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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6/17 01:58:19
Name OrBef
Subject [일반] 아빠 부시가 빌 클린턴에게 패한 후 남긴 편지
아들 부시는 이상한 전쟁을 일으켜서 욕을 많이 먹었지만, 아빠 부시는 조금 다른 사람입니다. 미국이 냉전에서 막 승리하던 시기에 취임해서, 소련의 몰락을 지켜보았고,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대상으로 (혼자는 아니고 국제 연합군을 조직한 거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게 더 대단하죠) 5주 만에 대승을 거둬서, '이제 이 세계는 미쿡이 킹왕짱임' 을 각인시켰죠.

애초에 취임사부터가 '독재의 시대는 가고 새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로 요약되는, 낙관적인 전망으로 가득 찬 것이었죠. 오바마 형님의 취임사 '우리는 망했습니다' 와 참으로 대비됩니다.

하지만 이 양반이 실제로 물려받은 미국 경제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레이건 재임 기간 중 연간 재정 적자는 세 배로 뛰었고, 연간 재정 적자만도 2천억 불이 넘고 있었죠. 오바마와 당적만 반대지, 부시 역시 '세금을 올려서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자' 라는 민주당과 '지출을 줄여서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자' 라는 공화당 사이에서 고생을 제법 했습니다. 나름의 타협안인 '세금은 조금 올리고 지출은 조금 줄이자' 라는 법안을 제안했던 부시는, '세금을 올린다고라?' 라고 분노한 공화당으로부터 (민주당이 아닙니다!) 거절을 당했죠. 어떻게든 재정 건전성을 회복해야했던 부시는, 오히려 민주당과 손잡고 어찌어찌 수정 법안은 통과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후 공화당으로부터 배신자의 낙인을 받게 되고, 집권 초기 90% 에 육박했던 지지율은 폭락,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해당 법안을 통과시키던 시점 이후부터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게 되고, 실업율이 치솟게 됩니다. '거 봐라 민주당 식으로 하니까 이렇게 되지' 라고 생각하는 공화당 지지자들로부터도 버림받고, 공화당 대통령이니까 당연히 민주당으로부터는 예쁨 받지 못하고, 망했죠.

이런 상태에서 1992 년 재선을 위한 캠페인에 돌입하게 됩니다. 상대는 (1년 전만 해도 걸프전 성공과 소련의 몰락으로 부시의 지지율이 90% 에 달했기 때문에, 민주당의 거물들은 오히려 대선 후보를 패스하는 분위기였다고 하는군요) 비교적 초짜인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 잘 생겼고/젊고/친근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화술을 구사하는 빌 클린턴은, 늙고/이마에 엘리트라고 썼으며/고루한 느낌의 부시와 (이 사람은 관료 오브 관료, 관료라는 개념이 살을 얻어서 인간으로 태어난 느낌의 사람입니다) 매우 대조되는 인물이었습니다. 불과 1년 전에 90% 였던 지지율은 불경기로 인해 매일 폭락, 대선 당시의 지지율은 겨우 37% 였다고 하는군요.

대선 결과는 43% 대 38% 로 클린턴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백악관을 떠나게 된 부시가, 백악관 책상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놓아두었다고 하네요. 원래 전임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에게 편지를 놓아두는 것은 미국 백악관의 관례입니다만, 일반적으로는 민감한 내용들이 좀 있고 해서 일반에는 공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편지는 그런 내용이 없는 대신 진심 어린 축하와 조언의 편지라서, 몇 년 뒤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힐러리 캠페인 쪽에서 '너희들 이런 편지 있었던 거 알지?' 라는 식으로 슬쩍 다시 인터넷에 흘렸다고 하네요. 저도 이런 편지가 있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위에서는 좋게좋게 설명했지만, 아빠 부시도 지저분한 일이 없었던 사람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가 파나마에서의 군사작전이 있겠네요. 하지만 그런 것 다 떠나서, 인간적으로 욕먹는 일은 없었던 사람으로 미국 대중에게 기억되고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하나지요. 이번 편지 관련한 기사에서도 누가 댓글에

'난 부시의 모든 정책에 반대했던 민주당원입니다만, 이런 공화당 대통령이 있었던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라고 써두었더군요. 그럼 한 번 읽어보시죠:

-----------------------


1993년 1 월 20일,

Dear 빌,

지금 이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나는 4년 전에 처음 이 사무실에 들어설 때 느꼈던 경외와 존경의 마음을 다시 느끼게 된다네. 자네도 아마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될 거야.

자네가 이곳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네. 전임자들 중 몇몇은 백악관이야말로 외로운 곳이었다고 말했다던데, 난 그렇진 않았어.

물론 어려운 때도 있을 게야. 자네가 받는 비판 중에는 불공평한 것들도 있겠지. 나는 사실 남에게 충고하는 타잎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언 하나만 하자면, 그런 비판을 듣는다고 해서 너무 자책하거나 비뚤어지지 말도록 하게.

자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 즈음에는 자네가 우리 모두의 대통령이겠지. 행운을 비네. 자네에게도, 자네 가족에게도.

자네의 성공이 이 나라의 성공이야. 자네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하네.

행운을 비네 -- 

조지

-----------------------

그리고 이런 편지를 받은 클린턴은, 백악관에서 너무(?) 행복을 추구하셨다는 추문을 남기긴 했지만, 미국 경제를 역대급 호황으로 만들어놓게 되지요. 그리고 그 사람의 부인이 자신의 둘째 아들과 다시 맞붙어서 싸울 뻔 했었다니, 인생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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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 of Beholder
16/06/17 02:02
수정 아이콘
흐흐 말 그대로 극락백악관 행이었죠.. our밑에 언더라인 쳐져있는게 간지납니다.
16/06/17 02:04
수정 아이콘
말씀 듣고 나서, 간지를 살리기 위해서 번역문도 밑줄을 쳤습니다
16/06/17 02:27
수정 아이콘
UN 대사,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 CIA 국장, 부통령 8년 등 대통령 취임 전에 쌓은 경험으로만 보면 힐러리 뺨따구라도 올려칠 베테랑이었지만, 경험과 비전은 다른 덕목이라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랄까요. 그 유명한 "Read my lips" 사건도 그렇고, 시대를 꿰뚫어볼 안목이 아쉬웠던 대통령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최대 실착은, 자식 농사입니다.
아들 한 놈은 미국을 말아먹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 나비효과로 세계를 말아먹었고,
아들 또 한 놈은 웬 금발의 뚱땡이 사이코패스 한놈조차 당해내지 못해서 세계역사를 헬게이트로 몰아넣기 직전입니다.

그 두 아들이 아버지의 후광과 아버지의 친구들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정치계 문턱이라도 갔을까 의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들들의 역량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들을 어설프게 요직에 올려놓다시피한 것은 본인으로서도 직간접적으로 책임을 느껴야 할 점입니다.
16/06/17 02:31
수정 아이콘
사실 뭐 경제는 대통령 한 명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복잡계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 확연한 개삽질을 한 것이 아니라면 뭐라고 탓하기는 좀 어렵지 싶습니다.

자식 농사 관련해서는 동의합니다. 그래도 젭이 트럼프한테 어떻게 당하는 지를 힐러리가 잘 공부해둔 것 같고, 지금 추세대로 가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것 같진 않으니.... 일종의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은 한 것 같습니다?
16/06/17 02:43
수정 아이콘
"Read my lips" 사건의 진정한 문제는 향후 경제의 변동을 예측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대통령이 절대 약속해서는 안되는 것을 약속했다는 것이었죠. 관련 전공의 학자나 관료들과 몇번 얘기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거의 일치하다시피한 견해가 "세금을 결국 올렸냐 말았냐가 문제가 아니라, 세금을 절대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시점에서 이미 문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정책의 묘는 그 재량과 유연성, 신뢰성과 안정성의 조화에 있는 것인데,
그 Read my lips 발언으로 유연성이 극적으로 제한되었고 그 제한된 유연성 내에서 정책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정치적, 경제적 자산을 낭비했으며 향후 그 약속을 깨버림에 따라 신뢰성까지 파괴되어버렸으니, 경제와 관련된 아버지부시 행정부의 몰락은 사실상 자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굳이 안해도 될 말을 해버리는 바람에 너무 큰 대가를 치렀어요.

물론 셸링의 이론이나 이스라엘의 대테러절대비타협정책처럼 스스로에게 제한을 부과함으로써 오히려 정책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도 가능하지만, 세금은 그런 제한을 감당하기엔 너무 막대한 정책대상이었죠.
16/06/17 02:54
수정 아이콘
그 부분은 말씀 듣고보니 그렇겠습니다. 이 분야는 제가 잘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대중 매체에서 접하는 것이 전부에요...
율리우스 카이사르
16/06/17 09:01
수정 아이콘
뭐 그렇긴 하지만, 아들 둘도 대통령하고, 둘째아들은 후보로도 언급되고,

자식농사는 잘 한편인거 같습니다. 주변에 워낙 자식이 본인 발끝도 못따라와서 모든 커리어를 다 이루고 말년에 노심초사 하는 분들을 많이 봐서..
뜨와에므와
16/06/17 07:13
수정 아이콘
편지 자체는 낭만적이긴 한데

아들 부시를 둘러싼 에너지 카르텔이나 네오콘 등등을 생각하면 순수하게 받아들이기가...

제가 너무 저런 음모론들을 많이 읽었나봐요.
칼라미티
16/06/17 10:05
수정 아이콘
이런 글 너무 좋아요! 잘 읽고 갑니다.
16/06/17 10:06
수정 아이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힐러리가 다시 언급한건데 편지 자체는 순수하다고 생각하고 생각보다 별 내용은 없지만 간지나네요.

그리고 아빠부시는 나름 성공적인 대통령 아니였나요?
그게 아니였다면 아들이 대통령 될수가 없었겠죠..
-안군-
16/06/17 10:13
수정 아이콘
클린턴이 너무 행복한 백악관을 즐기게 된게 다 저 편지에서 시작된 스노우볼이었군요!!
켈로그김
16/06/17 10:21
수정 아이콘
아빠부시때 걸프전..
그거때문에 울 아부지가 젤리를 수십만원어치 사서
"곧 세계3차대전이 일어나면 이게 식량이자 화폐가 될 것이야" 라고 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 젤리.. 차 트렁크에 다 들어가지도 않았었어요 ..
TheLasid
16/06/17 10:3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Happiness 앞에 적힌 단어는 뭔가요? great? 처럼 보이는 거요 :)
16/06/17 11:25
수정 아이콘
Great 맞는 것 같습니다
D.TASADAR
16/06/17 12:1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둥실둥실두둥실
16/06/17 17:34
수정 아이콘
편지가 되게 다정하네요. 'our'에 밑줄 그어져 있는게 마음에 남습니다.
cienbuss
16/06/18 00:44
수정 아이콘
인상적인 부분이 '우리 모두의 대통령', 그리고 '자네의 성공이 우리 모두의 성공'이네요. 미국 가보면 대다수 국민들이 한심해 보여도 세계최강국인 이유가 최상위 엘리트들의 역량과 국익을 위해서는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단결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라고 하던데 후자를 이 편지를 통해서 어느정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민주화 후 후임에게 저렇게 따뜻한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대통령이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매번 있었던 정치적인 보복들을 보면 (물론 이유없이 한 보복들은 아니고 실제 비리가 있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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