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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1/02 15:52:31
Name 아난
Subject [일반] 아도르노 - 해방된 사회 (수정됨)
<미니마 모랄리아>의 집필은 아도르노가 미국에 망명해 있던 동안인 1944년에서 1947년 사이에 이루어졌고 아래 에세이는 1945년에 집필된 2부의 마지막 에세이입니다. 에세이 번호는 100입니다. 번역한 제 자신한테도 아리송한 구절들이 있으니 읽는 분들한테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탈성장 Degrowth 생태공산주의적 메시지를 담은 글 - 선구적인 글 - 이라고 보시면 제일 좋습니다. 프랑스어로 되어 있는 제목은 모파상의 1888년에 출간된 지중해 요트 여행기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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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dor Wiesengrund Adorno, Minima Moralia. Reflexionen aus dem beschädigten Leben (1951)
테오도르 비젠그룬트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 (1951)

물 위에서

해방된 사회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인간적 가능성들의 실현’이나 ‘삶의 풍요’와 같은 답변들을 듣게 된다. 그 불가피한 질문이 부당한 것처럼, 그 대답이 역겹고 위압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그 답변은 삶을 만끽하려 들었던 1890년대의 수염 텁수룩한 자연주의자들의 사회민주주의적인 이상적 인간형을 연상시킨다. 가장 조야한 답변만이 부드러울 것이다: 아무도 더는 굶주려서는 안 된다는 것. 다른 답변들은 모두 인간적 욕구들에 따라 규정되어야 하는 상태를 위해, 자기목적으로서의 생산 모델에 맞춰 형성되어 있는 인간 행태들을 상정한다. 서슴없는, 힘이 넘치는, 창조적인 인간이라는 소망상에마저 상품물신숭배가 배어 있는데, 부르주아 사회에서 이 물신숭배에는 억압, 무기력, 늘 똑같은 것의 불모성이 따라다닌다. 부르주아적 ‘무역사성’에 속하면서 그것을 보완해주는 역동성 개념은 절대적인 것으로 격상되었지만, 생산법칙들의 인간학적 반사물로서, 해방된 사회에서는 그 자체가 욕구와 비판적으로 대질되어야 한다. 구속받지 않는 행동, 중단없는 생산, 포만감을 모르는 빵빵한 배, 대활기로서의 자유 같은 관념은 부르주아적 자연 개념을 먹고사는데, 그것은 예로부터 오직 사회적 폭력을 변경 불가능한 것, 건강한 영원성의 일부로 선전하는 데만 이용되었다. 마르크스 자신은 저항한 사회주의의 긍정적인 청사진이 야만 상태에 머무는 이유는 거기에 있지 소위 하향 평준화에 있지 않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류가 유복한 생활 속에서 축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연이라는 가면을 쓴 사회성, 즉 활동의 맹목적 광포함으로서의 집합성이 살벌하게 확장되는 것이다. 소박하게도 발전경향이 생산의 증대라는 한 방향으로만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총체성으로서 통합되고 양화에 의해 지배되어 질적 차이에 적대적이기 때문에, 발전을 한 방향으로만 허락하는 부르주아적 전망의 일환이다. 해방된 사회를 바로 그러한 총체성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생각하면, 소실선들이 시야에 포착되는데, 그 소실선들은 생산의 증대 및 그 증대를 반영하는 인간상들과 별 공통점이 없을 것이다. 아무런 억압도 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코 가장 안락한 이들이 아니고 가장 자유로운 이들조차 아니라면, 족쇄가 떨어져 나간 사회는 아마도 생산력 또한 인간의 궁극적 기초가 아니라 상품생산에 맞게 역사적으로 재단된 인간의 형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진실한 사회는 발전을 식상해 할 것이며 착란적 강박 아래서 낯선 별들로 돌진하는 대신 자유롭게 가능성들을 다 쓰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이다. 심지어는 더는 곤경을 모르는 인류에게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까지 취해 온, 그렇지만 풍요와 함께 곤경을 확대 재생산해왔던 모든 조치들의 망상적이고 무익한 무엇인가가 어렴풋이 떠오를 것이다. 현재의 향유의 도식이 바쁘게 쫓아다니기, 계획 만들기, 의지를 세우기, 정복하기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한, 향유 자체도 이것에 의해 영향받을 것이다. 한 마리 짐승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기,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기, ‘그저 있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기, 더 이상의 어떤 규정과 실현도 없이’가 과정, 행위, 실현의 자리에 들어서게 될 것이고 기원에서 정점에 이른다는 변증법적 논리의 약속을 진실로 이행하게 될지 모른다. 추상적 개념들 가운데 영원한 평화의 개념만큼 실현된 유토피아에 가까운 것은 없다. 진보라는 경마장의 울타리 너머 구경꾼인 모파상이나 슈테른하임은 이 의도에 표현을 빌려준다. 그러한 의도가 갖는 부서지기 쉬운 연약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수줍게.

Sur l'eau

Auf die Frage nach dem Ziel der emanzipierten Gesellschaft erhält man Antworten wie die Erfüllung der menschlichen Möglichkeiten oder den Reichtum des Lebens. So illegitim die unvermeidliche Frage, so unvermeidlich das Abstoßende, Auftrumpfende der Antwort, welche die Erinnerung an das sozialdemokratische Persönlichkeitsideal vollbärtiger Naturalisten der neunziger Jahre aufruft, die sich ausleben wollten. Zart wäre einzig das Gröbste: daß keiner mehr hungern soll. Alles andere setzt für einen Zustand, der nach menschlichen Bedürfnissen zu bestimmen wäre, ein menschliches Verhalten an, das am Modell der Produktion als Selbstzweck gebildet ist. In das Wunschbild des ungehemmten, kraftstrotzenden, schöpferischen Menschen ist eben der Fetischismus der Ware eingesickert, der in der bürgerlichen Gesellschaft Hemmung, Ohnmacht, die Sterilität des Immergleichen mit sich führt. Der Begriff der Dynamik, der zu der bürgerlichen »Geschichtslosigkeit« komplementär gehört, wird zum Absoluten erhöht, während er doch, als anthropologischer Reflex der Produktionsgesetze, in der emanzipierten Gesellschaft selber dem Bedürfnis kritisch konfrontiert werden müßte. Die Vorstellung vom fessellosen Tun, dem ununterbrochenen Zeugen, der pausbäckigen Unersättlichkeit, der Freiheit als Hochbetrieb zehrt von jenem bürgerlichen Naturbegriff, der von je einzig dazu getaugt hat, die gesellschaftliche Gewalt als unabänderliche, als ein Stück gesunder Ewigkeit zu proklamieren. Darin und nicht in der vorgeblichen Gleichmacherei verharrten die positiven Entwürfe des Sozialismus, gegen die Marx sich sträubte, in der Barbarei. Nicht das Erschlaffen der Menschheit im Wohlleben ist zu fürchten, sondern die wüste Erweiterung des in Allnatur vermummten Gesellschaftlichen, Kollektivität als blinde Wut des Machens. Die naiv unterstellte Eindeutigkeit der Entwicklungstendenz auf Steigerung der Produktion ist selber ein Stück jener Bürgerlichkeit, die Entwicklung nach einer Richtung nur zuläßt, weil sie, als Totalität zusammengeschlossen, von Quantifizierung beherrscht, der qualitativen Differenz feindlich ist. Denkt man die emanzipierte Gesellschaft als Emanzipation gerade von solcher Totalität, dann werden Fluchtlinien sichtbar, die mit der Steigerung der Produktion und ihren menschlichen Spiegelungen wenig gemein haben. Wenn hemmungslose Leute keineswegs die angenehmsten und nicht einmal die freiesten sind, so könnte wohl die Gesellschaft, deren Fessel gefallen ist, darauf sich besinnen, daß auch die Produktivkräfte nicht das letzte Substrat des Menschen, sondern dessen auf die Warenproduktion historisch zugeschnittene Gestalt abgeben. Vielleicht wird die wahre Gesellschaft der Entfaltung überdrüssig und läßt aus Freiheit Möglichkeiten ungenützt, anstatt unter irrem Zwang auf fremde Sterne einzustürmen. Einer Menschheit, welche Not nicht mehr kennt, dämmert gar etwas von dem Wahnhaften, Vergeblichen all der Veranstaltungen, welche bis dahin getroffen wurden, um der Not zu entgehen, und welche die Not mit dem Reichtum erweitert reproduzierten. Genuß selber würde davon berührt, so wie sein gegenwärtiges Schema von der Betriebsamkeit, dem Planen, seinen Willen Haben, Unterjochen nicht getrennt werden kann. Rien faire comme une bête, auf dem Wasser liegen und friedlich in den Himmel schauen, »sein, sonst nichts, ohne alle weitere Bestimmung und Erfüllung« könnte an Stelle von Prozeß, Tun, Erfüllen treten und so wahrhaft das Versprechen der dialektischen Logik einlösen, in ihren Ursprung zu münden. Keiner unter den abstrakten Begriffen kommt der erfüllten Utopie näher als der vom ewigen Frieden. Zaungäste des Fortschritts wie Maupassant und Sternheim haben dieser Intention zum Ausdruck verholfen, so schüchtern, wie es deren Zerbrechlichkeit einzig verstattet 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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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2 16:31
수정 아이콘
아도르노를 유토피아주의자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개론서를 읽은 적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한 마리 짐승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기,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기, ‘그저 있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기, 더 이상의 어떤 규정과 실현도 없이’가 과정, 행위, 실현의 자리에 들어서게 될 것이고 기원에서 정점에 이른다는 변증법적 논리의 약속을 진실로 이행하게 될지 모른다."라고 말하는 태도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도르노가 말하고자 한 바의 핵심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류가 유복한 생활 속에서 축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연이라는 가면을 쓴 사회성, 즉 활동의 맹목적 광포함으로서의 집합성이 살벌하게 확장되는 것이다."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부정문으로서의 '그저 있기', 부정문으로서의 '아무것도 아니기'. 따라서 저항의 측면에서 읽지 않으면 아도르노가 빛이 바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짧게 올려주실 때마다 두뇌에 감미로운 간식을 넣어주는 기분이라서 좋네요. 감사합니다.
브리니
21/01/02 16:48
수정 아이콘
그래서 마약과 히피와 비틀즈가 나온 것인가! 하지만 인간은 같은 실수와 유행을 반복하고...한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이보그와 가상현실로 뇌를 업로드 하여 그 속에서 대리전을 통해 폭력성을 발산해야한다..그걸 에너지로 삼은게 매트릭스 시스템!..네 망상이었구요

질문이 있는데 앞쪽에 마르크스 자신은 저항한~하향 평준화에 있지 않다 부분이 잘 이해가 안되는데 사회주의의 청사진이 야만상태에 놓여진 것에 거부감을 가진건지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에 거부감(저항한)을 가진건지 잘 모르겠네요.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제창했고 실현과정에서의 사회주의가 나타났다? 뭐 그정도 수준밖에 몰라서..
21/01/02 17:55
수정 아이콘
사회주의의 통상적인 청사진에서 자본주의 찬양자들의 성장제일주의에 전제되어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인간관/사회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그런 사회주의 청사진에 저항했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생각한 해방된 사회로서의 공산주의 사회는 '구속받지 않는 행동, 중단없는 생산, 포만감을 모르는 빵빵한 배, 대활기로서의 자유'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에게서 사회주의는 해방된 사회로서의 공산주의 사회로 가는 과도기 사회입니다.
브리니
21/01/02 16:55
수정 아이콘
느낀 점을 하나 더 쓰면..해방되기 위해 억압이 가미된 부르주아적 발전 방향?행태?가 좀 더 지속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예로 아프리카에 휴대폰이 보급되고 유선통신이 없는 상태에서 무선통신을 사용하고 있는데 몇몇지역은 그러한 단계에서 전력공급이 부족해 매우 비싸게 전기가 팔리고 있고..그럼에도 그 배터리 비용으로 가계 수익의 많은 부분을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그러한 곳에도 모바일과 전기공급이 원활해지면 1차적 해방 단계에 있는 것 아닐까~하고 본문 내용들과 연관지어봅니다. 물론 유럽뇨속들이 깽판쳐놓고 탄소배출권 거리면서 개발도상국 제재하는 건 좀 너무한다는 생각도 곁들여서..지들 다 해쳐먹고 남은 먹지말래 크크..
21/01/02 18:19
수정 아이콘
(수정됨) 아도르노는 인류가 풍요와 더불어 곤경을 확대재생산했던 조치들에서 곤경을 확대재생산하는 면 - 망상적이고 무익한 면 - 을 제거할 수 있는 생산력 발전 단계에 와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제거가 이루어지면 그 풍요도 더는, 더 많고 더 다양하고 더 고급한 재화들과 용역들의 무한한 확대재생산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사실 그 계속되어온 확대재생산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0억 내외의 인구가 궁핍한 것은 확대재생산이, 즉 생산력 발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윤 추구에 종속되어 있는 분배 시스템의 한계 때문이죠. 게다가 그 성장지상주의적 확대재생산은 생태계에 파괴적 영향을 끼쳐온 주범입니다. 그러나 이 얘기는 당장 기본적인 소비물자도 부족한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이 그 물자들을 넉넉하게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수단이 이윤 먼저인 자본주의적 생산을 더 자주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인 사람들에게 당장 생태공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호소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그들중 더 교육받았고 더 여유있는 일부라면 그 얘기의 장기적 - 사실 별로 장기적이지 않습니다 - 이고 거시적인 메시지를 받아들 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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