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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1/09 22:33:42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잉글랜드의 앵글로 - 노르만, 플랜태저넷 왕가의 아름다운 왕위 계승의 역사



"스티븐은 그의 통치기간에 일어난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그는 유능한 군대 지휘관이자 용감한 기사였다. 그러나 자신의 장점을 너무 과신한것 같다. 그가 왕위계승문제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나, 그 점은 그의 선대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위계승분쟁은 (아주)흔히 있는 일이었다." ─ 옥스퍼드 영국사 中




중세시대부터 소위 말하는 '국가 총력전' 의 개념이 슬슬 나오기 시작하던 '프랑스 혁명 전쟁' 의 이전까지, 유럽의 역사란 거칠게 표현하면 '국가 단위의 왕위 계승 분쟁' 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그래도 보통 남의 집안과의 반목이라고 한다면…… 


지금 소개해 드릴 왕가의 경우는 정말로 아름답고 훈훈한 한 집안의 이야기 입니다.







정복왕 윌리엄(William I, 1027 ~ 1087.9.9)



소위 정복왕으로 불리는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현재 영국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을 만든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66년, 노르망디를 건너 지금의 영국을 침략한 윌리엄은 '허스칼' 용병 부대를 이끄는 헤럴드 고드윈선을 상대로 고전을 하다 정말 기적같은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유명한 '헤이스팅스 전투' 입니다. 그 이후, 고작 1만에 불과한 노르만 침략자들은 대략 백만에서 최대 이백만을 넘던 앵글로 - 색슨+ 데인 계의 잉글랜드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고, 몇차례의 끔찍한 대학살 이후 이 지배를 공고히 하게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명말청초 시기 중국에 진입한 청나라 만주족을 생각하면 되겠네요. 이 이후부터 영국에는 프랑스를 비롯한 소위 '대륙적 요소' 가 깊게 자리잡게 됩니다. 








아무튼 그렇게 잉글랜드를 정복한 '정복왕' 은 본래 자신의 지역이었던 노르망디와 추가로 얻은 잉글랜드를 합쳐 앵글로 - 노르만 왕가, 즉 플랜태저넷 왕가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이 엄청난 콩가루로 남았다는게……









1. 아들 내미가....



정복왕 윌리엄의 갑작스러운 성공을, 그와 이웃하고 있는 세력들이 좋다고 보고만 있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게중에 가장 배가 아파했던 자들은 프랑스의 왕 필리프와 앙주 백 폴크 였습니다. 이들은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다른 사람도 아닌 윌리엄의 큰아들, 로버트가 이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윌리엄의 아들 로버트는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1066년부터 노르망디 지역에 대한 상속권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상속권이라는것은 결국 아버지가 죽어야 발동이 되는 바, 실질적으로 로버트는 부나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니 자기 아버지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게 된 것입니다.



결국 노르만 공 윌리엄과 프랑스 왕 필리프의 전쟁이 곧 발발했는데, 망트(Mante) 요새의 수비대와 전투를 치루던 윌리엄은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큰 부상을 입고 빈사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동안 둘째 아들이었던 윌리엄 루퍼스(William Rufus)는 아버지를 간호했으나, 정작 장남이었던 루퍼스는 아버지를 그 지경으로 만든 프랑스 왕의 곁에서 프랑스 왕을 돕고 있었습니다. 빈사 상태 와중에 잠시 정신을 차린 윌리엄은 둘째 루퍼스에게 잉글랜드를, 첫째에게는 노르망디를 넘겨주고 세상을 떠납니다.  


1087년 9월 9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한 윌리엄 1세는 캉(Caen)에 있는 생 테티엔트(saint-Etienne) 성당으로 옮겨졌는데, 사망할 당시 상당히 뚱뚱했던 그를 시종들이 억지로 석관에 밀어넣으려다 시신이 터져 시체의 악취가 교회 전체를 뒤엎이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File

윌리엄 2세(1087 ~ 1100)



2. "형제냐 왠수냐"



로버트가 아버지에게 개기고도 (그 당시만 해도 잉글랜드보다 알짜였던) 노르망디를 상속받은 이유는 장남이 영지를 세습해야 한다는 전례 떄문입니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잉글랜드 까지는 얻지 못했는데, 기실 로버트가 조급증으로 반란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전부 자신의 지역이 되었을테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로버트는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고도 잉글랜드까지 자기가 얻지 못한것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었습니다. 


한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둘째 아들 루퍼스, 즉 윌리엄 2세 로서도 노르망디에 자신의 형이 있는건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잉글랜드 내에 있는 가신들도 노르망디의 로버트와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 중에 누구를 따라야 할지 오락가락 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노르망디와 잉글랜드, 곧 형제는 장장 7년에 달하는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 전쟁의 끝은 교황 우르반 2세가 중재함에 따라 결국 끝이 나게 되었고, 때마침 십자군 원정의 분위기가 무르익음에 따라 노르망디의 로버트는 노르망디 지역을 잠시 윌리엄 2세에게 저당 잡히는 대신, 10,000마르크의 군자금을 받고 십자군 원정을 위해 떠나게 되어 간신히 분쟁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File



그런데 1100년 8월 2일, 윌리엄 2세는 동생 헨리와 퐁티외 남작 월터 티럴과 함께 사냥을 떠나게 됩니다.


그들이 얼마간 사냥감를 찾던 중 숲에 사슴이 나타났습니다. 사슴은 왕과 티럴의 사이에 일직선에 있었고, 윌리엄 2세는 움직이지 않고 조심스레 남작에게 사슴을 쏘라고 몸짓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남작이 쏜 화살은 사슴을 지나서 윌리엄 2세의의 가슴에 박혀버리고 맙니다. 윌리엄 2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가슴에 박힌 화살의 날개 부분을 꺾으면서 말에서 쓰러졌고, 이떄 엎어지듯 떨어지는 바람에 꺾인 채 남아 있던 화살 부분이 땅에 부딪히는 충격에 의해 가슴 깊숙이 박혀서 결국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고의적인 암살인지 실수였는지 확증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습니다. 그러나 왕의 동생인 헨리가 티렐의 가족에 대하여 훗날 특별한 호의를 베푼 점으로 보아 추측은 가능합니다. 윌리엄 2세와 사냥을 즐기던 동생 헨리는 그 순간 미친듯이 말머리르 돌려 윈체스터로 달려갔고, 바로 그날 윈체스터에 있는 왕의 금고를 확보한 헨리는 다음 날 소수의 영주들로 하여금 자신을 국왕으로 선출케 했으며, 이틀 뒤인 8월 5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즉위식을 올렸습니다.








헨리 1세



3. 형제는 왠수 맞는데 딸도 왠수란 말이냐



아무튼 그렇게 즉위한 헨리는 곧바로 문제에 직면했는데, 다름 아닌 십자군 원정을 위해 떠났던 큰 형 로버트가 돌아왔던 것입니다. 노르망디로 돌아온 로버트는 바로 자신이 앵글로 - 노르만 왕국의 적법적이고 '유일한' 지배자라는 뜻을 밝혔고, 헨리 1세는 로버트에게 연간 2,000파운드의 연금을 주어 잠시 시간을 끈뒤, 준비가 끝나자 공격을 감행해서 1106년, 탱슈브레 전투(Battle of Tinchebray)에서 형을 물리치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동생의 포로가 된 큰 형 로버트는 남은 일생인 28년을 꼼짝없이 포로의 신세로 살다 죽었습니다.



이렇게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내부를 다지던 헨리였지만 비극이 찾아오게 되는데...






1120년 11월, 중세 시대의 타이타닉 침몰 사건인 화이트 쉽(white ship) 사건이 발생합니다. 헨리의 아들인 윌리엄 왕세자가 배를 타고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이동하던 도중, 그가 타고 있던 배인 화이트 쉽의 선장 토마스 피츠스티븐(Thomas FitzStephen)과 일부 선원이 항해 도중 술에 취해 있던 사이, 암초에 배가 부딫혀 침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때문에 윌리엄 왕세자를 포함한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과 선원들은 300여 명 가량이 그대로 수장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전까지 헨리 1세는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것을 잇게 하기 위해서 모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헨리는 바로 재혼을 해서 후사를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제대로 된 자식은 딸, 마틸다 밖에 없었습니다.



헨리는 별수 없이 이 마틸다를 앙주 백 폴크 5세의 아들, 제프리 플랜태지니트(Geoffrey plantagenet)와 혼인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헨리의 딸이 결혼한 앙주 가문은 본래 노르망디의 숙적이나 다름 없는 존재들이라,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한 가신들은 크게 불만을 드러내었고, 딸은 딸대로 시집가면 남이라고 앙주 가문의 사람이 다 되어서 아버지에게 개기는등 이중에서 괴롭혀댄 끝에 헨리는 속수무책으로 고생만을 하면서 사망하게 됩니다. 







스티븐


4. 친척도 다 왠수다



헨리 1세가 '장어를 과식한 탓에' 사망했을때, 마틸다 등을 비롯한 계승 후보자들은 꽤나 거리가 떨어진 앙주, 혹은 메인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헨리 1세의 조카였던 블로와의 스티븐(Stephen of Blois)은 잉글랜드와 단 하루거리에 있었던 탓으로 먼저 선수를 쳐 잉글랜드 해협을 건너 자신이 적법한 후계자라고 선언하고, 앙주 가문을 아니꼬워 하는 가신단을 끌어들여 단숨에 왕으로 즉위하고 맙니다. 


당연히 헨리 1세의 딸이었던 마틸다는 이에 반발했는데, 스티븐은 당초에 비교적 유리한 상황이었고 본인의 군사적 재능도 괜찮았으나 사람이 성격은 좋았지만 조금 우유부단한 탓에 결정적인 승기를 놓쳤고(심지어 마틸다를 사로잡을 기회에서 기사도를 지키기 위해 놓아준 적도 있었습니다) 내부에서 반란도 벌어지자 싸움은 격렬해졌습니다. 


이 두사람의 싸움은 한때 마틸다가 런던까지 입성하면서 거의 끝이 나는듯 했지만, 마틸다는 마틸다 대로 너무 거만하게 군 탓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떨어져 다시 반격을 당했고, 결국 장장 19년 동안 전쟁은 끝없이 이어졌는데, 이에 '하느님과 천사들이 잠자고 있던 긴 19년의 겨울' 대해 할 정도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싸우다가 지쳤을 무렵, 스티븐의 아들이 사망하고 맙니다. 스티븐에게는 둘째 아들이 있기는 했지만 나이 탓에 왕위를 계승할 수 있을것으로 보이지는 않았고, 이렇게 되자 맥이 풀린 스티븐은 싸움이고 뭐고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전쟁을 그만두었고, 너무 고생을 한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맙니다...




King Henry II


헨레 2세



5. 실로 위대한 군주였지만 그 역시도....



이렇게 스티븐의 뒤를 이어 즉위한 헨리 2세는, 난리는 어머니인 마틸다가 이미 다 쳐놓은 탓에 장장 100년 만에 왕위 계승 분쟁 없이 즉위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안정적으로 즉위한 헨리 2세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자 거대한 야망을 가진 사람으로, 넘치는 정력을 바탕으로 각지의 적을 물리치고 내부 통치를 다졌습니다. 이 시기의 앵글로 - 노르만 왕조의 주인은, 일단 '노르망디 공' 신분으로 모시고 있었던 명목상의 주군인 카페 왕조의 프랑스 왕 따위는 우습지도 않을 힘을 자랑했습니다.


Map of England and France under Henry II


소위 앙주 제국이라고도 불리우는 헨리 2세 시절의 모습




그러나 그런 헨리도 결국 가문의 저주는 빗겨가지 못했는데....다름 아닌 마누라와 아들들이 문제였습니다.



헨리는 자신의 아들이었던 '아들 헨리' 와 리처드, 제프리 등에게 영지를 나눠주긴 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여전히 자신이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들들은 가만히만 있으면 될 것을 또 욕심이 나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걸 또 자신의 마누라가 아들들을 부추김으로서 난리통이 터졌습니다. 그 틈에 스코틀랜드의 왕까지 침입해 오면서 힘든 상황이 전개 되었으나, 헨리 2세는 이걸 다 때려잡았습니다. 헨리는 아들들을 용서했고, 이후 아들 중에 '아들 헨리' 와 제프리가 사망하면서 큰 문제거리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은 두 아들 중에 리처드와 존이 있었는데, 헨리는 존을 좀 더 편애했으나 리처드는 이를 불만스러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리처드가 대우를 못 받은것은 아니었고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그리고 앙주의 후계자 자리가 리처드에게는 있었으나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던 아키텐이 존에게 넘어갔다고 불만을 품은 것입니다.



결국 리처드는 또 반란을 일으켰고, 이번에는 프랑스 땅에 있는 잉글랜드의 영지를 걸고 프랑스 왕 필리프에게 도움을 얻어 1181년, 아버지인 헨리 2세를 격파했습니다.


패전 이후 헨리는 중병에 걸려 시농(Chinoin)에 머물러 있었는데, 자신에 대한 반란군에 자신이 아꼈던 막내 아들 존마저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존은 형인 리처드가 유리해보이자 그쪽으로 편을 갈아탔던 것입니다. 헨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하면 됬다! 될대로 되게 놔두어라. 내 자신의 일이건 이 세상의 일이건 아무것도 내겐 상관없다……. 내 명예를 앗아가고 자식으로 하여금 나를 욕되게 하는 그리스도를 내가 왜 경배해야 한단 말인가? …… 정복당한 왕의 창피스러움이여!"



결국 7월 6일, 헨리는 아들들에게 배신당하고 사망하고 맙니다.







리처드 1세


6. 동생 놈이 또 왠수야



그렇게 난리란 난리는 다 치고 즉위한 리처드 1세는, 즉위하기가 무섭게 "그 정도 돈만 지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런던도 팔겠다" 는 사자후를 토해내며 돈을 싹싹 모아 십자군 원정에 나서는데, 그 이야기와 무용담은 유명하지만 영국의 역사를 언급하면서는 한줄도 언급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는 없을 일들이고...



그런데 그렇게 형이 부재하고 있는 동안, 동생인 존은 또 왕위에 욕심을 내면서 프랑스 왕과 붙어먹었습니다. 리처드는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지만 십자군 원정 당시 리처드에게 모욕을 당한 일로 앙심을 품은 오스트리아 대공 레오폴트(Leopold)에게 사로 잡히고 말았고,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Heinrich VI)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는 리처드를 프랑스 왕에게 넘기겠다고 협박하며 15만 마르크의 몸값을 받아내는데 성공합니다.


리처드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노르망디에서는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가 벡생을 유린했고, 루앙은 거의 점령할 지경에 놓여졌습니다. 또한 궁정의 신하들은 자신들의 왕을 석방하기 위하여 기사들에 대한 군역면제금, 데인겔드 대신 부과된 토지세, 동산에 대한 세금, 심지어 교회의 금은 기물과 수도원의 양모까지 거두어들였습니다. 리처드의 부재에도 잉글랜드가 그의 석방에 필요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은 헨리 2세 시대에 이루어진 개혁이 그만큼 성과가 있었음을 보여주는데...여하간 10만 마르크를 내고 간신히 풀려난 리처드는 동생은 봐주고, 대신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지속하다가 결국 사망하고 맙니다.




File





7. 가신들도 왠수다



이미 집안 형제 막장극은 벌어질 만큼 벌어지고 난 뒤에 즉위한 이후라,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은 존 왕의 시대에는 집안 싸움은 덜했는데, 정작 존의 변덕과 성격에 진저리를 낸 영주들이 "저런 놈도 왕이라고" 라는 태도로 프랑스 왕의 아들 루이에게 "차라리 당신이 우리 왕 해라." 라며 프랑스군을 불러들여, 한 때 프랑스 군이 나폴레옹도 못한 잉글랜드 정복을 거의 실현 가능한 수준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넘어가고...



아무튼 존 - 헨리 3세(물론 시몽때문에 포로신세가 되었지만) - 에드워드 1세의 시대까지는 비교적 집안 싸움이 의외로 덜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존의 삽질로 앵글로 - 노르만 왕가의 대륙 쪽 영토가 거진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잉글랜드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노르망디의 형제들' 같은 일이 없어져서 그런듯 합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





아내 이사벨


8. 마누라인가 악마인가



유명한 군주인 에드워드 1세의 뒤에 즉위한 에드워드 2세는 부친과는 달리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하는데(사실 에드워드 2세의 문제 중에는 에드워드 1세가 저지르고 남긴 문제들도 있긴 합니다), 그는 즉위 내내 끊임없는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고 귀족들과 끝도없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왕비와도 사이가 극악이었습니다.



왕과 왕비의 사이가 너무나 극악한 통에, 에드워드 2세는 언제라도 마누라를 죽일 숙 있도록 칼을 차고 다녔고, 왕비는 왕비대로 프랑스에서 지원세력을 얻고 12살 짜리 아들을 데리고 다시 잉글랜드에 돌아와 반란을 일으켰고, 1326년 왕의 형제들을 포함한 왕국의 유력자들 거의 모두는 이에 가담 했습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쟁 이후 1327년 1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는, 가능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에드워드에게 돌리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도시의 관리들은 왕에게 적대적이었으며, 군중들은 왕비의 편에 가담했고, 해리퍼드의 주교와 윈체스터의 주교 역시 왕의 퇴위를 설교했습니다. 왕국의 각 신분 대표자들은 이사벨과 왕세자에 대한 지지를 서약했으며, 뒤이어 켄터베리의 대주교는 성직자와 귀족과 평민 모두가 에드워드의 퇴위에 동의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백작, 주교, 남작, 그리고 기사들의 대표는 왕을 찾아가 퇴위를 강요했습니다.




세상 모두에게 버림을 받은 에드워드는 위협 받고, 공포에 질리고,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양위를 강요받다가 왕위가 아들에게 계승된다는 조건으로 왕관을 내놓았습니다. 폐위된 에드워드는 브리스틀 북쪽의 버클리 성에 감금당했습니다. 너무나 왕이 미움을 받은 나머지 사람들은 납골당 위의 어두운 방에 갇힌 왕이 치명적인 병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을 정도였는데, 그러나 이런 처우 속에서도 살아남을 왕를 탈출시키려는 기도가 있자, 왕을 살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감옥에서 경호군사들의 폭행으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에드워드 2세는, 심지어 더 끔찍한 최후에 대한 전승도 남기고 있습니다. 붉게 단 쇠꼬챙이를 항문에서 창자로 꽂아 넣어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아들놈 키워도 소용 없어..."


File


"형님 동생도 필요없어..."








"딸도 필요 없어..."







"친척들도 필요 없어...."




King Henry II




"마누라고 자식이고 다 필요 없어..."









"동생놈도 필요없어..."




File




"신하들도 필요없어...."










"그냥 다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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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ndris
14/11/09 22:40
수정 아이콘
덕분에 민주주의는 발전했습니다...?
14/11/09 22:57
수정 아이콘
영국역사 보면 그만큼의 막장 역사도 없는듯 합니다.
얼불노의 배경이 영국역사를 바탕을 두고 있는것도 이런 막장성 이기때문이겠죠
14/11/09 23:01
수정 아이콘
이거 계속 읽다보니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이 생각나네요 크크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친을 멀리하고 친구를 가까이 두십시오.
다빈치
14/11/09 23:04
수정 아이콘
이걸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게임이 크루세이드 킹덤인가 있었던거 같은데..
세종머앟괴꺼솟
14/11/09 23:19
수정 아이콘
크킹베스트
사티레브
14/11/09 23:28
수정 아이콘
크루세이더 킹즈 입니당 흐흐.. 꼭해보세요!
매직동키라이드
14/11/09 23:12
수정 아이콘
뭐 현대 사회에서도 유산 가지고 피붙이들끼리 난리나는 거 보면... 왕위라는 떡밥에 걸맞는 가족사군요(...)
14/11/09 23:13
수정 아이콘
서양사에도 조예가 있으셨군요;.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적당히해라
14/11/09 23:32
수정 아이콘
흉악한건 죄다 영국놈들이 만들어낸다는데 이유가 있었군요
highfive
14/11/10 12:43
수정 아이콘
뭔가 익숙한 스토리다 싶어 찾아보니 저 화이트쉽 사건에서부터 이어진 19년전쟁을 배경으로 쓰여진 픽션이 '대지의 기둥'이었군요.
드라마로 보던 당시 하도 재밌어서 원작을 검색하다 픽션이라는 얘기에 실망을 했었는데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네요.
표절작곡가
14/11/10 18:02
수정 아이콘
어익후~~
막장이여~~~~
후라이드슈타인
14/11/10 20:28
수정 아이콘
헌데 저섬나라왕가들은 제임스계나 저뒤를 이은 튜더나 그담을 이은 스튜어스왕가나
도토리키재기급으로 막장을 왕왕연출했는데도
희한하게 저러면서 대영제국의 기틀을 이 막장왕가 콤비네이션속에
만들어 냈으니....왕실만 막장이었다는건데 우리 조선왕조중기 이후 특히 말기 세도정치
보면 그냥 부러울뿐이죠
루크레티아
14/11/10 21:58
수정 아이콘
크고 아름다운 막장도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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