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대학생 오스만은 헌책방에서 구한 정체불명의 책을 읽고는 접신이라도 했는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그는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그는 책 읽기 전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았다. 새로워진 세상을 탐구하던 그는 대학에서 메흐메트라는 남자와 함께 다니는 자난이라는 여대생을 만난다.
정체불명의 책을 읽었던 자난은, 오스만과 정체불명의 책을 논하다가 갑작스럽게 오스만을 향해 입맞춤을 한다.
그리고 자난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종되고,
자난을 찾던 오스만은 메흐메트가 정체불명의 남자에 총탄을 맞고 어디론가 사라진 걸 목격했다.
짝사랑하는 자난이 그리워지고, 메흐메트의 행방까지 궁금한 오스만은 자난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목적지는 없다. 정해진 기간도 없다.
오로지 자난을 찾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버스를 타며 정처없이 떠돌아다닌다.
정신없이 돌아다녔다는 방증인지 교통사고 현장도 세 번이나 목격한다.
그러다 세 번째 교통사고 버스 현장에서 자난을 찾게 된다. 그러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자난은 오스만더러 그 책을 읽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고,
이름도 새로 생겼고, 둘은 부부 관계가 되었고, 나린 박사의 회의에 참여한다는 새로운 임무가 생겼다고 선언한다.
나린 박사를 찾아간 그는 어떤 거대한 음모에 저항해야 한다는 계획을 알게 되고,
그와 관련되어 갈수록 알 수 없는 일들에 휘말려갔고, 일의 연쇄를 만들어갔다.
소설 리뷰하러 쓴 책이 아니니 책 이야긴 여기까지만 하겠다.
소설을 자세히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읽다보면 이 스토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통일전망대 민통선 구간은 원래 운행하던 셔틀버스가 끊겨서 전망대 입장소에서 히치하이킹해야 했다.
도서관에서 재밌어 보여서 빌린 『새로운 인생』과 함께.
지금도 그때도 청춘인 나는 책을 읽으면서 세상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고,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고, 목적지 없는 여행을 떠나고,
복잡한 일들의 연쇄에 휘말린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매혹적이고 인상적일 수가 없었다.
결말은 충격적이었지만, 당시 내향적인 아싸였던 나는 그런 경험이라도 해봤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국내여행 매니아인 나에게도 좀 이색적인 코스를 밟으면서 읽어서 더더욱.
그렇게 나는 새로운 인생 책을 내 인생책 Top 10 정도로 아꼈다.
내가 나도 모르는 새 오스만이 되었다는 걸 꿈에도 몰랐던 시절까지는.
그 독서, 그 독특한 여행 후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대학생으로서 전공 수업을 처음 듣기 시작했고, 복수전공도 신청해 듣고, 괜찮은 이성 둘 번호 따놓는데 성공해놓곤 별로다 싶어 포기했다가 이불킥하고, 저자의 고향 터키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22번의 국내 여행이 있었고, 일본 큐슈와 간사이와 대만이라는 3번의 국제 여행이 있었고, 사회복무요원 복무를 위해 휴학했고, 그 2년동안 100권의 책을 읽었고, 인터넷 방송이라는 신세계를 알게 됐고, 다이어트를 했고, 외모와 패션을 가꿨고, 사람들 많이 만나려 여러 커뮤니티와 동호회에 기웃거렸고, 일상에서 상시적으로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고, 다시 복학해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었고, 교회를 계속 다닐까 고민하다가 성경 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고, 영화를 즐기기 시작했고, 여러 인연을 어쩌다 만나게 됐고, 대학원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잘 사는 것 같은 인생인데 무언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너무 많은 일들을 겪어서 그런가, 내 집이, 내 주변 환경이, 심지어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진다.
과거의 내 사진을 보면 나가 아닌 것 같다. 단순히 외모가 많이 달라져서 그런 건 아니다.
그렇다. 내 인생은 오스만처럼 알 수 없는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그걸 눈치챈 건 그 여행이 끝나고 5년이나 지난 후였다.
바로 글쓰기 이벤트의 소재를 생각하다가 『새로운 인생』을 소재로 쓰기로 했던 그 시점.
단테의 『새로운 인생』의 구절을 딴 『새로운 인생』을 읽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다니는 주인공을 다룬 『새로운 인생』을 읽은 나도,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고, 『새로운 인생』에 나오는 문학적 기법을 이 글에 이용해 '새로운 인생'을 기술하게 되었다.
이 글의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새로운 인생이라는 것은, 과정인가 결과인가?
왜 새로운인생을읽고새로운인생을추구하는새로운인생책과 같은 이상한 재귀구조가 만들어지는가?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은 책을 다 읽은 후인가, 여행을 끝난 후인가 아니면 이 글을 쓰는 시점인가?
처음 보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만나는 일이 생기는 일을 타로점으로 해석해 본다면?
내 인터넷 고민글을 보고 현실에서 만나보고 싶대서 KTX 타고 내려가서 만났던 사람이, 만남 후에도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는 것은 영화에서라면 어떤 신호인가?
갑자기 새로워진 인생의 정체는 무엇인가? 신의 뜻인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가?
바쁠 것 같은 대학원에서 온라인으로만 수업을 듣게 된 건 축복인가 저주인가?
새로운 인생은 저주인가 축복인가?
아니, 새로운 인생이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인가?
내 인생의 퍼즐은 하나둘씩 꼬이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 글조차 원 소설의 문학적 구조마냥 꼬여버리기 시작했다.
사실, 세계가 꼬여버렸는데 내가 꼬여버리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알파고의 이세돌 승리, 브렉시트가 예상을 뒤엎고 가결, 트럼프의 예상치 못한 당선, 박근혜의 기괴한 스캔들과 탄핵, 백일몽이었던 남북정상회담, 일본에 절대 지지 않는다는 NO재팬 신드롬, 아파트값과 가상화폐의 이상급등, 코로나19와 원격의 세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의 호언장담, 갑작스레 뜬 국뽕운동, 갑자기 호러영화가 되버린 중국 일대기, 갑자기 낯설고 두려운 존재가 된 남성과 여성, 정체불명의 K-시리즈 범람...
이상하게 숙일 땐 숙이는 김정은.
기괴한 UI를 가진 키오스크.
마스크를 써서 새로워진 나의 얼굴 아이덴티티.
KTX보다 싸진 비행기.
책임있는 자유주의를 구사한다는 자발적인 K-방역.
불안할 정도로 들려오는 한국 문화컨텐츠 대성공 소식들.
이건 대체 무엇인가.
내가 사는 세계가 그 세계가 과연 맞는가?
심지어 사회과학 전공생인 나는, 꼬여버린 새로운 세계를 기술해야 한다는 임무도 맡고 있기에 더더욱 혼란스럽다.
『새로운 인생』은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실 작가의 고향 터키의 80-90년대의 혼란스러운 사회상, 서양과 동양의 갈등을 단층선에서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내가 지금 사는 세계도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니 적나라한 것도 아니고 그 자체다.
이쯤되면 나는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한국버전에 살고 있다고 결론지어도 될 듯 하다.
새로운 인생, 여행하는 듯한 느낌의 인생은 사실 치명적이다.
자난을 짝사랑하는 오스만의 언행은 찌질하기 짝이 없었고, 이는 파국적인 결말로 이어지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려 여행하다 버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메흐메트와 자난도 사람을 현혹시킨다며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에 대해 경고한다.
아마 내 새로운 인생도 그럴 것이다.
연애와 섹스는 어쩌면 내 정열을 태우고, 내 인생을 낭떠러지로 밀어버릴지 모른다.
새로운 선후배와 친구 관계는 스트레스만 만들고 담배와 술이라는 위험한 취미로 유도할지 모른다.
사제처럼 하는 대학원 공부는 나를 자살 직전까지 몰고갈지 모른다.
시대를 뒤흔들 지식인계의 새로운 사상은 나를 형장으로 이끌지 모른다.
새로운 인생을 위한 결혼과 육아는 나의 새로운 인생을 제약할지 모른다.
특이점 수준의 과학기술은 유나바머의 우려처럼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 모른다.
어쩌면 인생은 생로병사의 진리만 남는 공허한 것이라는, 불교적인 결론만 날지 모른다.
더 나아가자면 새로운 인생 따윈 없다는 결론도 가능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이 있다.
내 인생의 결론이 어찌되든, 새로운 인생이 환상임이 드러날지언정,
인생을 찾는 과정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
나는 이를 게임과 학문이라는 두 상극같은 매체로 확인했다.
작년에 즐겼던 게임에서는(치명적인 스포일러라 제목은 적지 않겠다) 결말에서 주인공들이 스스로 알던 인생과 현재 세계가 모두 외부에서 주입된 가짜, 픽션임을 알게 되자 좌절하나, 이런 픽션조차 자신들을 변화하게 했고 그때의 감정만큼은 진짜였다며 진실만큼이나 거짓도 세상을 바뀔 수 있다며, 픽션인지 사실인지 모른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내가 들었던 저명한 철학 교수는 회식자리에서 '이성은 결과보다는 과정이다'는 말을 남겼다.
내 인생이 어디로 여행할지는 나도 모른다.
새로운 인생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아니, 이게 새로운 인생은 맞는걸까?
이미 새로운 인생은 시작되었으니, 원하지 않는다 해서 피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낯선 세상을 향해 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씁쓸하지만.
나는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결말이 소설에 나오는, 새로운 인생을 위해 여행하다가 버스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비명횡사하는 것이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시작한 새로운 인생(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이제는 멈출 수 없다.
그것이 내 운명임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수밖에......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위로는 음악으로 대신해야겠다.
소설의 배경인 1980대에 유행했던 터키 음악이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새로운 인생을 맞이한 나한테 딱 어울리는 정서의 음악이다.
이런 훌륭한 음악들을 내뱉은 터키에 관심을 갖게 해 준 작가 오르한 파묵에 감사를 드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