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치(Bitch)론
어느 날, 고백에 실패한 친한 친구 하나와 연애상담을 하게 된 일이 있었다. 내 연애 앞가림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귀 기울여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랜 기간 공들여서 호감을 표시하고 정성을 쏟던 여자에게 결국 야멸차고 냉정하게 차였다는 얘기였다. 그 친구가 그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나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의 사연을 듣다보니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매력을 자랑하듯 칭송하며 세상에 둘도 없는 천사라며 자신의 애정을 듬뿍 표현하던 친구가 어느새 그녀를 화형대에 매달고 '천하의 나쁜년'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시절, 마치 이상화 시인에 빙의라도 된 듯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寢室)로 가자, 침실로!'라고 애타게 부르짖던 내 친구가 아니었던가. 한때 내 친구의 마돈나였던 그녀는 어느새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썅년'이 되어있었다. 마치 <건축학개론>의 수지처럼.
그렇게 내 앞엔 수밀도의 향그러운 흙가슴을 지닌 마돈나를 향해 구애하던 꾸밈없는 순수청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내 친구에게 남은 선택지는 둘 중 하나, 이른바 '썅년'에게 차인 비련의 순정남이 되거나, '아름다운 마돈나'에게 거절당한 매력 없는 찌질남이 되거나. 그렇게 그 친구는 뒤돌아볼 것도 없이 전자를 택했다. 찌질남 대신 비련의 순정남이 되기로 한 것. 결국 이렇게 내 친구가 끝까지 '순정남'으로 자기 자신에게 기억되고, 스스로의 연애역사 속 한 페이지를 굴욕없이 장식하려면 그녀는 볼 것도 없이 'Bitch'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Bitch'여야만 했다. 이렇듯 어느 순간엔 내 친구에겐 더 이상 그녀의 실체 따윈 중요해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녀가 착한 마돈나로 영원히 남는 순간엔 내 친구의 지위와 역사가 이상해져버리는 셈이었다. '착한 여자에게 차인 남자'가 되는 셈이니, 그럼 그 남자는 뭐가 되는 것인가?
물론 그녀가 모든 면에서 착하고 옳았던 건 아닐 것이다. 때로는 냉정하고 차가운 모습으로 친구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을 것이고, 또 때로는 기대와는 다른 이기적이고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본 그녀의 행동 범주는 누구나 연애 과정에서 혹은 거절과 헤어짐의 과정에서 흔히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을 뿐, 그녀에게 'Bitch' 딱지를 붙이고 화형대에 매달 근거까지는 되지 않았다. 결국 친구는 스스로의 실패를 돌아보며 지난 연애를 성숙의 거울로 삼는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 대신, 정신승리 식의 아주 쉬운 길을 택해버렸다. 자신의 파란만장하고 힘들었던 연애 역사의 한 페이지의 마침표를 찍은 친구는, 어느새 귀를 틀어막고 자신만의 국정연애교과서(?)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 그 서술에 다른 해석이 끼어들 틈과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정신승리식 회피가, 순간의 자신의 멘탈을 보존하는 임시방편은 될지 몰라도 멀리 볼 때 자기 자신의 자존감과 연애 자체를 지키는 현명한 방법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에 그 친구 앞에 과감히 종북좌빨(?)로 커밍아웃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나는 친구의 이러한 모습에서 지난 날의 나를 보는듯한 기시감에 답답하고 괴로웠다. 그것도 먼 과거가 아닌 불과 몇 년 전의 나. 사실 나도 자주 그랬다. 과거의 내가 친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초창기에만 해도 상대방에 대한 흑심(?)을 숨긴 채 바라는 것 없다는 듯 그녀에게 잘해주고 관심을 표현하던 건 나였다. 누구도 내게 강요하지 않았고, 그저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었다. "내가 A를 줬으니 B를 달라."는 뇌물이 아닌,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없으니 그냥 받기만 해도 된다."라는 식의 대가없는 호의를 선물해주었다. 꼭 무슨 물질적인 것들을 많이 퍼주었다기 보단, 그녀를 대하는 내 태도가 그랬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나의 호의가 '선물이 아닌 뇌물'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냉정한 거절을 당한 후부터 나는 씁쓸하게도 본전 생각이 났다. '그동안 내가 너한테 잘해준 게 얼만데.. 이제와서..' 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물심양면으로 온 정성을 다한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결국 거절해버린 그녀 앞에서 처음엔 창피하고 서운했으며, 그 다음엔 야속함과 원망이 내 마음을 휩쓸었고 마지막엔 분노와 절망이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그녀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길 바랐다. "행복하길 바란다"는 드라마 대사 같은 입에 발린 말은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차마 심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나는 그녀를 알게 모르게 탓하고 원망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부끄러움은 그녀를 향한 미안함이기도 했지만, 내 연애를 끝끝내 지켜내지 못하고 스스로 망쳐버린 나 스스로의 못난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그 후로 내가 결심한 게 한 가지 있다면, 누굴 만나 호감이 생기고 어떤 관심과 호의를 베풀게 되더라도 그 연애의 끝에 어떤 결과가 오든 상대방을 원망하지 말자는 것. 나는 뇌물이 아닌 '선물'을 주고 싶었다. 물론 그 선물, 혹은 호의 자체에 '그녀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동일하겠지만, 중요한 건 설령 결과가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전 생각에 태세변환을 해가며 상대방을 탓하고 원망하기 보단, "그래도 그동안 나는 진심으로 좋았다."는 정도의 얘기는 해주고 싶다.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까진 차마 해주지 못하더라도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 정도는 진심으로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게 내 작은 바람이다.
사람은 위기의 순간이나 마지막 순간에 본성이 나온다고.. 비록 거절당할 때 거절당하더라도, 당신을 좋아했던 이 남자가 그렇게까지 못난 남자는 아니라는 것 정도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선물이자 서로간의 지난날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호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그 상대방을 위한 선물이기보다는 내 자신을 위한 선물인지도 모른다. 지난 시간동안 이 사랑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내 연애의 마지막을 지키는 길이자, 남들 모르게 그동안 속앓이하며 고생해온 나를 스스로 끌어안아주는 다독임의 과정. 더불어 이러한 과정을 통한 성숙이 그 다음에 다가올 인연과 연애를 위한 디딤돌이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나는 친구의 그 사건 이후, 내 진심어린 조언을 들은 후 묵묵부답이던 그 친구가 지금은 그녀를 어떻게 추억하고 기억하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아직도 친구에게 그녀는 Bitch일까? 아니면 밤마다 이불킥을 하며 지난날의 자신의 태도를 후회하고 있을까. 어떤 모습이든 그 친구도 나도 앞으로 다가올, 혹은 현재진행중인 연애만큼은 자기최면과 왜곡으로 얼룩진 국정연애교과서가 아닌 자기성찰로 다져진 성숙하고 자유로운 연애교과서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