패스할게요. 최대한 간단하게 체코슬로바키아도 자유를 되찾았지만 곧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고, 프라하의 봄이 일어났지만 곧 진압당하고, 벨벳 혁명이 일어나며, 독립 후 두 나라가 평화적으로 국경을 분할해서 오늘날에 이른다는 것. 벨벳 혁명에 대해서는 제가 2년 전 촛불 혁명 당시 PGR에 투고했던 부드러운 혁명(Velvet Revolution)이라는 글을 참고해 주세요.
참고 링크 :
https://pgr21.com/?b=8&n=69316 부드러운 혁명(Velvet Revolution)
엄청나게 긴 이야기였네요. 어느 나라나 사연 없는 나라는 없다지만, 체코도 그런 나라 중 하나일 겁니다. 특히나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이후 합스부르크라는 외세에 짓눌린 게 3백 년, 나치에게 점령당한 게 7년, 이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한 게 40년... 우리로서는 어쩌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긴 시간일 것 같아요. 어쩌면 동유럽의 코리아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도 중국과 지겹게 싸우고, 결국 GG치고 중국 패권에 들어가고, 그러면서 공물 갖다 바치고 등등 별 짓을 다 했었으니...
날이 갈수록 역사 이야기가 심각하게 길어지는데 체코 역사는 공부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단순히 세계사 시간에 몇 가지 들어본 사건으로 체코도 역사에 얼굴을 내밀었었지 하고 들여다봤는데 의외로 들여다보면 볼수록 재미가 있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외국인이 우리 나라 역사를 볼 때 이런 느낌일까요? 뭐야 삼국시대 신라 고려 조선 이렇게 단순히 쫑인 줄 알았더니 왜 이렇게 역사가 치열해 할 그런 느낌? 그리고 이런 것도 체코와 연관되어 있었어? 싶었던 게 정말 많았습니다. (저야 창세기전으로 처음 이름을 들은 거지만) 얀 지슈카라든가, 적백내전이라든가.
역사 이야기는 이렇게 끝내고, 이제 프라하의 건축물 이야기를 몇 개 해 봅시다. 프라하! 체코의 수도이자 체코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이자 체코의 도시는? 하면 프라하 빼면 다음 도시가 생각이 잘 안 나는(...) 그야말로 체코의, 체코에 의한, 체코를 위한 도시 아니겠습니까. 앞서 이야기했듯이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에 프라하도 폭격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이게 정말로 기적적으로 몇 개의 랜드마크를 빼면 미 공군의 폭격으로부터
깔끔하게 살아남아서 오늘날까지도 프라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 맞다, 일단 이거부터 이야기할게요. 보헤미아니즘이라고 해서,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로 대표되는 그거. 근데 그 보헤미안이라는 게, 실은 체코와 보헤미아와는
아무 관련도 없습니다. 떠돌아다니고, 비정형(非定型)에, 틀에 박히지 않고 자유로운 뭐 그런 거. 그게 보헤미안이라 붙여진 스타일인데, 이게 실은 보헤미아가 아니라 로마니(Romani), 그러니까
집시 스타일입니다. 웬 엉뚱한 집시가 보헤미안이라는 타이틀을 가져갔냐면... 문화의 수도라는 프랑스 인들이 저지른 어이없는 실수입니다. 떠돌이 집단인 로마니였던 만큼 프랑스에도 많은 수의 로마니들이 살고 있었는데요, 프랑스 인들은 이들이
보헤미아에서 넘어온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고, "얘들 보헤미아에서 넘어왔다며? 그러면 얘들같이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스타일을 보헤미아 스타일이라고 하자!" ...이렇게 해서 보헤미안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죠. 참고로 로마니들은
집시라 불리면 무진장 싫어한다니까, 잘 알아두세요.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프라하에 있는 건축 양식들을 순서대로 읊어보면 다음과 같아요.
- 로마네스크 양식
- 고딕 양식
- 르네상스 양식
- 바로크 양식
- 로코코 양식
- 신 르네상스 양식
- 신 고딕 양식
- 아르누보 (Art Nouveau)
- 입체파
- 신고전주의 양식
- 최신파 (Ultra-modern)
아니 이쯤되면 대체 빠진 게 뭐야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죠.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예술이나 건축에는 문외한이라, 이걸 완전하게 여러분에게 이야기로 들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직접 사진을 보고, 위키에 서술되어 있는 특징을 짚어보고, 그리고 감탄할(...) 뿐이죠.
일단 예시로, 프라하 성을 봅시다.
블타바 강 너머에서 본 프라하 성입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처음 건설 시작이 870년인데, 개수 재건축 등등 잡다구리한 스텝을 거쳐서 최종 건설이 1929년에서야 끝났다네요. 물론 진짜로 1929년까지 무슨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마냥 건설 중이었을 리는 없고...
자, 이제 프라하 성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안으로 들어가면 성 비투스 성당(St. Vitus Cathedral)이 있습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주 전형적인(어찌나 전형적이면 그 많은 건물들을 문서로 작성했을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대놓고 prominent라는 단어를 썼을 정도죠)
고딕 양식의 건축물입니다. 고딕 양식의 특징 하면 일단
높은 첨탑이 떠오르는데, 그 외에도 늑재 궁륭(Rib Vault)이라고 하여 아치를 교차하여 건축물의 높이를 올리는 방식, 버팀도리(Flying Butress)라 하여 건축물의 무게를 삼발이 발처럼 받치는 부 구조물, 그리고
수많은 스테인드 글라스와
원형 창문이 그 특징입니다.
이게, 이 늑재 궁륭과 버팀도리 덕분에 꼭 가운데가 아니라 언밸런스하게 양쪽 끝에다가 첨탑을 올려도 건축물이 무사하게 버틸 수 있도록 되었다네요. 그런 만큼 초기에 드러난 이 건축물의 양식은 고전의 그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대단히 파격적이었고, 이를 불쾌하게 여긴 사람들이 "야이 고트족 같은 야만인들이나 좋아할 건축물들을 올리는 놈들아"라는 비하명칭이 졸지에 확 퍼지면서 고딕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고 합니다.
위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스테인드 글라스와 원형 창문은 보셨을 테고, 이제 내부 사진을 보시죠.
가운데 회랑의 천장을 잘 보세요. 마치 두 개의 아치가 X자로 교차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늑재 궁륭입니다. 뭐 이리 단어가 어렵나 싶긴 한데 아마 필시 그냥 립 볼트라고 해도, 아니 그렇게 해야 건축학과 분들이 알아들으시지 않을까 싶네요. 하여간 이게 고딕 양식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프라하 성 내에 있는 바실리카(특별한 일이 있을 때 쓰는 중요한 성당)인 성 이르지 성당(Bazilika Sv. Jiří, 근데 그냥 성 조지 성당이라고 해야 더 쉽게 알아들을 듯요)을 봅시다.
확실히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은 없는 게 딱 봐도 고딕 양식과는 좀 달라 보이지 않습니까? 건설 연도가 920년도로 프라하 성 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입니다. 근데 한 차례 대화재를 포함해서 몇 번 개수를 거쳤기 때문에 겉면은 양식이 920년도에 지은 것치고는 굉장히 최근 양식입니다. 최근이라고 해 봤자 17세기지만...
아무튼 이 양식은, 앞면은 확실히
바로크 양식입니다. 겉면이 마치 도드라지게 튀어나오는 듯이 앞으로 나온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저거 자세히 보면, 옆에 있는 주황색 건물과 그 오른쪽의 빨간색 입구는
일직선상에 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거나, 특히 모바일 화면 등처럼 작은 화면으로 보면
입구가 마치 주황색 건물 앞으로 튀어나온 듯이 보이게 되죠. 이게 핵심입니다.
빛과 그림자, 색을 통한 도드라지는 앞면. 이게 바로크의 특징이죠.
하지만 뒷부분의 인테리어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보시면 특징이 몇 가지가 보이죠. 우선 내부의
기둥과 기둥이
아치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문 역시
아치 모양으로 조그맣게 나 있고, 내부 건축물의 재질은
석재입니다. 그리고
아치에는 그림과 같은
장식이 그려져 있죠. 이 모든 특징은 이 건물이
로마네스크 양식임을 보여 줍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6세기부터 11세기에 대차게 유행한 바 있는데요, 이 시기에 지어진 건축물인 만큼 그 특색을 아주 잘 살리고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프라하 성 내의 건물 딱 두 개만 집었는데 벌써 세 가지 양식의 특색이 아주 잘 살아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프라하는 건축양식의 보고(寶庫)입니다. 심정 같아서는 일일이 다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랬다가는 글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고 게다가 전 건축양식 등에 영 문외한이니 양식 딱 하나만 더 짚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아까 아르누보 이야기했죠. 아르누보, Art Nouveau는 프랑스 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직역하면 뉴 아트. 즉 새로운 미술이라는 뜻인데요, 1890년에서 1910년, 그러니까 자본가들의 황금기 세대에 대유행했던 양식입니다. 독일에서는 유겐트스틸(Jugendstil)이라고 하는데요, 이게 유겐트가 어린아이(Youth)라는 뜻이거든요(히틀러 유겐트가 나치 당 소년단이었음을 떠올리시면 빠를 겁니다). 그러니까 어린애들 스타일이라고 한 건데... 어쩌면 당시에도 "어린애들이 멋부리는 스타일"이라는 인식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약간 부정적으로 비틀면, "요즘 어린 애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꾸미기나 하고 말야...
근데 니는 왜 또 그걸 미술이나 건축 양식에 적용하냐?" 이런 느낌? 물론 진짜로 그랬다는 건 아니고 그 당시 인기있던 독일의 미술 잡지 이름이 유겐트스틸이라 거기서 따 왔다는군요.
아무튼 어린애들 스타일이라서 그런지 새로와서 그런지 아니면 자본가들이 돈을 팍팍 지원해줘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면 그 세 가지 다 통틀어서 적용되었는지 어쨌는지... 이 아르누보의 특징은
닥치고 화려함입니다. 건축할 때 어려움? 비효율적?
All Bow Down to the MIGHT OF MONEY. 돈 앞에는 장사 없고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고 하여간 외부 건축물을 엄청나게 화려하고 까다롭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만 일용직 노동자들과 디자이너의 입에서 오만가지 욕설이 나왔을(...) 그런 건축물이 보인다 싶으면? 아 이게 아르누보 스타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체코의 쥬빌리 시나고그(Jubilee Synagogue, 그러니까 유대 교 예배당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듯하네요)라고 있는데, 이게 아르누보 스타일의 표본입니다.
건물을
눈 크게 뜨고 자세히 보세요. 우선 외부 장식부터가 형형색색의 줄무늬죠. 여기에 가운데 파란색 내에는 금색으로 쓰여진 히브리 어(저는 저게 히브리 어인 줄은 알겠는데 뭔 뜻인지는 글자를 몰라서 번역을 못 하겠습니다)의 글귀에다가, 왼쪽 아래에는 까다로운 조각에, 그리고 진짜 자세히 보면
소형 아치 하나하나, 원 하나하나가 그냥 통짜로 찍어낸 게 아니라
섬세하게 문양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걸 건축하라고? 환장할 노릇이었겠네요. 뭐 지금이야 관광명소이고 저도 당시 이걸 올렸을 때 사람들의 기분을 낄낄대며 상상하고 있습니다만 정작 당사자들은 얼마나 토나오는 일이었을까요(...) 이게 무어리시 리바이벌(Moorish Revival)이라고 해서 약간 고전틱한(그러니까 고딕 내지는 고전주의적) 양식과의 혼합이라고 하는데요, 어쨌든 화려하고 까다로운 외부 장식이 핵심입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이건 약과지 말입니다.
쥬빌리 시나고그 내부입니다.
이 화려한 장식물! 천장에까지 닿는 저 화려한 장식과 문양!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참으로 골때리는 이야기인데 이 아르누보 스타일 건축물을 좀더 찾아보다가 얻어걸린 게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제가 또 철도 좋아하는 걸 어찌 알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라하 중앙역이 또 한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가 되어 주십니다. 솔직히 말하면 앞의 쥬빌리 시나고그보다는 임팩트가 좀(...이라기엔 심하게?) 떨어지지만...
프라하 흘라브니 나드라지(Praha hlavní nádraží). 프라하 중앙역이라는 뜻인데요, 저 복잡한 문양하며, 돔을 이루는 기둥 하나하나에 있는 조각상하며, 그 아래에 또 형형색색의 띠 하며, 그 와중에 아치 사이사이에 또 하나씩 들어가 있는 장식하며. 아르누보 양식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건축물인데,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이게 말이 쉽지, 말하자면
우리 나라 서울역을 1870년대 경복궁 스타일로 올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다못해 서울역을 다시 지을 때 열차가 성문(?)을 통과하게는 못 하더라도 역 건물을 궁궐 스타일로 지어서, 석벽에 누각에 화원도 어디 하나 적당한 곳에 뚫어놓고 등등... 이런 점에서는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나라 서울역은 그냥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유리궁전인데...
엄청나게 이야기가 밑도끝도없이 길어지고 있어서 일단 여기에서 마무리할게요. 보통 체코 간다고 하시면 분명히 프라하 가실 게 99.99%일 텐데, 꼭 건축 양식에 대해서 공부를 한 번 하고 가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마무리는 프라하 외의 다른 도시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글이 두 가지 내용으로만 되어 있어서 좀 아쉽네요. 한 가지 토픽을 더 이야기하고 싶긴 한데 토픽거리도 잘 안 떠오르고 글이 너무 길기도 하고...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연재분 중에서 가장 즐겁게 쓴 글인 것 같아요.
브르노(Brno) 시 전경. 체코 제2의 도시인데, 프라하가 백만을 넘는 동안(120만 명 이상) 브르노는 37만 명입니다. 그러니까 여기도 엔간히 수도 집중화 현상이 심한 셈이죠. 어쨌든 이 브르노는 모라비아 지역의 중심인지라... 우리 나라도 중부의 서울, 영남의 부산 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보헤미아의 프라하, 모라비아의 브르노. 사진은 슈필베르크 성(Špilberk Castle)에서 찍었다 합니다.
오스트라바(Ostrava). 폴란드와 인접해 있는 체코 제3의 도시인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중세틱한 건물 뒤편으로 보이는 공업 지대가 퍽 인상적입니다.
리베레츠(Liberec). 독일과 폴란드 국경 사이에 딱 붙어 있는 도시인데 폴란드 서부가 구 독일령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독일에 붙어 있는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실제로 이 지역이 바로 수데텐란트의 중심부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그만큼 많은 독일계가 전후 피를 봤겠지만... 이 평화로워 보이는 도시에 그런 비극적인 역사가 있으리라고 상상이 가시는지요.
우스티 나트 라벰(Ústí nad Labem). 그냥 우스티라고 줄여서 많이 부르기도 합니다. nad Labem은 엘베 강 위쪽(above Elbe)라는 뜻. 우스티가 둘인가봐요. 발음은 어째 오스티 쪽에 더 가깝게 들립니다만... 하여간 이 도시도 독일과 딱 붙어 있는 공업 도시인데 엘베 강과 빌리나 강(Bílina)이 서로 만나는 곳이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강을 좋아해서, 이런 강이 낀 도시를 좋아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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