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웅포 해전에 이어서, 바로 장문포 해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웅포 해전의 경과는 장문포 해전, 왜교성 전투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조선수군이 주도적으로 나선 전투가 아니라는 점, 일본 수군이 싸움을 회피했다는 점, 육군의 병력 부족 또는 소극적 참전으로 수군 역시 큰 소득 없이 철수한 점 등이 판박이죠.
특히 장문포 해전은 도체찰사 겸 좌의정이었던 윤두수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때의 논의를 살펴보면 상당히 황당한 점이 많습니다.
놀랍게도 ‘이기면 하늘이 도와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지만, 이미 도원수가 작전을 진행하던 중이었나 봅니다. 이에 대한 다른 대신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솔직히 이런 기사를 보고 있으면, 되도 않는 작전을 몰래 진행한 윤두수뿐만 아니라 상관 말이라고 다 진행시키는 도원수, 이미 진행중이라 어쩔 수 없다는 대신들까지 전부 이상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윤두수야 그렇다 쳐도 도원수는 권율이고 저 대신 중에는 유성룡도 있었는데, 이럴 수가 있나 생각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촌극의 배후에는 사실 선조의 의지가 있었다는 분석도 존재합니다. 이유는 윤두수가 장문포 해전 이후 20여 일 동안 연속으로 탄핵을 당했는데, 선조가 여러 번 이를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체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당상관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
윤두수가 그 마음을 알아채고 앞장서서 공격을 주장했다면 배후가 든든하니 마음대로 작전을 추진한 것도 어느 정도 설명됩니다.
그런데 정작 이 작전에 대한 선조의 반응은 다음과 같아서, 이 역시 완전히 명쾌하지는 않습니다.
[ 예전에 징을 울려서 싸움에 이긴 자도 있고 복이 있는 사람은 신명(神明)도 도왔으니, 혹 만분의 일이나마 가망이 있는 일이다.
(···) 병가의 승패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적(賊)을 토벌한다고 하는데 어찌 저지하겠는가.
(···) 단지 적에게 잡히어서 끝내 멸망을 재촉하는 데 지나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대개 적과 대결(對決)해온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하여 우리나라는 적을 헤아리는 데에 밝지 못한 것인가.
(···) 무슨 물건으로 그들의 성을 공격할 것인가? 장편전(長片箭)으로 그들의 영루(營壘)를 쏘아대면 함락시킬 수 있는가?
(···) 적은 필시 상대하여 싸우지 않고 단지 지키기만 할 것이니, 수일 안으로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모르기는 해도 군량을 어디에서 내오며 누가 운송하겠는가? 하늘에서 곡식을 내려보내고 귀왕(鬼王)이 실어다 주겠는가?
(···) 견고한 성 밑에서 양식이 끊어진다면 적들이 탄환 하나 쏘지 않아도 무너지고 흩어져 달아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 이제 양호(兩湖)의 오합지졸 3천을 뽑아서 한 차례에 적을 섬멸하고자 하니, 괴이하고 괴이한 일이다. 내 구구한 뜻을 다 토설할 수는 없고 다만 하늘이 성사시켜 주기를 축원할 뿐이다. ]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709028_004)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거의 저주 수준인데, 좀 적당히 해야지 저 정도로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작정이라면 진작에 작전을 중단시켰어야 하지 않나 싶긴 합니다.
어쨌든 저런 말을 하면서도 선조가 승인했기 때문에, 이 이틀 뒤에 마침내 장문포 해전이 개시되었습니다.
장문포 해전은 거제도를 공격하는 작전이었기 때문에, 육군도 일부 참여합니다. 그 면면도 화려해서 곽재우 장군, 김덕령 장군(참고로 김덕령의 공식 참전은 이 전투가 거의 유일합니다) 등이 총 3천 정도를 이끌고 왔는데, 난중일기에 따르면 상륙전에 투입된 것은 수백 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sub_04/sub_04_01_02.asp?boardidx=628&mod_yy=1594&mod_mm=10)
하지만 일본군이 요새에 틀어박혀 화살과 탄환만 많이 쏘았기 때문에, 도저히 상륙해 점령할 수 있는 형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곽재우와 김덕령은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어느 정도 짐작했었다고도 합니다.
[ 진격할 무렵 진주 목사(晋州牧使) 곽재우(郭再祐)가 덕령에게 말하기를,
"장군은 정말 바다를 건너 적을 섬멸할 수 있겠소?"
하니, 덕령이 말하기를,
"이번 일은 나의 계책이 아니오. 굴(窟)을 점거하고 버티는 적을 난들 무슨 수로 제압하겠소."
하자, 재우가 말하기를,
"장군의 명성이 온통 적경(賊境)에 퍼져 있으므로 적이 움츠러들어 감히 제멋대로 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소. 만일 지금 경솔하게 진격하다가 약세를 보이기라도 하면 위엄을 잃어 실책함이 클 것이오."
하였다. 그리고 이내 원수(元帥)에게 치보(馳報)하여 그 계책이 옳지 않음을 말했으나 원수는 체부(體府)에서 이미 결정한 것이라고 하여 따르지 않았다. ] (선조수정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2709001_001)
한편 수군 역시 왜선들이 황급히 도망쳐 기지 내에만 머물렀기 때문에, 첫 조우에서 격파한 왜선 2척 이외에는 아무런 전공도 올리지 못합니다.
그러다 육군의 공격도 지지부진하자 점차 회의론이 조성되고, 일본군이 ‘강화 협상 중이니 싸우지 말자’라며 팻말까지 설치하는 등(
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sub_04/sub_04_01_02.asp?boardidx=630&mod_yy=1594&mod_mm=10) 극단적으로 전투를 회피하자 이튿날 육군은 철수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수군도 철군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장문포 해전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원래의 전술 목표였던 거제도 일본군 섬멸은커녕 뚜렷한 승리 하나 이루지 못했으니, 변명의 여지 없이 실패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수군의 경우는 왜선 2척을 격파했고, 그 뒤로는 일본 수군이 전투를 회피했으므로 그나마 전과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육군의 경우에도, 특별한 실책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윤두수에게 떠밀려 공격을 간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 다행히도 여러 장수들이 안 될 것을 알고 진(陣)을 함께하여 중지하거나, 주사(舟師)와 같이 싣고 함께 진격하였기 때문에 비록 승첩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패배에는 이르지 않은 것이니, 이는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710013_014)
이처럼 작전 설계 자체가 문제였다는 인식은 당대에도 있었고, 이 때문에 윤두수는 앞에 언급한 것처럼 대대적인 탄핵을 받게 됩니다.
[ 밖으로는 큰소리 치면서 조정에 품하지 않고 경솔히 군사를 출동하여 나라의 위엄이 땅에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우리 성상의 복수하시려는 마음이야 어찌 속히 흉적을 쓸어버리고 국치(國恥)를 쾌히 씻어버리고자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만 시세(時勢)가 그렇지 못하여 쉽게 시행하지 못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두수(斗壽)는 시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군사를 함부로 움직였으니 (···) ]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710020_005)
원래 장문포 해전에서 조선수군의 역할은 육군이 일본군을 쫓아내면 해상에서 격파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육군이 일본군에게 격퇴당했으므로 역할을 수행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이 역시 비판적으로 보면 패전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만, 책임소재는 윤두수에게 있으므로 이순신 장군의 ‘흠결’이라고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 듯합니다.
4. 2차 부산포 해전2차 부산포 해전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이며, 그만큼 미스터리한 전투이기도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임진왜란 중 있었던 해전 중에 불가사의하기로는 선봉을 다툰다고 생각합니다.
출전의 배경은 정유재란 직전 고니시 유키나가가 획책한 것으로 유명한 반간계입니다. (다만 반쯤은 진심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고니시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부하 요시라(要時羅, 가케하시 시치다유)를 시켜 가토 기요마사가 곧 건너올 테니 수군을 보내 잡으라고 조선 조정에 정보를 주었고, 이에 격동한 조정에서는 부산으로 가는 길목을 초계하라고 조선수군에 지시합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고니시 말만 믿고 적지에서 죽치고 있을 수 없어서 출전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2차 부산포 해전이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풍랑으로 인해 출격이 늦어지는 사이 가토가 조선으로 들어와 버리기는 했습니다만, 그건 천재지변이니 어쩔 수 없었던 일이고, 실제로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그 뒤로도 계속 부산 진격을 주문했습니다.
이는 아래 제안에 따른 명령으로 보입니다.
[ 수군이 차단하는 계책이 진실로 좋은 계책인데, 우리의 조치가 기일에 미치지 못하여 일의 기회를 그르쳤으니 매우 통한스럽습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적 청정이 비록 이미 상륙했더라도 아직까지 영루(營壘)를 이루지 못했고 사졸이 새로 도착하여 돌과 재목을 나르는 왜적이 산과 들에 널려 있으니,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급히 수군·육군의 방비를 신칙하여 몰래 군사를 내어 습격하고, 또 행장(行長)과 후히 사귀어 두 적이 서로 도모하게 하고 저들의 의구심을 인하여 계책을 행하면 우리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001023_002)
이에 따라 부산까지 조선수군이 출정한 것이 바로 2차 부산포 해전입니다.
하지만 부산까지 갔다가 돌아온 이순신 장군은 곧 왕명에 의해 한양으로 압송됩니다.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으로 교체됩니다. (이건 부산 출전이 있기 이전부터 조정에서 이미 결정한 사항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002006_003)
이 일의 부당함이나 이후 진행에 대해서는 워낙 잘 알려져 있으니, 더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압송된 영향인지, 전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간에는 난중일기 기록도 없을뿐더러 이순신 장군 본인이 쓴 보고서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당장 압송되는 상황인데 과연 장계를 쓸 수 있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일단 장계 자체는 올라간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후 유실되었는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비전문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2차 부산포 해전을 재구성하려면 다른 인물들의 보고를 참고해야 합니다.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는 당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출전했던 경상도 병사 김응서(김경서라고도 불리며, 계월향 설화에 나오는 그 김응서입니다)의 보고에 기반한 도원수 권율의 장계, 정탐꾼의 보고에 기반한 도원수 권율의 장계, 도원수 권율의 서장,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후의 원균이 올린 장계가 있습니다.
이중 전투 경과와 관련된 내용만 추려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고 시점에 따라 정렬했습니다.)
· 도원수 권율의 서장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002017_001)
- 수군이 부산에 도달하자 일본군이 총과 창검을 가지고 앞뒤에서 날뛰었다.
- 요시라가 조선 함대로 2~3번 왕래하였다.
-
행장(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이 직접 나와, 부하들에게 조선인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정탐꾼의 보고(를 수록한 권율의 장계)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002020_002)
- 통제사(이순신), 우수사, 우병사(김응서) 등이
2백여 척을 이끌고 갔다.
- 우병사는 왜장 평행장(平行長, 고니시 유키나가)과 밀약을 했다.
-
서로 밀약하기를,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을 유인해 함께 엄습하여 죽이기로 했다.· 경상도 병사(兵使) 김응서의 보고(를 수록한 권율의 장계)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002023_003)
- (김응서가) 통제사, 경상우수사 등과 함께
전선(판옥선) 63척을 거느리고 부산 앞바다로 가서 정박했다.
- 일본군이 수선을 떨며
3백 명을 내어 저항하려고 하였다.
- 날이 저물 무렵에 수군이 절영도로 물러나 정박하자 일본군도 진영으로 도로 들어갔다.
- 날이 어둡자 요시라가 와서 행장의 말을 전했다.
- 요시라가 말하기를, 조선수군이
전함을 더 모아와서 위세를 보이면 고니시가 나가 싸우라고 가토를 압박해 바다로 내려보낼 것이니 그때 공격하면 된다고 했다.
- 수군이 더 모인 뒤에 (가토를) 도모하려고 이틀 만에 배를 돌렸다.
- 돌아가다가 가덕도에 정박했는데, 그곳의
일본군이 우리 초동(樵童) 1명을 쳐서 죽이고 5명을 잡아갔다. - 그래서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 우수(禹壽) 등을 필두로
대포를 쏘며 일본군을 공격했다. 11명 정도 사살한 것 같다.
- 다음 날 요시라가 와서 말하기를 실제로는
일본 군관 6명과 병졸 8명이 죽었고, 17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또
잡아간 조선인들은 즉시 돌려보내 준다고 하였다.
- 요시라가 서장(일본군이 자꾸 휴전을 어기고 소란을 부려 질책하고자 수군이 출전했으니 앞으로는 휴전을 잘 지키라는 내용)을 써 달라고 했다. 일본군을 매어두는 데 효력이 있을 것 같아서 서장을 써 주었다.
- (권율의 의견) 김응서의 보고는 위와 같은데,
정탐인들의 보고와 크게 다르다.- (권율의 의견) 김응서의 보고는
만호(萬戶)가 탔던 배에 실화(失火)가 일어난 일과 사후선(伺候船) 2척을 빼앗긴 일을 거론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숨기는 듯하다.
· 통제사 원균의 장계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003020_004)
- 부산포에서 위세를 과시하고 가덕도에서 접전한 일은
이순신이 이미 보고한 바 있다.- 그때 일을 자세히 알아보니, 조수가 물러가면서
통제사의 배 밑창이 땅에 닿아 나포당할 뻔했으나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 우수(禹壽)가 구했다고 한다.
- 부산의 거사(擧事)에서
우리나라 군졸들이 바다 가득히 죽어 왜적의 비웃음만 샀을 뿐, 별로 이익이 없었다. 참전한 장수들을 벌해야 한다.
- 나주 판관(羅州判官) 어운급(魚雲級)은
적진의 코앞에서 불조심을 하지 않아 기계(器械)와 군량을 일시에 다 불타게 하였다. 어운급을 벌해야 한다.
여기까지 읽고 생각해 보면, 2차 부산포 해전은 뭔가 전투인 듯하면서도 전투가 아니고 회동인 듯하면서도 회동이 아닌, 그런 미묘한 출격이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출전의 동기부터가 ‘소서행장과 모의하여 가등청정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니시는 확실히 임진왜란에도 반대했었고, 강화에도 의욕을 보였던 만큼 여기서 협조적으로 나오는 것도 아주 없을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고니시와 협력하라는 것은 조정의 뜻이지 이순신 장군의 뜻은 아닌 것 같고, 일본군 자체도 고니시가 다 통제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싸울 듯 하다가 또 회동을 했다가 다시 우발적으로 국지전이 벌어졌다가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장계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 동원 병력은 판옥선 63척. 또는 200여 척. (소선까지 합쳐서 200척?)
- 부산포에서 조선수군과 왜군 300여 명이 대치했다. (탄환이 오갔는지는 불분명)
- 고니시가 해변까지 나와 싸움을 금지했다. (그 전까지는 뭔가 싸웠다는 뜻?)
-
부산포에서 대치하던 중에 대장선이 나포될 뻔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군졸들이 바다 가득히 죽었다?- 밤중에 고니시의 명을 받은 요시라가 와서, 김응서와 함께 가토 제거 작전을 논의했다.
- 가토를 끌어내려면 함대의 위세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해 조선수군은 부산을 떠났다.
- 돌아가는 길에 가덕도에서 쉬는데 일본군이 느닷없이 선공했다. 초동(樵童, 나무 베는 아이, 병사는 아닌 것으로 추정) 1명이 죽고, 5명이 잡혀갔다.
- 이에 대포를 쏘며 반격해 더 큰 피해를 주고, 잡혀갔던 조선인도 돌려받았다. 일본군의 피해는 군관 6명 사망, 병사 8명 사망, 17명 부상.
-
사후선(伺候船, 정찰선) 2척을 빼앗긴 적이 있다? (부산포에서인지 가덕도에서인지는 불명)
- 부산 근처에서 실수로 배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어운급의 배였던 것으로 추정)
정도가 됩니다.
이중 이목을 잡아끄는 것은 단연 원균의 보고인데, 저 말대로라면 2차 부산포 해전은 무수한 군졸이 죽고 대장선까지 조수를 헤아리지 못해 모래톱에 걸렸다가 겨우 살아나간 졸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권율의 보고에는 저런 내용이 없다는 것이 첫째로 걸리는 점입니다.
장계에서 보셨다시피, 권율은 (직접 참전한) 김응서뿐 아니라 따로 정탐꾼까지 운용해 여러 경로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양자를 비교하여 김응서가 치부를 감춘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권율이 ‘치부’로 언급한 것이 1) 배에 불이 난 일과 2) 사후선 2척을 빼앗긴 일, 이 둘뿐이라는 점입니다. 군졸이 무수히 죽은 사실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것까지 언급했어야 사리에 맞습니다.
게다가 원균 본인도 부산포에서는 위세를 과시했다고 한 반면 가덕도에서는 ‘접전’이 있었다고 명시하여, 두 사건의 성격이 다르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더라도 일본군은 300명 정도만 나왔다고 하고, 고니시가 직접 나와서 전투를 자제시켰다고도 하는 것으로 보아, 군졸이 무수히 죽을 정도로 큰 충돌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편 원균 자체의 신뢰성도 문제가 되는데, 이유는 전에도 아래와 같은 거짓 보고를 올린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 상이 이르기를,
“아군(我軍) 중에 계속 오는 자가 있었는가?”
하니, 종신이 아뢰기를,
“원균(元均)이 바다에 나가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고 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505010_006)
익히 알려진 것처럼, 저 당시 원균은 함선은 자침시키고 군영은 불태운 채로 혼자 도망간 상태였습니다.
이런 전과가 있으니 일리 있는 말을 하더라도 의심하고 볼 판인데, 그나마 위 장계는 권율의 보고와도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 시절의 원균이라면, 온 힘을 다해 이순신을 깎아내려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이순신이 못한 일을 자기는 할 수 있다고 상소(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505010_006)를 해서 삼도수군통제사를 꿰찼고, 평소에도 이순신을 싫어했으니 위의 거짓 보고 경력을 감안해서 보면 합리적 의심이 가능합니다.
물론 원균의 장계를 신용하지 않더라도, 권율의 장계에 등장하는 1) 배에 불이 난 일과 2) 사후선 2척을 빼앗긴 일은 실제로 있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특히 배에 불이 난 일은 원균의 장계에 등장하는 어운급의 실화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양쪽 모두에서 등장하므로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사후선 2척을 빼앗긴 일이 문제가 되는데, 이 사건이 언제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만일 부산포라고 보면, 원균의 장계는 사후선 2척이 나포당한 것을 대장선이 나포당할 뻔한 것으로 둔갑시켰을 수 있습니다.
반면 가덕도라고 보면, 일본군에게 초동 1명이 죽고 5명이 잡혀간 일이 사후선을 나포당하면서 발생했을 수 있습니다.
일단 사후선의 탑승 인원은 타공(舵工) 1명, 격군(格軍) 4명 등 5명이므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6152), 이들을 빼앗긴 것이 부산포라고 치더라도 2차 부산포 해전에서 조선 측의 피해는 최대 ‘1명 사망, 15명 생포(5명은 귀환)’정도입니다. 반면 일본군의 피해는 ‘14명 사망(6명은 장교급), 17명 부상’입니다.
배에 불이 난 것은 어디까지나 비전투손실이므로, 교환비는 여기서도 조선수군이 우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정리해 보면, 결국 2차 부산포 해전은 해전이라기보다는 무력시위나 교섭회동에 가까웠다는 인상이 듭니다.
고니시와 공모해 가토를 도모하려 했지만 고니시는 ‘수군의 위세가 아직 부족하다’라며 더 많이 끌고 오라고 요청했고, 이에 별 소득 없이 돌아가다가 가덕도에서 국지전을 벌여 승리한 것이 거의 유일한 전투입니다.
사실 이 역시 조정의 (그것도 고니시의 말에 휘둘린 조정의) 주문에 따라 출정한 것이므로 고니시에게 퇴짜를 맞은 것도 수군의 책임은 아닌 듯하고(고니시의 본의가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이긴 합니다), 본격적인 전투가 있었던 가덕도에서는 틀림없이 적을 압도했으므로 굳이 승패를 따진다면 승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원균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는 데에 동의할 경우에는, 여기서도 별로 흠결이랄 것은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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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아마 3편까지 써야 끝이 날 것 같습니다. 근데 하루에 다 올리면 도배가 될까 좀 우려가 되긴 하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