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의 태업을 알게 된 진린은 이튿날 육지로 올라가 항의했다고 합니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진린이 유정의 수자기(帥字旗)까지 찢었다고 하는데, 유정의 직급이 더 높은데도 그랬다면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유정의 육군은 공성을 기피했고, 수군 혼자 공격하는 것은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사실 육군이 도와주었다면 함락이 가능했을 수도 있는데, 유정이 나서지 않았던 그 10월 3일에는 수군의 포탄이 고니시의 처소까지 위협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정은 신기할 정도로 전투를 꺼렸습니다.
[ 소신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니 행장의 집이 동쪽에 있었는데 중국 화전(火箭)이 그 집에 떨어지니 서쪽의 왜적이 모두 동쪽으로 달려가 불을 껐습니다.
이때 육병(陸兵)이 진격하면 성사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되어 신이 이억례(李億禮)를 불러 유 제독에게 ‘바로 지금 진격해야 한다.’고 청하였으나 유 제독은 끝내 따르지 않았습니다. ]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202002_003)
[ 3일 수군이 조수를 타고 혈전(血戰)하여 대총(大銃)으로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막사[房室]를 맞추자 왜인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모두 동쪽으로 갔으니 만약 서쪽에서 공격하여 들어갔다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김수(金晬)가 문을 열어 젖히고 싸우자고 청하였지만 제독은 노기(怒氣)를 띠고 끝내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았습니다.
성 위에서 어떤 여자가 부르짖기를 ‘지금 왜적이 모두 도망갔으니 중국 군대는 속히 쳐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기회가 이와 같은데도 팔짱만 끼고 지나쳤으니, 제독이 행한 일은 참으로 넋을 빼앗긴 사람과 같아서 장수와 군졸들이 모두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마침 사천(泗川)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혼란하여 후퇴를 결정하였으니 (···) ]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0012_005)
[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이 성 밑에서 소리치기를, “왜군이 모두 동쪽으로 몰려가서 이 편은 비어 있으니, 만일 빈틈을 타서 공격하면 이길 것이다.”하므로, 이덕형·권율·김수 등이 나아가 싸울 것을 청하였으나, 제독이 듣지 않았다.
그런데 중로(中路)의 군사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회군할 뜻을 결정하므로 이덕형 등이 또 말리니, 제독이 거짓 허락하였으나 군정(軍情)이 이미 동요되어 머무를 수 없었다. ] (재조번방지)
아마도 유정은 초반에는 쉽게 공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이후에는 왜성의 견고함을 알아차리고 자기 군대를 보전할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 이미 뇌물을 받고 있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 유정이 항상 하는 말이 ‘양호(楊鎬)는 용병(用兵)할 줄 몰라서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나는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적의 소굴을 소탕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틀림없이 이길 형세인데도 겁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202002_003)
[ 도원수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는데, “제독 유정이 달아나려 했다”고 하니 참으로 통분할 일이다. ]
(난중일기
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sub_04/sub_04_01_02.asp?boardidx=1636&mod_yy=1598&mod_mm=10)
이후 유정이 돌아가 버리자 수군도 결국 며칠 뒤 철수합니다.
이것이 바로 왜교성 전투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어쨌든 수군은 장도도 점령하고 해상 지원을 최대한으로 했으나 육군이 소극적으로 나와 공성이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선조까지 유정의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고요.
[ 호남(湖南)의 일은 유 제독(劉提督)에게 배신당한 것 같다.
이는 존망(存亡)이 관계된 것인데, 제독이 조정에서 동방(東方)을 돌보는 염려를 명심하지 않았으니, 황제께서 장수로 임명하여 구원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유 제독이 일부러 힘써 싸우지 않았고 우리 나라 장수가 싸우기를 청해도 듣지 않은 정상을 약간 드러내어 꺼려하는 바가 있게 해야 한다. ]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0014_003)
그러면 앞서 살펴본 웅포 해전, 장문포 해전 등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애초에 똑같은 싸움도 긍정적으로 보면 ‘어디로 출정해서 적선을 깨뜨린’ 것이 되고, 부정적으로 보면 ‘어디를 공격했으나 끝내 격퇴당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어쨌든 공선전은 육군이 주력이었다고 본다면, 적 수군만 잘 물리쳐도 승리로 볼 근거가 있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애매한 것이, 이 전투는 교환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찾기 힘듭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군의 피해는 몇 번 언급되는데, 일본군의 피해는 ‘무수히 많이 죽였다’, ‘언덕에 시체가 낭자했다’ 정도로 나와 명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물론 왜교성 전투의 교환비에 대해서는 ‘일본군 3000명 전사, 왜선 30척 격파, 11척 나포’와 ‘명나라군 2000명 전사, 30척 손실, 조선군 130명 전사’ 같은 정보가 위키 등지에 많이 실려 있습니다만, 출처(특히 1차 사료)가 불명확합니다.
또 조선수군의 피해가 ‘사도첨사(蛇渡僉使) 황세득(黃世得)과 군관 이청일(李淸一) 휘하 130명 사망’이며 명군을 구원하던 중 전사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난중일기에 따르면 황세득과 이청일은 10월 2일에 죽었습니다. (
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sub_04/sub_04_01_02.asp?boardidx=1632&mod_yy=1598&mod_mm=10)
그리고 그때 죽은 조선수군은 29명으로 추정됩니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0013_003)
물론 저 29명은 탄환에 죽은 사람이니 다른 이유로 죽은 사람까지 합치면 130명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인 10월 3일에도 치열한 전투가 있었으니, 어쨌든 뭔가 숫자가 안 맞는다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특히 10월 3일 싸움에서는 연합수군의 피해가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군이 명나라군을 구원하는 내용도 사실 이때 자세히 나옵니다. 그리고 그 피해 정도는 사료마다 다 다릅니다.
먼저 난중잡록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 밤 조수가 갑자기 밀려나 배들은 육지에 있었다.
적병이 진흙 속으로 마구 들어와 당선(唐船)을 포위하고 기어 올라 마구 죽이니 명군이 힘이 다하여 마침내 스스로 그 배를 태우니 모두 43척이었다.
불은 밤새도록 끊어지지 아니하고 왜적은 탈출하는 명군을 추격하여 잡은 것이 무려 수백 명이 되었다.
상관(上官)이라고 부르며 손을 싹싹 비비며 살려 달라는 소리가 육지의 진지에까지도 들렸다.
우리나라 배 3척도 그 가운데 있었으나 선체가 높고 견고하며 활쏘기를 비 오듯 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 조수가 밀려들어서야 나왔다. ]
(난중잡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32A_0040_000_0060)
반면 난중일기를 보면, 명나라의 사선(沙船, 밑이 편편하고 납작한 배) 19척, 호선(虎船, 신호하는 배) 20여 척이 썰물 때 고립되어 불탔다고 되어 있으며, 판옥선 3척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
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sub_04/sub_04_01_02.asp?boardidx=1633&mod_yy=1598&mod_mm=10)
한편 권율의 보고로는 명나라 배 23척이 일본군에 의해 불탔으며, 살아남은 명나라군은 140명이었고, 판옥선도 (3척이 아닌) 7척이 얕은 곳에 걸렸다가 다음 날 돌아왔다고 합니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0010_005)
비슷하게 재조번방지에서는 진린이 왜선을 나포하느라 이순신 장군의 후퇴 신호를 듣지 못했고, 곧 조수가 빠져 명나라의 사선(沙船)·호선(號船) 23척이 얕은 여울에 달라붙었으며, 19척이 불타고 4척이 끌려갔는데, 조선수군이 편전(片箭)을 쏘아 구원하여 명나라군 140명이 탈출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32A_0040_000_0060)
그리고 예교진병일록에서는 조수가 빠져 갇힌 명나라 수군이 자기네 배 13척을 불사르고 뛰어내렸으며, 그중 과반이 죽고 조선수군이 명나라군 200여 명을 구출했다고 나옵니다. 또 얕은 물에 갇힌 판옥선 3척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중 보성군수의 배가 일본군에게 도륙당했으나 군수 전백옥(全伯玉)은 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나면, 어쨌든 조선수군이 명나라 수군을 구원하다 큰 피해를 당했다는 속설은 10월 3일의 이야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연합수군의 피해는 그나마 수치라도 나오지, 일본군의 피해는 ‘헤아릴 수 없다’ 식으로 계속 나온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과 중국 측의 기록)은 제 능력이 부족해 확인해보지 못했으므로, 정말로 명나라군의 피해가 정말 2000명 전사에 30척 손실이라고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정말로 일본군 3000명이 죽고 왜선 30척이 격침되고 11척은 나포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교성 앞에 있던 장도나 삼일포를 소탕한 사실이 있으니, 그때 전공까지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죠.
혹시 한문 독해(와 일본어 독해) 능력자분이 계시다면, 명실록이나 ‘일본전사조선역’(
https://dl.ndl.go.jp/info:ndljp/pid/936356)에서 해당 내용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쌨든 이런 사정 때문에, (일본군의 피해를 안다고 하더라도) 연합수군의 피해는 상당히 들쭉날쭉하므로 왜교성 전투의 교환비도 추정만 해볼 수 있습니다.
약간 사견을 넣어서 생각해 보자면, 10월 3일 이전에는 배가 고립된 적이 없다고 치고, 30여 명(조선군 29명, 명나라군 5명)이 전사했습니다.
또 10월 3일에는 조수가 빠지는 바람에 명나라 배가 최대 43척 고립되었는데, 판옥선 3척도 같이 갇힌 듯하고, 이를 보고 오히려 판옥선 4척이 구원을 왔다고 보면 총 7척이 날이 밝을 때까지 버티면서 명나라군도 140명가량 구출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명나라 배는 화공으로 사선 19척, 호선 20척 등 39척가량이 손실되었습니다.
당시 사선에는 60~80명, 호선에는 20~30명이 탑승했다고 본다면(
http://pdf.babytimes.co.kr/75/7519.pdf), 사선에는 1400명, 호선에는 500명이 있었다고 칠 수 있고, 이중 140명이 탈출에 성공했음을 감안하면 약 1750명 정도가 전사한 것입니다.
10월 3일 이후에는 이런 대규모 피해가 확인되지 않으므로, 계속 30여 명 내외만 사상당했을 것입니다. 수군이 10월 10일에 수영으로 돌아갔으므로(
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sub_04/sub_04_01_02.asp?boardidx=1640&mod_yy=1598&mod_mm=10), 그 사이에 계속 싸웠다고 가정하면
약 2000명 사상, 40여척 손실이 총 피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명나라군 2000명 사망설도 뭔가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이것도 조선수군만 따로 계산하면 수백 명 사상, 0~1척 손실 정도가 되므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죽였다’는 일본군에 비하면 교환비가 좋을 것 같긴 합니다.
물론 연합수군이었는데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한다면 이 전투가 이순신 장군의 (그나마) 최대 흠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후퇴 신호를 무시한) 진린의 흠결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라고는 하지만, 의외로 일본군의 피해가 조선수군보다도 적다고 나온다면 그때는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긴 합니다.)
6. 노량 해전
노량 해전에서 조·명 연합 함대의 목표는 일본군의 해상 퇴로를 차단하고 왜선을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1차 부산포 해전이나 웅포 해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진짜로 일본군이 퇴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함대 역시 쳐들어가서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다가 덮치는 전술을 수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처음 목표했던 것은 순천 왜교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였습니다. 전술한 것처럼 왜교성이 일본군 점령지 중 제일 서쪽에 있어서 봉쇄하기 알맞기도 했고, 다른 일본군 점령지는 왜교성을 넘어야 갈 수 있으므로 수군의 사정권이 아니기도 했습니다.
[ 도독이 만나고자 하므로 곧 나갔더니, “순천 왜교(倭橋)의 적들이 초열흘 사이에 철퇴한다는 기별이 육지에서 통지해 왔으니, 아주 빨리 진군하여 돌아가는 적들의 길을 끊어 막으라”고 했다. ]
(난중일기
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sub_04/sub_04_01_02.asp?boardidx=1643&mod_yy=1598&mod_mm=11)
물론 왜교성 봉쇄 당시 연합함대의 움직임이나 이후 전개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 일부러 왜교성을 봉쇄한 뒤 이를 알려 다른 일본군까지 유인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천에 주둔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의 경우에는 순천의 고니시와 계속 연락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올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구원을 왔죠.
다만 고니시와 시마즈를 비교했을 때 (조선 사람들 입장에서는) 고니시를 참살하는 것이 훨씬 통쾌한 일이기 때문에, 각개격파라면 몰라도 아직 고니시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 굳이 유인책까지 썼을지는 다소 의문이 듭니다.
게다가 고니시의 원군 요청 연락선을 통과시켜 준 사람은 이순신이 아니라 진린이며,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죠.
[ 왜놈 장수가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와서 돼지 두 마리와 술 두 통을 도독에게 바쳤다고 한다. ]
(난중일기
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sub_04/sub_04_01_02.asp?boardidx=1648&mod_yy=1598&mod_mm=11)
[ 도독이 진문동(陳文同)으로 하여금 왜 영으로 들여 보내더니, 조금 있다가 왜선 세 척이 말과 창·칼 등을 가지고 도독에게 나아가 바쳤다. ]
(난중일기
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sub_04/sub_04_01_02.asp?boardidx=1650&mod_yy=1598&mod_mm=11)
[ 행장이 천위(天威)를 두려워하여 유 제독과 진 도독에게 강화하자고 하면서 유 제독에게는 수급 2천을, 진 도독에게는 수급 1천을 보내줄 터이니 자기를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였다.
진 도독은 그 말을 믿고서 말하기를 “나에게도 수급 2천을 보내주면 보내 줄 수 있다.” 하자, 행장이 날마다 예물을 보내고 주찬(酒饌)·창검(槍劍) 따위의 선물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남해(南海)에 사위가 있는데 그와 만나 의논해야 하므로 사람을 보내어 불러오려고 하니 이곳의 배를 내보내주기 바란다.” 하자, 이순신(李舜臣)이 말하기를 “속임수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사위를 불러 온다는 것은 구원병을 청하려는 것이니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으나, 진 도독은 듣지 않았다.
14일 1척의 작은 배를 보냈는데 왜인 8명이 타고 있었다. 그 뒤에 이순신이 말하기를 “왜선이 나간 지 이미 4일이 되었으니 구원병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도 묘도(猫島) 등지로 가서 파수하여 차단시켜야 한다.” 하였다. ]
어쨌든 이 정도라면 일본 함대를 빈사 상태로 만든 해전인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연합함대에서도 장수가 6명 정도 죽었고, 특히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것은 매우 뼈아픈 일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사령관이 죽을 정도니 조선군 피해가 더 컸다‘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실록을 보면 (장수를 포함해) 10명이 탄환에 죽었다고만 했으며 배를 잃은 기록은 아예 없습니다. 이에 따라 수백 명 정도의 사상이 추정될 뿐입니다.
또 시마즈 측 기록인 정한록(征韓錄)에도 중국 배 2척과 조선 배 4척(판옥선이 아니라 협선으로 추정됩니다)을 나포했다는 소소한 전과만 나옵니다.
다시 말해, 교환비만 보면 압승에 가깝습니다.
다만, 전술 목표가 달성되었느냐를 평가해 보면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일단 원래 목표였던 고니시는 노량해전을 틈타 남해로 도주했는데, 당시는 이순신 장군도 전사하고 연합함대는 아직 싸우는 중이라 미처 추격하지 못했습니다.
[ 적추 소서행장이, 주사가 노량(露梁) 앞바다에서 격전할 때를 틈타 종적을 감추고 도망치기에 깃발을 돌려 추격하였으나 이미 대양으로 멀리 떠나 잡지 못하였으니 매우 한스럽습니다. ]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2002_005)
[ 금월 19일 사시(巳時)에 예교(曳橋)의 왜적이 모두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유 제독(劉提督)이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니 성중에는 다만 우리 나라 사람 3명과 우마(牛馬) 4필만 있었습니다.
남해(南海)의 대양(大洋)에서 진동하는 대포 소리가 멀리 들렸는데, 이는 반드시 수군이 접전하는 소리인 듯하나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3_004)
[ 한참 싸움이 무르익었을 때에 행장 등이 철병하여 몰래 묘도의 서량(西梁)을 따라 나가 평산(平山)으로 향하여 바다로 달아났다. ] (난중잡록)
게다가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시마즈 요시히로도 결국은 어찌어찌 포위를 뚫고 도망쳤기 때문에, 일본군 사령관급은 다 살아 나간 꼴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일본군은 고니시도 결국 살렸고, 시마즈가 죽은 것도 아니니 전술 목표를 달성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조선수군 입장에서 보면 진린의 트롤링으로 전술목표가 중간에 한 번 바뀌었다고 할 수 있고, 바뀐 전술목표는 시마즈를 잡는 게 아니라 노량으로 오는 일본군 자체를 많이 쳐부수는 것이었으므로 충분히 달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일본군이 철수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조·명 연합군 수뇌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선 정부와 이순신 장군이 한사코 출전한 것은 일본의 재침공 역량을 없애는 한편, 7년이나 조선 땅을 유린한 일본군에 대한 원한을 조금이나마 풀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달성 여부에 대해서는 선조가 긍정적인 언급을 남긴 바 있습니다.
[ 해상(海上)에서의 승리는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하였으니 이는 조금 위안도 되고 분도 풀린다. ]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9_002)
어쨌든 이 역시 여러 가지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우중문 우문술이 살아 돌아가도 대첩이 되고 소배압이 살아 돌아가도 대첩이 되는 만큼 노량해전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편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