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EU의 6 번째 경제대국으로 인구 3,850만 명의 나라 폴란드의 암울한 정치 현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현재 폴란드는 2015년 10월 선거로 집권한 법과정의당(PiS)이 주도하는 과거사 진실 규명으로 점점 정치적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법과정의당의 과거사 규명에 대한 집착은 일반적 상상을 넘는 수준으로 이미 국내 문제를 넘어서 EU와 NATO 체제의 근간을 흔들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2010년 스몰렌스크(Smolensk)의 비극: 살아남은 자의 분노
법과정의당은 2001년 창당된 민족주의 정당인데 이 당의 핵심에는 현대 정당사에서 보기 드물게 쌍둥이 형제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Lech Kaczynski와 Jaroslaw Kaczynski가 바로 그 쌍둥이 형제인데 2005년 9월 총선에서 법과정의당이 승리하고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레흐 카친스키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신생 정당과 쌍둥이 형제의 야망이 빛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2006년 7월 총리가 사임하자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은 후임 총리로 자신의 쌍둥이 형제인 야로슬러 카친스키를 지명함으로써 쌍둥이가 대통령과 총리가 되는 세계 현대 정치사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스몰렌스크 사고는 일국의 대통령과 주요 수뇌부가 한꺼번에 외국(그것도 적국에 가까운 나라)에서 몰살한 매우 이례적이고 정치적 여파가 컸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대통령은 메드베데프였고 총리는 푸틴이었는데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폴란드 대통령 대행 Komorowski에게 즉시 전화를 걸어 유감과 함께 사고 처리의 협조를 다짐할 정도로 사건 초기에는 협조적이었습니다.
2011년 1월에 발표된 사고 보고서에 따르면 항공기의 기술적 결함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짙은 안개에도 불구하고 조종사가 착륙을 강행한 것이 사고의 주원인으로 기술되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쌍둥이 형제 야로슬러 카친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고의 조사 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법과정의당과 지지자들이 보기에 이 사고는 그 진상이 철저히 은폐되었으며 1940년 카틴 숲 학살과 여러모로 닮아있다며 국제적 음모론을 내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스탈린의 소련은 히틀러의 독일과 불가침협정(Molotov-Ribbentrop Pact)을 맺고 폴란드를 분할 지배하기로 합의합니다. 폴란드 동부를 점령한 소련은 스탈린의 승인하에 비밀경찰 엔카베데 수장 베리아의 주도로 22,000명의 폴란드 장교들을 집단 처형하기로 하고 이중 4천 명을 카틴 숲에서 살해하였습니다.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이들 폴란드 장교들이 사회주의에 반기를 든 반혁명주의자들이며 민족주의 세력이라는 명분으로 베리아에게 처형을 지시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러시아 혁명 이후 수백만 명이 이런저런 폭력으로 살해된 점을 생각하면 볼셰비키들에게는 별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이 학살은 폴란드 인텔리 계층의 상당수를 소멸시킴으로써 폴란드의 잠재력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킨 국가적/민족적 대참극이었습니다.
* (주의!)아래 유튜브 동영상은 폴란드에서 제작한 카틴 숲 학살 영화의 한 장면으로 연속적 총살 재현 장면이 담겨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75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진 ISIS의 집단 참수와 엔카베데의 학살 중 무엇이 더 반인륜적 범죄인지 쉽게 결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학살이 외부에 드러난 계기는 놀랍게도 나치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면서 학살의 현장을 수중에 넣은 다음이었습니다.
1942년 말과 1943년 초에 걸쳐 나치는 소련이 저지른 대학살을 조사하였고 선전상 괴벨스는 이를 대외에 알림으로써 서방과 소련의 동맹을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나치는 다국적 법의학 전문가들(벨기에, 네덜란드, 불가리아,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등)로 구성한 조사단으로 하여금 현장을 조사하도록 하였으며 유럽 적십자 당국자들을 학살 현장에 초청하기도 하였습니다.
괴벨스는 라디오를 통해 볼셰비키가 서구 문명의 진정한 파괴자라며 카틴 숲 학살을 대소전의 주요한 명분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당시 런던에서 활동 중인 폴란드 망명정부(폴란드 망명정부는 전후에도 조국의 공산화로 인해 귀국하지 못하였고 1989년까지 런던에서 존속하였습니다. 특히 마지막 망명정부 대통령은 스몰렌스크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는 이 사건에 대해 영국 정부에 따져 물었는데 처칠 총리는 볼셰비키의 잔혹성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소련과의 동맹을 고려하여 국제 적십자단이나 다른 단체의 조사에 반대하였습니다.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비정한 국제 역학 관계와 무력한 자신들의 처지를 절실히 느꼈지만 서방의 외면 속에서도 학살 사건에 대한 규명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냉전 해체와 서방의 관련 문건이 차츰 공개되면서 당시 영국 정부가 볼셰비키에 의한 학살의 진상을 거의 모두 알고 있었지만 동맹 관계이었던 폴란드 망명 정부에 이를 은폐했으며 미국 정부는 1952년까지 이 학살에 대해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음이 드러났습니다.
* 미국 맨해튼 건너 저지시티에 1991년 세워진 카틴 숲 학살 추모 조형물(상대적으로 외진 이곳에 2010년 4월 11일 수많은 꽃다발이 놓여 있던 광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미궁(?)에 빠진 스몰렌스크 참사: 부실한 사고 조사가 빚어낸 거대한 음모론
폴란드 사람들에게(특히 민족주의자들에게) 카틴 숲 학살은 단지 학살자 볼셰비키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뿐만 아니라 폴란드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을 때, 영국과 미국 등 이른바 자유주의 세력이 자신들을 외면하고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려 함으로써 결코 쉽게 잊기 어려운 트라우마를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런 민족주의 정서를 가장 많이 내포한 법과정의당은 반공과 반EU를 동시에 내세우는 극우-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는데 스몰렌스크 참사는 법과정의당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폴란드인들마저도 과거의 트라우마와 함께 민족주의 감수성을 자극했습니다.
자신의 분신을 잃은 카친스키 전 총리는 참사 직후부터 이 국가적 참사가 결코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푸틴 정부(비록 푸틴은 당시 총리였지만)에게 반러시아 성향이 강한 카친스키 대통령은 눈엣가시였고, 1999년 가입이후 NATO의 핵심 주력으로 자리 잡은 폴란드 군부는 70년 전 볼셰비키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안보의 방해물이었습니다.
여기에 당시 폴란드 집권당을 이끌던 투스크 총리는 카친스키 형제의 정적이었으며 동시에 친EU, 친독일 인사로 메르켈 총리와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법과정의당 지지자들은 투스크 총리가 자신의 정적을 잠재운 이 참극의 사후 처리를 푸틴에게 넘긴 것이 또 다른 확실한 음모론의 증거로 보였습니다.
이들은 투스크 총리가 러시아와의 긴장을 원하지 않았던 독일의 영향력 행사로 서둘러 사건을 봉합하려고 러시아 주도의 조사를 인정하였다고 믿었습니다. 비록 사건 발생 지역이 러시아에 속하고 사고 기체도 러시아제이지만 NATO 소속 국가의 비행기(그것도 NATO 국가 정상 부부와 군 수뇌부가 타고 있던) 사고의 조사를 NATO 조사 팀에게 맡기지 않은 것(또는 적어도 폴란드 조사 팀이 총괄하지 못한 것)은 이례적으로 보일만했습니다.
더욱이 러시아의 철저하지 못한 조사와 비협조로 시신 확인이 늦어지거나 아예 시신이 뒤바뀌는 사태가 장례식은 물론 매장 후에 밝혀지기도 했으며 폴란드 정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기체 잔해를 돌려받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카친스키 형제의 가장 큰 정적이었던 투스크 총리는 이 사건으로 대통령을 자신의 정당 출신 인사인 Komorowski로바꿀 수 있었으며 별다른 정치적 견제 없이 통치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카친스키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성향의 폴란드인들에게 스몰렌스크 참사의 사후 전개는 러시아의 의도적인 테러 공격(아니면 적어도 사보타지)과 독일의 압력으로 사건 무마에만 애를 쓰는 민족 반역자 집단(투스크가 이끄는 Civic Platform) 그리고 러시아의 눈치를 보는 서방(특히 독일과 EU)의 침묵 또는 외면이 어우러진 또 하나의 카틴 숲 학살 사건으로 보였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민족적 트라우마를 들불처럼 일깨울 수 있는 불쏘시개였습니다.
아래 동영상은 사건 직후 한 민간인이 추락 현장을 찍은 것이라며 유튜브에 올라온 것인데 낮은 해상도와 흔들리는 영상은 생동감과 의문을 더해주었습니다.
이 동영상이 충격적인 것은 생존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몸짓뿐만 아니라 사이렌(기차 경적처럼 들리기도 하지만)이 울리자 마치 수색 군인들이 생존자들을 즉결 처형하는(카틴 숲 학살처럼) 총소리로 의심되는 총성이 울려 퍼진 장면 때문입니다.
* 한 민간인이 스몰렌스크 추락 현장을 담은 3분 분량의 동영상
* 스몰렌스크 음모론을 다룬 1시간 1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스몰렌스크 사고에 대한 공식 사건 보고서가 나오고 관련 위원회가 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음모가 이 사고 뒤에 있다는 믿음은 폴란드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음모론이 시간이 갈수록 수그러들지 않고 기세를 올린 배경에는 폴란드 정부의 미숙한(?) 일처리와 의구심을 증폭시킨 각종 동영상과 인터넷 자료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2012년 1월에는 스몰렌스크 사건을 맡은 검사가 총으로 자살했으며 가을에는 추락 사고의 목격자가 지하실에서 시체로 발견(자살로 발표) 되었습니다.
급기야 2012년 10월 말 폴란드의 보수 일간지 Rzeczpospolita는 일면에 스몰렌스크 추락이 사실 기내에 설치된 TNT 폭발 때문이었다며 기존 공식 사건 보고서를 완전히 뒤엎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이 기사는 폴란드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던졌는데 당국은 신문에서 TNT의 근거라고 내세우는 화학물질은 다른 이유로도 발견될 수 있다며 TNT 폭발설을 강하게 부인하였지만 신문 편집장과 해당 기사를 쓴 기자 및 스탭들이 신문사를 그만두면서 오히려 음모론은 더 강해졌습니다.
* TNT 추락설이 실린 신문 1면: 1면 헤드라인은 'TNT가 투폴레프(추락기 기종) 잔해에서 발견됨'
총선이 다가오자 음모론은 더욱 퍼져 나갔는데 민족주의 성향의 라디오 방송에서는 이 사건의 배후에 투스크 당시 폴란드 총리와 러시아 푸틴 총리, 그리고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있다는 식(민족반역자와 2차 대전 폴란드 분할의 두 주역이 배후에 있다는 식)의 민족 감정을 부추기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내보냈습니다.
특히 총선을 4개월 앞둔 2015년 4월에는 라디오 방송 RMF에서 사고기 조종석의 녹음 파일 녹취록을 공개했는데, 사고 당시 사고기 기장과 부기장이 조종실로 들어온 군 수뇌부(공군 사령관?) 인사의 착륙 강행 압박을 받은 정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폴란드 국민 중 스몰렌스크 참사의 원인이 공식 사건 보고서가 지목한 조종사의 실수(부실한 러시아 관제 시스템을 포함하여도)가 아닌 다른 데 있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이 30%를 넘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음모론을 믿는 폴란드인들 대부분이 법과정의당 지지자이긴 하지만 1/3에 해당하는 음모론 지지 비율은 결코 작은 비중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