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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6/22 17:57:17
Name 퐁퐁퐁퐁
Subject [일반] 달리기 이야기


  그리 특별한 취미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실 흔한 취미지요. 과장 좀 섞어서 동네 지나가는 아저씨 열 분 중 한두 명 쯤은 갖고 있을 법한 취미니까요. 하지만 앞에 젊은 여자라고 붙이면 그때는 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주말에 뭐 하냐고 물어 보길래, 마라톤 대회가 있다고 말하니 눈이 동그래졌던 그 분의 얼굴이 아직까지 떠오르네요.

  전 잔걱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오지랖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넓지요. 공연히 생각하지 않아도 될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며 삽니다. 뭐가 그렇게 사는 게 복잡한지 모르겠어요. 남들도 다 하는 건데. 이 얘기를 할 걸 그랬나, 저 얘기는 하지 말 걸 그랬나. 생각하다보면 머리가 뻥 터지는 것 같아요. 늘 그렇듯 인간관계에는 똑 부러진 답 같은 건 아무리 찾아봐도 없고요.

  그런데 달리기는 참 좋더군요. 마라톤에는 언제나 시작과 끝이 있죠. 물론 끝으로 가기 위해서는 호흡이 힘들다던지 다리가 아프다던지 하는 여러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건 나아가기만 하면 언젠가 끝이 난다는 거예요. 현재 처한 어려움이 무엇이든지, 도착하기만 하면 일단 괴로운 건 끝이 나요. 그걸 생각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계속 뛰게 되더군요. 세상에는 내 맘대로 안 되는 일만 가득한데, 이거만큼은 내 맘대로 끝낼 수 있다는 쾌감이 생각보다 크더라고요.

  아는 사람들을 따라 얼떨결에 참석한 대회 이후로, 이제는 혼자서도 대회에 다니네요. 접수 어렵다는 나이키, 45초만에 접수가 끝난 뉴발란스도 악착같이 다녀왔네요. 접수할 때 애는 먹지만, 접수하기 어려운 대회일수록 대회 운영이 깔끔한, 이른바 ‘괜찮은’ 대회거든요.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브랜드 대회가 아닌, 엄청나게 추웠던 모 숙취음료 회사의 대회였어요. 영하 십도에 강풍이 부는 한강변에 갔으니 안 추울 리가 있나요. 에이, 괜찮겠지 싶어 나갔는데 안내방송이 들리더군요. ‘죄송합니다, 남자용 탈의실이 날아갔습니다. 화장실을 이용해주세요.’ 뭐라는 거지 싶어 입을 딱 벌렸는데 어떤 남자분이 보이더군요. 핫팬츠를 입고 온 남자 분이었는데, 얼굴이 파랬어요. 조금 있으면 보라색이 될 판이더군요. 여태까지 떤 게 아까워 기다렸다 대회를 참석하려고 했는데, 누군가의 머리에 맺힌 고드름이 보이더군요. 땀이 ‘나는’ 게 아니라 땀이 ‘얼어버릴’ 정도로 굉장한 날씨였던 거예요. 어서 빨리 뛰게 해 주지 않으면 주최자 멱살을 잡을 사람이 여기저기서 나타날 즈음, 드디어 마라톤이 시작되더군요. 다들 추워서 실력 발휘를 못한 건지, 운 좋게 상은 탔지만 다시 그 날씨에 뛰라고 하면 절대로 안 뛸 거라고 마음이야 먹었는데…….

  요전에 참석한 대회에서는 반대로 타 죽을 뻔 했지요. 자외선이 어마무시한데 그늘은 한 톨도 없지. 어차피 땀범벅에다 한 마리 야생동물 같은 모습이었으니 꼬락서니야 상관 않고 급수대에서 물을 머리에 좍좍 부었습니다. 진심으로, 이러다 머리가 활활 타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날 사진을 보니 고작 몇십 분 차이로 피부색이 다 다르더군요. 몸에는 티셔츠와 핫팬츠 자국 딱 새기고 왔고요. 집에 슬금슬금 기어들어가니 엄마가, 어디서 저런 시꺼먼 게 딸이라고 들어왔냐고 그러더라고요. 아부지가 하도 요상한 일을 많이 하고 다니셔서 그런지, 이 정도에 놀라는 것 같진 않았어요.

  어째 달리기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다 팍 새버린 거 같은데. 저렇게 춥고 저렇게 더워도, 계속 하게 되는 게 달리기 같아요. 뭘 해도 달리기를 해냈을 때의 그 마음 같은 건 못 느끼겠더라고요. 달리기를 한다고 해서 문제가 실제로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한 걸음 나아갈 힘을 얻는 기분이 들어요. 결승점을 향해서 한참 달리다 보면, 끝이 없는 문제들도 언젠가는 마무리 지어질 거라는 착시현상 같은 걸지도 몰라요. 때로는 반대로, 언제까지나 열심히 달릴 힘을 얻도록 어느 정도 문제는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야, 달리기는 즐거우니까요. 잔걱정 많은 분들이라면 이번 주말에 한번 뛰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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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ffhanger
15/06/22 18:10
수정 아이콘
저도 생각하고 싶을 땐 걷고, 생각을 없애고 싶을 땐 뜁니다. 뛰는 거 좋아요.
카피바라는말했다
15/06/22 18:10
수정 아이콘
가끔 천변을 뛰곤 했는데 달리는 기차가 선처럼 지나가는걸 보면 참 가슴이 뛰더랬죠. 다만 날벌레들이 많아서 숨쉬기가 조금 힘이 든게 아쉬울 뿐. 워크맨 귀에 꽂고 바깥세상 달리는 게 커다란 낙인 사람으로서 반갑습니다. 달리기는 참 좋은 취미에요.
15/06/22 18:12
수정 아이콘
여명 다녀오셨나봐요. 저도 일년에 몇번은 꾸준히 나가는데 올해는 메르스 때문에 다 미뤄졌네요. 대신 가을에 바쁠 것 같아요.

<여자의 달리기>라는 책이 있는데 좀 옛날스럽긴 한데 추천드려요~
Steve Jobs
15/06/22 18:13
수정 아이콘
작년에 한창 웨이트에 맛 들려서 그 참에 달리기 까지 영역을 넓혔었죠. 달리기 하니까 살도 쭉쭉 빠지고 너무 재미 있더라구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시즌에 저녁에 달리니 갑자기 무릎 옆이 아프더니, 장경인대염에 걸렸습니다...
사실 그 증상의 원인도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구요, 그동안은 원인도 모른채 운동을 자제하며 스트레스 받고 있었지요...
(안아프다가도 달리기만 하면 아프니...)
너무 늦어 버린 탓에 만성이 된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습니다.
현금이 왕이다
15/06/22 18:17
수정 아이콘
달리기... 말만 들어도 숨이 차네요.
한때 달리기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습관이 되기 전에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공설운동장을 한 시간 정도 뛰었었죠. 알다시피 모두가 한 쪽 방향으로만 뛰잖습니까?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 나오는 죄수들도 아닌데 말입니다;
제가 척추측만증이 있어선지 몸을 기울여 돌기를 사십분 가량 하다보면 허리가 아파오더라구요. 아쉽습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15/06/22 18:28
수정 아이콘
주로 몇키로 뛰시나요?
10km 뛰면 적당히 숨차면서 끝나고 소맥 맛있고 좋던데...요.. 아 술....

또한 10km는 후유증도 없는 것 같아서 생각보다 자주 나가게 되어 스스로 기록 비교도 해보게 되더라구요~
퐁퐁퐁퐁
15/06/23 09:22
수정 아이콘
주로 십키로 뛰는데, 가을에는 하프 뛰려고 해요. 십오키로가 생각보다 괜찮더라구요
그리고 마라톤 뒤에 먹는 맥주는....생명수 아닌가요? 안 마시려고 해도 안 마실 수가 없....
귀가작은아이
15/06/22 18:44
수정 아이콘
달리기.....젊은 여자가 하기에 정말 좋은 취미 같아요.
저는 숨찬 느낌이 싫어서 안 하지만 제 절친이 어느 순간 러닝 매니아가 되더니 온갖 마라톤에 다 참여하더라구요. 그리고 참 예뻐지던데 크크 분위기도 건강해지구요.
즐달 하세요 ^^
리듬파워근성
15/06/22 19:40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파우스트
15/06/22 20:11
수정 아이콘
저는 달리기 중에서 1500m를 좋아해요.
장거리라 하기에는 짧고 단거리라 하기에는 길죠.
그래서 더 힘든 것 같아요. 뭔가 한 쪽의 특징이 없으니 스피드와 페이스조절의 황밸이 중요하니까요. 뛰다보면, 사는게 1500미터 같다는 생각을 해요.
빠를 땐 빠르게, 천천히 갈 땐 천천히 가는 거 말이에요.
그리고 피니쉬 라인이 가까워질 수록 각자 나름의 스퍼트를 내기도 하구요.

여담인데, 헬스장가면 왜 러닝머신(정확히는 트레드밀이지만)에서 다들 워킹만 하실까요.. 저는 거의 12 위로 놓고 뛰는데 혼자 쿵쿵 거리니 괜히 뛰는게 민망하더라구요.
15/06/22 20:21
수정 아이콘
달리기가 참 좋죠! 5키로만 되도 힘들어서 문제죠
추신수
15/06/22 20:57
수정 아이콘
조금 전 달리고 들어와서 이 글을 보니 참 반갑네요. 가장 쉽게 할 수 있고 건강한 취미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달리는 여성분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건강하게 즐런하세요.
구밀복검
15/06/22 21:59
수정 아이콘
사흘에 한 번 400M 러닝과 워킹을 5회 반복하곤합니다. 대쉬는 가능한 한 빠르게, 워킹은 4분 이내로. 대충 25분이면 5회가 끝나는데, 그러면 25분 동안 4km를 달리다 걷다 한 셈이지요. '뭐야, 그 정도면 별 거 아니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러닝을 얼마나 빠르게 하느냐에 따라 이것은 지옥 같은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느슨한 장시간 저강도의 운동의 굴곡없는 지속>에 비해 <타이트한 단시간 고강도의 운동의 간헐적 반복>이 가져다주는 이득이 상당함을 체감할 수 있지요.
mapthesoul
15/06/23 10:45
수정 아이콘
저도 구밀복검님과 비슷하게 인터벌 달리기(?)를 해봤는데 생각보다 힘들더라구요.
처음엔 이게 운동이 될까 싶더니 한 20분쯤 되니까 운동효과가 팍!
살빼고 싶으신 분들 추천드립니다!!!
구밀복검
15/06/23 11:30
수정 아이콘
사실 몇 초를 끊느냐가 사람마다 다를 뿐이지, 일정거리 전력 질주를 다회 반복하는 것이 안 힘들 수는 없지요. 안 힘들면 전력 질주가 아니라능..그냥 일정하게 페이스 맞춰서 여유 갖고 장시간 밋밋하게 달리는 것보다 훨씬 화끈하고 빡세고 그만큼 운동이 되죠.
당나귀타고
15/06/23 13:23
수정 아이콘
달리기를 시작하셨으면 풀코스에는 드리데봐야...
30K 를 넘기 시작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Colorful
15/06/26 08:46
수정 아이콘
아버님이 무슨일을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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