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리듬파워근성님의 <연이는 봄비를 좋아해>[연이가 태어나기 10주 전에,
그러니까 연이 아빠 장례식 이틀째 밤
나는 연이 아빠가 무사히 집에 돌아오는 꿈을 꿨다.]
글의 도입부에서 글쓴이는 아주 어마어마한 사실을 매우 담담하게 펼쳐놓습니다. 우선 '주인공은 아기를 임신한 엄마이고, 그녀의 남편은 아이가 태어나기 10주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런데 그 태도나 문체가 흥미롭습니다. 마치 오늘 저녁메뉴로 닭볶음탕을 해먹고 잠이 들었다는 얘기만큼이나 아주 담담하고 간결하게 주인공의 상황을 서술하고 있죠. 여기에서 독자가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호기심은 이 소설을 읽어 내려가게 만드는 일종의 동력이 됩니다. 결국 이야기를 서술하는 간결하고 담담한 문체의 매력이 첫 문장부터 독자들을 끌어당기게 되는 거죠.
[통장에 600만원이 있으면 임대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몇 달만 바짝 2교대 근무를 하겠다고 했다.
대신 하루에 한 시간 연이에게 책 읽어주는 약속은 꼭 지키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난 연이아빠는, 사고로 죽기 몇 달 전, 위와 같이 아내에게 말하고 임시 계약직인 본인의 근무시간을 2교대로 늘려 바쁘게 일하게 됩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전 개인적으로 웃픈 감정을 느꼈습니다. "통장에 600만원만 있으면 임대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남편이나,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아내나.. 이 둘의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함에 절로 실소가 나오는 동시에 무언가 안타깝더군요. 아마 이 둘은 별 생각없이 그냥 믿었고, 또 믿고 싶었을 겁니다. 현실이야 어찌됐든, 임대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다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기쁨은 가난한 부부에게는 큰 행복과 희망이었을 테니까요. 그래서인지, 안타까운 내용과 슬픈 구절들이 많은 이 작품에서 가장 절 슬프게 만든 구절이 바로 [통장에 600만원이 있으면 임대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리뷰를 쓰게 된 계기가 바로 이 한 문장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마치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라는 백석의 시 <여승>의 한 구절처럼 담담함 속에 피어나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진하게 배어있는 구절이죠.
어쨌든 그렇게 남편을 떠나보낸지 10주 후, 아기를 낳기 위해 병원 분만실로 들어가는 침대 위에서 그녀는, 출산 도중 아이와 함께 죽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연이는 무사히 태어납니다. 그리고 웬걸요, 한 가닥 기대를 걸고 방문했던 아파트 분양 사무실에서 아파트 입주를 위해선 '통장의 600만원은 기본 조건이고 보증금 5100만원이 있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듣습니다. 결국 그녀는 무너지듯 갓난아기와 함께 울음을 터뜨립니다. 꿈꾸던 아파트 입주가 무산돼서가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했던 희망을 품고 힘들게 일하다가 그로 인해 결국 죽음을 맞이한 남편이 떠올랐기 때문이죠.
[야 이 등신 머저리야. 600만원이 아니라 5100만원 이래잖아.
나는 연이 아빠가, 그 바보 멍충이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착하기만 했던 그 인간이 결국
헛수고만 한 것 같아서 그리고
그 고생하면서 세 가족이 아파트에서 살 날을 상상하며 잠들었던 그 밤들이 너무 무안해서 또
모델하우스 앞에 세워진 단지 조감도가 너무 멋있어서 마지막으로
연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아서 계속 울었다.]
2. 시적 감수성과 호흡으로 정서를 전달하다
여담이지만 사실 이 글은 제게 '소설의 형식을 지닌 산문시'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글을 읽으며, 기본적으로 글쓴이가 소설적 재능도 훌륭하지만 시적 감수성도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른바 소설의 장점과 시의 매력을 아주 절묘하게 배합시킨 글이라는 느낌이 들었죠. 우선 시어를 연상케 하는 함축적인 문장들이 그랬고, 마치 시처럼 연과 행으로 분리된 듯한 단락의 구조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소설임에도 시와 같은 호흡과 감수성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위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이글을 읽으며 저는 백석의 <여승>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주인공 혹은 여성화자가 지닌 서러움과 한의 정서가 간결하고 담담하게, 하지만 진하게 독자에게 전달되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쫓겨난 분양 사무실 앞에 세워진 아파트단지 조감도를 보며 딸아이를 등에 업은 채로 서럽게 울던 연이엄마의 모습에서, 평안도 산 속 금전판 앞에서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던' 파리한 여인이 떠올랐습니다. 이처럼 <연이는 봄비를 좋아해>에서는 시적인 구조와 호흡, 함축적 문장으로 독자에게 작품의 정서를 전달하는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아 거리더니 가가 거리더니 으아 를 지나서 으마 그리고 드디어 음마 까지 왔다.
난 음마가 됐다. 시어머니는 항마가 됐다.
집 안에서 대화가 느니 연이도 말이 늘었다.
음마는 연이를 만난 이후 가장 기쁘게 웃었고 연이도 박수를 엉터리로 치면서 좋아했다. 과묵한 항마도 그 날은 소리까지 내면서 웃었다.
셋이서 웃는 게 나는 너무 신기하고 신비롭고 놀라웠다.
그 날 밤엔 연이 아빠 사진을 쓰다듬으면서도 울지 않았다.]
[등 뒤에서 시계를 만지작거리던 의사는 선고를 내렸다.
운구반이 와서 항마의 몸을 하얀 시트로 감기 전까지도 나는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선물처럼 포장된 항마가 실려 나가자 나는 주저 앉아 오열하며 땡깡을 부렸다.
비닐 가운을 찢고 마스크를 집어던지고 신발이 벗겨졌다.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그냥 데굴데굴 굴렀다.
이 개 같은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고작 그것 뿐이었다.]
[나는 충분히 슬펐다. 이제는 강해져야 한다.
턱없이 약했고 당연히 대가를 치렀다. 연이마저 대가로 치를 수는 없다.]
이렇듯 문장 하나하나가 시어처럼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것이 바로 이 글의 특징이자 매력입니다. 때로는 띄어쓰기를 통한 단락의 구분을 통해 호흡을 조절하고, 때로는 문장의 함축성을 통해 주인공의 감정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연이가 "음마"거리고 "항마"거렸을 때 연이엄마 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기특하고 뿌듯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고, 결국 '항마'가 갑작스레 돌아가셨을 때 연이엄마 뿐만 아닌 독자들도 '충분히' 슬펐을 테니까요. 결국 이 글은 연이엄마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는 제3자의 시선을 연이엄마의 시선 속으로, 그리고 그녀의 삶 속으로 끌어내려 함께 비벼내는데 성공합니다. 때로는 영리하게, 또 때로는 우직하게 말이죠.
물론 아쉬운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몰아붙일 땐 몰아붙이고 차분히 쉬어갈 땐 쉬어가는 흐름의 완급 조절과 정서 전달에 있어서, 글의 구조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인데요. 이 글에서 과감하게 사용된 이야기의 가지치기와 들어냄, 그리고 주어의 생략은 이러한 글의 구조의 도움을 크게 받고 있습니다. 이 얘기는 바꿔 말하면, 띄어쓰기를 통한 단락의 구별 없이 원고지에 쓰여지는 줄글의 형태로 빽빽하게 글이 놓였을 때, 과연 지금과 같은 호흡과 감정선을 독자에게 충실히 전달해줄 수 있는가, 또는 지금과 같이 과감히 생략된 문장들이 여전히 유기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리뷰어로서 굳이 깔거리를 찾아내자면 그렇다는 얘기이고, 적어도 이 글의 글쓴이는 애초에 이러한 글의 구조까지도 작품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자연스레 하나로 녹여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결국 '소설의 형식을 지닌 산문시의 느낌' 또는 '주어를 잘라낸 간결하고 함축적인 문장' 등은 이 글의 약점이기보다는, 고유의 개성이자 강점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마치며
다소 스포가 될 순 있겠으나, 저는 개인적으로 1, 2편으로 이루어진 두 파트 가운데 1편을 더 좋아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 취향의 문제인데, 글의 완성도를 떠나 2편이 마치 글쓴이(혹은 독자들)의 바람이 담긴 일종의 판타지처럼 느껴진다면, 1편에는 우리네 차가운 현실에 대한 직시가 더욱 적나라하게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봄비'라는 매개체를 통해 갈등을 풀어나가며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훈훈한 2편의 마무리도 좋았지만, 저는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짐을 정리하다가 '800만원이 들어있는 통장과 새거나 다름없는 운동화를 보고는' 다시금 한참을 울어버린, 비루하고 서글픈 현실 속 연이엄마의 모습이 아무래도 더 진하게 기억에 남았나봅니다.
뭐 그건 그렇고, 어쨌든 <연이는 봄비를 좋아해>는 저의 지난 글 <짧은 문장에 정서와 이야기 담기>(https://pgr21.com/?b=8&n=58032)에서 얘기한 좋은 문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코 길지 않은 텍스트의 분량 속에서 적절한 생략과 절제, 그리고 함축을 통해 더 진한 정서를 독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이 소설은, 말 그대로 '덜어냄으로서 더 진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피부 위로 덕지덕지 화장을 분칠하듯 과도하게 덧씌운 그런 얼굴이 아니라, 깔끔하고 단아한 기초 화장만으로 민낯의 매력을 자연스레 발산하는 그런 얼굴을 대하는 느낌이랄까요. 이 세상에 깨끗한 피부미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글을 읽어 내려가는 제 마음이 꼭 그와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