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를 위해 반말로 작성하였으니 양해 부탁 드립니다)
삼국지 커뮤니티에서 가장 논쟁과 분쟁이 많은 것이 바로 관우/제갈량 일 것이다. 제갈량이야 워낙 연의에서 기책과 모략에서 반인반신半人半神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것에 반해 정사에선 신기묘산의 부분보다 오히려 성실하고 우직하고 근성있는 모습이기때문에 그런 괴리감때문에 폄하가 많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관우의 경우를 살펴보면 연의에서 많이 부풀려지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연의때문에 폄하를 당한다고 본다. 관우가 연의에서 참살하거나 잡은 장수는 대개 허구의 무장이나 잡장인데 반해 역사상에서 그와 대결했던 이들은 조인, 만총, 이통, 악진, 문빙, 여몽, 육손, 노숙, 주연, 서황, 우금, 감녕 등의 걸출한 무장들이다. 이들은 나관중이 연의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는 무장으로 묘사하여 사실상 관우가 저들에게 진 것에 대해 결과적으로는 관우를 초라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 저들 역시 위나라와 오나라의 명장으로서 관우가 진다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못된다.
1. 연의에서는 웬만한 장수라면 다하는 적장 참살이 정사에선 굉장히 드문데 관우가 독보적임에도 이런 부분을 간과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대인전으로 일기토를 한것 자체부터가 많지않은데 적장을 참살한 경우는 더욱 드물기때문에 관우가 원소의 사령관급인 안량을 참살한 것은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된 것이다.
원소가 대장(大將) 안량(顔良)을 보내 동군(東郡)태수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은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先鋒)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刺)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諸將)들 중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 삼국지 촉지 관우전 -
(링크) 이십이사차기 관우와 장비의 용맹
http://blog.naver.com/smh2829/220648450405
2. 전공이 부실하다?
사실 안량 참살부터가 엄청난 전공인데 이를 두고 폄하하는 사람이 많다. 얼마나 엄청난 전공이었으면 사서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을 정도인가. 저 당시엔 연의같은건 찾아볼 수도 없었던 시대이다.
또 관우의 양번전쟁도 결국은 형주 상실로 이어졌기때문에 단지 행운에 의한 승리로만 여겨 상당히 많은 폄하를 한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관우는 유비의 명령을 받아 한중전과 호응하여 양번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한중전과 양번전쟁 당시 중원의 상황은 관우 또는 촉나라와 연계한 반란이 많이 일어났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관우는 우금을 포함한 7군을 포획하고 방덕을 참수하기에 이르러 위나라의 중원이 관우의 위세로 인해 진동한다. 위나라의 멸망 전까지 가장 위기상황을 이때로 볼 수도 있다.
안량 참살은 원소의 사령관급 대장을 참살한 것이며, 우금은 위나라의 사단장 급, 방덕은 원스타 급이다. 이런 전공은 결코 부실한 것도 아니며 당시에 흔했던 전공도 아니었다. 따라서 결코 전공이 부실하다고 볼 수가 없다.
3. 패배만 했던 장수이다?
이것도 역시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관우가 일생을 통해 패배한 것은 기록에 의하면 3번이다.
1> 서주 하비전
이 때는 이미 유비의 본진의 궤멸된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2> 적벽대전 이후 남군 공방전 직후의 청니/심구 전투
: 조인을 사로잡기 위해 주유에 의해 강릉 북쪽길을 끊으려 파견되었으나 이통/악진/문빙 등에 의해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링크)
http://blog.naver.com/smh2829/220498338416
3> 형주 상실 : 유비의 명을 받아 한중전에 호응하여 위나라 각지에 반란을 조장하고 양번지역으로 진격한 것으로 생각됨.
(링크 ①)
http://blog.naver.com/smh2829/209336564
(링크 ②)
http://blog.naver.com/smh2829/220636343024
결론 요약 : 사실 불가항력적인 패배로 볼 수 있다.
4. 촉지의 간략함을 모르고 하는 얘기도 있다.
진수는 삼국지를 편찬하면서, 위지는 왕침의 위서를 기본으로 하였고 오지는 위소의 오서를 기본으로 하였으나 촉지는 기록과 사적이 산일되어 본인이 찬술하였다.
촉지는 선주전, 후주전, 제갈량전 정도를 제외하면 간략한 열전들이 많으며 창업대장열전인 관장마황조전도 부실하고 간략하다. 이런 사례는 매우 많아 미축, 손건, 간옹, 이적의 기록도 너무나 적고 조운에 버금갔다고 했던 진도의 경우는 계한보신찬에서 한줄기록으로 볼수 있고 왕평에 버금갔던 구부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런 사례는 일일히 열거하기도 어려울만큼 너무나 많다.
5. 관우만큼 자타공인받은 무장도 없다.
여러 기록이 있는데 몇가지만 올려둔다.
황초 원년(220), 유엽을 시중으로 삼고 관내후의 작위를 하사했다. 손권이 관우를 주살한 후에 문제는 조칙을 내려 모든 신하들에게 물어 유비가 관우를 위하여 오나라에 보복하려는지 않으려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모두들 논의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말했다.
“촉나라는 작은 나라일 뿐이며, 명장(名將)으로는 오직 관우만 있었습니다. 관우가 죽고 군대는 무너졌으며, 나라 안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데, 다시 출동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유엽만은 혼자 이렇게 말했다. (이하생략)
- 삼국지 위지 유엽전 -
건안 24년(219),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는데, 이때 각 주에서는 모두 병사를 변방지역에 주둔시켰다. 온회가 연주자사 배잠(裴潛)에게 말했다.
“이 시기는 비록 적이 있지만 걱정할 가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남방을 정벌하는 군사에게 변고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강물은 불어나고 조자효(曹子孝 : 조인)는 적지 깊숙이 들어가 고립되어 장래의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우는 용맹하여 전쟁을 잘 하므로,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반드시 근심이 될 것입니다.
- 삼국지 위지 온회전 -
공손연이 맹약을 위반하자, 손권은 가서 정벌하려고 했다. 육손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같이 말했다.
-공손연은 험난한 곳에 의지하고 견고한 수비에 기대어 우리의 특사를 구휴한 채 명마를 바치지 않고 있으므로 사실 원수가 되어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만이는 중원을 소란스럽게 하며 성왕의 교화를 받지 못하고, 새처럼 황폐한 변방에 숨어 있으면서 우리 군대에 대항하여 폐하로 하여금 진노하게 하여 작은 배를 타고 대해를 건너는 위험을 생각지 않고 예측하지 못하는 험난함을 결심하도록 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지금 천하는 구름처럼 혼란하고, 군웅들은 호랑이처럼 다투며, 영웅호걸들은 뛰어오르려고 하며 크게 소리지르고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신무(神武)의 자태로써 하늘의 안배를 받아 오림에서 조조를 무찌르고, 서릉에서 유비를패배시켰으며, 형주에서 관우를 붙잡았는데, 이 세 명의 적은 당대의 영웅호걸이었지만 모두 그 예봉을 부러뜨렸습니다. 폐하께서 성스러운 교화로 어루만지자, 만 리 안의 백성들은 바람이 풀을 움직이는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중원을 평정시키고 통일 대유(大猷)를 실현 시킬 때인 것입니다.
- 삼국지 오지 육손전 -
6. 그럼 관우는 비판할 수가 없는 완벽한 무장인가?
아니다. 관우는 오나라와의 외교에서 최악으로 대처하였고 형주 사족/호족의 대해 결집을 시키지못하여 분열이 있었으므로 결국엔 형주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는 외교력과 정치력의 부재가 있었기때문이다. 따라서 관우는 외교력과 정치력을 비판하면 된다. 관우는 첨예한 상황의 형주를 담당할만큼의 역량은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