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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3/10 13:29:00
Name 삭제됨
Subject [일반] 쉬운 글과 어려운 글.
작성자가 본문을 삭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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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1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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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해서 정희진 선생님의 칼럼이 있는데 일독을 권합니다.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2142125025&code=990100
아이리홀릭
15/03/10 13:36
수정 아이콘
저도 그 글을 인상깊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별다른 사전지식이나 사유의 노력없이 쉽고 편하게 수용하는 글일수록, 상투적이고 피상적인 인식에 입각한 경우가 많죠. 동감하고요.
김연우
15/03/1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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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본 글과 주제가 같군요.

보통 이야기하는 쉬운 글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쓰기'하는 글 뿐이란걸.
15/03/10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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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이지만 저는 이러한 태도가 최근 일련의 교육학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도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고 있지만, 학생들 발표수업을 진행하면 결국 학생들이 선호하는 건 어지간하면 이미 공인되었거나 인정받는 손쉬운 입장들의 '패러프레이즈' 뿐인데(속된말로 안전빵 노선을 취하는), 그 이유를 물으면 해당 '전문적 지식에 대한 이해하기 어려움'을 말하지만, 동시에 어려움의 원천이 '받아들일 수 없는 차이나 다름'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거든요. 특히 인문학과 관련해서는 대학교조차도 이제 어러가지 이해관계에 의해서 점점 손쉬운 지식만을 전파하는 곳이 되어가고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그리고 그 손쉬운 지식이란 해당 전공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은 언뜻 당연하겠지요) 제 편견일수도 있지만 이과방면에서는 전공지식의 어려움은 당연한 반면, 최근 문과 방면에서는 어려운걸 어렵게 말하는 건 그 해당 전공 자체나 그걸 전달하는 강사의 자질문제라는 인식도 제법 보여지구요. 여러모로 대학에서의 교육이 딜레마에 처하게 될 것 같네요.
아이리홀릭
15/03/1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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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방면에서는 전공지식의 어려움은 당연한 반면, 최근 문과 방면에서는 어려운걸 어렵게 말하는 건 그 해당 전공 자체나 그걸 전달하는 강사의 자질문제라는 인식도 제법 보여지구요. "

라는 말씀에 적극 동감합니다.
김연우
15/03/1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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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랑 문과는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겠네요.

이과에서는 설명을 못해도 답을 맞춤으로써 '얘가 설명을 못하는거지 알긴 안다'라는걸 알 수 있는데,
문과에서는 설명을 못했을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다만 제대로 아는 사람이 설명을 더 잘하는건 맞긴 한거 같습니다.
개고기라면
15/03/1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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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이것도 이과(정확하게는 수학적 문제 해결)에 대한 오해가 아닐까 하는데요. 답을 맞춘다고 안다, 라고 말할수는 없는 부분이거든요.
칸트의 정명론을 주요 요점만 외워 얘기한다고 정명론을 안다고 말할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푸리에 공식을 외워 대입해 답을 맞춘다고 푸리에 공식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공대에서는 얼핏 느끼지 못할수도 있지만 증명해라만 주구장창 나오는 수학과를 다니면 확실히 알수 있는 지점이지요. (절대 수학우월론 아닙니다ㅠㅠ)
평가방법에 있어 필요한 부분만을 요구할 뿐이지, 어떤 것이 곧 지식이 되는가에 있어서는 문이과 공통된 과정과 결과를 가진다고 봅니다.
포프의대모험
15/03/1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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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생은 읽을 수도 없는 공식에, 대입조차 못하는 이과생도 많을 뿐더러 푸리에를 외워서 푸는 애들은 석박으로 한걸음만 더 걸으면 결국 막히니까 티가 납니다. 답을 계속 낼 수 있다면 능력에 대한 훌륭한 증명이 되지요.
개고기라면
15/03/10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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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제가 말씀의 요지를 잘 파악을 못하겠어서.. 다른 예를 들자면, 완성된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가지고 답을 내는 것으로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이해했다고 볼수는 없다는 요지였습니다. 답을 계속 낼수 있다고 해도, 근의 공식을 유도하는 것(=근의 공식을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지요. 정명론의 핵심 문장 몇을 읊을줄 안다고 해서 정명론을 안다고 할수 없는 것처럼, 답을 내는 능력을 가지고 알고 있다, 로서 판단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답을 구할 수 있다)는 (알고 있다)에 포함될 뿐이지, 등가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공대 얘기를 살짝 한 것도, 공대에서는 푸리에를 가지고 답만 구할 수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에(=이차방정식의 답만 구하면 되기 때문에) 얼핏 못 느낄수도 있지만, 수학과에서는 짤없이 푸리에를 유도해야하기 때문에 비유가 적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좀 잘못 들었나보군요.
Rorschach
15/03/1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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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처음 내용은 딱히 글의 어려움/쉬움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진 않네요.
어려운 글이 곧 좋은 글은 아니지만 나쁜 글도 아니라는 말에는 동감합니다만 "오해받는" 글이라면 '어렵게 써서'라기 보다는 '잘못 써서'일 가능성이 훨씬 높죠. 심지어 그게 매번 오해를 받는다면야...
아이리홀릭
15/03/10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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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상 "쓸데없이 중언부언하며 현학이나 부리는 글"이란 '어려운 글'에 대한 전형적인 반감이 녹아있는 코멘트이긴 합니다.
Rorschach
15/03/10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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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단에서의 "내가 볼 때" 부분을 놓쳤었네요.
사실 본문 내용에도 동의하지만 본문의 첫 문단의 내용도 동의하는 입장이라서 써 본 댓글이예요. 마지막 문단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을 빼먹고 읽었다는게 좀 민망하네요;;;
바위처럼
15/03/10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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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선생님의 반지성주의관련 칼럼이 떠오르네요. 철학과 굴뚝청소부도 반갑고요. 잘 읽었습니다.
아이리홀릭
15/03/10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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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과 별개로, 사실 철학과 굴뚝 청소부는 상당히 훌륭한 철학 입문서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첸 스톰스타우트
15/03/1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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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라는것도 소통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면, 글을 쓸 때 고려해야 할 부분중에 가장 큰것이 바로 독자겠죠.
아이리홀릭
15/03/10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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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어려운 글에 대한 반감은, 꼭 독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대상을 한정하였습니다만, 원래 생산자와 수용자가 함께 참여하는 것이 글인데, 당연히 한쪽에만 책임이 있는 건 아니겠죠.
첸 스톰스타우트
15/03/10 15:40
수정 아이콘
첨언하자면, 글을 쓸적에 독자의 범위를 설정하는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독자를 한정해놓고 쓴 글에 너도나도 달려드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겠죠.
15/03/10 13:48
수정 아이콘
댓글을 달면서 제가 문장을 제대로 적었는지 확신하기 힘든 경우가 자주 생기던데 이건 계속 쓰는게 답일까요?
몽키.D.루피
15/03/1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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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사실 글이라기보다는 말에 가깝죠. 지금 쓰는 이 문장도 구어체구요. 크게 거슬리는 비문이 아니라면 대충 익스큐즈합니다.
김연우
15/03/10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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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을 보면 '쉬운 글'이라기보다, '찬성해주는 글'이 대부분 쉽다고 하고 반응이 좋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반지성이라던가 우민화 뭐 이런거 이전에, 일단 인터넷에서 만큼은 게시판 시스템의 특징이 한몫한다고 봐요.

게임도 그렇지만, 읽기도 '난이도 조절'이 정말 중요한거 같아요. 읽기 등 지식 습득에서의 난이도는, (아는 지식)/(모르는 지식)의 비율로 결정되는거 같구요.
아는 지식이 많으면 너무 쉽죠. 그러면 대충 보고 후르륵 넘어가도 다 읽힙니다. 대신 그만큼 '읽는 의미'가 없죠. 그냥 지식 되새김질 하는거에요.
모르는 지식이 많으면 너무 어렵죠. 그냥 이해가 안되니까요.
그러므로 '적당하 아는 지식'이 있으면, '적당히 모르는 지식'이 있는 글이, 이해할 수도 있으면서 이해하기도 쉬운 좋은 글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게시판은 모든 사람들이 모두의 글을 읽습니다. All vs All
따라서 적당한 글이 없죠. 어떤 글은 누구에게는 어렵고, 누구에게는 쉬울테니까요. 그렇게 되었을때 선호되는 글은 무조건 가장 쉬운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해될 수 있고, 게시판에서 중요한 것은 많은 조회수, 많은 댓글이니까요. 따라서 게시판 시스템상 쉬운 글만 범람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적당한 수준의 파편화가 필요한데, 그건 '친목질'이란 이름의 나쁜 이미지로 박혀있더군요.
절름발이이리
15/03/1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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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적당한 파편화를 시스템적으로 구축해 낸게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죠.
15/03/1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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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적당한 수준의 파편화' 라는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거의 불가능한지라. 친목질이란 나쁜 이미지로 박혀있는이유는 딴게 아니라 진짜 나쁘니까 나쁜 이미지로 박혀버린거죠.

친목질로 켜뮤니티 말아먹은게 한두번도 아니고 당연히 그것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가질수 밖에 없죠.
말씀하시는것처럼의 태도로 시작했어도 결국에는 커뮤니티 말아먹는 일이 발생하니 그 자체에 위험성을 느낄수 밖에 없을듯 싶습니다.
김연우
15/03/10 14:04
수정 아이콘
인터넷 커뮤니티가 게시판만 있는건 아니고,
그 구성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접근방식이나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절름발이이리님 말마따나,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140자 제한, 팔로잉 방식 등 여러가지 특징에 의해 둘다 인터넷 커뮤니티임에도 사용양식이 완전히 다르지요.

아직 없다 뿐이지, 쭉 없으리란 법은 없어요. 새로 생각해내면 될 뿐.
15/03/10 14:09
수정 아이콘
글쎄요... 절름바이이리님 말따라 간다고 해도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애초에 친목질 자체를 중심에 두고 만든거라서 상관이 없죠.
제가 이야기하는거는 커뮤니티 사이트 내의 친목질이고 그건 쓰긴 곳이 pgr이라는 커뮤니티 사이트이기 때문이죠.
애초에 친목을 대상으로 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모두가 그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덜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커뮤니티 사이트는 그 문제가 다릅니다.

아직 없다 아니다라고 한적 없습니다. 왜 친목질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사람들이 꺼려하는지 이야기 한것 뿐이니까요.
댓글의 문맥상 그것이 부당하게 이미징 되었다고 생각하는것 같아서 말씀드리는겁니다. 친목질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는 수많은 사건들이 증명해주죠.
김연우
15/03/10 14:13
수정 아이콘
그러니까 이야기하는 커뮤니티 사이트, 즉 pgr21같은 게시판 형태가 아니면, 문제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라구요.
15/03/10 14:16
수정 아이콘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건 커뮤니티 사이트 즉 pgr같은 대다수의 커뮤니티에서 나타난 문제라고요. 그것은 달라질수 있다와는 다른 이야기고요. 제가 트위터나 페이스북같은 것까지 태클걸었나요? 아니죠. 전 커뮤니티에 한정 지어서 말씀드린거고 그것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든 말든 현재의 상황으로는 부정적인 이미지에는 이유가 잇다는거죠. 왜 자꾸 다른 이야기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王天君
15/03/10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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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실 트위터가 친목질을 하는 공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끼리 팔로잉을 하고, 완전 타인에게 무작위로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더 많은 것 같거든요
아이리홀릭
15/03/10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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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공감합니다. 말씀하신 파편화말인데, 그 부분은 시스템의 문제도 있겠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군중'의 인식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나는 이글이 어렵지만, 누군가에겐 유용할 것이다."라는 합의가 있다면, 어려운 글은 비록 덜 대중적이더라도 자신에게 합당한 역할과 자리를 배정받겠죠. 문제는 다수의 공통분모가 형성되는 '쉬운 글'의 소비자들이, '대중'이란 이름을 앞세워서, 자신의 독서 역량을 절대화한다는 겁니다. 즉, "내가 알아 먹기 힘든 글은 잘못된 글이다.", "독자가 소화할 수 없는 글은 공론장에 나와선 안된다."라고 말이지요. 본문에서도 말했듯 '나'를 보편적 척도로 내세우며, 어려운 글의 가치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15/03/10 14:24
수정 아이콘
하지만 반대로 그러한 성향이 진짜로 토론장에서 벗어나야할 글 조차도 걸러내지 못하고 난립하게 되면서 대중들이 제대로된 정보 선택이 힘들게 하는경우도 있겠죠.
일부러 반대 포지셔닝으로 댓글을 달기는 하지만 독서 역량의 상대화는 자칫하면 정보의 난립과 혼란을 불러 올수도 있습니다.
가릴건 가려야죠.
삼공파일
15/03/10 20:11
수정 아이콘
이 맥락에서 PGR은 대체재가 없는 게시판입니다. 게시판에 대한 이런 메타적 비평 자체가 가능한 곳이 사실상 없어요.
몽키.D.루피
15/03/10 13:58
수정 아이콘
문장이 어렵다는 건지 내용이 어렵다는 건지 구분해야죠. 어려운 내용을 쉬운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게 글쓰기의 최고 경지 같습니다. 이진경 씨 예를 들었지만 사실 한국에서 대중에게 철학을 좀 소개한다는 저자치고 글 잘 쓰는 사람 찾기 힘든 거 같아요. 이진경 씨 글이 잘 쓴 글 같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쉬운 내용을 어려운 문장으로 쓰는 사람이 글쓰기 최하수죠. 인터넷에서 스킵 당하는 대부분의 글들은 이에 해당합니다. 독자가 바보라서가 아니라 말그대로 세줄로 표현할 걸 주저리 적어놨기 때문에 세줄 요약이나 당하는 거죠.
아이리홀릭
15/03/10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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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반지성주의 성향이나, 지식인의 오만한 '보그체'냐, 이 논제는 원래 한 두 마디로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파고 들면 다양한 논점이 존재할테고, 그만큼 섬세하게 가려볼 수 있겠죠. 다만,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으로 번뜩 떠오른 대목을 개괄적으로 거론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줄로 표현할 걸 주저리 적어놨다"는 선결 인식이야 말로 검증과 회의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겠냐고, 이 글은 말하는 중입니다.
15/03/10 14:21
수정 아이콘
그건 반대로 이야기 해서 그러한 검증과 회의 자체가 진짜로 세줄로 표현할수도 있는것 문장을 되려 방해하는것도 고려해야하지 않을까요?
뭐 이건 전체적인 이야기이지만 포괄적인 검증과 회의가 오히려 논제 자체의 공리조차 파괴하는경우도 심심치 않게 봐서요. 검증과 회의. 물론 좋죠.
근데 토론할때 그 공리조차 깨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대학생 토론에서 그러한 경우를 많이 봐서요...
할머니
15/03/10 15:15
수정 아이콘
이렇게 보면 니체는 글쓰기 최하위 레벨일거에요. 덧붙여 이진경 정도면 엄청나게 쉽게 써준거죠. 독자가 바보라서 세줄요약하는겁니다.
15/03/10 14:03
수정 아이콘
애초에 내용이 어렵다와 글이 어렵다와는 동치가 힘들죠.

뭐 결국 독자와 글쓴이 양쪽에 부담되는거지만 결국 의도처럼 간다면 독자보다는 글쓴이에 그 책임이 더 커질수 밖에요...
아이리홀릭
15/03/10 14:28
수정 아이콘
정확히 말하면, "내용이 어렵다"와 "표현이 어렵다"로 나눌 수 잇을텐데, 사실 그 둘이 그렇게 명징하게 분리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미는 결국 발화나 언표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조잡한 예를 들자면,

"사람은 언젠가 안타깝게 죽는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하려는데,

"나도 당신도 언젠가 죽을 거에요. 슬퍼요. 언제까지고 살아가고 싶지만, 우리네 삶은 영원하지가 않군요."라고 하는 것과

"인간은 관념의 자유와 육체적 한계를 함께 지닌다. 영원을 꿈꾸면서 찰나에 얽매이다 사라져버리는 슬픈 동물인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의미의 층위나 결이 좀 다르죠.

내용과 별개로 표현을 쉽게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은 자칫 내용 자체를 손상할 여지가 있습니다.

독자는 저자가 짜놓은 생각과 표현의 흐름을 따라서 텍스트를 소비할 수밖에 없으니,

소통 불능의 책임은 저자에게 좀 더 있다는 말에 반대하지 않습니다만,

독자도 모든 지적 논의가 자신의 지적 지평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기대는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15/03/10 14:32
수정 아이콘
하지만 독자는 그럴지 몰라도 독자들이 그렇게 해야한다고 하는것 자체가 어떻게보면 무리한 요구라고 할수 밖에 없다고 해야할까요?
인류가 다음 차원으로 가지 않는한 개인은 똑똑할수 있어도 대중은 멍청하다가 거의 대명제처럼 받아드려지는 상황에서 애초에 글쓴이도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이 자신들이 지적 지평에 맞출수 있다는 기대도 버리는것이 좋죠.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그러한 논의 자체는 좋으나 토론과 마찬가지로 이미 모든것이 상대적이라는 마인드 자체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 공리조차 상대적이라고 치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것에 있죠.
그것조차 상대적이면 애초에 논의 자체가 이루어질수 없고 그렇다면 모호한 문장과 난립할수 밖에 없는 수많은 정보들로 정보 축약이 힘들어 질겁니다.
PoeticWolf
15/03/10 14:03
수정 아이콘
으아.. 공감합니다.
저는 어렵게 글 한번 써보고 싶은데, 어려운 지식을 애초에 가지고 있지를 않.... ㅜ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반하는 걸 다뤄볼 용기가 없... ㅜㅜ
15/03/10 14:07
수정 아이콘
이분 최소 왕희지인데 김정호가 부럽다고 하시는 분
아이리홀릭
15/03/10 14:32
수정 아이콘
공감하신다니 반갑습니다. 말씀 감사-
15/03/10 14:0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언젠가부터 저에게 잘 읽히는 글만이 좋은 글이라고 판단하고 지냈던 것 같은데요. 글쓴이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꼼꼼이 읽어보는 습관을 들여봐야겠습니다. 정보의 소비자이자 제공가이기도 한 '나'라는 주체의 발전을 위해서도 말이죠.
아이리홀릭
15/03/10 14:30
수정 아이콘
"정보의 소비자이자 제공가이기도 한 '나'라는 주체의 발전을 위해서도 말이죠."

이 말씀에 동감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SuiteMan
15/03/10 14:14
수정 아이콘
막줄만 빼고 저도 정말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글에서 주장하시는 바와 반지성주의는 살짝 궤를 달리하는것 아닌가요? 어려운글을 폄하하는것과 반지성주의는 다른것 같아요.
아이리홀릭
15/03/10 14:32
수정 아이콘
말씀 감사합니다. 반지성주의는 지식인에 적대적인 태도와 지적인 권위와 가치를 부정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어려운 글에 담긴 권위를 혐오하고, 그 가치를 부정하며, "쓸데없이 복잡하게 말하는 지식인들"을 미워한다는 점에서

반지성주의와 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15/03/10 14:19
수정 아이콘
생각해볼 만한 내용이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아이리홀릭
15/03/10 14:3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마스터충달
15/03/10 14:36
수정 아이콘
글이 쉽거나 어렵거나는 나중에 따질 요소이고, 결국 얼마나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느냐가 좋은 글과 나쁜 글을 가르는 핵심이라는 점. 글을 쓰다 보면 보다 인기를 얻기 위해, 호응을 얻기 위해 이 점을 잊을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같은 내용이라면 쉬운글이 더 좋은글이긴 하겠죠. 술술 읽히는 것이야 말로 독자를 위한 배려의 최고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근데 그렇게 술술 읽히는 글을 쓰는 게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ㅠ,ㅠ 늘 꼴리는데로 써서 구성따위는 고민할 레벨이 안되고;; 주관적 시각과 객관적 시각의 균형을 잡는 것도 어렵고, 나만의 냄새가 나는 문체 같은 건 고민해도 답도 안나오고요. 이렇게 형식적인 것에 고민이 많아지면 또 내용이 구려집디다 ㅠ,ㅠ 글쓰기 참 어려워요.
아이리홀릭
15/03/10 14:41
수정 아이콘
맞는 말씀입니다.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글로써 말하려는 바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표현에 구애받지 말고,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적극적으로 캐치하는 노력도 필요할테고요. 예컨대 글이 잘 읽히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저자에게 물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에게도 돌려보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기왕이면 쉬운 글이 좋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만, 이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명한 인문학 저자들 가운데는 전략적으로 난해한 글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기하겠으나... "술술 읽히는 쉬운 글"은 그만큼 독자의 사유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측면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독자의 적극적인 사유를 끌어내고 환기하기 위해서, 독자의 주체적 관점을 유발하기 위해서, 부러 독자와 텍스트 사이 독해의 '간극'을 창출하는 것일수도 있겠죠.
마스터충달
15/03/10 14:58
수정 아이콘
하지만 그 간극을 극복하고 글을 읽어줄 이해심 많은 독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만약 저자가 그런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는 명성이나 권위가 있다면 모를까 블로그나 커뮤니티가 아니라면 글 하나 실을곳이 없는 아마추어(혹은 프로 지망생)에게는 쉬운 글을 쓰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쓰기가 독자에게 저자의 글을 파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독자에게 이해의 노력을 기대하기보다 글쓴이가 더 쉽게 쓰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본문 말씀대로 독자가 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요.)
아이리홀릭
15/03/10 15:07
수정 아이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쓰는 글에 아량을 베풀만한 독자는 많지 않다는 말은 냉철하고 정확한 지적이신데요.

문제는 정성일 같은 사람도 "허세 부리는 평론가" "글을 못쓰는 평론가"라며 폄훼당하기도 한다는 거죠.

한국 영화 평론계에서 정성일만큼 권위있는 사람이 어디있다고요.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단순히 저자의 권위나 역량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라고만 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지적인 권위 자체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숨어있는 건 아닌가, 또는 자신의 지적 수준을 절대화하고픈 욕망이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걸 대중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반지성주의가 버티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든다는 거죠.
15/03/1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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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가 다른 지점일 수도 있는데 좀 더 복잡한 감정에서 자기 기준을 절대화하는 독자의 악의적인 태도를 보게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그 극단적 사례로 보는 것이 유아인의 트위터 글들에 대한 몇몇 남초 사이트에서 보이는 '허세 쩌네'하는 식의 노골적인 폄하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 유아인은 나름 자신의 지적 편력을 잘 소화하고 자신의 이해를 적확하게 전달하는 글을 쓰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문체가 허세로 느껴지는데에는 그를 판단하는 대중 독자의 어떤 당파성이 작동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특히 유아인을 그러한 글을 쓰기에 어울리지 않는 계층, 즉 일종의 '딴따라'로 규정하는 폄하의 태도 또한 함축되어 있지요. 반지성주의의 외피 속에 여러가지 혐오의 감정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아서 단순한 현상 분석이 여러운 지점인듯 하네요.
王天君
15/03/10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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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글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의 표현인데, 글 속에 드러나는 자아가 지식이든 감정이든 혹은 어느 풍경의 묘사든 관념이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와의 교집합을 고려하지 않는 글은 반감을 사는 게 당연합니다. 하물며 그것이 130자의 압축성 안에서 자의식의 과잉 말고 별 다른 건덕지를 찾을 수 없다면 읽는 사람이 불편할 수 밖에 없겠죠. 저는 유아인씨의 트위터가 일으키는 반감이 지적계급의 분화로 인한 차별의식보다는, 내용보다 형식이 앞서는 글에 관한 불편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댓글로 욕할 줄만 아는 사람보다는 허세에 가까울 지언정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이 더 멋지다고 생각해요. 치기는 좋은 원동력이죠.
마스터충달
15/03/10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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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평론가들은 권위가 있음에도 대중들의 반감이 상당히 심하죠. 하지만 이를 대중의 반감이나 반지성주의로 보기보다는 평론가들, 즉 저자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요즘 평론가들에 대한 반발도 그런 데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한데요. 관객들은 분명히 재미없게 봤는데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 다음에 '너희는 이 좋은 영화를 이해 못 하냐?'라고 혼내는데 와 닿지도 않아요. '너희들은 들뢰즈를 몰라서 이 영화를 몰라. 너희들은 무식해' 이러는 거죠. 평론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사람들이 보도록 만들어야 해요. 평론가는 거간꾼이고 맞선 주선자에요. 그런데 오히려 어려운 평론 탓에 사람들이 '아, 이 영화 보지 말자'라고 생각한다니까요. 나는 고생해서 이런 영화도 본다고 얘기하는 게 무슨 평론이에요? 평론은 매개를 만들어주는 거에요.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며 왜 그렇게 느꼈는지 깨달을 수 있게 해줘야 해요. 자신이 받은 감동을 타인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그것을 평론가가 마련해줘야 하는 거에요.]
강신주 교수가 한 말입니다. 정말 공감하고, 제가 글을 쓸 때 항상 염두에 두는 부분이고요.

어쩌면 대중에게 반지성주의라는 반감을 심어준 것이 글쓰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이런 악순환을 벗어나려면 독자도 저자도 노력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판매자와 구매자라는 일종의 갑을 관계를 생각하거나 권위를 앞세우던 저자들의 모습을 고려할 때 독자보다 저자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王天君
15/03/10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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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안해서 평론가가 욕을 먹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동진씨도 그렇게 간결하고 친절하게 쓰는데 별점만 보고 욕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욕합니다. 평론가와 대중 간의 괴리는 감수성의 발달 차이이지 단순히 저자의 글솜씨와 독자의 독해 능력은 아닌 것 같아요
마스터충달
15/03/1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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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의 발달 차이라뇨;; 그럼 대중은 평론가보다 감수성이 덜 발달한 겁니까? 차라리 태도가 문제일뿐 글쓰기 솜씨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모를까, 감수성 같은 부분에 우열을 논하는 것은 상당히 오만한 일이고, 어쩌면 윗 글에서 강신주가 지적하는 지적 허영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王天君
15/03/10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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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의 선천적 차이도 분명히 존재하거니와, 그것이 갈고 닦아지는 후천적 노력 역시도 간과할 순 없지요. 모든 사람의 감수성이 보편적으로 똑같다는 의견은 동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섬세한 감수성, 날카로운 감수성 같은 말은 왜 나오겠어요. 좀 에둘러 말해 무언가를 느끼는 일종의 "감각"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고 그것은 어느 정도 훈련이 가능합니다.(특히 감상의 경우)

집합으로 따지면 당연히 대중이 평론가보다 감수성이 덜 발달할 수 밖에 없죠. 선천적인 건 제껴놓더라도 일반 사람과 평론가는 본 영화의 갯수와 질부터가 다른데요. 이건 전혀 오만한 말이 아닙니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사람마다 느끼는 감동은 천차만별인데요.
마스터충달
15/03/10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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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을 평론가와 대중간의 괴리의 원인으로 꼽는다면 결국 평론은 우월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감상을 강요하는 것이 되버릴 뿐입니다. 그런 자세는 오만이겠죠. 강신주가 지적하는 바도 감수성의 차이가 아닌 지식의 차이를 통해 상대방이 느낀 감정을 보다 이론적이고 서술적으로 표현하려는 자세를 평론가에게 바라고 있고요. 평론과 대중의 기호 간의 괴리는 평론가의 오만한 태도나 대중의 편하게만 보려는 태도, 즉 어느 쪽으로도 태도의 문제이지 능력의 차이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집합 논리로 대중이 평론가보다 감수성이 덜하다고 하는 것은 전형적인 통계의 함정입니다. 평균치만 그럴 뿐 감성지능을 측정하면 평론가보다 훨씬 감수성이 뛰어난 비 평론가가 아마 평론가 수 보다 많이 존재할겁니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느끼는 감정이 천차만별임을 생각한다면 평론가보다 더 감수성이 풍부한 대중이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하는 겸허함을 가져야 하겠죠.
王天君
15/03/1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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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감상은 그 자체로 인정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거야말로 상대주의의 함정입니다. 난 재미없어 에서 그치면 상관없어요. 재미있어라 하고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 부분은 이렇고, 저 부분은 저렇기 때문에 난 이 영화를 훌륭하다 평가한다는 평론가의 발언을 개똥 취급하는 걸 대체 왜, 어떻게 평론가 측에서 더 노력해야 하나요. 그것이 감수성이 됐건 지식이 됐건 감상이 됐건, 우월함을 인정하지 않는 대중의 오만함이 더 큰 문제죠.

강신주씨의 전제 중 제가 동의하지 못하는 건, 평론가가 소위 중매쟁이 같은 역할을 한다는 거죠. 물론 연결다리를 이어주는 건 맞아요.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이어지는 다리를 잇는 일은 아닙니다. 평론이란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을 향한 유인책이 될 수도 있으되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과 공유하는 되새김질의 목적을 더 크게 가질 때도 많습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 그리고 그 중에서 자신과 같은 감상을 한 사람들을 향한 소수의 대변이 될 수도 있지요. 거기다가 그것은 타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감상이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중점이 맞춰져있는, 지극히 개인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글이에요. 자신의 감상을 글로 정리하는 건 본디 자기만족이 우선이지 이 영화를 남들도 보면 좋겠다... 고 쓰는 추천사와 같다고 할 순 없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엄청 좋았다, 고 말해도 남들이 아무도 이해 못하면 그냥 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이해 못하는 그 사람들이 수적 논리로 반드시 옳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구요.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며 왜 그렇게 느꼈는지 깨달을 수 있게 해줘야 해요, 라고 하는데 현재 평론가들이 그걸 안하나요? 뭘 도대체 얼마나 더 굽실거리고 친절하게 해설을 해야 할까요. 저는 이 부분이 제일 궁금합니다. 비판받는 소위 평론가들의 독선과 오만, 이걸 대체 어떤 글에서 얼마나 많이 보길래 평론가 집단 전체를 대표하는 문제점 마냥 지적되고 있는 건가요.

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교수의 지식과 교육 능력에 대해서 사람들은 거부감없이 인정합니다. 소설가나 작곡가의 창작 능력 역시도 알아주죠. 그러나 어떤 것을 더 예민하게, 날카롭게 느끼고 다시금 전달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인정이 박해요. 거기에 수반되는 다양한 지식 역시 폄하되기가 일쑤구요. (평론가들한테 쏟아지는 비난 중 가장 보기 쉬운 것이 아는 척 쩌네 라는 류의 댓글들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는 감수성이란 단순히 작품에 대해 감동을 받느냐 안 받느냐가 아니라, 한 작품의 완성도를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이성적이면서 감성적인 감각을 뜻합니다. 나를 찾아줘 를 보고 대부분의 관객은 대단하다!! 라고 느끼겠죠. 그렇지만 이것을 영화 속에 나타나는 미쟝센, 대사, 컷의 연결 등을 통해 감독의 의도, 각 씬과 캐릭터가 지니는 의미,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 편집 등 총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은 일반 대중보다 아무래도 평론가가 나을 수 밖에 없죠. 저는 이런 걸 지적하는 겁니다.

충달님은 왜 대중과 평론가 사이에 감상 능력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애써서 무시하시려는지 모르겠네요. 영화에 미쳐있는 사람과 영화를 시간 때우기로 보는 사람은 당연히 이해의 깊이가 다를 수 밖에 없는데요.
삼공파일
15/03/10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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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에 숨어 있던 들뢰즈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식자층이 사회에 10~20% 정도가 있고 그 사람들이 어떤 계층을 이뤄서 그런 평론을 소비하는 게 정상적이고 문화가 발전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에 관심도 없는데 굳이 들뢰즈가 숨어 있는 영화를 찾아보고 들뢰즈가 숨어 있다고 찾아낸 글을 읽고 욕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문제겠죠.

식자층이라고 하면 소득이나 교육 수준이 관련이 있어서 계급주의적으로 빠질 수 있겠지만 고급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층이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다는 정도만 받아들이고 그런 문화에 평론은 반드시 상호발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것까지 인정하면, 한국 문화계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연극이나 뮤지컬도 대중적인 면도 있지만 평론이 필요한 어떤 식자층을 어필할 수 있는 깊은 성찰을 담아야 발전하는 건데, 소비하는 식자층이 없다보니 평론도 수준이 계속 떨어지고 평론 수준이 떨어지다 보니 영향력도 없고 영향력이 없다보니 다시 그 매체 수준도 떨어지고 매체 수준이 떨어지니 식자층은 더 매니악해지는 악순환을 한국 문화에서 봅니다. 얼마 전 본 [버드맨]에서 뉴욕타임즈에 악평이 올라오면 연극이 망하는 이야기를 보면서 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강신주가 정말 철학자면 평론가들이 글 어렵게 쓴다고 욕할 게 아니라, 자기가 어려운 글을 쓰고 철학 평론을 해서 철학책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족시켜야죠. 그런데 그런 층이 없으니 대중 강연을 하고 대중 강연을 하고 책을 쓰니 기만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게 되고 그러는 게 아닌 가 싶네요.
王天君
15/03/1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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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문화산업의 문제점은 결국 수요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하기사 인구 오천만 중에 천만이 보는 영화가 이렇게 자주 터지는 것도 희안한 일이죠.
이동진씨랑 허지웅씨는 정말 큰 일하고 있는 걸지도요. 평론가란 직업을 얼마나 대중적으로 알리고 있습니까 하하
삼공파일
15/03/10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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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와 한국 시상식만 비교하더라도 영화의 비평 작업이 한국에서 얼마나 게으르게 되고 있는가 체감하죠.
마스터충달
15/03/10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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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도를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것에 대해 감수성이라기 보다 감상능력이라고 하는 것으로 통일했으면 합니다. (이후 감상능력이라고 쓰겠습니다.)

강신주의 매개로서의 평론은 보고난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언급하신 [왜 그렇게 느꼈는지 깨달을 수 있게 해줘야 해요.]라는 부분이 그러하죠. 그렇다면 평론가들이 이 부분을 열심히 하고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대중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허세를 부리는 것이죠. 들뢰즈니 라캉이니 이런 지식을 이미 알고있다는 전제로 글을 쓰는데, 이건 대중에게 불친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나마 들뢰즈면 모르겠는데, 라캉같은 사이비를 가지고 인물심리를 이야기 하는 걸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죠.)

다음은 대중이 호응하는 것에 대해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작년의 최고 흥행작 <명량>에 대해 평단은 혹평을 쏟았죠. 하지만 대중은 (비록 스크린 독점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역대 최고 흥행을 시켜줬죠. 그럼 대중이 이것에 왜 감동을 받는지, 그들의 감동을 어떻게 강조했는지, 그런 반면에 왜 작품으로서 부족한지 설명해주는 평론가는 없다시피 했습니다. 끽해야 촬영과 시각효과는 훌륭하다고만 했을 뿐이죠. 저는 이 부분에 대해 <명량>의 백성론이 관객에게 통했다는 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존의 백성론과 다른 '참여하는 백성'을 강조했고 이것이 대중에게 감동을 줬다고 말이죠. 이러한 분석을 하는 시각을 제공한 것은 영화좀 볼 줄 아는 분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영알못이라 하는 분들이었죠.

스토리상 사족에 불과하다는 부분이 오히려 대중에게 어필한 장치가 되었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 하죠. 영화를 분석하는 지식이 있다면 거부감이 들었을 장면이 그런 '선입견'이 없다면 감동이 되었으니 말이죠. 이렇게 평단과 의견이 갈리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영화 용어는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서 어떤 평론가도 주목하지 않았던 작품의 본질을 드러내는 감상을 듣기도 합니다. (저희 어머님은 <왕의 남자>를 처선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참신한 시각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에 미쳐있건 아니건 감상능력에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영알못이라도 진지한 태도만 갖추면 평론가보다 좋은 평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다고 보기 때문이죠. 그리고 때때로 영화에 미쳐있다는 것이 선입견이라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둡니다. 자신이 가뜩이나 아마추어인데 지적 허영까지 갖추면 정말 아무도 찾지 않는 글을 쓰게 될거라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삼공파일
15/03/10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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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평론이라 함은, 어느 정도 지적 수준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문화에 대한 글입니다. 트랜스포머 같은 무뇌한 블록버스터에 대해서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면 당연히 다들 어이 없어 하고 반발이 생기지만, 예술 영화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 들뢰즈에 대한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담겨 있고 표현해냈는지 설명을 듣고 싶어할 겁니다. 물론 똑같은 블록버스터라도 식자층을 대상으로 평론할 수도 있겠고요. 도서나 연극, 클래식 등에 대한 평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문제는 식자층 정도로 설정한 상위 대중층이 없다는 것이겠죠. 책을 읽는 사람도 없고 지적 만족감을 추구하려고 문화를 소비하는 계층이 없습니다. 예로 드신 강신주 같은 사람도 욕먹는 이유가, 철학을 철학책 안 읽는 대중을 대상으로 설명하려고 하니 철학책 읽는 진짜 자기가 찾아야 하는 계층한테 반발감을 사는 거죠.

갈수록 대학에서도 교양 강의 같은 건 등한시하고 그러니 그런 계층은 더 얇아지고 식자층은 더 매니악해지고 평론가들은 평론가들끼리 까면서 대중을 기만하는 경향이 심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참 문화 후진국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마스터충달
15/03/10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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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자층이 매니아층이 되는 것은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여집니다. 대중에게 어렵지만 좋은 글이 아니라 대중을 배척하는 글이 되는 순간이 아마 식자층이 매니아층이 되는 지점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러면 오히려 그 분야는 답답해지고 전반적인 퀄리티도 떨어질 것 같습니다.

일본 애니가 90~2000년대 황금기를 지나 2010년 이후 매니아들만 만족시키면서 계층화되는 모습을 볼 때 예술이나 평론이 대중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비슷한 계층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가 되네요.
삼공파일
15/03/1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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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온 이후에 씹덕물이 창궐하고 말았죠...ㅠㅠ
王天君
15/03/1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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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독이 들뢰즈의 내용을 영화 속에 집어넣었다고 칩시다. 그럼 이걸 평론가가 더 이상 어떻게 해석할까요? 영화 감독은 들뢰즈를 넣었지만 일반 대중은 들뢰즈를 모르니 이 평론은 하지 말자, 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건너 뛸까요. 이 감독이 들뢰즈를 인용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 이건 들뢰즈랑 연결이 제법 잘 되네, 하지만 대중은 들뢰즈를 모를테니 건너뛰자, 하고 평론가가 글의 주제를 국한시켜야 할까요? 정작 충달님도 영화 그녀에게의 감상을 쓰시면서 메를로 퐁티를 인용하셨는데, 이게 메를로 퐁티라는 철학자를 삼척동자도 알만해서 쓰신 건 아니실텐데요.

제가 불편한 것은, 평론가란 직업에 대해 충달님이 실체 없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지요. 일종의 허수아비 공격인데, 평론가가 뭘 대체 얼마나 소통의 벽을 쌓고 있느냐는 의문이 첫번째고, 두번째로 평론가의 본질이 소통인가 하는 것입니다. 명량을 예로 드셨는데, 대중의 호응에 대해 평론가는 인정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물을 수 있죠. 평론가가 왜 대중의 호응에 장단을 맞춰야 할까요? 1000만이 들면 그 때 그 영화의 가치를 다시 찾아보려 해야 할까요? 뭐 A/S 정도로는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무언가를 놓쳤다고 생각한 평론가가 다시 보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죠. 하지만 이건 지극히 결과적인 겁니다. 일단 불가능한게, 적지 않은 수의 평론가는 언론 시사회나 블라인드 시사회를 통해서 영화를 대중보다 먼저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고 대중들이 이러이러해서 좋아할 것이다... 라고 예언이라도 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일단 혹평을 가한 영화에 관객이 미친 듯이 들고 있다고 칩시다. 명량이나 국제시장처럼요. 그러면 그 때는 평론가가 내가 뭘 잘못 봤나? 하고 자신의 미적 기준을 다시 재고해야 한다는 말씀이신지요? 저는 관객수로 인해서 영화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평론가를 단 한명도 본 적이 없어요. 평론가가 영화를 분석하고 평하는 게 그렇게 관객 수에 따라 바뀔 만큼 시시하고 취미스러운 것인가요? 대체 왜 평론가가 대중의 눈치를 봐야 합니까? 정치적으로 왜 수의 논리에 따라 그런 결탁을 해야 하죠? 평론가인 아무개가 볼때 이 영화는 시각 효과 말고는 별게 없습니다. 그럼 그걸로 된거죠. 많은 사람한테 어필한다고 해서 그걸 평론가가 놓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자기가 볼 떄 시시하기 짝이 없던 거였어요. 그럼 그걸로 된 겁니다. 왜 소비자의 반응에 따라 평론가가 자신의 생산품을 일일히 수정하고 그에 영합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평론가의 본질을 왜곡하고 계신거죠. 그리고 이야말로 대중의 무지에 권위를 부여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나는 재미있게 본 국제시장을 허지웅은 뭘 저렇게 까대는거야? 그러면 허지웅이 내가 영화를 잘못 본 건 아닌가...하고 고민을 하거나 아 나는 이 영화를 개똥같이 봤지만 1000만이나 봤으니 그 사람들이 재미있게 봤을만한 지점을 찾아봐야겠다 하고 다시 고민해야 하나요? 감상은 철저하게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입니다. 그것이 설득력을 갖춰야 하는 부분은 그에 공감하는 독자나 해당 영화의 관객 수가 아니라 감상을 쓰는 사람의 내적 논리죠. 충달님 말씀대로라면 지금 싸이의 앨범에 별 다섯개를 안 준 임진모 및 이즘의 필진들은 전부 다 머리라도 박아야 할 겁니다.

감상능력에 차이가 없다고 하시니 제가 직접 예를 들죠. 인터스텔라는 1000만이나 봤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았다고 해요. 그렇지만 그 영화에서 받은 감동이 감독이 의도한 것, 그리고 작품 상의 가장 아귀가 맞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냐는 거죠. 이 영화는 우주영화를 한 편이라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 사이에서 감상이 다르고, 놀란의 전작을 봤던 사람과 안봤던 사람 사이에서 감상이 다릅니다. 인셉션을 봤던 사람은 아...인터스텔라의 이야기 구조가 인셉션과 놀랄 정도로 흡사하구나, 하면서 조너던 놀란의 각본에서 창의성 부분은 조금 짠 점수를 줄 겁니다. 하지만 처음 본 사람은 수미상관의 반전에 전율을 느끼겠죠. 이 때 야 놀란 영화 반전 짱이다, 저런 반전이 여태 영화사에 있었냐? 하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무조건 긍정을 할 수 있을까요? 우주선이 지구를 떠나는 장면에서 사운드를 완전히 제거해버리는 편집을 보고 누군가는 우주의 진공 상태에 대한 놀라운 표현이라고 할 지 모르지만,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본 사람은 이것이 오마쥬구나 하고 눈치 챌 겁니다. 누구의 감상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해당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배경이나 레퍼런스들을 알고, 그것이 담고 있는 의도를 더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건 당연히 평론가들이란 말이죠. 영화에 대한 평론이란 단순히 감동하고, 그 감동을 다시 글로 표현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지닌 미학적 가치에 대해 타당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인데 어떻게 이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다고 하실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진짜 궁금합니다. 허세를 부린다는 평론가의 글을 예로 좀 드실 수 있으신가요? 그리고 저는 평론가가 대중의 해석이나 의견을 무시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GV에 참석하셧다면 아시겠지만 거기에 대해 정답은 없다, 관객의 몫이며 각자의 의견이 모두 맞는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마스터충달
15/03/1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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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를 설명없이 쓰는 것과 그냥 질러대는 것은 다르죠. 평론가의 허세와 오만이 드러나는 것으로 왕의 남자 리뷰에 있던 김현경의 평론과 그래비티 리뷰에 있던 씨네 21 평론을 들고 싶네요. 왕남 평론은 라캉을 그냥 막 끼얹는 수준이고 그래비티 평론은 기초적 지식도 찾으려는 노력이 없는 오만한 글이었죠. 이런 평론가가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그들에게 좀 더 친절해지는 것을 주문하는 것이 그렇게 부당한가요?

그리고 감상능력의 차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해당 분야의 지식이 감상의 깊이를 더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영알못도 그런 깊이에 도달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다는 것이죠. (물론 영덕후보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은 낮겠죠)그러니 감상할 수 있는 지능이 낮다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겁니다. 깊이있는 평론을 할 수있는 머리는 누구나 가지고 있어요. 다만 그럴 노력이 없을 뿐이죠. 그러니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겁니다.

모바일이라 링크를 따로 남기지 못합니다. 이 점 양해바랍니다.
王天君
15/03/1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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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정말 주류인가요? 혹은 대다수의 영화 평론가의 성향을 대표할 수 있나요? 그래비티의 오류는 같은 평론가(본인은 부정하지만)인 듀나가 바로잡는 칼럼을 올렸고 이를 인정했습니다. 김현경씨의 평론은 따로 링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 그 평론이 잘못된다고 해서 그것이 평론가 대부분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인지는 모르겟지만.

저 역시 감상능력에 대해 누군가는 더 훌륭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아요. 하지만 그게 저희의 이야기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현재, 혹은 특정 시점에 대중과 평론가 사이의 감상능력 차이를 말하는 건데, 가능성이 똑같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감상이 죄다 동일한 의미가 있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거기다가 선천적인 감상능력의 차이를 왜 자꾸 부정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일주일에 똑같이 영화 한편씩 보러 다녀도 누구는 보이후드 보고 찡하다고 하고 누군 세시간동안 뭣하러 홈비디오를 보냐고 합니다. 이건 당연히 차이가 나는 거고, 이게 나쁘거나 우열의 문제가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표현하는 데 왜 그렇게 거부감을 가지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아이큐 이큐처럼 감상능력(제 기준에는 감수성이란 단어가 더 들어맞습니다만) 에도 선천적인 차이가 있는데, 이걸 부정하시면 어떻게 각각의 영화 취향이 생기는지 그리고 그 감상의 질에도 차이가 생기는지 설명할 수가 없죠. 장 뤽 고다르 같은 실존 사례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스터충달
15/03/1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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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주류는 아니지만 비주류도 아니죠. 말씀하신대로면 평론에 주류가 어딨겠습니까. 저도 평론가 집단 전체가 오만에 사로잡힌 노답집단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중에 비판받을 사람도 있고, 한 사람만 보더라도 그런 비판을 받을만한 경우가 때때로 있을겁니다. 좀더 친절하라고 말 못할 이유도 없고, 주장하시는대로 그만 친절하라고 할수도 있죠. 양쪽다 못할 소리는 아닌 것 같네요.

선천적인 감상능력의 차이를 인정 안한것도 아닙니다. 다중지능이론에 따르면 심미적 지능은 사람마다 당연히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평론가라는 직업이 감수성이 뛰어난 거로 해석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들의 감상지능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자세로 평론하는것은 말씀하신대로 평론가들도 지양하고 있는 추세죠.

그들이 영화를 더 깊게 볼줄 아는 것이 왜 그들이 감수성 혹은 감상지능(심미적 지능)이 뛰어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지 저야말로 의아하네요. 지능은 몇몇 천재가 아니면 사람들 모두 비슷비슷 합니다. 그 능력을 발현하는 노력을 얼마나 들이느냐의 차이일 뿐이에요. 제가 거부감이 드는 것은 이런 태도의 차이를 지능의 차이로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보이후드를 홈비디오로 보는 시각에 우열을 놓을 수 없다는 분이 왜 평론가라는 직업이 지능적 우월함을 가졌다고 하십니까?

전 오히려 보이후드를 홈비디오 취급하는 사람에게 이 영화의 매력으 무엇인지 친절하게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내는 그런 평론이 하고싶습니다. 볼줄 아는 지식을 그렇게 전해주는 것이죠. 그 때 제가 "난 너보다 감수성이 풍부해서 이런걸 본단다" 라고 말하면 중2병도 이런 중2병이 없지요 -_- 감수성이 뛰어난게 아니라 보다 진지하고 열정적인 태도만 있을 뿐인겁니다.
王天君
15/03/1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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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평론가의 어떤 영화에 대한 사후 평가가 가지는 현실적, 당위적 목적도 다시 한번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7번방의 선물이 1000만이 들었다고 황진미가 관객들의 반응에 초점을 다시 맞춰야 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거든요
마스터충달
15/03/1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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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는 해적/명량 한줄평 보면 오히려 관객 반응에 너무 초점을 맞춘 평론가가 아닌가 싶은데요;;;

영화에 대한 평가와 그것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한번에 서술할 필요는 없죠. 평론이 꼭 작품분석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극장에서 내린 후에 작품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평론할 수도 있고 그게 특화되면 대중문화평론이 되는 거구요. 전문 평론지에는 그런 평론도 꽤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더 대중적인 공간에서도 그런 글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王天君
15/03/1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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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감상은 그 자체로 인정해요. 누가 재미없다는 데 그게 재미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문에 말씀드렸죠. 하지만 저는 그 능력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어떤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느냐 마느냐는 능력의 차이에요. 왜 이렇게 나타나는 차이에 대해서 충달님은 자꾸 당위를 부여하시는 겁니까? 평론가는 그 감상능력에 있어서 절대 우월할 수 없는 사람인가요? 그렇다면 평론가란 직업이 왜 있나요. 너도 나도 다 그 생각이 그 생각 도긴개긴이면 평론가란 직업이야말로 의미가 없죠.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램을 잘 짜고, 미식가는 음식의 맛을 일반인보다 더 잘 보고 잘 표현합니다. 영화 평론가가 영화를 더 잘 감상하는게 무슨 문제가 되죠? 이것이 선천적인 거라고 치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이미 세상에는 재능의 차이 및 다른 선천적 차이로 많은 결과들이 차이를 띄게 되지 않습니까. 쟤는 나보다 영화를 더 잘 느껴, 하지만 그건 쟤가 나보다 영화 보는 게 절대 뛰어나다는 건 아님 노노. 아니 이런 주장이 타당한지는 제쳐놓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노력만 하면 동등한 감상 능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건가요?

거기다 모순되는 게, 보이후드가 홈비디오처럼 느껴졌다면 그냥 그걸로 냅두면 될 일입니다. 그걸 왜 평론가가 자신의 대답이 정답인양 그것에는 이러이러한 정답이 있단다 하고 교조적으로 나가야하죠? 이런 식의 평론이야말로 충달님께서 지양하고자 하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문제 삼는 건, 각각의 독립적인 감상을 인정하지 않는 대중의 오만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모든 감상이 상대적으로 같은 가치를 지닌다면 각각 존중을 해주면 되지요. 최소한 평론가는 저렇게 평했고 저기에 대해서는 평론가 나름의 근거가 있겠구나 하고 생각을 해야 한다는 거에요. 평론가는 자기가 맞다, 너가 틀렸다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느끼고 생각한다 ~ 라는 글을 남길 뿐인데 거기에 대해서 재수없다, 아는 척 한다고들 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식으로 평론가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냐는 거죠. 거기에 대해 친절하게 지도해주지 않아서요? 주관적 감상만 남겨도 욕을 얻어먹는데 그런 식으로 감상을 유도하는 글은 얼마나 더 욕을 먹겠습니까.

평론에 주류냐 비주류냐를 가리자는 게 아니라, 지적하신 분들이 평론가 집단 전체를 대표하는 문제가 되냐는 겁니다. 이게 정말 평론가란 놈들은~ 하고 싸잡아 꼬집을 정도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실수이며 자정이 일어나지 않는 건가요? (평론가에 주류가 왜 없나요. 외부에서 이런 주류를 나누는 게 의미가 없을 뿐이죠)평론가 집단 안에서도 빈번하게 지적이 일어나고 그에 따른 토론과 반성이 생깁니다. 그런데 대체 평론가에 대한 외부의 공격이 그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비판과 지적보다 훨씬 더 시급하고 필요한가요? 혹은 그만한 의미가 있습니까? 영화에 대한 애정, 지식, 태도 그 모든 게 오로지 주관적인 자신의 감상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비난"이 대다수에요. 이 전제를 무시하고서 모호한 비판과 미약한 증거 한 두가지를 나열한다고 해서 평론가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타당성을 갖출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하죠. 평론가들의 태도를 논할 때, 논하는 당사자들의 태도는 공정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 공정성은 누가 어떻게 담보하나요? 제가 꼬집는 게 이런 겁니다.

백번 양보해서 노력을 하면 평론가 비슷한 수준까지 갈 수 있다고 치죠. 그런데 이런 전제가 의미가 있습니까? 평론가처럼 글쓰는 훈련을 하나요 아니면 더럽게 재미없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을 일부러 찾아보나요 혹은 같은 영화를 백번씩 보나요. 대중은 즐기고 평론가는 계속 훈련합니다. 그 갭은 당연히 좁혀질 수가 없는데 왜 자꾸 대중과 평론가의 감상능력을 동일선상에 두고 대중이 평론가에게 비판하는 것의 무게를 과하게 재냐는 겁니다. 소수는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집단과 집단으로 두고 보면 대중은 절대로 그런 노력을 안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생기는 감상능력의 차이가 작품에 대한 이해와 전달능력의 차이를 벌립니다. (거기다가 이런 노력의 동기는 흔히 자기도 모르게 영화를 미친 듯이 좋아하는, 시네마 천국의 토토와 같은 선천적인 기질입니다. 그게 매니아 기질이건 감수성이건)

평론의 종류야 당연히 많죠.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평론이란 작품 자체와 그 연결고리가 되는 것들에 대한 비평이지 작품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주류가 아니에요. 거기다가 그걸 안하고 있는것도 아닙니다. 대중들이 왜 나는 재미있게 느꼈는데 저 평론가는 재미없다고 느끼지? 하고 간극을 설명 안해줘서 반감을 가지나요? (만약 그렇다면 대중들은 오로지 평론가가 후술할 때까지 마냥 기다릴 만큼의 권위를 지닌, 설득의 대상일 뿐인가요?) 평론가의 독립적 의견이 그 자체로 존중을 못받고, 강신주 같은 철학자가 대중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고 하는데 이거야말로 평론가의 본질을 휘두르는 왜곡이죠.
(다른 영화들의 평점에서 황진미씨는 유난히 튀어서 별점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단아로까지 취급받습니다.)

평론가들은 감상을 강요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걸 강요라고 받아들이는 대중의 열등의식이 문제죠. 평론가들이 스스로를 엘리트라 지칭하는 것도 아니고 내 평이 정답이라고 쑤셔넣는 것도 아닌데, 이에 대한 반론을 펼칠 부지런함이나 능력도 없이, 뭘 안다고 떠들어대 하고 영화 자체는 평할 만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평론가들은 쓰잘데기 없이 아는 척 하는 인간들이라는 양비론 물타기를 대중들이 하고 있는거죠. 이 명백한 반지성주의를 왜 충달님께서는 평론가측의 책임으로 돌리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스터충달
15/03/1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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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이 그 분야에 대한 이해도의 차이로 드러나는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게 선천적인 것이라고 보는 점이 부당하다는 겁니다. 그게 왜 선천적입니까? 영화평론가는 그 능력을 영화라는 매체에 집중한 것이지 그들의 지능 자체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깐 지능/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겁니다. 대중이 비평가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이 부족한 것이죠. (그러니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경우 평론가의 이해도는 대중을 상회합니다. 제가 언제 평론가가 대중보다 못하다고 한 적 있나요?) 평론가가 된다고 갑자기 지능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심미적 지능이 낮다고 평론가가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 그들을 선천적으로 우월한 존재라고 하십니까? 평론가보다 심미적지능, 감성지능, 공감지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전혀 없다면 모를까, 비 평론가중에 그들보다 해당 지능이 뛰어난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평론가들만 특출난 두뇌를 타고난 게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평론가가 공부하고 훈련한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로 그들이 더 깊은 성찰이 가능하고 평론에 도움을 주는 것이 맞고요. 그런데 대중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게 왜 평론가를 대중레벨로 끌어내리는 것으로 해석하십니까? 대중이 평론가 레벨로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되어야죠. 그렇기에 대중의 관점이 평론가보다 아래의 것이라는 자세를 보이지 말라는 겁니다. 조금만 상세히 설명해도 훨씬 많은 대중이 이해해줍니다. 그걸 평론가 스스로 거부한다면 대중을 말귀도 못알아먹는 멍청이 취급하는 거로 비춰질수 밖에요.

제가 평론가들을 비판하는 것과 왕천군님이 대게의 여론이 평론가를 비판하는 시선도 분명하게 다릅니다. 전 아는척 쩐다고 비판한적도 없습니다. 그들이 대중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죠. 저런식의 대중의 비난은 제가 봐도 불합리합니다. 그걸 왜 저한테 부과하십니까? 저야말로 평론가들이 아는 척 좀 많이 해줬으면 합니다. 대신 좀 친절하게 하라는 거죠. 끼얹지 말고 설명해달라는 건데 이것과 '아는 척 쩌네~'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王天君
15/03/11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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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빙글 도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죠. 그 차이가 온전히 선천적이라고 제가 말 한 적도 없거니와, 애초에 대중의 반지성주의를 평론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에 전 반대하고 있으니까요.왜 이야기를 그쪽으로 돌리시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희 둘 다 평론가와 대중 사이에는 어느 정도 감수성 혹은 감상력에 우열이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충달님께서 애초에 우위보다는 태도라는 표현으로 뜻을 애매하게 표현하셨지만, 어쨋건 상호합의가 됐으니 이 부분은 더 이상 다툴 건이 아닙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대중과 평론가 사이의 괴리감은 평론가의 책임인가 아닌가. 그리고 충달님은 평론가가 평론을 어렵게, 불친절하게 쓰기 때문에 대중들이 괴리감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충달님의 비판에는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물론 평론가가 항상 맞는 소리만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충달님이 지적하는 대로 평론가는 대중이 못알아먹을 정도로 허세만 부리나요? 그 정도가 심하고 대다수의 평론이 그렇습니까? 아는 척 쩐다고 직접적인 워딩만 없었을 뿐이죠. 보다 이론적이고 서술적으로 표현하라고 하셨는데, 지금 평론가와 대중의 괴리감은 덜 이론적이고 덜 서술적이어서 생긴다는 말씀이 아닌가요. 충달님께서는 보고 난 감상을 대중들이 깨달을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걸 평론가가 안 하는 것도 아니에요. 평론가가 대중의 호응을 인정하냐 안하냐 하는 건 이야기 할 필요가 없는 논제입니다. 평론가가 자신의 미학적 기준을 대중과 일치시켜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명량을 1000만이 감동적으로 봤으니 평론가들은 자신의 평을 다시 고치거나, 혹은 대중들의 감동을 다시 해석해야 할 이유나 명분이 있나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평론가가 지켜야 할 유일한 신조는 자신의 영화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미학적 기준을 다른 외부적 요인에 굽히지 않는 겁니다. 어떤 평론가가 영화를 개구리다고 봤는데 이 영화를 1000만이 봤습니다. 그렇다고 이 평론가가 자신의 평을 수정하거나 분석을 다시 할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대중들의 열광, 흥행, 이런 건 전부 다 마케터나 장사치들이 할 일이고 평론가에게 우선하는 일은 아닙니다. 영화를 성실히 보고, 생각하고, 쓰는 것. 이게 평론가의 제1의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평론이 쉬워야 하느냐 이것도 따져봐야겠죠. 모든 글에서 독자가 우선하진 않아요. 종류에 따라서는 독자가 노력해야 하는 글들도 허다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개같이 글을 써놨으니 독자를 우롱하는 건가요? 같은 선상에서 영화 평론이란 장르도 볼 수 있죠. 영화라는 장르가 쉬운가요? 아닙니다. 영화라는 장르를 분석하는 게 쉬운가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영화라는 장르를 분석해놓은 걸 글로 옮기는 건 쉬운가요? 절대 아닙니다. 영화 평론이란 건 평론가가 아무리 애를 쓰고 쉽게 쓰려 해도 그 글을 읽는 기본적인 어려움에 대해 기본적인 준비가 안된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넙죽넙죽 받아먹을 수 있는 장르가 아닙니다. 원래 평론이란 장르가 그렇지 않나요? 어느 장르고간에 무언가를 평가하고 논하는 건 많은 분석력과 통찰력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글을 무슨 피천득 선생의 수필마냥 후루룩 넘기기만을 기대하는 건 게으름이죠. 어려운 걸 어렵게 분석해놓는 데 이걸 쉽게 풀어쓰라는 건 난 모르겠고, 알아듣게 설명해봐 하는 어거지죠. 이게 제가 지적하는 대중의 오만이구요.

평론에 대한 반감은 대부분 상업영화, 그리고 고민 없이 설계된 영화들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던 평론가와 기꺼이 즐겼던 대중 사이에서 가장 흔하게 나옵니다. 그 다음으로 흔하게 발견되는 건 어렵다고 일컬어지는 소위 아트 영화들이죠. 가장 빈번한 이 두 사례 중에서 평론가가 게으르다고 할 만한 사례가 많았습니까? 저는 어떤 GV 후기에서도 아는 척만 한다,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지적 허영만 부린다 라고 하는 식의 후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친절했다, 쉽게 설명해 줬다, 그럼에도 내가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하고 자신의 책임을 탓하는 후기는 많이 봤어요.

저는 대중의 악의만 담긴 평론가에 대한 공격을 원하신다면 링크 이백개 정도는 끌어올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영화 전문 사이트에서도 엄청 자주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그렇지만 충달님께서 지적하시는 평론가의 지적허영과 불친절한 모습은 거의 못봤습니다. 설령 어떤 글이 어렵더라도, 그걸 너무 어렵게만 썼네 하고 저희가 평가할 만큼 해당 영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충분하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정성일 평론가가 문어체로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고 해서 쯔쯔쯔...겉멋에 취해가지고는, 하고 반대중적인 평론가라고 도장 찍을 수 있나요?

평론가와 대중 사이의 괴리감은 명백하게 대중에게 있어요. 굳이 평론가와 대중 사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서 벌어지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추가하고 싶은 것은, 평론가 역시 완벽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죠. 그네들도 실수하고, 잘못 말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대중에 대한 기만과 불친절함에서 나오는 겁니까? 그리고 그게 자체정화가 안될만큼 그렇게 고인 물로 썩어가는 형국인가요? 요즘처럼 댓글이니 뭐니 피드백이 활발하고 각종 커뮤니티 활동도 활발한 판국에?
마스터충달
15/03/1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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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논의가 길어진 중요 쟁점이 평론가의 감수성이 우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부분은 제 입장에서 수용가능했지만, 감수성에 대한 부분은 심리학적 지식에 있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말씀하신 것 처럼 온전히 선천적이라는 입장만 아니라면, 그들의 후천적 노력의 성과에 대해 당연히 인정하는 입장이기에, 저도 더 이상 논의할 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바가 딱 그 지점이었으니까요.

비판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위에 예시로 든 두개의 평론이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불친절한 평론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평론가들이 대중친화적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요. 앞서도 언급했듯이 지금 상황이 극단적으로 대중을 배척하거나 대중친화적이지 않은 이상 양쪽에 대한 비판은 모두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애당초 평론이 주관적이라면 '주류'라는 존재야말로 오히려 불확실 합니다. 당연히 어딘가에서는 불친절하고 대중경시의 자세를 가진 평론이 어쩌면 세상 끝날때까지도 계속해서 나올지도 모르죠. 그럼 그에 대한 비판도 언제나 계속할 수 있을겁니다. 이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 마냥 치부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저도 평점에 대한 대중의 역반응(평점이 높으니 안봐야겠다느니)같은 사례들에 아쉬움이 많기에 왕천군님의 입장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다만 그런 인식을 필요로 하는 쪽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저자가 그런 고자세라면 고립과 단절은 오히려 심해지겠죠. 이 점은 저의 입장을 독자가 취한다 해도 마찬가지겠죠. 어려운 글이 직무유기라며 비판만 한다면 평점에 대한 역반응 같은 것이 나오는 거구요. 이 글을 처음 봤을때 독자보다 저자의 입장에서 생각이 많아 저자에 대한 책임을 더 강조했다고 봐주셨음 합니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특히나 아무런 권위도 명성도 없는 아마추어의 입장에서 좀 더 발전(이라기 보다는 생존일지도...)하려면 저의 입장이 보다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사람들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뭐랄까 자신이 징징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王天君
15/03/11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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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저는 애초부터 그것이 아예 전적으로 선천적이라거나, 혹은 우월함과 열등함으로 나눈 적이 없는데요.

평론가가 가져야 하는 자세와 어떤 상황에 대한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는 아주 다른 문제입니다. 충달님께서는 지금 글쓴이의 도의적인 자세를 기대하신 게 아니라, 현상에 대한 분석을 하신 거고, 전 그 분석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거에요. 그건 예시로 든 두개의 평론으로 퉁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대중이 평론을 소비하지 않는 건 어려운 글을 안읽을려는 게으름과 평론을 어렵다고 치부하는 선입견 때문입니다.
마스터충달
15/03/11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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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와 대중 간의 괴리는 감수성의 발달 차이이지 단순히 저자의 글솜씨와 독자의 독해 능력은 아닌 것 같아요] 이 발언으로 인해 긴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감수성의 발달 차이'라는 것이 심미적 지능의 차이로 해석되었고, 이후에는 [감수성의 선천적 차이도 분명히 존재]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개인간의 차이가 아닌 평론가라는 직업군으로 확장되면 '평론가는 선천적으로 대중보다 감수성이 발달했다'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평론가가 대중에 비해 감수성이 발달했다'라는 명제가 틀렸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한 것입니다.

두 개의 예시는 제가 직접 뜯어보고 비판한 글이었습니다. 이런식의 평가식 비판은 굉장히 조심스럽고, 그렇기에 곱씹은 글들을 인용했습니다. 이 두개의 평론이면 지적 허세라는 현상이 분명히 존재하는 증거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두개로 '퉁쳐서' 전체 평론가 집단을 독선적 존재로 비판하지도 않았다는 점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말씀하신 이동진 평론가의 경우 오히려 과도하게 대중친화적이라고 비판받을 정도로 쉽고 공감가는 평론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모든 평론가가 지적 허세에 빠져있지 않다는 점은 저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평론가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죠.

대중이 어려운 글을 읽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 만큼, 평론가들도 어려운 철학을 그저 끼얹는 수준의 안일함은 타파해야 할 것입니다. 한쪽에게만 잘못을 부과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현재의 경향이 현학적인 자세보다 보다 대중친화적으로 가고 있는 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王天君
15/03/11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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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가 두번째 댓글에 바로 [감수성의 선천적 차이도 분명히 존재하거니와, 그것이 갈고 닦아지는 후천적 노력 역시도 간과할 순 없지요. 모든 사람의 감수성이 보편적으로 똑같다는 의견은 동감하기 어렵습니다.] 이라고 말씀드렸을텐데요. 문학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도 있고, 음악에 대해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영화라고 없을 거라는 전제를 주장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게 그렇게 뭔가 우생학적인 내용이나 인류 평등에 반하는 내용인가요? 평론가의 평론은 오로지 훈련에 의한 계발로만 얻어지는 후천적 형질이고, 또 그래야만 하나요? 제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건 여기에 가치판단을 계속 결합시키는 충달님의 태도에요.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식의 느낌을 받는데, 이게 그렇게 큰 부조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세상에는 그보다 더한 재능의 축복자들이 많고, 그 덕에 몇배나 시간과 노동력을 단축해 뭔가를 받아들이고 창조하는데요. 평론가쪽의 천재라면 이미 장 뤽 고다르라는 걸출한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평론가 전체에 저 주장을 적용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선천적이건 후천적이건, 감상 능력은 더 발달해 있습니다. 이건 익히 동의하신 부분이지 않습니까.

저는 지적허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두개의 사례로 모든 평론가의 고질적인 문제인냥 대표군으로 삼는 걸 지적하는 거죠. 정말로 평론가들이 그렇게 허영에 취해있거나 불친절하다면, 대체 왜 가장 대중과 가깝게 소통하는 GV의 후기들은 그렇게 만족도가 높단 말입니까. 말과 글이 달라서 그런가요? 평론가의 지적 허영이 없는 건 아니다 와 평론가의 지적 허영은 곳곳에 만연한 문제다 는 전혀 다른 주장입니다. 그러니 제가 계속해서 충달님의 비판은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거죠. 충달님의 말씀대로라면 실제로 여기저기서 평론가의 허영을 쉽게 목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이건 사실의 왜곡인 겁니다. 그렇다더라 말고는 증거가 불분명한 주장인 거죠.

당연히 어떤 사안에 있어서 일방적 가해자와 피해자는 존재하지 않겠죠. 그러나 그 책임 소지가 한쪽에게 훨씬 더 큰 경우는 많습니다. 저는 대중이 어렵다, 불친절하다 라고 하소연하는 글은 몇번 봤지만 그런 평가가 공정한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어요. 페이스북의 가장 큰 영화 커뮤니티에선 고등학생이 딱 나이 대의 리뷰를 올려도 어렵다, 아는 척 한다고 공격합니다. 대중들의 반감이란 건 딱 그 정도 수준인 거죠.

상황에 대한 인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충달님이 접하고 느끼는 한국 영화 평론의 현실은 저랑 다를 수도 있죠. 그러나 저는 충달님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되는 상황들을 거의 접한 적이 없어요. 그 어렵다는 정성일 평론가의 GV 도 이해가 잘 되진 않았지만 저 사람이 현학적이라거나 자의식 과잉이라는 걸 느끼지 못했습니다. 충달님이 말씀하시는 평론가의 책임이란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크지도 않거니와,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쉽거나 요령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진지함의 과잉이 그렇게 나오는 때가 많지 그것이 대중에 대한 기만은 절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마스터충달
15/03/1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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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에 집중한 것은 평론과 대중을 가르는 잣대가 지능차이가 될 경우 한 쪽 주장에 대해, 무식하다느니, 수준이 떨어진다느니 하는 근거없는 비판에 근거로써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천적으로 발달했다는 것은 정말 우생학적인 관점이 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평론가가 후천적으로 발달했다는 것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만큼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점을 대중이 권위로서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스스로 어필한다면 지적 과시와 소통 단절이 될테죠. 이렇게 사고의 프레임이 나뉘는 사안이고 그로인한 부작용이 예상되니 가치판단적이라 할 수있죠.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도 위 사례들로 모든 평론가의 고질적인 문제마냥 대표군으로 지적한 적이 없습니다. 중간에도 분명 몇번씩 명시했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평론가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그런 비판을 꺼낼 수도 없나요? 저자의 입장에서 보다 반성적으로 상황을 볼 가능성과 그럴 필요가 느껴지는 현상의 존재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재판처럼 피고/원고 나눠서 이기는 쪽이 다 독식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저야말로 경향을 모르니 말씀을 믿고 독자층이 요즘 더 극심한 잘못을 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반대쪽이 반성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런 부분이 일부 있으니 좀 더 개선해보자'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상황 타개의 능동성을 쥐고 있는 쪽은 저자쪽이라 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王天君
15/03/11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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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라는 수식어만 썼어도 제가 이렇게 긴 댓글을 몇차례나 달 필요는 없었겠죠. 의도하지 않으셨더라도 충달님은 여태 댓글에 모든 평론가를 한 데 묶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평론가의 게으름에 대한 비판을 하려면, 에둘러서 통으로 공격하는 모양새로 이 댓글들이 달린 본문에 대한 반박사례로 쓰실 게 아니라, 더 정확한 사례와 비판의 포인트를 가지고 아예 새로운 글에 통으로 할애하셨으면 더 진지한 논의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잘못된 비판을 한 건 아니냐는 건, 좀 비겁하네요. 이런 건 공정한 비판이 아닙니다. 대상의 적용 범위가 달라지면 그 비판의 질도 당연히 달라져야 합니다. 책임이 없지 않다와 책임이 크다는 다른 이야기이고, 어찌됐건 너네도 잘못은 있긴 있잖아라는 건 양비론에 불과해요. 애초에 그런 식의 의미를 함축한 게 아니었던 주장을 이제 와서 바꾸시다니요. 저는 계층 댓글이 막히는 걸 싫어해서 충달님의 첫번째 의견 아래 계속 댓글을 달고 있습니다. 지금 하시는 말씀은 제가 처음 댓글을 단 바로 윗계층의 댓글과 전혀 다른 이야기에요.
마스터충달
15/03/1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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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특히 [저자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라는 부분은 누가 더 많은 잘못을 하고 있느냐보다는 이런 현상까지 이어진 원인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냐는 부분입니다. 이는 적용범위와는 무관한 부분이기도 한 것이 대중 개개인이 반감을 갖게 되는 것에는 단 한 편의 잘못된 평론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반감기제가 작동하게 되는 원인을 저자에게 묻고 있으며, 이렇게 낳은 반감이 정당한 평론에도 날을 세우는 '악순환'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그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게 만드는 '일부'의 안일한 평론이 계속되는한, 그들의 개선을 촉구하는 비판도 언제나 합당할겁니다. (물론 독자층도 당연히 개선이 필요합니다. 그게 이 게시글의 본문이죠.)

양비론이라는 지적도 부당한 것이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게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가 개선할 수 있다면 모두 개선하면 되지 왜 한쪽이 옳고 다른쪽이 그르다고 판결이 나야 합니까? 누가 더 잘못했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떻게 개선해 나가야 하는 가를 따져야 할 일 아닌가요?

위에서 언급한 부분이 전체를 매도하는 것으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일부'라는 언급이 전혀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후에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들이 정말 주류인가요? 혹은 대다수의 영화 평론가의 성향을 대표할 수 있나요?]라고 문제제기 하셨을때, 저는 바로 이어서 [그들은 주류는 아니지만 비주류도 아니죠. 말씀하신대로면 평론에 주류가 어딨겠습니까. 저도 평론가 집단 전체가 오만에 사로잡힌 노답집단이라 생각지 않습니다.]라고 답변드렸습니다. 그런데 마치 제가 꾸준한 어조로 일부를 전체로 퉁쳤다는 식으로 하시면 안되죠. 더구나 이렇게 확실한 답변을 드렸는데 이제와서 말뒤집기라고 비겁하다 하시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표현이 정확하지 못할지언정 필답을 오가는 와중에 말바꾸기나 할 정도로 근성없이 응하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비겁하다'는 비난에 화가 많이 납니다. 차라리 제가 적용범위에 대한 답변을 드렸을 때 바로 지적하셨으면 모를까(그렇다면 해명의 기회라도 있었겠죠) 이제 와서 그것을 다시 끌고와 어떻게든 제가 퉁치기를 했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과연 누가 비겁한지 되묻고 싶습니다. 직접적인 물음에 뭉뚱그리거나 회피하거나 물타기 하지도 않고, 직설적으로 명확하게 대답을 드렸음에도 비겁하다란 말이 나오는 군요. 저는 절대 비겁한 대화는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말주변이 없다고 하십시오. 상황에따라 눈치나 보며 태세변환하는 박쥐취급은 사양하겠습니다.
마스터충달
15/03/12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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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마음이 많이 편치 않네요. 끊어진 필답이 외면인지, 회피인지, 무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말벗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쉬움과 실망을 느낍니다.
술 한 병 마시고 이 댓글 남깁니다. 감상에 치우쳐 이런 글을 남기게 된 점 죄송합니다. 하지만 섭섭함을 금할 수가 없군요.
王天君
15/03/13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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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화를 달랠 정도로 몰아붙일 의도는 아니었지만 저는 충달님의 의견 개진이 비겁하다는 발언은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읽어봐도 똑같은 느낌뿐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의미의 문장을 다른 문장처럼 애매하게 의미를 흐리시기 때문이죠. [첫 댓글, 특히 [저자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라는 부분은 누가 더 많은 잘못을 하고 있느냐보다는 이런 현상까지 이어진 원인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냐는 부분입니다.] 이 문구를 보면 과격한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건 명백한 말장난이에요. 저희가 떠들고 있는 현상은 문제가 되는 현상이고 거기에 대한 책임 소지를 묻는 건 누가 더 잘못했냐와 다를 바가 없어요. 이런 식으로 말을 흐리시니 저는 그렇다면, ~라고 하시는데 라고 계속 말하신 바를 상기시켜드리며 논의를 이어나가야 합니다. 명확치 않은, 논점에 어긋나는, 주제와 연관이 없는 말이 자주 보이는데 이게 만약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전 당연히 비겁한 물타기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해도 제 피로가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만.

이야기를 원론으로 돌아가보죠. 저희가 의견을 달리 하는 부분은 단순합니다. 대중과 평론가 사이의 괴리감은 평론가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없다 죠. 표현을 바꿔도 대중과 평론가 사이의 괴리감은 평론가의 책임이 크다/작다 정도가 됩니다.(저희가 나누고 있는 논점에서 저 두 논점은 표현이 다를 뿐 그 본질은 똑같습니다. 전적이라고는 안했다고 하실까봐 이렇게 풀어 씁니다) 저희는 두 집단의 원활하지 못한 상호 작용에서 각기 다른 집단, 평론가 혹은 대중에게 실질적인 책임을 돌리구 있는 겁니다. 본문과 연결지어서 영화 평론의 소통에서 공급자와 수용자 중 그 책임은 누가 더 크냐를 묻는다면 충달님은 공급자를, 저는 수용자를 들고 있는 거죠. 이것은 아주 명백한 이분법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대답이 끼어들 수가 없어요. 이 논쟁에서 충달님은 평론가를, 저는 대중을 계속해서 비판해야 합니다. 그게 저희가 서로에게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고 설득시키려는 부분이죠. 안 그런가요?

그런데 충달님은 [이게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가 개선할 수 있다면 모두 개선하면 되지 왜 한쪽이 옳고 다른쪽이 그르다고 판결이 나야 합니까? 누가 더 잘못했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떻게 개선해 나가야 하는 가를 따져야 할 일 아닌가요?] 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논의를 갑자기 확장시키신 겁니다. 그리고 바꾸셨어요. 평론가의 어떻게를 말씀하신건 저희가 나눈 논의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애당초 저는.평론가가 잘못하고 있다는 전제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니까요. 충달님은 평론가라는 어느 하나를 고르셨습니다. 저는 대중이라는 나머지 한쪽을 골랐구요. 이분법 안에서 상충하는 두 개체 어느 쪽이 책임이 더 큰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떻게를 꺼내시는건 쌩뚱맞은 이야기죠.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평론가와 대중 사이의 괴리감을 해소하기 위해 "각각" 어떻게 해야 할까? 를 이야기 한 게 아닙니다. 누구의 잘못인가? 라는 책임 소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말이야 바른 말입니다. 어느 한쪽의 잘못을 판별하는 건 사태를 개선하는 데 큰 의미는 없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분법을 먼저 적용한 건 충달님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충달님이 야기하는 어떻게에 대한 전제, 누가 더 잘못인가에 대해 전혀 찬성하지 않아요. 그런 상황에서 평론가의 노력 여부를 제가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충달님의 의견은 양비론 물타기가 됩니다. 상황이 좋지 않다, 어느 한쪽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 같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개선안은 어떤 사안에 있어서 양쪽의 잘못이 비등비등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죠. 당장 평론가측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하시면서 모두 다 함께 노력하자는 결론으로 에두르시는 건 충달님 스스로의 논점을 흐리고 계시는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부분이 전체를 매도하는 것으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는 부분도 그래요. 결국 이는 충달님이 애초에 주장하는 적용 대상의 범위를 애매하게 표현하신 겁니다. 이것도 좋게 봐줘야 그렇게 읽히는 거고, 충달님께서는 분명히 강신주씨의 말은 인용해 평론가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비판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해의 여지가 없는 부분을 아,그런데 내 말은 그게 아니었어, 라고 하면 그 반대의 뜻이 편리하게 전부 다 뒤집어지나요? 아 그렇구나 내가 오해했구나 하고 다시 새로운 합의 하에 논의 시작!! 이렇게 될 수 있나요? 억울하시다면 제가 댓글을 다다는 저희 논쟁의 시발점인 댓글을 다시 읽어보세요. 제가 더 기가 막힌 건 왜 저보고 바로 지적을 안하셨냐고 하시는 부분입니다. 개념의 합의가 명확하지 않으면 그 불명확함을 초래한 충달님이 스스로 오해의 소지에 더 명쾌하게 하고 넘어가셔야 하는 거죠. 토론의 기본 규칙을 어기시면서 저에게 왜 제때 지적 안했냐고 하시면 저는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참고로 저는 충달님이 말을 바꾼 바로 다음 단락에 동일한 질문을 했습니다. 충달님의 사례가 평론가 전체를 대표할 수 있냐고요 저의 그 질문을 그냥 넘긴 건 충달님입니다)

평론가에 주류 비주류가 어디있겠습니까... 라는 말도 그냥 논점을 흐리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이동진, 허지웅, 김도훈, 오동진 등등 씨네 21 필진 출신을 필두로 한 사람들이 주류고 이름도 모르는 나머지 평론가들이 다 비주류죠. 만약 충달님께서 드신 예가 비주류 평론가라면 이는 평론가가 대중과의 괴리감을 일으킨다는 주장에 대한 입증사례로 불충분한 겁니다. 소위 듣보잡이 말하는데 대중이 거기에 뭐 얼마나 신경을 쏟나요? 그 영향력은 한정적으로 발생했다가 끝납니다.

거기다가 충달님은 논리의 비약까지 하고 계십니다. 일반 대중이 잘못된 평론 하나만 잘못 접해도 그게 평론가의 전체 평가로 이어진다는 건 충달님의 개인적 상상의 영역이죠. 예를 들어 듀나의 키스 오브 더 댐드 리뷰를 보고 뭔 개소리야 라고 느낀 사람이 있다 칩시다. 그럼 그 사람은 앞으로 평론에 학을 떼거나 평론가란 것들은 쯔쯔쯔 하고 편견에 사로잡히나요? 이런 현상이 생긴다면 이건 글을 잘못 쓴 듀나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일반화의 오류가 습관이 된 그 사람의 잘못인가요? 충달님의 말씀대로라면 일반화의 오류, 영화에 대한 감수성 및 사전 지식이 부족한 사람 등 그 모두를 평론이라는 장르에 익숙해질 수 있게끔 흡입력을 갖춰야 한다는 건데... 이게 가능이나 합니까? 그리고 네이버 리뷰 보시면 아시겠지만 얼핏 보면 어렵고 전문적인 글들이 조회수도 제일 많고 추천도 제일 많이 먹습니다. 그렇다면 평론가는 이것보다도 훨씬 더 허들이 높은 글을 쓰기 때문에 대중이 외면하는 건가요?

페이스북 영화공장에.가입하셔서 한달만 활동해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현재 가장 보편적인 소셜 네트워크, 그리고 그 안의 가장 큰 영화 소모임에서 평론가에 대한 공격이 얼마나 빈번하게 비이성적으로 일어나는지요( 사자왕이나.익무는 일반적인 대중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마지막으로 충달님께서 쓰신 첫 댓글과 마지막으로 쓰신 댓글을 비교해보세요. 첫댓글에 인용했던 강신주의 발언에서 정말 강신주가 평론가의 일부만을 공격했으며 그것이 잘못된 평론 하나의치명적인 전염성을 전제로 했는지 그것이 일관되게 이어오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충달님은 저의 비겁하다는 발언에 화가 나셨겠지만, 저 또한 일관성 없는 충달님의 의견에 지쳤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또한 충달님께서 어떤 식으로 평론가에 대한 비판의 정단성을 확보하시는지 댓글들을 좀 흝어보셨으면 좋갰습니다. 쉬운 글이 좋은 글은 아니고 어려운 글이 나쁜 글은 아니다 (독자가 기준이 될 수 없다) 라는 본문에 영화 평론은 들어맞는 사례가 아닙니다.

전 충달님도 서장훈씨처럼 같은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처럼 혹은 다른 이야기를 같은 이야기처럼 하고 계시다는 걸 지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다음 댓글에서는 제가 한 말과 충달님이 한말을 조목조목 복붙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군여

이건 여담입니다만, 저나 충달님이 하는 건 본질적으로 평론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저희가 다른 평론을 비판할 정도의 자격이나 능력을 갖췄다고 자신하실 수 있으신가요?
마스터충달
15/03/1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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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제가 왕천군님과 논의에 집중한 곳은 감수성에 차이가 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말씀만 아니면 왕천군님이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는 다 인정할 수 있습니다. 애당초 독자(대중)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게시물의 본문에 동의하는 바였으니 왕천군님 말씀을 부정할 필요도 없지요. 하지만 '감수성'이라는 부분에 있어, 이것이 선천적 지능 차이를 포괄하고 이에 따라 평론가 우월주의나 멍청한 대중론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틀린' 부분이었으니 이 지점을 분명히 하고자 대댓글을 달았던 겁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답변없이 논점을 감수성에서 '일부-전체' 문제로 갈아타며 흘려버리셨죠.

일부와 전체의 말꼬투리 잡기 놀이는 이제 그만 하죠. 논의 시작부분에서 평론가 집단 전체에 대해 비판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 다시 한번 인정하고, 그에 따라 제가 잘못된 표현을 한 점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평론가 전체가 노답이라고 생각치 않으니까요. 그러니 구체적 지적이 나왔을 때, 평론가 전체가 노답인 것은 아니라고 한 발 빼고 이야기했죠. 이게 토론에서 양보이고 인정이고 합의죠. 이후 논의는 이를 통해 이야기가 진행되어야지, 다시 처음 얘기를 끌고와서 말바꾸기나 하고 있다고 하시는 것은 부당합니다. 혹여나 제가 앞선 부분에서 '평론가는 그 탄생 자체가 노답적 요소가 있다.' 라던가 '이런 한계를 모든 평론가가 보여주고 있다.' 라고 했다면 말바꾸기가 맞겠지만 그냥 '평론가들의 이런점이 문제다'라고 했는데 이걸 극단적으로 평론가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하신거야 말로 왕천군님의 상상놀음일 뿐입니다. 이 부분이 주장을 전부 뒤집는 것으로 보시는 시각이 이분법적이라는 겁니다.

주류/비주류 이야기도 정말 의미없는 말꼬투리잡기죠. 제가 주류, 비주류가 무의미 하다고 한 것은 평론은 개인적 감상이고 그에 따라 누구나 평론가가 될 수 있다는 상념에서 나온 말입니다. 또한 논의에 있어 주류/비주류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 지점의 불필요성을 지적한 말이기도 하죠. 그런데 왕천군님은 이에 의미를 두시고는 비주류 평론이라면 영향력이 없으니 책임소지를 따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까지 하십니다. 이 점에 있어선 그냥 팩트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인용한 안일한 평론은 모두 '씨네21'이라는 주류 평론지에서 나온 글입니다.

사실 감수성의 의미에 대한 것 이외의 부분에 있어서는 왕천군님의 말씀중에 부정해야 할 부분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평론가-대중의 괴리에 대중이 더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그러니 저는 한발 뒤로 물러나 이점을 인정하더라도 평론가의 허물이나 책임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항변하는 것이죠. 이에 돌아왔던 것은 비판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평론가의 허물이 존재치도 않는다는 답답한 모습과, 양보를 말바꾸기로 바꾸는 모욕이었습니다.

도대체 논쟁을 왜 하십니까? 싸우자고 하시는 건가요? 논의가 진행되면서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고, 타협할 부분은 타협하고, 합의할 부분은 합의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왕천군님은 상대방의 생각마저 스스로 재단하여 명백한 'vs'구도를 만들고, 논리적 허점을 후벼파 승자독식을 하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지금 이 대화 상황도 웃긴 것이 왕천군님은 "너는 이렇게 생각하는 거로 보이는데 왜 아닌 것처럼 구느냐"고 하고 저는 "그건 내 생각이 아니고 이러이러한 것이 본래 의도다"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관심법도 정도껏이지, 본인이 아니라는데도 그게 맞다고 하십니까? 차라리 말주변이 없다고 하라니깐 끝까지 비겁한 말바꾸기 궤변론자 취급을 하시네요. 내 머리속에서 생각을 고쳐먹은 적이 없는데 왜 자꾸 박쥐취급이십니까? 그래서 처음 발언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그렇게 비춰진 책임조차 스스로의 부족한 글솜씨라 하는데, 뭔 억울한 점이 있으시길래 부득부득 제가 태세변환했다고 몰아가십니까? 그냥 그렇게 보고싶으신거 아닌가요?

저와 이야기 하는 것에 지치신다고 하는데, 저야말로 벽보고 이야기 하는 것 같아 엄청나게 피곤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발언이 무례하다는 것을 알기에 따로 언급하진 않으려 하죠. 근데 그 소리를 왕천군님한테 먼저 듣는군요.... 뭐랄까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 수록 불쾌감과 모욕감만 더해지는 것 같네요.

어짜피 평론의 목적에 대한 부분부터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으니 좁혀지지 않을 논쟁이 지속될 거란 생각이 드네요. 제가 아무리 왕천군님 의견을 인정한다 한들 사상을 끼얹는 듯한 안일함이 권장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왕천군님이 제 말을 다 인정해주신다 해도 대중의 권위 무시가 정당화 되지도 않듯이요. 애당초 어느쪽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도 아니니 상대를 완전히 자신의 입장으로 포섭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런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감수성의 용어 논쟁이나, 현재의 대중 경향 같은 사실판단만 가능하겠죠) 그러니 인정과 타협을 통해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는 가를 고민해 봐야 옳겠죠. 그런 논쟁이 아니라면 더 이상의 정신소모와 불쾌감, 모욕감은 사양하고 싶군요.
王天君
15/03/1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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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답답하네요. 충달님이 인정하시는 오해의 소지는 아예 저희가 나누는 논의 자체를 무의미한 걸로 바꿔놓는다는 겁니다.

나는 a라고 생각해. 그건 아냐 b지. 아, 내가 여태 이야기한 건 a가 아니고 c였어. 내가 a라고 잘못 썼구나. 그럼 우리 다시 c와 b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을래? 이러면 저는 그렇구나, 그럼 다시 새로운 토론을 시작하자 하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논의를 이어가야 하나요? 저희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논리 대결을 시험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이 감정과 생각을 담아서 주장을 충돌시키고 있는거죠. 충달님이 그러하듯, 저 역시도 이 키배를 진지한 유희로 다루고 있습니다. 충달님께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상대방의 주장에 내내 열심히 반론을 펼쳤는데, 잠깐, 내 이야기는 그게 아니었어 라고 말하면 여태 소비한 시간과 논리 및 감정 소모는 대체 뭐가 되나요? 내가 인정했으니 다시 이야기를 하면 되잖아 라는 건 어떤 토론에서 휘두르는 쿨몽둥이입니까? 토론의 기본 규칙인 개념의 합의 문제에서 상대방의 일관성 부족을 지적하면 말꼬투리 좀 그만 잡아 라고 하실 수 있나요? 이건 쿨한 게 아니에요. 뻔뻔한 거죠. 그게 한 두번 문답이 오고 갔으면 모를까, 장장 몇시간에 걸쳐 A4 몇 장 분량의 글이 오고간 다음에야 내가 잘못 썼네, 그러니 다시 새로 토론하자, 라고 하면 저는 그러셨군요 하고 넘어가면 되는 일입니까?

몇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저는 충달님의 첫번째 의견에 계속 답변을 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충달님과 저의 의견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갈라졌는지를 계속 확인하면서 댓글을 달아요. 저는 애초부터 감수성의 발달이라는 부분이 "온전히 선천적"이라고 한 적이 없어요. 거기에는 당연히 후천적인 것도 포함이 된다고 그 바로 다음 댓글에 달지 않았습니까? 충달님께서는 계속해서 감수성이라는 것은 평론가나 대중이나 똑같다고 하시고, 우열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하셨어요. 그럼 감수성에 대한 저희의 논의 주제는 이렇게 압축됩니다. "평론가와 대중의 감수성에는 차이가 있는가? 혹은 우열이 나누어지는가?"

그리고 충달님은 계속해서 잘못된 반론을 펼치고 계십니다. 제가 하지 않은 주장에 대해서 [그런데 그게 선천적인 것이라고 보는 점이 부당하다는 겁니다. 그게 왜 선천적입니까? 영화평론가는 그 능력을 영화라는 매체에 집중한 것이지 그들의 지능 자체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깐 지능/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겁니다. 대중이 비평가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이 부족한 것이죠. (그러니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경우 평론가의 이해도는 대중을 상회합니다. 제가 언제 평론가가 대중보다 못하다고 한 적 있나요?) 평론가가 된다고 갑자기 지능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심미적 지능이 낮다고 평론가가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 그들을 선천적으로 우월한 존재라고 하십니까?] 라고 반론을 하고 계시죠. 제가 바로 두번째 댓글에서 [그것이 갈고 닦아지는 후천적 노력 역시도 간과할 순 없지요. 모든 사람의 감수성이 보편적으로 똑같다는 의견은 동감하기 어렵습니다.] 라고 저희의 주제를 좀 더 명확히 했는데도 불구하구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고 한 겁니다. (선천적인 차이가 존재하느냐 안 존재하느냐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하죠. 이 부분은 좁혀질 것 같지도 않으니. 대체 어떤 능력에 있어서 누군가 우월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대체 왜 그렇게 알러지를 보이시나요? 수많은 영역에서 나타나는 재능 차이가 평론가와 대중 사이에서 나타난다는 게 그렇게 못마땅하시나요? 정치적 공정함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미신을 낳습니다. 당장 평론가 사이에도 잘 팔리는 글과 안 팔리는 글이 있고 주류와 비주류를 낳는데 이 차이는 죄다 그들의 노력 차이입니까?)

주류 비주류가 왜 의미가 있는지 다시 설명해야 하나요? 충달님이 말씀하신대로 평론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고, 누구나 평론가가 될 수 있는 거라면, 대체 충달님은 왜 애초에 프레임을 평론가 대 대중(非평론가)로 나누셨습니까? 저희는 아주 보편적인 두 집단 간의 충돌을 이야기하는 거라구요. 그런데 그 보편성을 담보하기에 불충분한 측의 증거를 제시하면서 이것 봐라 이게 평론가들의 문제다... 라고 이야기를 하시나요? 비주류면 그게 평론가들...이라고 이야기가 안된다니까요? 그건 일부 평론가의 문제가 되지 보편적, 전체적, 대다수의 평론가들의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일반화의 오류라는 말이에요. 어느 집단을 대표할 수 없는 증거를 왜 자꾸 근거로 들이미시는 겁니까? 세월호 유족 썩었네 하고 술 먹다 깽판친 사람을 욕하는 거랑 하나 다를 게 없어요. 그럼 귀찮으시겠지만 토론에서의 입증책임에 기반해 제가 조금 더 많은 사례를 요구해도 되겠습니까? 현학적이라거나, 대중을 인정하지 않는 등의 잘못된 평론, 그리고 그 평론에 의해 평론 소비를 중단하는 소비자들의 발언 같은 것들 말이죠.

논쟁에 대해서 물으니 말씀드리죠. 저를 단순한 인격 모욕죄로 몰아가시는 것에 대한 변호도 포함해서요. 논쟁은 싸우는 겁니다. 서로의 주장과 논리를 가지고 VS를 하는 거라구요. 피지알의 수많은 토론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토론의 과정은 상대방과 싸우는 거에요. 물론 여기에는 숭고하고 번드르르한 포장들이 붙을 수 있습니다. 문제점 인식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개개인의 의견을 총합하고 가장 나은 답에 수렴하기 위한 블라블라... 쉽게 말해 저희는 네 말이 맞냐, 내 말이 맞냐 아주 단순하게 말싸움을 하고 있는 거라구요. 것도 유희를 위해서요. 내 말이 맞고 상대방 말이 틀리다, 그렇다면 상대방 말의 틀린 부분을 계속 지적하면 됩니다. 내 말이 틀리고 상대방 말이 맞다, 그럼 그 사실을 인정하면 됩니다. 원래 토론은 승패가 갈리는 거에요. 애초에 레토릭이라는 그렇게 생겨났고 저희는 아주 고전적인 형태의 논쟁을 펼치고 있는 거라 이 말입니다. 제가 충달님의 의견에 어떤 부분을 타협해야 하죠? 그리고 제가 근거없이 충달님의 의견에 동의하기를 거부하며 땡깡을 부리고 있습니까? 계속해서 저는 논쟁의 규칙을 지키며 충달님의 잘못된 의견을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억울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짜증은 납니다. 내 말이 잘못되기는 했는데, 그것만 좀 바꾸면 여전히 말이 안되는 건 아니잖아? 하고 당최 다른 비판을 끼워넣은 채 좋게 좋게 끝냅시다...하고 속된 말로 단도리를 치려고 하시니까요. 충달님께서는 자신의 의견이 잘못됐다는 인정을 절반만 하셨어요. 그게 진짜로 인정한 게 되었을려면, 아예 평론가와 대중 사이의 괴리감이라는 논쟁 자체를 끝내고, 일부 평론가의 잘못에 대한 논의를 새로 발제를 하셨어야죠. 전혀 다른 두 이야기를 슬그머니 연결시키고 그래도 내가 틀린 건 아니지 않냐고 하시면, 저는 이 VS 놀이를 왜 하나요? 유희란 진지해야 재미있는 거에요. 그리고 저나 충달님 모두 진지하게 그 유희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규칙을 어깁니다. 그럼 저는 화가 날 수 밖에 없겠죠.

충달님의 의견은 저희의 논쟁에서 떼놓고 보면 말은 맞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평론가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그런 비판을 꺼낼 수도 없나요?] 이 말도 이 논쟁에서 떼놓고 보면 말은 맞다구요. 그런데 이 논쟁의 주제, 평론가와 대중 둘 사이에서 괴리감의 책임은 누가 더 큰가? 라는 이야기와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어딘가에 게으르고 진실되지 않은 평론과, 그런 글을 쓰는 평론가는 존재한다 - 라는 명제가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평론이란 장르에 한해서는 평론가의 책임이 더 크다 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치환이 됩니까? 내 말이 맞긴 맞잖아 랑 이 상황에서 내 말은 맞잖아 는 전혀 다른 거라고요. 그리고 착각하시는 건, 절대적인 맞고 틀리고를 도출할 수 없는 문제 가 맞고 틀리고를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것 역시도 상대주의의 함정이에요. 그럼 애초에 세상 사람들이 왜 논쟁을 합니까? 맞고 틀리고를 이야기하지도 못하는데. 절대적이지는 못해도, 절대에 최대한 가까운 상대적인 옳고 그름을 나눌 수는 있어요. 그리고 저희가 나누는 주제 또한 분명히 그렇습니다. 절대적 결론을 낼 수 없음이 어느 한 쪽의 논리적 허술함을 감춰주는 이야기는 되지 않아요.

이미 말씀드렸지만, 후천적 노력이 부족한 대중과 그 노력을 통해 보다 나은 감수성 혹은 해석 능력을 가진 평론가 사이에서 갭이 존재한다는 건 충달님께서도 인정하신 사안이니 원하신다면 평론가와 대중 사이에는 선천적 차이가 존재하는가? 는 별 의미는 없어요. 저희가 이야기하는 건 지금, 대한민국, 의 보편적인 평론가와 대중 이라는 특정 상황을 전제하고 나누는 이야기이니까요. 그럼에도 평론가와 대중의 선천적인 차이 유무에 대해 논쟁을 하고 싶으시다면 전 상관없습니다. 물론, 저도 더 이상 제가 끊임없는 복기를 통해 이야기를 다시 상기시키는 정신적 피로를 유발하는 대화는 사절이에요. 안타깝지만, 저는 토론의 기본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끝없는 인내심을 발휘할 만큼 인격의 도야는 부족하고, 그런 걸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마스터충달
15/03/13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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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말로 답답하네요. 솔직히 제 첫발언 자체에도 그런 의미도 없었다 보지만 백번 양보해서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으나 본의가 아니라고 하는데 왜 님이 내 본심을 재단하십니까? 왜일까요?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경우 님의 논리가 어긋나기 때문이겠죠. 자기 논리 맞추자고 남을 호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논의할 필요도 없는 것이 남에게 모욕적 언사를 하고 사과한마디 없는 사람과 더 엮이는 인내심을 발휘할 만큼 제 인격의 도야가 충분치 않으니, 더 이상 피로할 필요없이 즐거운 불금이나 마저 즐기시길 바랍니다.
王天君
15/03/13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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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지난 후쯤에 원래 있었던 본문의 의미를 곱씹어보시고 충달님이 쓴 댓글을 차분히 다시 읽어보세요 당장은 억울하고 저만 미울테니 뭐가 안들어오겠죠.
뭐 편할 대로 하세요
레이드
15/03/1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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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자체도 하나의 당파성을 가지고 있죠. 따라서 말씀하신 주제에 대한 토론은 계속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는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모른다고 혹은 나와 다르다고 배척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태도인 듯 합니다.
아이리홀릭
15/03/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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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동감합니다. 제가 글에서 말하려는 요지도, "내 기준에 어긋난다고 글의 존재 의미를 배척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王天君
15/03/10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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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합니다. 이전에 이리님도 쉬운 글이 좋은 글은 아니다 라고 쓰셨는데, 그 글의 초점이 어려워 질 수 밖에 없는 글은 어렵게 쓰일 수 밖에 없다고 형식을 지적한 반면 이 글은 중립적일 수 없는 일종의 정치적 편향성을 지적하는군요.
이러나저러나 무지한 독자의 하소연은 결코 설득력을 지닐 수 없죠
아이리홀릭
15/03/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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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당파적 속성 자체 보다는, 독자들의 편향된 선호 기준의 하나로서 당파성의 예를 든 것에 가깝습니다만, 독자의 하소연이 항상 정당하지 않다는 점은 제가 말하려는 바와 일치합니다. 공감의 말씀 감사합니다-
할머니
15/03/1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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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라면, 니체가 글은 상종도 못할 쓰레기이며, 고진의 글은 실체없는 메아리이고 황병승의 시는 배설이죠. 쉽게 쓰기로 유명한 신형철조차도 영화평론계에서는 쉬운 글을 어렵게 쓰는 수준이하의 허접으로 분류될지도 모르겠네요. 글쓴이가 수준이하라고 헐 뜯을 지성능력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 정작 본인의 지성능력에 대한 반성은 할 줄 모르는게 요즘 인터넷이죠.

뭐 PGR에서도 뭐만 썼다하면 하루키 아류같네요. 라는 말이 나오니까요. 하루키가 그렇게 폄하될만한 작가인지도 모르겠지만.
몽키.D.루피
15/03/1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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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니체처럼 글쓰면 쓰레기 맞다고 봅니다. 매체가 다르고 독자가 다르면 글쓰기도 달라야죠.
할머니
15/03/10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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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설정은, 독자가 하는게 아니라 저자가 하는거죠. 어떤 게시판이든 일정 소양을 갖춘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여 글을 쓸수도 있을거고, 게시판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하여 글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PGR자게의 야구글이 저를 대상으로 쓰여지지 않는 것 처럼요.

저는 세이버가 어쩌구, 타율이 어쩌구, 하나도 모릅니다만, 그 글에 ' 뭔말인지 모르겠네요. 겉멋 드신듯 ' 이라는 댓글을 함부로 달지 않는게 독자로써 최소한의 에티튜드겠죠. 그런데 문학을 타겟으로 한 글이나, 문학적인 글에는 그런 댓글이 많이 달리더라구요. 과학관련 글에는 배경지식이 있어야 댓글을 달 수 있을 것 같은데 문학적인 글쓰기를 읽는데는 배경지식이 필요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그거야 말로 과대망상에 자아도취증상의 일종이겠죠. 글이 형편없다고 느낀다면 형편없는 이유를 기술해야지, 본인이 이해하지 못한다는게 합리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죠.
사악군
15/03/10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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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할머니님께서 야구를 '모르시니까' 그렇지요.
문학에 대해서 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문학을 아니까' 혹은 안다고 생각하니까 댓글을 다는 겁니다.

(내가 모르니까) ' 뭔말인지 모르겠네요. 겉멋 드신듯'과
(나도 문학은 아는데 네가 써놓은 건 문학적인 기교가 아니거나 형편없어) ' 뭔말인지 모르겠네요. 겉멋 드신듯'에는 차이가 있는겁니다.

뭐 둘다 그런 댓글을 함부로 다는 건 좋지 않은 게 맞지만요.
할머니
15/03/1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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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WBC를 봤다고, 나지완이 끝내기 결승포를 날리던 방송을 라디오로 들으며 좋아했다고 야구를 알게되는게 아닌데, 인터넷에서의 독자는 '내가 알고있다'라는 기준이 너무 낮은 것 같습니다.
몽키.D.루피
15/03/1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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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게시판이라면 기본적으로 그 게시판 이용객 전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에 피자일에서는 계층 말머리를 달고 있구요. 그리고 특정 주제의 글을 쓰더라도 기본적으로 모른 사람도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끔 쓰는게 '최소한의 에티튜드'입니다. 어떤 댓글에 상처를 받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님부터가 님 글을 읽는 사람들을 문(학)알못으로 상정하고 있는데 제대로된 소통이 될리가 없겠죠.
할머니
15/03/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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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댓글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댓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PGR에 문알못으로 상정하고 글쓴적 없습니다. 문학에 대해 글쓴적이 없으니까요. 기본적으로 모르는 사람도 어느정도 이해하게 쓴다는 점에서보면 니체의 글도 문제될게 없죠. 다만 담론의 크기에 따라 내용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글도 있으며, 저자의 스타일에 따라 명료성을 포기할 수도 있죠. 커뮤니티의 글은 모두 명료한 신문식 글쓰기를 지향해야한다고 누가 정한적 없거든요.

덧붙여 니체 글이 어려운건, 그의 글이 문학적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건 열화가 아닌 선택이고, 적어도 독자는 누군가에게 열화라는 딱지를 붙이기전에 이게 열화인지, 선택인지 구분할정도 능력은 갖춰야죠.
아이리홀릭
15/03/10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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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글쓰기에 말씀하신 대로의 속성이 강한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글이란 것은 삶 자체를 반성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독자들은 저자의 반성적 성찰을 요구하는데는 능숙합니다만, 그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데는 인색한 것 같고요. 별달리 문제없는 글의 논지가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오해받고 비난받는 것을 개인적으로 많이 목격하기도했습니다. 조금만 글이 잘 읽히지 않아도 화부터 내는 독자들도 많은데, 그 점이 의미심장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실 "내가 볼 때 어려운 글"이 있다면, 그건 자신의 성향이나 눈높이와 잘 맞지 않는 것이니, 글의 객관적 가치에 대한 판단은 유보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막말로 잘 읽히지 않는다면 그냥 나하고 잘 안맞나보다 스킵할 수도 있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대중 공론장에서도, 관련 주제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충분히 구비하고 있거나, 지적인 호승심과 자기 계발 욕구로 '어려운 글'을 선호하는 독자들이 분명 존재하니까요. 어려운 글에 대한 대응이 퇴출과 비난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거지요.

번외로 말하면... 어려운 글은 독자의 지성 뿐 아니라 내면을 드러내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례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먹기 힘든 글을 접하면, 거의 모욕감을 느끼듯 벌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쉬운 말로 할 수 있는 걸 왜 복잡하게 얘기하느냐!"라고 말이죠. 그런데 독자가 평소에 자기 지적 수준이나 독해 역량을 잘 객관화하고 있다면, 자신이 수용하는 글 하나 하나에 그렇게 휘둘릴 필요가 없는 것이거든요. 만약에, 독자가 자신이 소비하는 글을 통해 자기 수준을 확인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한다면, - 만약 그런 게 없다면 "내가 누구 누구 책을 읽었네 하며 떠벌리고 다니는 스노브들도 없겠지요. - 그 글을 통해 과연 무엇이 좌절되었길래 그렇게 분노하는지는 사실 자명하죠-
제랄드
15/03/1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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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 시절, 성당(카톨릭) 다니던 시절에 여차저차 신부님의 권유(내지는 숙제)로 기독교 서적을 하나 읽게 되었습니다.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이었는데 책 사이즈가 매우 작고 두께 또한 얇아서 좋아라 했었죠. 그런데 책을 펴는 순간 본문의 1/4이 한자로 되어 있더군요. 게다가 제법 옛날 서적이라 동원된 문체와 구술 방식이 다소 옛스럽기 때문에 옆에는 옥편을 펴 놓고 한 줄 한 줄 '해석'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 페이지를 간신히 넘어가면 문득 어라, 앞 페이지에서는 무슨 소리를 했었지? 이 말이 여기에서 왜 나온 거지? -_- 뭐 이렇게 되서 다시 앞 페이지로 돌아가야 했었고요. 거기에 게으른 성격 탓에 완독은 커녕 절반 정도 읽는 데에만 1달이 걸렸습니다.
당시의 제가 감당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내용의 글이었고, 앞서 언급했듯 쉬이 읽혀지지도 않았고, 아예 이해조차 못한 문장도 있었으며, 전혀 공감할 수 없었던 문장도 있었습니다만 몇 년의 시간이 지난 어느 이름 모를 날 문득 그 책의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책은 참 좋은(여러가지 의미로) 책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껏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도 말이죠.
아이리홀릭
15/03/1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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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려운 글의 가치는 점진적으로, 반성적으로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탄탄한 지식과 논리, 문제의식으로 체계화된 한 편의 글은, 가독성이나 난이도 때문에 접근장벽이 높더라도, 끈기있게 완독하고 나면 독자의 지적 수준이나 지평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큘러스
15/03/1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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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고자 하는 핵심을 잘 모르겠네요. '당파적인 글읽기'를 비판하고 싶으신 것인지, '내가 볼 때 어렵게 씌여져서 읽기 싫다'는 태도를 비판하시는 것인지 , '정말로 어려운 내용의 글이 싫다' 는 태도를 비판하시는 것인지 말이죠. 각자 지향점이 조금씩 다른데 그런 내용들이 본문에 적당히 뒤섞여진 다음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는 너희들이 문제있는건 아닐까?' 로 슬쩍 귀결짓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문 글도 본문 자체의 분류법에 따르면 '어려운 글' 인것 같은데, 죄송한 말이지만 이런 글을 '어렵게' 씌여진건지 '못' 씌여졌는지는 구분을 해야 하지 않나 싶네요. 난이도가 있으나 좋은 글들이 배척받는 현상은 문제가 있으나, 그렇다고 계통없는 글들마저 독자탓을 할 수는 없죠. 특히 서두에 시작하는 '지속적으로 오해받는 글' 은 PGR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광경인데, 한두번도 아니고 글이 지속적으로 오해를 받는다면, 두가지중의 하나에요. 정말 글을 못쓰거나, 그 오해를 애초에 의도했던가. 여기에 쉬운 글만 읽으려는 독자라는 프레임이 왜 덧씌워지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당파적으로 내 입맛에 맞는 글만 읽는건 글쓰기의 난이도와는 또다른 문제고요. 글의 방향을 하나로 정하시면 더 좋지 않을까 합니다.
아리마스
15/03/1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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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과 못쓴글이 아닌 "쉬운글"과 "어려운글" 이라서 그런 느낌이 드는게 아닐까요 ? 간결하고 장황하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가 전달이 되는 좋은글을 그저 복잡한 수준을 논하기보다 대중에 부합하려하는 쉬운글로 치부하고, 단순한 이야기임에도 난독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나 문장구조로 이야기 하는 "못쓴글"을 독자들의 난독증을 이야기하면서 어려운글을 안타깝게도 수준높은데 묻히는글들 속에 묶어버린다면다면, 어쨋건 잘못이 있다면 다른쪽에 있을게 분명하거든요.
Nasty breaking B
15/03/1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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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분명히 본문에 생각해볼 지점이 몇 가지 존재하긴 하는데, 그 지점들이 하나의 주제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주제로 다뤄져야 하는 것들 같아요.

예를 들어 저는 독자가 글을 평가하는데 '당파성'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에 대해 동의합니다. 그러나 서두에 언급된 트위터 글은 표현의 명료함, 혹은 의미 전달력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즉 '못 쓴 글') 이건 당파성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죠. 못 쓴 글과 어려운 글은 다른 것이라는 게 본문의 논지인데, 트위터의 문장도 그렇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까는 대상은 '못 쓴 글'입니다. 디씨 같은 곳에 PGR류 토론글을 올리는 식이 아니라면 내용이 어려운 경우 읽으려고 하지 않을 뿐이지 이게 오류가 있다며 까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어려운 글인데 못 쓴 글이라고 잘못 판단할 수는 있겠죠. 근데 '지속적으로 오해받게 쓰는 경우'가 거기에 해당하는가? 여기에서 '못 쓴 글'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시작부터 논의에 혼선이 생기고 있는 거죠.

첫플에 달린 링크에 저는 동감합니다. 그러나 같은 관점이라고 말하는 본문에는 물음표를 지울 수 없네요.
아이리홀릭
15/03/10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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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볼 땐 제가 말하려는 핵심을 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텍스트 소비에 대한 독자의 제 편향들과 그에 대한 성찰"이 이 글의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님께서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는 너희들이 문제가 아닐까?"라며 다소 부정적으로 윤색하신 것 처럼요. 그리고 당파성/쉬운 글이라는 환상/어려운 글에 대한 거부감, 이란 세가지 독해 양상을, "각자 지향점이 조금씩 다른데 그런 내용들을 적당히 뒤섞은"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소비하는 독자의 편향'이란 주제에 따라 공통점을 찾아 논의한 것이지요.

본문에서 어려운 글의 기준을 제시한 바도 없을 뿐더러, 제 글이 어려운 글인지는 잘 모르겠고,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독자의 반응'을 우선시하는 기준에 따른다면 최소한 못쓴 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게시판 한 페이지 안에서 가장 많은 추천수를 얻었고, 댓글을 다신 분 가운데 "공감한다." "좋은 글이다"며 동의하시는 분들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서두에 씌어진 트윗은 "오해받는 글" = "현학적인 글"이란 맥락을 노정한다 판단해 인용한 것입니다. 애초 이 글은 독자의 제 편향들을 지적하는 것일 뿐더러, 쉽게 잘 읽히는 글일수록 논지가 선명하거나 선입견에 편승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파적 글쓰기 또한 그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관계가 없는 프레임을 덮어씌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파성이 강한 글이 '쉽고 좋은 글'로 환호받는다고 말한 것이고요.

만약에, 한 편의 글이 지속적으로 오해를 받는다면, 가능성은, 말씀하신대로 두가지가 아니라, 세가지입니다.

1) 저자 저술 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2) 일부러 오해를 의도하며 글을 쓰든가 그리고 3) 독자의 독해 역량/환경에 문제가 있거나.

이렇듯 3)의 가능성을 시작부터 소거해버리고 모든 소통 오류의 책임을 저자에게 돌리는, 정확히 님과 같은 인식을 지적하려 저는 이 글을 쓴 것입니다-

PS) 님께서 이 글에서 불필요하단 투로 말한 '당파성'에 빗대 설명해보겠습니다. 일베에 가서 박근헤를 비판하는 '좋은 글'을 계속해서 올려보십시오. 과연 그 글은 "지속적인 오해" 의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오큘러스
15/03/11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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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많이 받았는데 좋은 글 아니냐' 정도 수준의 반박이 나올줄은 몰랐네요. 마찬가지로 댓글에 글에서 핀트를 잘못잡고 있는것 같다 지적하는 댓글또한 여럿입니다. 뭐 머릿싸움 하는것도 아니고 그런식으로 본인의 글을 변호하시면 곤란해 보이네요.
당파성이 강한 글이 '쉽고 좋은 글'로 환호받는다? 애매모호한 부분이 여기있었네요. 당파성이랑 글의 쉽고 어려움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일베에 가서 박근혜 비판하는 좋은 글이 '지속적 오해' 를 받는게 글이 어려워서 읽기 싫어지는 겁니까? 지식의 빈곤이 아니라 가치관의 편향이죠. 가치관이 달라서 안 읽는것과 어렵고 짜증나서 안 읽는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데 단지 '독자가 글을 잘 안읽으려고 한다' 라는 분류 하에서 이것저것 집어다놓으니 무슨 말을 하고싶은건가 두루뭉실해지는 거죠. '당파성' 문제가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에요. 당연히 편향된 가치관으로 지 보고싶은것만 보는건 문제죠. 그런데 이건 '쉬운 글만 읽으려는' 문제와 별개라는 겁니다. 문제의 원인과 개선방안의 논점이 전혀다른데 이걸 그나마 앞뒤도 잘 안맞게 묶어놓고 '텍스트 소비에 대한 종합적 성찰을 해보고 싶었다' 는 상당히 뜬구름잡는 이야기죠.

그리고, 한두번도 아니고 동일저자가 쓴 글이 지속적으로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는걸 보고 독자의 역량/환경문제를 따지는건 글쓴이가 상당히 오만방자하거나 답정너 수준이라는 것 밖에 안됩니다. 한두번이어야 3)의 가능성이 시작부터 소거되었느니 어쩌느니를 따지죠. PGR에서 누가 정치관련글을 올리는데 올릴때마다 어그로만 끌어요. 본인은 어그로 끌 생각이 없었다 하고. 이건 독자의 불성실함을 논하기에는 비슷한 패턴도 한두번일때 이야기입니다. 이런 노답상황에 대한 저자비판을 '모든 소통 오류의 책임을 저자에게 돌린다!' 라고 하시면 안되죠.
아이리홀릭
15/03/11 06:05
수정 아이콘
-댓글이 지워져 다시 씁니다.

1. 내 글이 추천을 많이 받았으니 좋은 글이라고 으스대는 것이 아니라 제 글을 두고 못쓴 글이니 어쩌니 빈정거리시는데, 저도 똑같이 응수해드린 것 뿐입니다. 애초에 논리없이 비아냥 거리시는 데 무슨 논리적인 변호(?)를 하겠습니까?

2. 어디서 넘겨 짚으시는 건지 보이는데, 본문을 다시 정확히 읽어보세요. 저는 당파성이 강한 글이 객관적으로 난이도가 높다고 주장한 적 없습니다. 당파성이 강한 글은 그만큼 독자에게 쉽게 읽힌다는 말을 하는 중입니다. 둘은 전혀 다릅니다. "애초 이 글은 독자의 제 편향들을 지적하는 것일 뿐더러, 쉽게 잘 읽히는 글일수록 논지가 선명하거나 선입견에 편승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파적 글쓰기 또한 그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고 앞선 댓글에서 말했는데, 꼼꼼히 읽지 않으셨나 보네요. 아니면 의도적으로 누락했거나.

3. 동일한 저자가 쓴 글이 지속적으로 의도와 다르게 전달된다면 독자의 역량/환경은 조금도 변수로 고려할 수 없다, 라고 하셨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알기 쉬운 예를 듭시다. "야구는 레저다."라는 주장을 싸커라인에서 한다면 매번 추천수를 적립하겠지만, 똑같은 주장을 아무리 날카로운 논리로 펼쳐도 엠팍에서는 "답정너" 취급받습니다. 엠팍에서 문재인을 비판하는 '명문'을 지속적으로 쓴다면 지속적으로 답정너 취급을 받겠죠. 다른 예도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당파성이 독자의 오해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일베 예시도 같은 취지에서 든 것인데, 맥락을 잘라내서 엉뚱한데 붙여놓으시는군요.

4. 이 글의 세부 논점을 1) 글읽기의 당파적 편향 2) 쉬운 글이라는 환상 3) 독자의 수준을 절대화하는 편향,으로 나눈다면, 1)-3) 모두 '오해'의 책임을 저자에게 돌리는 편향으로 귀결됩니다. 문제의식의 교집합이 분명하고, 구체적인 원인을 서술하였으므로 대안도 자동도출됩니다. 1)은 당파적 진리와 보편적 진리가 비동일함을 곱씹고 2)는 어려운 글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고 3) 대중의 눈높이란 평가 기준을 상대화하는 것입니다. 원인과 개선방안이 없는 뜬구름 잡기가 전혀 아닙니다.
삼공파일
15/03/10 20:17
수정 아이콘
읽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타당한 비평이긴 한데 요즘에는 쓰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당파성에 묻혀서 오해 받을 가능성을 모르고 쓰느냐에 대해서요. 사실 보면 대부분 알고 쓰는 것 같은데 내 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나중에 글쓴이가 그러면 좀 기만하는 느낌도 듭니다. 저도 딱히 글을 쉽게 쓰는 편은 아닌데 일부러 어렵게 쓰는 건 아니고 쓰려고 하는 주제가 어렵다 보니 내용이 어려워 지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굳이 이걸 쉽게 써서 풀어 써야 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게 그냥 그 수준대로 두면 독자층이 분명해져서 오히려 전달이 더 잘 되는 느낌입니다.

결국 글 쓰는 사람이 공감 받거나 생각을 풀어내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글을 쓴다면, 게시판과 독자의 편협함에 대해서 탓하거나 개선의 여지를 찾으려고 하기 전에 일종의 댓가 지불이라고 생각하고 감안해서 글을 쓰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 글을 모두가 이해해서 공감했으면 좋겠고 내 글을 오해하지 말아달라는 욕심을 버리면 게시판이 좀 더 평화로울 것 같네요.
마스터충달
15/03/10 21:02
수정 아이콘
저도 이 글을 읽는 순간 독자의 입장보다 글쓴이의 입장이 먼저 다가오더라고요. 그래서 이래저래 생각해보니 결국 먼저 나서서 노력해야 할 쪽은 독자가 아니라 글쓴이 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급한 쪽은 읽을 거리가 넘쳐나는 독자 쪽이 아니라 그 레드오션 틈바구니에 있는 글쓴이니까요;;;
삼공파일
15/03/10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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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PGR에 읽으러보단 쓰러 오는 입장이고 마스터충달님도 비슷할 거라고 봅니다. 그런 입장에서 공감하더라도 읽는 사람을 까는 건 약간 이해충돌이랄까요? 그런 느낌입니다.
아이리홀릭
15/03/10 21:24
수정 아이콘
글쎄, 오해받을 걸 알면서도 글을 쓰는 경우가 어떤 게 있을까요. 소위 '어그로'를 끄는 것 말고는 다른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현재 공론장에서 횡행하는 당파적 편향을 모두 어그로라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읽는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에 맞추어 먼저 결론을 내려 놓고 글을 판단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문재인에 대한 비판은 모두 문재인을 향한 음해로 받아들인다든가, 문재인/안철수를 중립적으로 비평하는 글이 양 진영 지지자 모두에게 비난받는다든가, 하는 경우가 많겠죠. 오히려 당파성이란 측면에서 따지자면, 일부러 오해를 유도한다기 보다, 일부러 당파성에 편승하고 부추기는 글쓰기가 훨씬 많죠. '진영논리'라는 게 그렇게 구축이 되는 거고요.

어려운 글을 쓰면 오히려 전달이 더 잘 된다는 말씀은 무슨 근거로 말하시는 건지 의아합니다. 만약에 보다 많은 사람과 공감을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말씀하신대로 가능한 전략적으로 쉬운 글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의도로 글을 쓴다면 독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더 엄밀하게 정확하게 글을 쓰는 게 당연한 귀결이 아닐는지요? 독자의 편협함만 탓하지 말라는 것도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그것이 왜 공론장에서의 소통장애를 '개선할 여지'를 찾지 말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지도 이해가 안갑니다. "내 글을 모두가 이해해달라"는 욕심이 무리하다는 것도 지당한 말씀인데, 반대로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을" 써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환상이라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인게지요-
삼공파일
15/03/10 22:16
수정 아이콘
저는 철학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관련 글을 자주 쓰는 편인데 어려운 개념을 풀어서 쓰거나 사전 지식을 미리 설명하는데 굳이 애쓰지 않아도, 저랑 관심 분야가 비슷한 독자층만 반응을 보여서 공감을 사거나 토론하기 좋았습니다. 풀어서 쓰려고 하다 보면 "이해가 안되니 다시 설명해달라"는 반응이 많아지는데 사전 지식이 없는 상대방에게 원래 주제가 아닌 걸 전달하려다 보면 오해가 많아지더군요.

또 저는 민주당 까는 글도 자주 올리는 편인데 대체적으로 반응이 좋진 않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사는 오해는 감안한다는 것이죠.

실제로 글을 자주 쓰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써본 것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원글에 동의하는데 속으로 "나는 어렵지만 좋은 글을 써"라고 자뻑하는 입장에서 좀 가식적이더라도 "쓰는 사람이 잘 써야지" 해봤습니다.
구밀복검
15/03/10 23:34
수정 아이콘
좀 과격한 관점일 수 있으나, 그 자체로 형식상의 결함이 없고 내적 완결성을 충족하고 있는 당당하고 떳떳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사려 깊지 못한 독자의 굴절된 인식에 의해 곡해될 위험을 고려해서 그 이상의 외삽과 가필이 더해져야 한다면, 그것은 작자에게 독자에 대한 비굴함을 강요하는 것이고, 이는 궁극적인 관점에서는 매춘이요 매문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일단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테고요....

윤리성을 접어두고 커뮤니케이션의 효용의 측면에 한정하더라도, 글의 완결성이 충분할 경우에는 독자의 시선에 대한 작자의 고려는 최소한이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은 결국 진실하게 서로의 사고와 감정과 세계관을 주고 받을 때에 의미가 있는 것인데, 작자가 지나치게 독자의 반응에 대해 고려하다보면 [쓰기 위한 글]이 아니라 [보여지기 위한 글]을 쓰게 되고, 이것은 결국 자기검열로 이어지죠. 이 과정에서 작자의 주관과 소신은 크게 망실될 수밖에 없고요. 남는 것은 독자들의 기호 뿐입니다. 그나마도 실재하는 진짜 독자들의 진짜 기호가 아니라, 작자가 핍박과 박해에 대한 두려움에 질려서 관념 속에서 왜곡되이 상상해낸 허구의 독자들의 기호일 테죠. 그러면 독자들이 작자의 글을 보았을 때,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창자의 신념과 관점과 열망이 아니라 [작자의 상상 속의 독자들의 시선]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은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겠지요. 허깨비들이 허깨비와 대화를 하는 격이 되니까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산뜻한 커뮤니케이션이 되려면 먼저 작자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직언을 서술할 수 있는, 독자의 검열을 두려워하지 않을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보네요.

결정적으로, 개별 글 각각에 있어 작자는 유일한 반면 독자'들'은 불특정 다수이기에, 작자는 자정이 가능하지만 독자'들'은 자정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독자들은 집단적으로 작자의 가치를 결정해버릴 수 있지만, 작자는 독자들의 가치를 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자가 뻘소리를 하면 누가 일부러 거창한 비판의식을 가지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무수히 많은 독자들이 몽둥이 찜질을 해대기에 견제도 가능하고 그 가운데에서 작자 본인도 자기반성과 검토를 수행하게 되곤 하지만, 독자들의 뻘소리에 대한 견제는 제한적이기에 자발적인 반성도 발전도 없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독자들은 군중 속으로 숨어버릴 수도 있고요. PGR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죠. 첫플부터 명백한 오독으로 시작한 댓글들이 줄줄 달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댓글들이 본문을 읽지도 않고 쓰였음을 예증하는 반박 댓글이 달리면 그 위에 있던 댓글들이 소리소문 없이 지워지는 상황들 같은 것 말이죠.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나 대개의 경우, 특히 커뮤니티에서 작자가 독자보다 갑인 상황은 극히 드물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며, 그렇다면 보다 권력을 가진 쪽에 비판의 추의 무게를 높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더더군다나 실제로 커뮤니티를 살찌우고 컨텐츠를 풍성하게 하는 것은 작자이지 독자들이 아니기도 하고요. 개별 독자들이 아무리 상처받아봐야 며칠 접속을 안 하는 데에 그치지만, 작자가 독자들의 윤리관에 의해 부당하게 박해받는다면 컨텐츠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죠.

해서, 저 개인적으로는 용기 있는 타입이 못 되는 터라 키배를 피하기 위해서 비교적 친절과 예의를 가장하여 매문과 매춘을 하곤 합니다만, 이것은 저의 부족함과 나약함일 따름이고, 진영논리와 독자들의 편견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떳떳함과 당당함을 가지고서 글을 쓰는 이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외려 그러한 시도들이 장려되어야 커뮤니케이션의 진실성이 증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도입부가 어렵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부러 그렇게 쓴 것이다. 산에 오르려면 산의 호흡을 알아야 하고, 내 소설을 읽으려면 내 소설에 적응해야 한다."는 선언은 광오해보일지 몰라도 지극히 타당한 정론이라고 보네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리고 이를 객관화한 일정한 기준에 비추어보았을 때에 글이 결함이 없다면, 지레 겁 먹을 필요는 없겠지요.
아이리홀릭
15/03/10 23:50
수정 아이콘
야 pgr 게시판에도'좋아요' 버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좋은 댓글로 본문의 문제의식을 깊이있게 승화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공파일
15/03/10 23:54
수정 아이콘
저도 "내 글을 이해 못하는 너희가 나빠" 세력입니다. 제 심정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해봤습니다. 흐흐;;
마스터충달
15/03/11 04:27
수정 아이콘
매문이라... 과연 저는 나의 글을 써본적이 있는 것인지 고민이 되네요.
대중에 등돌리는 것들에 대한 반감과 그러한 보수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고뇌가 매춘에 지나지 않았을까요? 글이건 예술이건 대중과 함께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가치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소신이 흔들립니다... 글쓰기가 더 힘들어 질것만 같네요...
15/03/11 09:41
수정 아이콘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생각이 많이 정리되네요.
좋은글 써주시는 분들에게 더 권력을 드리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권력이란게 생각같지 않아서 유지하는데 또 힘이 소요되고 유지 시키기 위해 상처 받고 입히고 해야 해서 어렵더라구요.

전 이런 글과 댓글이 달릴수 있고 의견 교류가 가능해서 자게가 좋아요. ^^
세종머앟괴꺼솟
15/03/11 11:01
수정 아이콘
진입 장벽을 높게 칠 만한 퀄리티의 글에서는 맞는 말이신데, 그 진입 장벽 넘는 행동을 시간 낭비로 만드는 글들이 좀 있어서요. 피지알에도 꽤 있고. 글을 독자에게 불편하게 쓰려거든 그 정도 가치있는 글인지 스스로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구밀복검님한테 하는 얘기는 아니고요 님 글은 장벽 대비 컨텐츠가 상당히 좋은 편이라...
王天君
15/03/13 14:29
수정 아이콘
완벽하게 동의합니다. 아주 명문이네요. 이거 좀 퍼가야겠어요.
MoveCrowd
15/03/10 20:44
수정 아이콘
요새 사람들이 당파성에 따라 글을 골라 읽는다는건 정말 심각한 문제죠.

그렇지만 절대적인 기준에서 똑같은 내용을 다룰 때 읽기 쉽게 쓴 글이 더 좋은 글인 건 맞겠지요.
아이리홀릭
15/03/10 21:31
수정 아이콘
전달하는 의미와 정보가 같다면 쉬운 글이 더 훌륭한 글입니다. 저도 그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터넷 시대가 열리며, 언제부턴가 "어려운 글"에 대한 냉소와 적개심이 커진 것도 사실인데, 이 글은 거기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yangjyess
15/03/10 22:04
수정 아이콘
반대로 쉬운 글에 대한 무시도 종종 눈에 띄죠. 정말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쉽게 썼다고, 대중 취향이라고 얕잡아보는 그런 사람들. 어려운 글에 대한 냉소와 적개심의 책임이 독자에게 있다면, 그런 독자들은 무시하면 그만이죠. 수준이 그런걸 어쩌나요. 설명해서 알아들을거 같으면 애초에 그런 냉소와 적개심을 드러내지도 않았겠죠. 하긴 쉽다고 무시하는 독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글쓴이가 정말 잘 썼으면 그 수준에 맞는 사람들에겐 인정받을 것이고 사실상 무한대의 독자층을 전부 만족시킬 순 없는거 같네요.
15/03/10 22:03
수정 아이콘
제가 이 게시판에서 주로 쓰는 글들이
단순하게 뉴스기사를 바탕으로 약간의 재구성에
자기 생각을 덧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읽어보니 뜨금해집니다.
삼공파일
15/03/10 22:18
수정 아이콘
그런 글만 너무 자주 올라오면 PGR만의 재미가 없어질까봐 걱정은 되지만, 헤비 유저로서 다른 게시판 안 가도 왠만한 동향은 다 알 수 있어서 감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정보 제공에 의미를 두고 보고 있어요.
아이리홀릭
15/03/10 22:23
수정 아이콘
피지알 게시판을 떠나서 인터넷 시대의 보편적인 경향을 얘기한 글입니다. 특정한 누구를 불편하게 만들려 쓴 글이 아니므로 전혀 그런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어떠한 글을 쓰지 말라는 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글을 읽는 경향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15/03/10 22:41
수정 아이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읽어보면서 쓰는 사람 입장에서 단순한 정보 제공뿐 아니라
깊이도 같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습니다.
김여유
15/03/10 23:24
수정 아이콘
이 글의 제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맨 앞에 (인터넷에서)가 추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프라인에서의 글쓰기와 글읽기는 사실 온라인에서의 그것들과는 확실히 다르죠. 온라인에서 3줄 요약이 있지, 오프라인에서 3줄요약해달라고는 안 합니다. 그만큼 온라인에는 정보가 넘치고 읽을 것들이 셀 수 없다는 점이 특징이죠. 다른 글과 경쟁에서 서로 읽히려고 경쟁해야하는 온라인, 그리고 그런 특징과 다른 오프라인은 확실하게 구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인터넷에서'라고 제목을 정하셨으면 위에 많은 논쟁들이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이리홀릭
15/03/10 23:36
수정 아이콘
애초에 sns에 파편적으로 쓴 글을 정리해서 옮겨온 것이라, 구성 상에 불완전한 부분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스터충달
15/03/10 23:35
수정 아이콘
본문에 대해 어디까지 동의하는 가에 대해서는 의견차가 있지만, 글읽기를 넘어 글쓰기까지 생각할거리를 주는 정말 좋은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추게에서 다시 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5/03/11 07:15
수정 아이콘
글을 잘 쓰는 것 보다 글을 잘 읽는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인데 사람들이 글읽기를 너무 쉽게 생각하죠.
대충 읽고 자기 맘대로 이해를 한 후 그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글쓴이를 비판하는 경우는 너무 흔해서 예를 들 필요도 없고 대충 읽었는데 이해가 잘 안되면 그 글은 현학적 자기 자랑으로 치부해 버리는 게 현실.

반지성주의는 하나의 유행이 된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
피아노
15/03/11 12:12
수정 아이콘
좋은 글과 좋은 댓글들이네요. 잘봤습니다.
15/03/13 11:13
수정 아이콘
최단기간 탈퇴 및 글삭튀 신기록이네요
스프레차투라
15/03/13 11:26
수정 아이콘
쓸데없는 겉멋과 지성은 구분해야죠. 후까시 가득한 글줄에 뭔 성찰이 있다고..
속빈 강정같은 만연체 문장들만 잔뜩 늘어놓고, 조금만 툭 건드리면
독자탓이네 지적 열폭이네 덤탱이 씌우는 못된 버릇도 너무나 팽배해있습니다.

어쨌거나 답정너에 글삭튀까지 때리고 가신 마당에 이게 다 뭔 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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