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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9/26 20:25:55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한니발? 나폴레옹? 스키피오 님이 최고시다!
리델 하트는 영국인으로, 아마 2차 대전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알만한 유명한 저술가 입니다. 물론 지금은 전격전이라는게 실체가 없었다는 사실이 유명하지만 그 이전에는 전격전의 교리의 시초를 제공했다고 하여 유명하기도 했고, 여하간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책 중에 다음과 같은 책이 있는데……






원판에서도 그런 언급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내 번역판에서는 책을 열어보기도 전에 뒤에 패기 넘치는 구절들이 쓰여 있습니다.



"누가 한니발을 이겼는가!"

"누가, 로마의 가장 절망적인 시기에 적진으로 뛰어들었는가!"

"누가, 젊은 로마를 세계의 주인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전술이 부재한 아시아 부족들을 상대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달리,

오합지졸의 야만인을 상대로한 카이사르와 달리,

전례 없이 와해된 로마를 상대로한 한니발과 달리,

스물네 살의 나이로 당대 최고의 세력인 카르타고의 심장을 겨눠

명장 한니발을 무릎 꿇게 한 로마의 젊은 지휘관 스키피오





열어보기도 전부터 엄청난 패기가 느껴집니다. 이 책의 원본은 이러한데







제목부터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패기……



여기도 패기가 느껴집니다. 부제가 "나폴레옹보다 위대한" 이라는 군요.



여기서 가장 패왕색이 느껴지는 부분은 책의 마지막 단원, 『다시 스키피오를 조명하다』에서 스키피오와 함께 다른 유럽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고 불리우는 인물들, 곧 카이사르와 한니발, 알렉산드로스와 나폴레옹을 스키피오와 비교하는 부분입니다.


자, 봅시다! 



지휘관으로서






……알렉산드로스는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이용할 수 있는 군대와 자원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특권적 힘' 이라는 어마어마한 자산을 갖고 누렸다. 본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던 한니발조차도 스키피오나 후에 (영국의) 말버러가 씨름해야만 했던 자신의 전쟁수행에 관한 자잘하고 끊임없는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승리는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전술적 능력이 부재했던 아시아의 부족들을 상대로 획득한 것이다. (이후 뜬금없이 영국 장군인 로버트 클레베를 꺼내 알렉산드로스는 그 기동작전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이어짐)









카이사르 또한 일레르다와 파르살루스 전투 전까지는 능력 있는 '부관형 지휘관' 에 지나지 않았다. 그 스스로 말했듯이 그는 "에스파냐에서는 장군 없는 군대와 싸우고, 동쪽에서는 군대 없는 장군과 싸웠다." 더구나 카이사르는 현명하지 못한 병력분산으로 인하여 두 번이나 숫적인 열세를 안고 싸워야 했다. 처음에 그는 디라키움에서 패배했고, 나중에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만회하기는 했지만 한 번 뿐인 이 일급의 승리는 최고의 지휘력을 주장하기에는 빈약한 기반이다.



(중략)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 두 사람 모두 그들에 대항한 적군 지휘관들이 의지가 박약하고 무지했었기 때문에 무리 없이 전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스키피오와 한니발만이 끊임없이 잘 훈련된 적군의 지휘관들과 싸웠는데, 둘 사이의 조건은 한니발이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한니발의 결정적인 세 전투, 곧 트레비아, 트라시메노, 그리고 칸나에 전투는 정교한 기술과 훈련이 필요한 전술을 어리석게도 경멸하고, 오직 곤봉훈련밖에 모르는 고집불통의 경솔한 적장들을 상대로 이루어낸 것이다. 

(중략)

로마의 플라미니우스와 바로는 역사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우리에서 호의호식하며 도살될 날을 기다리는 살찐 소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그러나 스키피오의 기록을 조사해보면, 우리는 그의 전술적 성공이 독보적일 뿐더러 시작부터 그의 적들은 한니발 집안에서 훈련받은 강적들이었고, 모든 증거들은 한니발의 형제들인 하스드루발과 마고가 능력 있는 장군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스키피오 이력의 정점인 자마 전투는 모두가 인정하는 위대한 장군이 그와 동등한 수준의 다른 장군에게 완승을 거둔 역사상의 유일한 예이다. 





스키피오>>>한니발>>>>>>>>>>>>>>>>>>>알렉산드로스 = 카이사르




2. 지휘술의 질



지휘술의 질로 따지자면 한니발이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를 능가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영웅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과 카이사르도 별거 없다는 내용이 이어짐)


전투의 기술적인 면에서 한니발은 천재였고, 이때문에 그는 역사상 최고의 전술가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 점에서 스키피오는 한술 더 뜬다. 


(중략)


나는 감히 말하건대, 일리파 전투와 같은 완벽한 예는 역사에서 다시 발견할 수 없다. (이후 한번 찬양이 이어짐)


역사상 이러한 '전쟁술의 찬란한 컬렉션' 이 또 있는가? 한니발이 그런 독창성과 기습의 각종 변형을 보여주었는가? 만약 평지의 전투에서 한니발의 컬렉션이 스키피오의 것보다 약간 떨어진다면, 다음의 두 가지 또다른 전투국면에서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우선 한니발에게 헌신적인 전기작가들조차도 공성작전을 그의 유일한 약점으로 인정하며, 이점에서 한니발은 스키피오의 카르타헤나 공략에 비견될 만한 것으로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한니발의 기록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심각한 부재는 승리를 이용하고 완성하는 추격전의 부재이다. 그에게 전술적인 추격전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트레비아와 칸나에 전투에서조차 전략적인 차원의 추격전이 없었다는 것은 도무지 설명이 안된다. 우리는 이와 대조적으로 (이후 스키피오 찬양이 한번 이어짐)


(스키피오의 추격전은) 나폴레옹 등장 이전까지 독보적이다. 고대에서 스키피오의 유일한 (추격전의) 경쟁자는 알렉산드로스인데, (중략) 그의 원정에서 추격전이 (스키피오만큼) 일관성 있고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 병참술





병참술에 있어서는 역사적으로 나폴레옹이 타의 추종을 보여준다. 불충분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수부타이가 그에게 비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고대에서 병참술에 부재에 대해 이야기한뒤) 그러나 나폴레옹 이전 한계 속에서 스키피오는 전략적 행보의 지평선을 넒혔고, 그것은 고대사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수준이다. 매가 먹이를 낚아채는 것과 같은 카르타헤나의 기습은 너무나 치밀히 계산되어서 세 개의 카르타고군 중 어느 누구도 시간 내에 그곳을 도울 수 없었다. 


(이후 끊임없이 스키피오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 뒤)

스키피오의 전략에 대해 어떤 실수나 결점이 있는가? (중략) 다리우스는 얼마나 여러번 알렉산드로스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는가? 왜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폼페이우스를 놓쳤는가? 또한 한니발은 무슨 이유로 트라시메노나 칸나에 전투 이후 로마로 진군하는데 실패했는가? 거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없다.








(중략)


한니발의 병참술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첫째, 그의 모험적인 알프스 횡단의 큰 목적은 스키피오가 리비에라선을 따라 론 강에서 한 발 앞서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좌절되었다. 둘째, 그는 트레비아에서 샘프로니우스가 스키피오와 합류하는것을 막지 못했다. 이후에도 칸나에 전투 직후에 로마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 있었던 카누시움 공략을 게을리 한 것은 너무나 결정적이었다. 이따금씩 그의 작전은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의 지연작전에 의해 무산되었다. 또 네로의 재치 있는 거짓 기동은 그의 형제가 메타우루스 강에서 쓰러져 가는 것을 한니발이 절망 속에서 무기력하게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한니발은 전술가로서는 너무나 위대하지만, 전략가로는 별로 인상적이지 못하며, 솔직히 스키피오 이전 몇몇 로마 장군보다도 떨어진다.





카이사르는 병참술에서 더욱 빛을 발하지만, 갈리아에서 그의 수많은 작전은 야만인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이후 폼페이우스를 상대할 때 쩔쩔맺다는 내용이 이어짐)








스키피오가 고대인들 중 병참술에서 최고봉이라면, 나폴레옹은 어떨까? (이후 나폴레옹은 역사를 통해 배웠다는 조건을 말하고 스키피오는 선구자라는 언급을 한뒤) 솔직히 이 부분에서는 나폴레옹의 우위를 인정한다.





4. 전략가로서




(스키피오의 위대함에 대해 앞선 모든 부분을 합친 만큼 장황하게 설명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명백히 스키피오에 앞선 최초의 거대 전략가였다. 그러나 그의 정신적, 경제적 측면은 스키피오의 절묘한 계산에 비해 얼마나 많은 부분을 우연과 운에 의지하는가! 그의 임무는 훨씬 단순했으며, 전제군주로서 그는 스키피오와 극복해야 했던 내부적, 정치적 난관이 없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이 스키피오보다 위대해보이지만, 실상 양에서 조금 나을 뿐이며 질은 스키피오가 훨씬 낫다는 이야기가 이어짐)






나폴레옹과 스키피오를 비교하자면, 만약 나폴레옹이 병참술에서 우세가 인정된다면 우리는 그의 전술적 열세와 거대 전략적 열세에 대해 추궁해야만 한다. 거대 전략가로서 나폴레옹의 체면은 '안정 속에 번창하는 평화' 라는 거대 전략의 목표를 자각하지 못한 것 뿐만 아니라, 적들의 심리에 미치는 그의 군사행동과 정치적, 경제적 효과에 대해 여러 차례의 큰 실수와 나아가 그의 자원과 병력의 낭비에 의해 크게 손상된다.



마지막으로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세워놓은 기반을 이용할 수 있었고, 한니발은 그의 아버지, 카이사르는 마리우스, 나폴레옹은 카르노의 것들을 이어받았으나 스키피오는 재난 위에서 모든 것을 다시 건설해야 했다. 





5. 한 인간으로서
(다른 부분이야 군사 저술가로서 비교니 개인의 생각을 존중한다 쳐도 무슨 생각으로 이런 비교를 한건지)





한 인간으로서 스키피오를 특정짓는 다양한 일례들은 마치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의 온건함, 자제력, 인간에 대한 동정심, 개인적인 매력, 군대를 휘어잡는 영향력, 행동과 말을 통해 보여지는 그의 고결한 영혼.


(이후 장황한 찬양이 이어진후)


스키피오는 고대의 모든 위대한 장군들 중 뚜렷한 도덕적 결함을 암시하는 그 어떤 혐의도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우리가 한니발을 공격하는 비난들, 즉 불경, 탐욕, 배신, 그리고 당시의 관습을 뛰어넘는 잔혹성 등을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에 대해서는 설령 우리가 여러 비난을 기각한다고 해도, 이기심, 폭력적인 기질, 편견, 파르메니온에 대한 그의 잔혹하고 불공정한 행위, 과대망상에 가까운 야망, 그리고 저 유명한 술버릇 등 움직임일 수 없는 오명들이 있다. 





카이사르의 많은 위대한 자질도 그의 성적인 방종, 정치적 부패와 음모,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성취와 업적을 이끈 이기적인 동기를 감출 수 없다. 


카이사르는 음모와 협박을 동원해 갈리아 원정을 떠났지만, 스키피오는 역경에 처한 조국의 부름 때문에 에스파냐로 떠났다. 

카이사르는 로마를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훈련시켰지만, 스키피오는 로마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그들의 목적을 생각해보라. 카이사라는 동포들에 대한 승리로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고, 스키피오는 시팍스와 한니발을 정복함으로써 영광을 얻었다. 







나폴레옹의 야심은 카이사르가 로마의 피를 본것만큼이나 프랑스의 피를 고갈시켰다. 


어떤 도덕적 기준을 제시해도 스키피오는 위대한 장군들 중에 우리가 철학이나 종교적 지도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위대함과 영혼의 순수함을 가진 독특한 존재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앞으로 페이지를 넘겨 저자를 확인했습니다. 이게 정말 그 유명한 리델 하트가 쓴 책이란 말인가!


스키피오를 찬양하기 위해 무려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나폴레옹, 한니발에게 광역 어그로를 시전하는 놀라운 패기! 


숫한 역덕들에게 조롱받는 시오노 할머니의 카이사르 사랑 따위는 리델 하트의 스키피오 사랑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근거를 말하긴 했지만, 보통 이렇게 유명한 저술가라면 객관적이지 않더라도 객관적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보다보면 거의 절제를 못하다시피 하면서 끝없는 찬양이 이어집니다.


제가 본 관련 전문가가 쓴 책에서는 지 모 교수님이 쓴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정도가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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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신
13/09/26 20:34
수정 아이콘
스키피오님이 환생해서 쓴 책인가요;;;; 후덜덜
13/09/26 20:37
수정 아이콘
제목만 보고 리델 하트 예상 했네요.

엄청난 스키피오 빠돌이죠. 흐흐
사티레브
13/09/26 20:40
수정 아이콘
한니발 본인이 이미 고대서양장수 본좌순위를 정해브렀죠..
알렉산더 피로스 한니발
스키피오는......
swordfish
13/09/26 20:41
수정 아이콘
문제는 리델하트 주장 보다 한니발 주장에 모두 공감한다는게 유머. 물론 피로스는 논란 중입니다만...
13/09/26 22:03
수정 아이콘
심지어 스피키오 본인도 왜냐고 물어봤지, 부정은 안 했다는 사실...
Je ne sais quoi
13/09/26 20:44
수정 아이콘
재밋네요 하하
13/09/26 20:48
수정 아이콘
오오 근데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데요? 일대일로 키배 떴다면 저도 스키피오 추종자가 되었을 지도!
13/09/26 20:57
수정 아이콘
저는 티베리우스 추종자였는데 읽어보다 보니 스키피오한테 넘어갈 것 같아요 크크크
오카링
13/09/26 20:58
수정 아이콘
한니발이 전략적 안목이 떨어진게 아니고 팀 트롤들이 1승만 해달라니까 진짜 1승만 해줘서 그런거 아닌가요. 팀들이 죄다 똥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데 뭘 더해야 하고 뭘 더 할수가 있었다는건지;
13/09/26 22:17
수정 아이콘
심지어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박살난 군대 복구한 것도 본인이 했죠...
귀여운호랑이
13/09/27 00:15
수정 아이콘
그때 한니발은 꼬마였습니다
13/09/27 00:17
수정 아이콘
당연히 1차 포에니 전쟁 이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2차 포에니 전쟁 때 이베리아 반도를 지키고, 이탈리아 침공한 병력 상당수는 자기가 다스리던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온 군대고요. 물론 혼자서 다 한건 아니고, 그 이전의 하스드루발의 공이 크긴 합니다만.
13/09/26 20:58
수정 아이콘
확실한건
스키피오, 한니발,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가 키배 뜨면
카이사르가 이길껍니다.
Friday13
13/09/26 20:59
수정 아이콘
사생팬은 역시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는군요.

장수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마리우스랑 술라는 장군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나요?
가만히 손을 잡으
13/09/26 21:30
수정 아이콘
뒤에 나온 인간들이 워낙 괴물이어서 그렇지 역시 레젼드급 아닌가요?
13/09/27 00:20
수정 아이콘
술라는 전략에서도 정략에서도 높은평가를 받는데 술라체제가 죽자마자 박살나서 저평가...
13/09/27 08:30
수정 아이콘
이후 이룬 업적의 차원이 달라서 그렇지 장군으로선 마리우스가 카이사르에 밀릴 게 없다고 봅니다. 술라는 좀 애매하고요.
13/09/26 20:59
수정 아이콘
막상 그 리델하트도 군사학에서의 위상은 차츰 약화되는 추세라서......
아이지스
13/09/26 21:05
수정 아이콘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자다가 완파됨
사티레브
13/09/26 21:15
수정 아이콘
잡것이 떠드네
라고 하며 다시 뒤척이시다 주무실듯
13/09/26 21:10
수정 아이콘
최고시다가 아니라 체고시다 였으면 의미가 2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생팬은 동서고금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각한 현실이군요...덜덜..
시오노 할머니가 울고가실듯합니다 ㅠㅠ
아키아빠윌셔
13/09/26 21:26
수정 아이콘
역시 덕후는 주화입마를 조심해야 합니다
13/09/26 21:33
수정 아이콘
하지만 이순신이 출동하면 어떨까?
Cool Gray
13/09/26 21:36
수정 아이콘
문제작...이라는 평가가 정확할 것 같네요.

국난에서 국가를 구한 스키피오라는 칭송과 찬사는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이라고 보지만,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는 카르타고군은 단 한 번의 전투 - 스키피오의 아버지와 삼촌의 목숨을 앗아가고 에브로 강까지 줄줄이 밀리게 만든 그 전투 말하는 건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군요 - 를 제외하면 전패했죠. 반면에 스키피오 측에는 스키피오 외에도 쿵크타토르와 이탈리아의 칼, 그리고 노예 군단을 충성스러운 군단으로 만들어버린 그라쿠스 등등이 있었구요. 롤로 치면 이건 다이아 한 명과 네 명의 심해(그 중에서도 심해 아래 내핵인들) 대 네 명의 플래티넘과 한 명의 골드유저(메타우루스의 클라우디우스 네로) 정도라고 봐야 할까요? 오히려 운이 좋았던 건 스키피오가 아닐까 싶은데요. 아프리카로 건너간 첫 해의 전공은 딱히 의미있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알고 있는데, 그 시점에서 짤려도 할말없는 터였을 텐데요. 물론 그 때 안 짤린 덕분에 훗날 자마에서 한니발 정예를 뼛속까지 털어버리지만...

리델 하트... 현재 2차대전 관련서를 구해서 읽고 있는 입장에서는, 참 뭐랄까... 제가 독일군 팬인데(정확히 하면 장군들의 뛰어난 전술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만슈타인과 모델.) 이 양반을 보고 있자면 뭔가 좀 그렇거든요. 독일군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주장을 불러온 장본인이라고 보고 있어서. 안 그래도 좋게 봐 줄 수 없는데 더욱 실망이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왜 있잖습니까. 국내에 있는 여러 2차대전 관련서적들은 사실 좋은 책들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원서를 제대로 번역한 케이스가 아니고서야... 아니, 원서 자체에 좀 문제적 시각이 있는 경우도 많구요. 그 중에 <히틀러의 장군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재미는 있는데 읽다 보면 굉장히 묘해져요. 뭔가 실드칠 수 없는 부분(이를테면 만슈타인의 전쟁범죄 건이라던지 - 소극적 반대의 범주에 들지 않고 소련 인민과 유태인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하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혹은 발터 모델의 라트비아에서 67만 명을 사망하게 만든 수용소의 책임론이라던지 상당한 나치로 평가받고 있는 구데리안이라던지 등등)까지 실드를 치고 있는 걸 보자면 정말 묘합니다. 이게 아니라면,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였나... 롬멜을 지나치게 띄워 주는 책도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 서적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 봅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영어가 짧아놨다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원서를 읽는데 애를 먹고 있어서 국내에 있는 관련서적들을 먼저 훑어보고, 이제서야 한두 권씩 원서를 읽어나가고 있지만 말입니다. 만본좌의 자서전은 읽어봤는데 읽다 보면 그것도 좀 묘해요.)
13/09/26 21:57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 전투는 베티스 고지의 전투일 듯...
DivineStarlight
13/09/26 22:03
수정 아이콘
만본좌의 능력에 대해서야 누구도 이견을 달 수는 없겠지만 기회주의자의 일면이나 홀로코스트 관련 건에 대해서는 최근에 나온 만슈타인 평전들에선 다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것 같더군요. 번역본이 없어서 원서로만 대충 넘겨보긴 했습니다만.. 문제는 어지간히 잘 팔리는 책이 아니면 이런 책들은 번역되어 들어올 리가 없겠죠...
어느멋진날
13/09/26 21:39
수정 아이콘
책을 직접 읽진 않았는데 전략, 전술, 병참 이런것들을 고루고루 본다면 각자 스키피오보다 더 뛰어난 장군들은 있었을지언정 종합적으론 스키피오가 낫다는 식으로도 보이는군요. 스키피오는 여러가지를 고루 갖췄다라는 생각은 듭니다. 카르타헤나 공략은 중요한 일이었다는건 알았지만 이렇게 찬양받을 정도인지 몰랐는데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고 싶긴 하군요.
13/09/26 21:47
수정 아이콘
심지어 한니발은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시민군이 몽땅 소진된 다음에 스스로 이베리아 반도를 운영한 장본인이란 것을 고려하면 전략적인 안목이 없다는 평가는 올바르지 못하죠. 오히려 전술적으로 압도한 전투가 많아서 그렇지, 한니발은 전략적인 안목이 가장 휼륭했던 지휘관 중 한 명이었고요.
13/09/26 21:48
수정 아이콘
뭔가 다른 비교 대상인 알렉산도로스, 카이사르 등이 상대한 적은 약화시키고 스키피오가 상대한 카르타고를 엄청나게 띄어준듯한 느낌이 드네요.

당대 최강의 카르타고라니. 세력에 비해선 포에니 2차 전쟁때 한니발을 제외한 패배가 너무 각인이 되어서 쉽사리 동의가 되지는 않네요.
알리바바 사르쟈
13/09/26 22:03
수정 아이콘
한니발은 2차 포에니에서 자기 할일은 다했죠. 문제는 아군이....
swordfish
13/09/26 22:16
수정 아이콘
아군이 전막에 똥쟁이라는게 문제...
김연우
13/09/26 22:07
수정 아이콘
나폴레옹 빠로써 이건 좀
불곰왕
13/09/26 22:10
수정 아이콘
카이사르가 갈리아 양민을 상대했다고 했는데
미국이 베트남에서 승리한것과 같은 업적이라고 하고 싶네요
양민들 회전 한번 치뤘으면 탈탈 털리는건 매한가지지만 조국의 지원이 거의 없다시피한 상태에서
비문명 적지에 들어가 뒤통수를 맞아가며 최후의 한방러쉬까지 막아내며 이겨내고
거대한 제국의 북방 통치+방어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솔직히 갈리아 못먹었으면 로마는 게르만한테 1~200년 빨리 털렸을겁니다
전 이성적으로는 카이사르에 1표 ... 빠심으로는 나폴레옹에 한표 던질렵니다
13/09/26 22:23
수정 아이콘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이기는건 쉬웠는데요? 북베트남 지상군으로 공격못한다는 정치적제약만 없었어도 어렵지 않았죠
13/09/26 22:29
수정 아이콘
베트남은 정치적 상황의 영향이 매우 컸지, 그냥 서로 전면전했으면 답이 없었습니다.
불곰왕
13/09/26 23:34
수정 아이콘
로마도 갈리아에서 이기는건 쉬웠는데요? 원로원파가 방해 안하고 국력을 조금만 집중시켰으면 어렵지 않았죠
실제로 베르킨게토릭스가 봉기하게 된 것도 카이사르가 정치적으로 몰려있어서 한번만 어떻게 하면 된다라는
희망을 가지고 한 것이구요
갈리아도 정치적 상황의 영향이 매우컸지, 그냥 서로 전면전 했으면 답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로마가 폼페이우스의 동지중해 소탕작전에 부여했던 권한을 카이사르에게 부여했다면 갈리아따위
7년은 커녕 1~2년이면 끝났습니다.
13/09/2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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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원파가 방해 안하고 국력을 조금만 집중시켰으면 어렵지 않았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은 동원 가능한 총 전력을 낭비 수준으로 전개했습니다. 여기서부터 갈리아 전쟁하고는 맞지가 않아요. 베트남 전쟁은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이기고도 남을 전력을 가지고 진군을 못한거지, 로마처럼 정치적 상황 때문에 병력이 부족하거나 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최종 공세조차 압도적으로 이긴게 베트남 전쟁이었습니다. 갈리아 전쟁과는 비슷하지가 않아요.

반대로 갈리아 전쟁과 유사한 전쟁이나 전투를 뽑자면 미군의 모가디슈 전투가 비슷할 예일 겁니다.
불곰왕
13/09/27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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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도 갈리아를 정복하는데 속주군단+자비편성군단 만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 판단한 결과입니다.
본국의 지원을 받아서 본격적으로 카이사르의 군대가 아닌 로마의 군대가 갈리아를 침공했더라면
갈리아도 순식간에 쓸려나갔겠지만 그러진 않았죠 카이사르는 기대 조차 하지 않았고 본인의 업적을 위해서라도 필요 없었습니다.
병력이 부족해진건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고 총독임기가 끝나는것을 틈탄 갈리아인들의 봉기로 부장들의 군단이 털려나갈때나 그랬죠
그 전, 정상적인 전쟁을 벌일 당시엔 병력 부족같은일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미군도 정상적인 싸움에 이기기 부족한 병력은 절대 아니었죠 공산진영이 묵인하는 선인 남베트남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30~50만의 병력을 들이 부었지만 사실은 개막장을 달리는 비효율과 민심장악 실패로 병력은 택도 없이
부족해졌습니다. 충분했으면 한국에 퍼주면서 파병을 요청하지도 않았을겁니다.
거기다 협조적이지 않은 국내 정세와 더불어서 총독 임기가 끝나가는 카이사르처럼 미국도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그걸 틈탄 공산군의 구정공세+케산전투가 있었던거죠 전술적으로 실패한 공세였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인들의 멘탈을 털어버렸고 미국은 못견디고 나와버린겁니다.
카이사르는 배신당하고 흩어져 숙영하던 부장들이 털리고 민간인과 병참기지가 박살나는 와중에서도 멘탈을 잡고 이긴거구요
나이트해머
13/09/27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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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로마의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맞는 말이겠군요.
마리우스의 개혁 부작용으로 인해 당시 로마군은 거의 다 장군들의 사병에 가까웠습니다. 카이사르의 군대가 아니라 다른 군대를 불러왔다면 그건 로마의 군대가 아니라 폼페이우스의 군대이거나 크라수스의 군대이거나 다른 누군가의 군대겠죠.

덤으로 로마가 개입했다면 카이사르처럼 갈리아로 치고드는 행위는 없었을 것입니다. 소카토가 '카이사르가 함부로 허락도 없이 외국을 침략한다'고 비판하고 다녔죠. 솔직히 과연 로마에 갈리아가 필요했는가에 물음표를 던지고 봐야 해서...
13/09/27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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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최대 투입된 병력은 50만이 넘어가는데, 그 중에서 작전 투입된 실제 전투 병력은 절반 이하였습니다. 괜히 철수한게 아닌 전쟁이었죠. 애시당초 효율이 문제였지만, 말만 몇십만이지 전체 작전들 보면 투입된 병력이 10만도 안 되는 전투가 엄청나게 많을 정도였습니다. 그냥 병력 주둔만 하고 있었지, 제대로 전투도 안 해봤던 전쟁입니다. 반면에 갈리아 전쟁은 최소한 점령의 목적을 두고 싸운 전쟁이니까 성격이 다르다고 보는거죠. 카이사르도 병력이 완전히 풍족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베트남 전쟁 때처럼 싸울 이유도 없이 그저 주둔만 하고 있던 그런 상황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로마는 갈리아에 모든 전력을 투입해서 전쟁을 할 이유도 없었고, 전선이 하나인 것도 아닌데, 그럴 여유도 없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과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반박하는 이유는 서로 병력이나 상황이 부족했던 것은 맞는데, 전자는 충분한 목적을 갖고 제대로 전쟁 수행이 가능했던 것에 비해서, 후자 측은 애시당초 전력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고, 제대로 대응조차 해본 적이 없는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불곰왕
13/09/27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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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도 북베트남/캄보디아 접경지대를 털어버려서 국경을 봉쇄하고 베트콩이 통제하는 남베트남의 전 영토를
'점령' 하는게 애시당초 목표였습니다. 싸우다보니 싸울 놈들이 안 보이는데 전쟁을 계속 되니까 주저 앉아버린거죠
어떻게 다릅니까?
13/09/27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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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게, 고대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필요 없이 그냥 군사력으로 점령하면 끝나는 전쟁과 자칫 잘못하면 세계대전 벌어질까봐, 대놓고 적국 본토에는 제대로 된 군사 활동도 없이 원래 영토만 점령하는게 목표인 전쟁이 똑같을 수가 없죠. 제대로 수행할 전쟁이었으면 북베트남부터 초토화시켜놨어야 했을 전쟁이었고요.
불곰왕
13/09/27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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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똑같지 않으면 끝까지 틀리다고 하실것 같아서 관두렵니다.
고대전쟁과 현대전이 똑같지 않으면 비슷하다고도 못하나보네요
저도 모가디슈전투와 갈리아전쟁의 다른점부터 여쭤볼께요 일단 이틀짜리 전투와 7년 전쟁을
비교하는 것부터가 말도 안되는거라고 생각하지만 베트남전보다는 유사하다고 하시니까 ...
전쟁의 목적부터 갭이 너무 크네요 토지 확보가 아닌 치안/요인 확보라니 그리고
전쟁/전투의 진행도 차이가 심한데요? 뭐 애시당초 전쟁의 목표부터 다른데 유사할 건덕지가 없죠
유사해 보이는건 미군도 정치적 부담감으로 탱크나 공격헬기 지원을 못받았다 정도?
13/09/27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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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벌 당시 운용한 전력 규모는 폼페이우스의 그것에 비해 크게 모자라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후 로마가 전력을 다해 게르만 정벌을 시도 했을 때 생각해보면 서로 다른 문명 지역을 1~2년만에 통합시킨다는건 불가능한 소리죠.
불곰왕
13/09/27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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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벌할때 최대로 거느렸던 병력은 10개군단 6만명입니다. 실제로는 5만명 남짓이었구요
폼페이우스는 12만에 모든 해군의 지휘권에 거의 모든 국가예산을 위임받았는데 크게 모자라지 않다구요?
군단병만해도 두배 넘게 차이나고 카이사르는 배를 빌리고 직접 건조했던 해군을 그냥 통짜로 위임받았는데요?

6만명의 병력으로도 카이사르는 실질적으로 3년만에 갈리아를 정복했고 그 이후엔 갈리아를 자극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브리튼,벨기에,게르만을 털러 가거나 입지 부족과 약간의 관리 실패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러 다녔습니다.
12만의 병력에 정치적 입지까지 탄탄 했다면 1~2년만에 정복자체는 끝났을 것이고 반란도 일어났을까요? 아닐껄요
애시당초 게르만은 교화가 불가능했지만 갈리아는 교화가 가능했고 친로마 부족도 많았습니다 비교 불가죠
13/09/27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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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우스의 작전 권역이 지중해 전체 연안 80여 km에 달할 정도로 넓은걸 생각하면 병력 규모가 엄청나게 차이 났었다고 보긴 힘들죠.

그리고 게르만 정벌 들어가던 시점의 게르만도 친로마파와 반로마파가 혼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아르미니우스도 로마 시민권자였어요. 오현제 시절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원정이 총 2차례, 2~3년간 해당 지역을 완전히 말살 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는걸 생각하면 1~2년만에 로마화의 형태로 정복한다는건 비약이 심하다는 겁니다. 3년에 갈리아를 실질적으로 정복했으면 알렌시아 공방전에서 갈리아 정복 성과를 한방에 날릴 정도로 위기에 빠지지도 않았겠죠.
불곰왕
13/09/27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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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전체 연안이라고 해봐야 실질적으로 소아시아 시실리안 해적을 때려잡는게 주 임무였고 3개월만에 끝났습니다.
압도적인 병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한 결과물인데 카이사르에게도 그러한 병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할 여력이 있었다면요?

갈리아에 속한 부족은 3년만에 전부 제압한건 사실입니다. 그 후로는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에게
주어졌던 병력이 있었더라면, 원로원이 협조적이어서 카이사르가 아닌 카이사르의 로마가 직접 갈리아를 통치하기
시작했더라면 변방 부족의 반란정도야 있었겠지만서도 하이두이같은 놈들마저 반란을 일으켜서 파국을 맞이할 뻔
한 사태같은건 결코 없었을겁니다.

그리고 아르미니우스 같은자가 친로마파라고요? 국경을 맞대고 있고 로마가 유력자들에 싸우지 말고 잘 지내자
라는 식으로 준 시민권이지 아르미니우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로마를 물리치고 게르만의 왕이 되고 싶어 하던 자
였습니다. 갈라아의 로마시민권자와 게르만의 그것은 성격 자체가 대단히 다릅니다.
물론 게르만에도 '친로마파' 가 있었겠죠 갈리아랑 비교할수 없을많큼 적은 수로
13/09/27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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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제압했는데 구심점이 될만한 인물 하나 생겼다고 갈리아 전체가 들고 일어나진 않았겠죠. 3년만에 제압하고 4년간 눌렀으면 폼페이우스와의 비교는 무의미 합니다. 폼페이우스는 소탕만 하면 끝나는 임무였지만 3개월의 시간만 이용한거고 카이사르는 병력은 절반이더라도 기간으로는 몇 배를 더 보냈죠.

그리고 게르만은 교화가 불가능하다는건 전형적인 편견입니다. 그저 로마와 국경을 맞댄 역사가 갈리아에 비해 짧았을 뿐, 어느정도 시간 지나면 게르만도 갈리아처럼 로마와 교류하는 부족, 싸우는 부족, 돈받고 용병 뛰어주는 부족 등으로 분화되니까요.

민족을 정복해서 동화시킨다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고, 카이사르가 못 해서 오래 걸렸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카이사르 할애비가 와도 타문화권을 서서히 동화시켜 정복한다는건 무조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에요. 병력이 많으면 1~2년에 끝난다는건 그걸 너무 쉽게 보시는겁니다.
불곰왕
13/09/2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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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살펴보니 님이 다신 첫번째 리플부터 잘못됐네요
제 글에 어디 1~2년만에 문명을 복속시켜 동화시킨다는 소리가 적혀있나요
갈리아전쟁 7년 했다고 갈리아가 문명적으로 '로마화' 되었나요? 택도 없는 소리죠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에게 부여된 권한 (20개군단, 충분한 예산, 임무완수까지의 총독지위)이
주어졌다면 군사적으로 갈리아는 1~2년 안에 충분히 박살냈을거다.. 란 말에 왜 문명, 문화가
왜튀어나오나요 그리고 군사적으로 단기간에 박살나서 로마 속주가 된 나라들 수두룩 빽빽 합니다.
갈리아와 다키아만 보이시나요 소아시아, 폰투스, 셀레우코스, 이집트, 그리스, 누미디아, 카르타고
본격적인 군사행동이 시작되고나서 박살나기까지 1년안쪽부터 길어야 3년이었습니다.
13/09/26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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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는 모국의 국력이 한니발의 카르타고보다 앞서지 않았나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지고 로마에 뺏긴게 많았죠
이 책의 논리대로라면 사마의 >> 제갈량도 성립할거같은데..
그리고 어떤면으로 비교해도 꿀릴게 없는 한신.상대도 최강
난멸치가싫다
13/09/26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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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님//정말 그렇네요. 거기다가 사마의는 위의 넷과는 달리 후대까지 이어지는 인생의 승리자였으니. 사마의가 최고시다?

그건 그렇고 신불해님은 뭔가 자극적이고 말초적임에도 불구하고 상세한 글을 잘 쓰시는 거 같아요 크크. 존경합니다.
SugarRay
13/09/26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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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대를 통틀어 말하라면 칭기즈 칸과 수부타이가 수위를 먹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알려진 전 문명권을 상대해 이겼고, 그 광대한 작전반경과 병참을 무시하는 몽골군의 보급, 기동력을 생각해 보면 말이죠. 전술적으로 보면 이순신 장군도 대단하구요.

위의 인물들, 카이사르, 스피키오, 한니발, 알렉산드로스, 나폴레옹 중에서 고르라면

대국적 견지에서 보면
나폴레옹(러시아, 스페인 전역 이전)-알렉산드로스-카이사르-한니발-스피키오-나폴레옹(러시아, 스페인 이후)

전술적 관점에서 보면

한니발-나폴레옹(러시아, 스페인 전역 이전) 정도가 수위를 차지할 것 같습니다.

자마 전투에서 스피키오가 이겼으니까 한니발보다 낫다고 했는데 사실 그 당시 한니발은 숙련병을 잃고 누미디아 기병도 없고 해서 코끼리라는 도박수에 의존했죠. 그마저도 난전으로 끌고 갔었고.
13/09/26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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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수부타이야 말할나위 없는 본좌죠.
저는 전술적 관점에서 보자면 20세기의 만슈타인도 끼워넣고 싶어요.패전국 장군이긴 하지만 그렇게치면 한니발도 패전국 장군인셈이니..
SugarRay
13/09/27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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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본좌는 좋지만 그의 맞수로 꼽히는 주코프와는 다르게 작전의 가장 큰 흐름을 결정할 수 없었으니 전략적으로 논하기엔 그렇고, 전술적으로는 완벽한 모범이지요. 다만 이차세계대전은 시기가 시기인지라 전술적 움직임이 지도에서 보일 정도긴 하지만요.
난멸치가싫다
13/09/26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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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garRay님//유목민은 원래 지휘관의 역량이 평균에만 달하면 보통 정주민족을 처바르죠. 아바스 이슬람, 훈, 사마르티아, 티무르 등등이 그런 태크를 탔구요.
칭기즈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닌데 역사적 동향을 살펴보면 '역사상 유목민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한 지휘관'은 될 수 있어도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지휘관'은 되기 힘들다고 봅니다. 만일 된다면 아틸라나 티무르도 동순위에 넣어야 될듯 하고요.
SugarRay
13/09/27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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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민족에 비해 유목민이 강했던 건 대규모 회전이나 기습인데, 몽골군은 대단히 빠르게 공성기술을 습득하고 일반적인 유목민족과는 다르게 도시를 함락시키지요. 대규모 회전, 기동전, 공성전, 기습, 매복, 같은 다양한 전투에서 칭기즈 칸과 수부타이는 승리했습니다. 아틸라는 휩쓰는 데는 성공했으나 성을 함락시키는 데는 능하지 못했고, 그만큼 다양한 군대와 붙지도 않았지요. 심지어 그가 죽고 난 다음 훈족은 와해되었구요. 티무르 역시 비슷했지요.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해 호라즘을 치는 것을 동고트 공격에 비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티무르도 앙카라 전투는 인정합니다.
나이트해머
13/09/27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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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이 대규모 회전으로 나온다면 정주민족 군대에겐 쌩큐입니다만? 흉노부터 시작해서 유목민족 군대는 회전으로 나가면 명성에 비해 약체의 모습을 보였어요. 위청-곽거병 시기에 흉노가 정면대결을 붙었다가 개박살이 나고 막북으로 쫓겨난 것이나, 아틸라의 훈도 군대가 거의 껍데기만 남은 서로마군에게 카탈라이쿰에서 무너졌던 일, 심지어 그 이름높은 몽골군도 야전으로 몰리자 숫자가 자기보다 적은 헝가리군에게 본진강습을 얻어맞고 총사령관의 부관까지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말지요. 천하의 수부타이가 자기보다 숫자 적은 군대를 이끌던 금나라 완안진화상에게 참패를 경험하기도 하는게 유목민족 군대의 회전능력의 현실입니다. 후방교란과 게릴라로 서달을 물리치던 몽골군(북원)이 야전으로 몰리니 남옥에게 박살나는 것만 봐도 차이는 확실합니다. 서돌궐이 당군을 각개격파하려고 1만 수천을 지휘하는 소정방(백제 멸망시킨 그 소정방 맞습니다)을 섬멸하려고 10만 기병을 동원해 세번을 공격하고도 보병 1만의 방진을 못깨고 주춤거리다가 역습에 박살나서 중앙아시아의 패자라는 명성이 허망하게도 서돌궐이라는 국가 자체가 무너져버린 케이스도 있습니다.

정주민족 군대는 어떻게 해서든 도망다니는 유목민족 군대를 회전으로 끌어들여 박살내려고 기를 쓰고, 유목민족 군대는 회전은 최후 수단으로 남겨놓고 지속적인 스웜 전술로 정주민족 군대를 휘둘러대면서 최대한 소모시켜 무너뜨리려 드는 게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목민족에 대한 환상이 너무 큰 감이 있어요.
난멸치가싫다
13/09/27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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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거병의 비상식적인 진군 전에는 5대 동안 조공을 바쳐야 했던 한나라의 역사가 있었고, 카탈라이쿰 전투에서의 아틸라의 패배 전에는 열두 개 도시의 함락과, 그 이후에 이루어진 로마 함락도 있었죠. 그리고 결국 헝가리는 폴라드와 함께 무너졌지 않습니까. 산해관을 끝내 못 넘었던 청시조의 경우에서도 보이다시피 유목민의 강점은 어디까지나 회전입니다. 궁기병은 궁병에 비해 절대적인 사격에서의 이점을 가지고, 중기병은 보병에 비해 절대적인 단위공격에서의 이점을 가집니다. 기동력이나 유동성 등은 말할 것도 없고요. 통합되어서 정주민족의 보병들과 얼추 비슷한 숫자만 갖춰진다면, 유목민은 거의 필승해왔습니다.
나이트해머
13/09/27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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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동네에서 유목민의 강점이 회전이라 하는데요? 오히려 잘 끌고 가다가도 회전을 잘못 걸어서 말아먹은 경우가 한가득인데.

한나라가 조공을 바첬다는 것 뒤에는 최초로 통일 유목제국을 상대한다는 데서 오는 난감함이 있었고 아틸라 이전에 이미 야전군이 파탄나서 전선군으로 돌려막기 땜빵하던 서로마 상대로 도시 몇개 함락시킨다고 해서 그게 뭐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청 건국시기는 이미 유목민의 강점이 빛을 읺은 시기고 만주족은 순수 유목민도 아니며 팔기군의 장점은 주저없이 보병으로도 활동 가능한 유연성이지요. 궁기병이 궁병보다 사격전에서 강점을 가진다는 낭설이 많이 퍼져 있지만 당장 당대인들의 증언에서 최초의 통일 유목군대라는 흉노부터 시작해 가장 강력한 군대라는 몽골군까지짇ᆞ도지도 노, 석궁으로 대표되는 보병화기에 어 기동력을 제외든 측면에서 열세여서 이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전형적인 '유목민 신화'에서 깨어나시길 바랍니다. 얼추 비슷한 숫자라면 필승? 전혀 안그런데요.
난멸치가싫다
13/09/27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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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어느 동내에서 유목민의 약점이 회전이라 하는지 묻죠. 어느 문명을 점령하려 하건 야전 수행은 필수적이었고 그 전투에서 이겼기에 근세까지 유지되어온 수많은 유목국가들이 있는 겁니다.

한나라는 곽거병 이전까지는 흉노를 막아내는 것 조차 잘 못했고, 게르마니아 절반을 집어삼킨게 대단한 게 아닐 수는 없죠. 산해관 이전의 사르후 전투에서도 누르하치는 기동성의 우월성과 화력의 우월성을 보여줍니다. 조선과 명 연합은 총포로 대응했는데도 오히려 궁기병에게 밀려 졌죠. 푸아티에 전투에서는 서유럽 최강의 중보병, 압도적으로 유리한 숲 속에서의 전투, 군사수의 압도 등의 모든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싸워서 이겼는데도 기독교연합은 이슬람 기병대와 비등한 수준의 사상자를 내는 데에서 그칩니다. 약탈은 약탈대로 당하고, 점령지를 되찾지도 못했구요. 그래서 500년에 걸친 레콩키스타가 있어야만 했던 거죠. 반면 유목민족은 이긴 전투에서 상대를 섬멸시킬 수 있습니다.
노와 석궁은 유목민족에게 전혀 효과적인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유목민족을 상대해야 했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석궁이 도태되고 중보병과 중기병을 상대해야 했던 서유럽에서 석궁이 발전되었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요?

야전에서 유목민 만나면 땡큐? 전혀 안 그런데요.
나이트해머
13/09/27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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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막론하고 유목민족에 대응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유목민족을 상대로 군사원정을 벌이면 회전을 유도하려 들고, 거기에 잘못 유도되면 유목민족 군대가 엇비슷한 정주민족 군대에 박살이 나는데 무슨 소릴 하시려는 겁니까. 어느 문명을 점령하려 하든 회전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거기다 유목민족 군대는 바로 그때문에 정복왕조 출현 이전까지 온전히 정착한 정주민족 국가를 확실하게 정복하지 못했죠.

게르마니아 절반을 집어삼킨게 대단한 게 아닐수는 없다? 그 게르마니아 정복이 뭐 한순간에 팍 이루어진 줄 아시나 봅니다? 4세기 훈족이 출현하고 아틸라 집권기까지 걸린 기간은 50년 가까이 됩니다. 50년동안 조금씩 조금씩 밀어낸 거에요. 그것도 게르만족 전체와 한번에 맞짱을 뜬 게 아니라 처음에 흑해 연안의 동고트 왕국을 밀어내고, 다음에 다뉴브 강 하류로 내려오면서 또 게르만족을 밀어내고 하는 식이었고.
사르후 전투? 그건 10만 조명연합군을 죄다 1만씩 쪼개서 갖다 바친 명군 장수들의 공적이 가장 크죠. 후금군이 그때 4,5만정도 되는데 명군이 서로 공을 다툰다고 죄다 쪼개놓으니 이건 뭐 알아서 잡아먹으십쇼 하는거나 마찬가지. 거기다 사르후 전투에서 '궁기병에게 밀려 졌다?'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이 마방책 둘러치고 화기류 늘여세우자 누르하치는 팔기군을 말에서 내리게 해서 이런 장애물을 모두 제거한 다음 말에 다시 태우고 공격했는데요.(위에서도 언급했죠. 팔기군의 장점은 보병으로도 활동할 수 있는 유연함이라고)

푸와티에가 숲속이다라... 아닌데요. 누가 푸와티에 전투 보고 숲속이라고 해요? 푸와티아에서 기독교 연합이 군사수에서 압도했다라... 아닌데요. '프랑크군이 40만이나 됐쎄요, 머릿수가 너무 많아서 우리가 밀렸쎄요' 하는 아랍 기록이나 그런 말을 하지. 그런데 프랑크군이 아랍네들 말하는 것처럼 머릿수 많았다면 샤를마뉴가 2만~3만 5천 가지고 다해먹는 것과 너무나 큰 차이가 느껴진다는 생각 안드십니까. 링크나 하나 걸어드리죠.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Tours
점령지를 되찾지도 못했다? 에스파냐 변경백령(Marca Hispánica)은 그럼 어디 놀고 집어먹은 겁니까? 애초에 프랑크 왕국이 구서고트 왕국 땅을 모조리 수복해 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데요

노와 석궁이 유목민족에게 전혀 효과적인 무기가 아니었다라... 중국에서도 요, 금, 원에 대향하여 노를 부단히도 발전시켰고, 고려도 여요전쟁 이후 노에 대한 개량기사가 고려사에 한가득인데 정말 효과적이지 않아서 이렇게 유목민족에 대한 대응책으로 노를 개발하는군요? 서유럽의 석궁에 대해 '타타르족이 두려워하는 석궁' 이라는 평은 왜 있을까요? 중앙아시아에서 석궁이 도태되었다? 거긴 원래 석궁 전통도 없네요. 거기다 유목민족끼리 치고받던 중앙아시아 세력들이 정주민족입니까? 이거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네요.

근거 하나 없이 이리도 자신만만하게 주장하시는 모습이 실로 놀랍습니다.
어니닷
13/09/2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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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치고 빠지기만이 유목민족의 전략인것처럼 애기하시는데.. 유목민족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들끼리 싸워서 패자가 된 다음 정주민족에게 도전을 했고, 이 패자가 된 유목민족의 회전 능력은 대부분 그 당시 정주민족을 압도했습니다.
가령 가장 일반적으로 읽히는 유라시아 유목민사 책만 바도 명확하게 나오죠..
물론 17,8세기 넘어가면서 정주민족으로 그 힘의 추가 넘어가긴 하지만, 그 시기를 논하는건 아니니까요.
13/09/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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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회전에서 유목민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유목민의 승리중 상당수는 기동력을 이용한 치고 빠지기를 통해 상대방에게만 출혈을 강요하는 지속적인 전투의 결과 상대의 대열이 무너지거나 군대가 와해되는 것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죠.

회전에서는 의외로 충격력의 부족으로 인해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고 역전당하는 경우도 꽤 있는 편입니다. 몽골군이 회전에서 무적으로 군림했던건 편제에 상당수의 충격기병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난멸치가싫다
13/09/27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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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횡단을 거쳐 대국을 치는 일은 투르크 제국, 디아스포라 이후의 그리스계 제국, 페르시아계 제국 등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함유한 국가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일이었고 타클라마칸이 가혹하기로 이름 높다지만 몽골군은 상술한 국가들의 경우완 달리(투르크는 제외하고) 기동의 용이성이 존재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봅니다. 거기다가 호라즘의 잘못된 대응과 국가적 한계 때문에 초반에는 대회전을 치룰 필요가 없어서 이점을 누릴 수 있었구요.

아틸라가 여러 적을 상대하진 않았다는 말은 동의하기 힘드네요. 오히러 아틸라는 이면전투도 별로 치루지 않았던 칭기즈칸과는 달리 게르만, 동로마, 서로마, 스키타이로 이루어진 사면에서의 전쟁을 치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중 동로마는 당대 최강국이었고요. 그 자신의 오만으로 인한 자업자득이라 해더라도 최소한 아틸라가 살아있는 동안 그는 적들을 압도했습니다.

징기즈칸으로부터 시작되는 소위 몽골 제국 군대의 전술 또한 독창성은 없습니다. 포로 학살로 사기 꺾기, 도망치다가 일거에 기습하기, 시체 던지기 등 몽골이 사용한 전술은 종래의 기마민족들이 사용한 전술들을 집대성한 것이죠. 그걸 가장 능숙하게 사용한 민족이라는 건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만.

몽골이 강했던 가장 큰 이유는 징기즈칸의 유목민 유화 정책이었습니다. 정주민족은 학살하면서 유목민족은 강제적 징발 또는 자발적 징발과 병행하며 유화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전투를 할수록 불어나는 사상 최대의 기마군대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정책은 한두 세대 동안은 몽골제국의 위명을 떨치도록 만들었습니다만...그 결과는 고만고만하게 동화되어왔던 투르크와 비교한 오늘날의 몽골족의 처지가 말해주고 있지 않을까요.

말했다시피 징기즈칸이 사상 최고의 유목민 제왕이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의 유목민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지적받아야하지 않을까요.
13/09/27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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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의 군대는 단순한 유목민의 스웜전술만 쓴게 아니라, 정석적인 도시 공략, 기동력을 살린 포위 기동 등 다양한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애초에 평균역량만 되도 유목민이 정주민을 처바르면 중국사에서 정주민 왕조국가가 유지되는게 기적이 되겠죠. 대대로 중국에서 유목민 왕조가 권력을 잡을 때는 뛰어난 지휘관과 지도자가 나타났을 때 뿐입니다.
나이트해머
13/09/27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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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지휘관의 역량이 평균수준이라면 정주민족에게 처발리고 다닙니다. 유목민족에 비범한 지도자가 나올때 그제서야 정주민족군을 이기고 이름을 역사에 새겨넣는 거죠.
난멸치가싫다
13/09/27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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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알렉산더 대왕조차 페르시아 원정 시기에 맞붙은 스키타이족 궁기병에게 무승부 내는게 고작이었습니다.-_- 그 휘하 장군들은 자싸르타 전투가 있기 전까지는 걍 쳐발리고 다녔고요. 그당시 스키타이족 지휘관은 아마 인류 역사가 끝날 날까지 듣보잡으로 잊혀져 있을텐데, 그 듣보잡이 알렉산더와 동급이었다는 소리는 아니겠죠.
13/09/27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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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 발에 채일만큼이나 있는 듣보 장군들도 유목민 평정 잘만 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난멸치가싫다
13/09/27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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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평정이란 건 로마가 파르티아에게 거둔 승리들보다도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중국 사가들이 기록하는 그대로만큼만 유목민이 잘만 평정되었다면 강희제가 준가르 평정할 이유도 없었겠죠.
13/09/27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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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이 생활 패턴상 기마병 중심의 편제가 되어 있어서 전근대의 전투에서 기마를 통한 기동력 및 전장 선택능력에 상당히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는건 부정하지 않습니다만, 정주민족을 처바를 정도로 압도적인 역량차가 난다면 중국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 유목민 침략 때문에 한족 왕조라는게 유지될 수가 없었겠죠.

통상적으로 정주민군과 유목민군의 전투는 기동력을 살린 유목민 군대의 스웜전술을 정주민군대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게 되는데, 매번 유목민군이 압도적으로 이긴건 아닙니다. 약탈후에 빠르게 퇴각하는게 아니라 전장에서 회전을 하는 경우 충격력의 부재 때문에 애를 먹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던거롤 알고 있습니다.
난멸치가싫다
13/09/27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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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민족은 지리적 및 문화적 특성에 의해 생산상과 효율이 높았고, 그래서 유목민을 견뎌낼 수 있었죠. 물론 메소포타미아처럼 올 때마다 쓸려나가던 장소도 있었고요. 역으로 생각하면 유목민 군대와 정주민 군대가 비슷한 교환비만이라도 가졌다면 몽골이나 투르크족 국가는 없었을 겁니다. 생산력과 보충률이 현저히 차이나니까요.
나이트해머
13/09/2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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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생산성만 높았다고 한다면 중국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경지치가 칭송받지만 한무제의 대흉노원정 직전 국경선은 만리장성에서 상당히 남쪽에 형성될 정도로 영토를 빼앗기고 있었죠. 그리고 유목민이 살아남은 건 교환비가 우월해서가 아닙니다. 거리와 비용의 문제죠.
난멸치가싫다
13/09/2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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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민족이 살아남은 것이야말로 교환비가 비등해서가 아니라 거리와 비용 덕분이었습니다. 평야지대에 자리잡은 정주민족은 유목민에게 완전히 와해되거나 정복당해왔습니다. 소수의 유목민족이 다수의 정주민을 이기지 못했다면 헝가리, 불가리아, 모로코를 비롯한 수 많은 나라들은 없었겠죠.
나이트해머
13/09/2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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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불가리아를 유목세력으로 치부하는군요. 남슬라브족이었던 불가르 세력은 말타고 내달리는 전술이 아니라 전쟁이 활용한 유격전으로 전쟁을 벌여왔습니다만. 1차, 2차 불가르 제국이 동로마제국과 싸울때 주요 교전은 거의 대부 산지였습니다.
헝가리? 마자르족족이 거기 자리잡은 건 아바르족 세력이 프랑크 왕국과 1차 불가르 제국에 샌드위치로 얻어맞고 완전히 흡수 소멸당한 빈자리를 채운거지 정주민이 살던걸 유목민이 정복한 곳은 아니죠. 모로코도 마찬가지. 이건 뭐 제대로 예시를 대는 게 없군요.
난멸치가싫다
13/09/2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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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가 유목민족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데서 혀 좀 차고 갑니다. 불가르 제국 시절의 불가리아는 사르마티안들과 궤를 같이하는 투르크계 분파로써 정주 후에도 유목민적인 생활관습을 유지했습니다. 산지란 건 현 불가리아 영토의 남북쪽 지방에나 해당되는 거지 불가리아 제국 시절엔 멀쩡히 말 타고 강 건너서 콘스탄티노플 공격한 건 뭡니까 그럼.
헝가리가 빈집털이? 제대로 기억하는게 없는 건가요? 중세 헝가리는 몽골이 오기 전까지 카톨링거 왕조보다도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카톨링거 제국의 전투에서도 연승했고, 그 결과가 프랑스보다도 거대한 영토를 가진 헝가리 제국으로 나왔죠. 모로코 자체도 비잔틴과 반달족을 몰아넨 이슬람계 유목민족이 세운 우마야드 왕조에서 유래하죠. 뻔히 보이는 반박만 하는군요.
난멸치가싫다
13/09/2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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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가 유목민족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데서 혀 좀 차고 갑니다. 불가르 제국 시절의 불가리아는 사르마티안들과 궤를 같이하는 투르크계 분파로써 정주 후에도 유목민적인 생활관습을 유지했습니다. 산지란 건 현 불가리아 영토의 남북쪽 지방에나 해당되는 거지 불가리아 제국 시절엔 멀쩡히 말 타고 강 건너서 콘스탄티노플 공격한 건 뭡니까 그럼.
헝가리가 빈집털이? 제대로 기억하는게 없는 건가요? 중세 헝가리는 몽골이 오기 전까지 카톨링거 왕조보다도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카톨링거 제국의 전투에서도 연승했고, 그 결과가 프랑스보다도 거대한 영토를 가진 헝가리 제국으로 나왔죠. 모로코 자체도 비잔틴과 반달족을 몰아넨 이슬람계 유목민족이 세운 우마야드 왕조에서 유래하죠. 뻔히 보이는 반박만 하는군요.
나이트해머
13/09/27 19:23
수정 아이콘
1차 불가르 제국 시절에도 유목민족 풍습 남은건 적대한 세력 지도자 두개골에 은칠해서 술잔만드는 거 정도네요. 근데 그런건 슬라브족도 매한가지고 가지고 있다는 거. 1차 불가르 제국 건국시에 이미 불가르족은 슬라브화한지 오래됐습니다. 슬라브족도 유목민족이라 하지 그러십니까 아주.

중세 헝가리가 카톨링거 왕조보다 강력한 나라다라... 크게 웃고 갑니다. 카톨링거 제국에게 연승했다라... 애초에 마자르족이 헝가리 평원에 자리잡을때 이미 카톨링거 제국은 3분된 상태였지 말입니다. 아 카톨링거 제국의 1/3보다는 강력할지도 모르겠네요. 그것도 오토 대제에게 박살나고 나서는 더는 못할 말이 되고 말았지만. 프랑스보다도 거대한 헝가리 제국? 어디서 그런 참언망설을 내뱉는지 한번 봅시다.
모로코는 로마제국시기에도 유목민족인 베르베르족이 원주민으로 살던 동네입니다. 고대 로마제국 시기에 일부 지역에 정주 도시가 세워졌다고 베르베르족이 어디 가는 거 아니죠. 그나마도 그 도시들은 반달족 이동할때 다 날라갔고, 남은건 베르베르족들 정도. 정주민족 사라지고 유목민족만 남은 곳에 다른 유목민들이 들어와 지배권을 확립한 곳을 무슨 정주민이 유목민들에게 정복당한 거라고 하시나요. 대체 모로코 역사에 대해 알긴 합니까.

이건 뭐, 억지쓰기도 작작이어야지. 근거나 제대로 들고와서 이런 낭설을 말하시길 바랍니다.
난멸치가싫다
13/09/27 03:47
수정 아이콘
충격력의 부재는 여러 곳에서 지적하는 약점이긴 한데 말에 깔린 사람은 어지간하면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의구심이 가는 지적입니다. 경기병이라고 해도 기병끼리 비교할 때나 해당되는 말이고, 당장 달리는 말 앞에 서기만 해도 답이 안 나오죠. 거기다가 아이유브쪽 경기병들은 투창도 들고 있었고. 경기병의 충격력이 중기병에 비해 부족하다는 게 유목민이 정주민과 비등했다라는 근거로 받아들이기에는 좀 뭣한 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례지만 오늘은 물러갈께요. 영 졸려서;;;
나이트해머
13/09/27 08:05
수정 아이콘
의구심이 가든말든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게 유목군대의 충격력 부족입니다. 1만 보병을 10만 기병이 세번이나 들이받고도 진을 못깬 사례도 있는데요.
13/09/2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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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거병에게 털린 다음 세대에서 이릉의 보병 5천을 흉노군 기병 수만으로도 섬멸 하는데 며칠이나 걸렸고, 십자군 전쟁에서도 충격력 부족으로 대열을 해체하지 못 하고 유리한 위치만 점하고 있다가 근접전을 강요 당하면서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죠. 굳이 근접전으로 내몰리지 않아도 중갑의 보병-사격병이 방진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 상당한 출혈을 강요당하기도 하고요.

때문에 서로의 강점(유목민 쪽은 전장 선택 권리와 기마의 기동력, 정주민 쪽은 충격력 및 근접전시의 파괴력)을 잘 이용하는 쪽이 승리해 온거지 유목민이 무조건 이기는게 아니라는 소립니다. 유목민이 이런 전투에서 매번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건 기마의 기동력 덕분에 불리한 싸움은 하지 않으면서 퇴각이 가능하니 최소 무승부가 나오기 때문이죠.
난멸치가싫다
13/09/2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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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el2 님// 대게 동의하는데 기동력을 이용해 불리한 전장에서 후퇴할 수 있다는 건 무승부를 내는 것 뿐만이 아니라 승리하는데에 있어서도 절대적 이점을 줍니다. 벨리사리우스처럼 포위기동을 위해 분산된 적을 기동력으로 각개격파 할 수도 있고, 징기즈칸처럼 불리한 전투에서 도망치다가 분산된 추적병을 역으로 그물 던지듯이 포위할 수 있으며, 누르하치처럼 1선이 적당히 시간 끄는 동안 2선과 3선이 한 지점에 뭉쳐서 궤뚫을 수도 있죠. 유목민이 항상 이기는 건 아니지만, 정주민의 승률은 더 낮을 수 밖에 없습니다.
13/09/2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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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멸치가싫다 님// 도망치면서 부대를 나눠 복합기동으로 상대를 포위 섬멸 할 수 있으면 그건 이미 평범한 수준의 지휘관을 넘어선거 아닌가요. 유목민 지휘관중에서도 그런 복잡한 전술기동 보여준 사람은 손에 꼽는 수준입니다.

몽골군은 충격력의 부족을 공간을 통해 극복한 케이스고(상대를 유인해서 부족한 충격력으로도 섬멸할 수 있을 정도로 분산시키는 방법), 누르하치는 명나라 지휘관들의 무능을 이용한 병력의 선택과 집중을 보여주는 건데 둘다 이미 평범한 지휘관의 지휘력은 아득히 뛰어넘는 판단인데요.
나이트해머
13/09/27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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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가 무승부를 냈다는 헛소문이 퍼져있지만 실제로는 '고전을 하긴했어도 이겼다'입니다. 휘하 장군들이 처발리고 다녔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힛앤런으로 교란전을 벌이는 스키타이족을 '따라잡지 못한 데' 불과하고. 그나마도 당시 마케도니아군은 정주군대가 유목군대에 보이는 장점, 즉 더 사거리 길고 위력이 강한 투사병기의 대량활용 능력이 없는 상태. 이런 걸 가지고 유목민족 짱짱론을 펼친다면 처량하군요.
난멸치가싫다
13/09/2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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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싸르타 전투의 참전자는 알렉산더가 더 많았고, 사상자 비율은 천대 천으로 비등합니다. 알렉산더는 유리한 강가에서 포위전술을 짰지만 스키타이족은 유유히 풀고 도망친 다음 보급부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는게 가능했죠. 이는 알렉산더가 인도에서 후퇴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전술적으로는 비등하나 대국적으로는 알렉산더의 패배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전투입니다. 이런 걸 비겼다고 쉴드치는 모습을 보니 처량하군요.

거기다가 정주민족의 투사전투력 보유능력은 거의 항상 유목민족보다 떨어졌습니다. 토번, 조선, 잉글란드 정도가 예외지 활로 날리던 민족들은 대게 유목민족이었죠. 당장 유럽만 봐도 유목민 이슬람들의 투사능력은 유럽 군대의 투사능력을 월등하게 압도했습니다.
나이트해머
13/09/2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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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전쟁사까지 왜곡하시네요. 인도 철수는 포루스의 과장에 겁먹은 병사들의 항명 때문이지 스키타이가 보급선을 괴롭혀서 뭐 이런건 아닌데요. 어디서 그런 낭설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키타이가 팔팔하게 살아서 알렉산더를 괴롭혔다면 중앙아시아에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나타날 수도 없었고 박트리아가 건국될 일도 없다는 정도로 정리되는 이아깁니다. 간단히 확인해 볼까요?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Jaxartes
Aftermath and Consequences[edit source | edit]
This was the end for the Scythian army - about 1200 Saccae were surrounded and killed, including their commander Satraces. Over 150 prisoners were taken and 1800 horses were captured. As far as the Macedonians and Greeks knew, no commander had ever been able to pin down and destroy a nomad army – including Darius the Great. This was a boost for morale, and a psychological blow for the nomads north of the Jaxartes.
스키타이 군대 끝장났다고 적어놓은 이건 뭘까요. 인도 원정에서 귀환한 게 스키타이족 때문이라면 무슨 사료에서, 어떤 책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좀 확인이나 해 볼까요. 그리고 아랍? 초기 확장기때 동로마 제국은 아랍세력을 투사무기에서 압도했고(야르무크 전투 4일째에 동로마군의 궁병대가 아랍군의 궁기병들을 사격으로 압도해서 al-Waqidi는 이날을 두고 '눈을 잃어버린 날' 이라고 부를 정도로 막대한 데미지를 입혔습니다.)이 십자군 전쟁시에도 아랍측은 석궁에 피보고 살았죠.

정주군대가 유목군대를 맞상대할 때 항상내내놓는 대책 중 하나가 강력한 투사무기를 대량으로 확보해 사격전으로 맞상대하는 것이였고 이는 대부분의 경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유목부대가 사격전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주장은... 실제와는 전혀 다르며, 실상은 정반대였다 하겠습니다.
난멸치가싫다
13/09/26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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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개인적으론 스키피오>>>>>>>>>>>카이사르 부분은 마음에 드네요. 시저라는 이름값에 나나미 여사의 언플에 아우구투스의 프로파간다까지 더해진 현재 카이사르의 위명은 거품이 많다고 보는지라. 아무리 생각해도 중앙집권조차 되지 않은 부족연합과 내전에서 공을 세운게 다인 카이사르가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지휘관으로 들어간다는게 찝찝해요. 로마가 위대한 거지 카이사르가 위대한 건 아니죠.
류지나
13/09/26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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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정치적 능력에서 카이사르가 많이 앞서는 듯하여...
난멸치가싫다
13/09/26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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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야 원로원에게 발리고 관광탔다고 해도 카이사르의 꾸준한 원로원 견제의 결과물이 가슴칼빵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카이사르도 딱히 잘난 정치인이라고 하기 힘들죠...폼페이우스 이긴 다음엔 그야말로 삽질의 연속이었고.
13/09/27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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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군재가 그정도로 무시될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갈리아를 너무 물로 보시는듯. 카르타고도 한니발 빼면 뭐 별거 없는건 똑같습니다.
난멸치가싫다
13/09/27 02:37
수정 아이콘
갈리아 원정이 다키아 원정보다 딱히 어려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아니, 오히려 다키아는 통합된 땅이라 더 어려웠겠죠. 그러니 트리야누스도 카이사르급으로 칭송받아 마땅한데 보통 그러지는 않죠.

뭐, 스키피오가 카이사르보다 딱히 특출나게 잘난 점도 없(하지만 '한니발'을 뺄 수는 없죠. 한니발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란 건 10만의 군대를 빼면 아무것 도 아니라는 말과 동급입니다.)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카이사르가 카푸치노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죠.
13/09/27 02:50
수정 아이콘
카이사르가 거품이어도 스키피오>>>>>>>>>>>>>>카이사르는.아니겠죠.

스키피오가 카이사르보다 딱히 특출나게 잘난점도 없는데 저정도 차이가 난다는건 리델하트의 팬심 가득 담긴 스키피오>>>>>>>>>>>>>>>나머지 평가랑 다를게 없는데요.
난멸치가싫다
13/09/27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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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입니다. 뭐, 저도 마음에 든다고 했지 동의한다고는 하지 않았고요. 어차피 둘 다 한니발 아래쪽이고, 둘 사이의 우열은 가릴 수 없고 가릴 필요도 없지만 카이사르 거품은 좀 꺼져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13/09/2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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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카이사르 부분만큼은 어느정도 동감합니다. 갈리아 전쟁이야 초기엔 각개격파였고....
어느정도 연합을 형성했다는 알레시아에서조차도 수뇌부와 주력은 성안에 포위, 지원군은 바깥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진지를 구축한 로마군에 대항해 공성전을 펼쳐야했죠.

로마내전이야 어제까지 전쟁터에 있던 정규군 vs 손놓은지 10년 된 예비군의 싸움이었고,
오히려 다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가 그만큼 밀어붙인 게 더 대단해보입니다.
13/09/26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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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이래서 빠가 싫어.
류지나
13/09/26 22:30
수정 아이콘
커리어로 보면 알렉산더-나폴레옹-카이사르-스키피오-한니발 순일거 같고...

능력비교는 정말 어렵네요.
장군으로서 전술적 능력은 나폴레옹=한니발-카이사르-알렉산더-스키피오일테고
지도자로서 정치적 능력은 카이사르-알렉산더-스키피오-나폴레옹-한니발 순이라 생각합니다.

이리보면 제가 스키피오를 별로 안 좋아하는 느낌도 드는데... 스키피오가 모자란게 아니라 위 장군 모두가 올타임 레전드 급인지라...
불굴의토스
13/09/26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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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장군인 한니발을 이겼다는데 큰 감명을 받은것 같네요. S급 장군끼리 대결한 사례가 많지 않다보니.
류지나
13/09/26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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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링턴이 나폴레옹을 꺾었지만 누구도 나폴레옹보다 위대한 장군이라 안하듯이... 패배한 S급 장군들은 대부분 엄청난 국력차가 있는게 일반적이죠

카이사르가 꺾은 폼페이우스도 당대 s급 장군이었는데 무시당함 orz
13/09/2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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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우스 이쪽도 스키피오와 비하면 전혀 꿀리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a
절름발이이리
13/09/2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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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우스는 당대 수준이 아니라 로마사에선 역대급이죠.
수부왘
13/09/26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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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카르타고가 한니발 없이 로마상대로 3할정도 승률만 거둘 능력이 됬어도 팍스 페니키아 시작이었죠.. 한니발은 솔직히 전술적 능력으로 따지면 육군으로는 서양사에서 올타임 넘버원이라고 해도 쉽게 이의를 제기하기 힘든데 스키피오를 -_-; 게다가 한니발의 병력이란 것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상비군도 아니고 각 지역에서 다닥다닥 끌어모은 돈에만 좌우되는 용병들을 순수히 개인의 카리스마로 로마를 낭떠러지 직전까지 몰아붙인게 더 대단하죠. 자마 전투도 그 불리한 조건에서 로마 기병이 되돌아오지 않았으면 로마군이 와해될뻔한 상황까지 몰고갔구요. 비단 전술단위만이 아닌 전략 차원의 논의로 나가더라도 한니발의 대국을 보는 눈은 알프스 통과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전략적 천재임을 알 수 있죠. 물론 로마의 동맹시 포섭에 실패해서 물량의 귀재인 로마련방에게 통한의 패배를 당했지만 사실 본국인 카르타고가 1승 전패라는 희대의 성적을 기록하지만 않았어도 동맹시들이 그렇게 강경하게 나오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야로비
13/09/26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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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코비가 역대 체고시다!' 내지는 '르브론은 이제 조던을 능가했다능!'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13/09/2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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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명장인 한니발을 이긴게 스키피오이니 스키피오가 최고시다! 이런건데...
스타로 비유하면..최강의 이영호를 다전제에서 이긴 김정우!!
고로 스타 역대 최고의 선수는 김정우! 이런 느낌이죠
Practice
13/09/26 22:45
수정 아이콘
빠가 까를 만든다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다만 리델 하트가 말하는 만큼은 아닐 뿐....
사티레브
13/09/26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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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위에 언급되는 비교대상과같은 급은 아니긴한데...흐으
하야로비
13/09/26 22:46
수정 아이콘
로마사 부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명저 하이켈하임의 '로마사'에서는 아예 이렇게 쓰고 있죠.

'하스두르발의 지원군이 한니발과 합류했다면, 한니발은 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에스파냐에서 카르타고 지원군을 이끌고 한니발과 합류하려던 한니발의 동생 하스두르발은 로마 장군 네로의 기습을 받고 전사했고 지원군은 전멸했습니다. 한니발은 자신을 그렇게 괴롭힌 로마 장군 마르켈루스를 정중히 장례지내줬는데, 로마인들은 하스두르발의 머리를 잘라서 한니발에게 던져주었죠.
마음만은풀업
13/09/26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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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는게 수 년동안 수많은 로마인들이 학살당했죠. 증오감이 대단했을 겁니다. 박혀있는 한니발을 도발해야할 필요성도 있었고요.
류지나
13/09/26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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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서양 장군 중 전술 능력 탑5를 고르면

한니발 구스타프아돌프스 나폴레옹 만슈타인 스프루언스를 꼽는데

얼마나 공감받을진 잘 모르겠군요(...)
13/09/26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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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로마 명장들 (특히 카이사르)을 좋아하지만 이건 너무 크크
13/09/26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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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 한니발님을 까다니...(부들부들)
그래봤자 스키피오 따위 한니발님의 발끝만도 못한게 진실이죠.(녹차)

...분노에 눈이 멀어 잠시 내면의 덕력이 폭발했네요. 신불해님이 한니발 장군님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글을 기대해봅니다!

+벨리사리우스에 대한 평가는 나폴레옹, 한니발, 알렉산더, 카이사르, 스피키오 등에 비해 어떤지 궁금하네요. 개인적으론
한니발과 함께 첫 손에 꼽고 싶은 장군인데요.
사티레브
13/09/26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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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님 본인이 오시면 재밌겠다 싶어요 흐으
하야로비
13/09/26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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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으로는 legend님이 언급하신 legend들 중 카이사르만 빼면 벨리사리우스를 포함해 거의 동급으로 보이네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반발 앞선거 같기도 하고. 솔직히 카이사르는 거기 낄 레벨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카링
13/09/26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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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사리우스는 왠지 고생하는게 약간 이순신 분위기가 나서 사람들이 좋아하죠.
근데 (녹차)는 뭔가요. 이런건 처음보는데
알리바바 사르쟈
13/09/27 01:18
수정 아이콘
자리깔고 녹차 따라 마시면서 온화한 표정 짓는 걸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13/09/26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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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사리우스는 그냥 불쌍하죠...
나이트해머
13/09/27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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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벨리사리우스를 정말 엄청나게 봐야하는지 상당한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로마군이 중세로 갈수록 소수정예화가 이루어져서 이미 벨리사리우스 시기의 동로마 중앙 야전군쯤 되면 두배 정도의 이민족 군대 정도는 너끈히 발라먹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거든요. 거기다 지원이 없었네 뭐네 하지만 이미 벨리사리우스가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날 때 쯤 되면 이탈리아에는 동로마군이 동고트족 전체를 두어번은 박살내고도 남을 규모인 3만 이상이 가 있었지만 벨리사리우스가 이들 군대의 지휘권을 완전히 장악 못해서 제대로 활용을 못해먹었다는 게 시간이 갈수록 크게 다가오더군요.
난멸치가싫다
13/09/27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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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을 순회공연하며 10배가 넘는 적을 상대로 연승을 쌓고, 늙어 죽어갈때쯤 배태랑 300명으로 칸의 친위대 4천을 이겨 종국에 2만의 불가리아 군대를 패퇴하게 한 벨리사리우스가 엄청난 인간으로 보일 필요가 없다는건 말도 안되죠;;; 나폴레옹이나 한니발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전투들에서 무패였는데.
나이트해머
13/09/2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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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사리우스가 10배가 넘는 적을 상대했다고 할만한 적은 많은 게 아닙니다. 애초에 게르만 부족왕국에서 실질적인 전력은 1~2만 내외의 핵심 전사집단이고 그외에는 사실상 보조병 및 비전투병 등 제한된 활용밖에는 할 수 없는 인원수지요. 사실상 벨리사리우스의 서방 원정에서 총전력의 열세가 나타나는 건 이탈리아 원정 초창기가 고작이라 하겠습니다. 거기다 베테랑 소수 인원으로 다수의 부족군대 발라먹는 건 어려운 일이긴 하나 희귀하다고 말하긴 힘든 전공이라, 이는 훌륭한 전공이긴 하나 그걸 절대적인 전공이라고 찬양하는 건 좀 과장된 느낌도 드네요.
난멸치가싫다
13/09/27 12:40
수정 아이콘
반달 정벌을 위해 조직한 1만 5천명의 병사, 그 중에서도 정예는 산악민으로 구성된 500명 가량의 보병이 전부이며 나머지는 약체화된 징집병에 통제할 수 없는 훈족 기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가지고 아프리카에서 겔리메르가 이끄는 6만의 군사를 내리 이겼습니다. 이후 병력의 충원 없이 아프리카로 건너가 고트족 5만 명을 내리 이겼고요. 보급으로 온 나르세스는 벨리사리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열심이었고, 결국 병력 충원 없이 프랑크 10만 대군과 싸워 이겼습니다. 1.5만으로 이 모든 업적을 이뤄낸 것 만으로 충분히 알렉산더와 나폴레옹 뺨따구 후려칠 수 있습니다.

벨리사리우스가 지휘권을 장악 못한 건 유스타니우스와 나르세스의 의도적인 방해가 컸는데, 이걸로 벨리사리우스의 평가가 한푼도 깎일 일 없는게,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와는 달리 벨리사리우스는 일개 군단의 군단장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군단장에 의한 황제 시해가 500년간 이어져온 제국의 스타였죠. 유스타니우스로부터 카르타고 의회가 한니발에게 보냈던 만큼의 지지를 얻는 건 괴링의 혀가 달렸어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거기다가 명장들이 늘 하듯 약탈로 인한 현지보급조차 하지 않고 황제에게 보급을 구걸하며 쪼들리는 군사병력으로 그 모든 걸 이뤄냈다는 건 절대적 인성까지 느껴질 지경이죠.
나이트해머
13/09/27 17:55
수정 아이콘
유스티니아누스는 군사적 목적으로는 쓸모없게 되었던 스콜라이 3,500명에 대한 급료 지급을 중단해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가 아프리카에 국경군 부대들을 추가했음에도 그곳 병력은 395~559년 사이에 어느 정도 줄어들었으며, 특히 유스티니아누스가 545년에 그들에 대한 급료 지급을 중단했던 이후에 더 그랬다.32
하지만 국경군 부대들과 스콜라이는 여전히 존재를 지속했고 큰 수효 감소는 없었던 게 확실하며, 같은 점은 함대들에 있어서도 사실이었던 게 분명했다.
기동군들만의 수효는 395년에 약 104,000명이었고, 우리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재위하는 동안 오리엔트군-Army of the East-이 이전만큼 컸고 일리리쿰군만이 약간 작았던 것을 확인해오고 있다.
아가티아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국경군 부대들을 포함했었고, 그의 총계는 그것들 모두가 새 야전군들에 추가한 것을 이유로 약 50,000명만을 남겼을 것이다. 아가티아스는 때문에 틀림없이 국경군 부대들-Frontier Troops-을 생략했을 것이며 스콜라이에 대해서도 그랬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이런 부대들이 더 이상 야전군 부대들과 대등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프로코피우스는 550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국경 지대 부대들-Border Troop-을 정규 군인으로 헤아리는 것을 멈추었었다고 기록했다. 33
옛 기동군들에서 분리된 아가티아스의 50,000여명의 인원은 때문에, 새 기동 부대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위에서 언급했듯 프로코피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치하의 오리엔트군이 531년에 20,000명을 보유했고 548년의 일리리쿰군은 15,000명이었다고 말한다.34
프로코피우스는 530년의 아르메니아군이 페르시아 군세의 30,000명의 딱 절반 수준이었다고도 말하며, 그는 페르시아 군대의 정확한 수효는 잘 몰랐었던 것 같지만 아르메니아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알았던 게 분명하다. 고로 아르메니아군은 15,000명을 보유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35
프로코피우스는 아프리카군에 대해서는, 533년에 그와 벨리사리우스가 아프리카로 보병 10,000명과 기병 5,000명으로 이뤄진 정규 부대 15,000명을 데리고 아프리카로 항해했으며 여기에 추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노군 30,000명, 수군 2,000명, 야만족 용병 1,000명 그리고 벨리사리우스의 개인 수행원-Retinue-등을 데리고 갔다고 말한다. 36
노군, 수군과 용병 그리고 벨리사리우스의 수행원들은 아프리카에 영구 주둔할 예정과 의도가 없었던 게 분명하며, 한편 일리리쿰군 및 아르메니아군의 병력 수와 대등한 정규 병력 15,000명은, 최초의 상비 아프리카군이 될 예정이었을지 모른다.
아가티아스는 이탈리아군에 대해서는, 554년에 나르세스가 동고트와의 결정적 전투에서 18,000명을 이끌었다고 말한다.37 나르세스는 이탈리아의 비잔티움 점령지의 여러 장소에 몇몇 주둔 병력들을 남겨놓아야만 했었기에, 이들은 나르세스의 군인들 전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장소들은 그 당시에는 몇 개로도 충분했고 그 전투는 꽤 중요했으며, 고로 이 18,000명은 나르세스의 병력의 상당히 가장 큰 부분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의 전체 군대는 때문에 약 20,000명으로 추산될 수 있겠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벨리사리우스의 535년에 있었던 첫 원정군 7,500명은 단계별로 증원을 받았으며 일부 손실을 겪었고, 약 14,000명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 수치는 마치 유스티니아누스가 시작부터 이탈리아군의 규모를 심중에 두기라도 한듯, 약 20,000명의 총 군세에 대해 다시 가리킨다. 이 병력은 오리엔트군과 대등할 것이며, 일리리쿰군과 아르메니아군의 15,000명은 약간 상회한다. 아마도 보다 가깝고 손쉬우며, 보다 작고 지키기도 더 쉬운 아프리카에서 증원군을 받았을 것이다.

주32. 유스티니아누스의 국경군 부대들과 스콜라이에 대한 처리는 Procopius, Secret History, 24. 12 - 22쪽 참조.
주33. Ibid., 24.13.
주34. See above, p. 47.
주35. Procopius, Wars, L 15. 11.
주36. ibid, III . 11 . 2 - 19 .
주37. Agathias, II. 4.10.
================================
출처는 워랜 트레트골드 저 <비잔티움의 역사>

약체화된 징집병이요? 애초에 그건 이미 유스타시아누스가 정규군 명단에서 빼버렸습니다. 반달전쟁에 참전한 1만 5천은 '약체화된 징집병' 이 아니라 '오랜 전쟁 속에서도 로마제국이 끝끝내 유지한, 정예 야전 기동군의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기동군은 몇세기에 걸처 자기보다 규모가 큰 이민족 정예 전사집단을 매번 히로익 빅토리로 박살내고 다니던 무시무시한 질을 자랑하는 군대고 말이죠.

거기다 게르만족에 대해서는 보조인원 및 비전투인원을 모조리 포함시킨 머릿수를 계산하고 동로마제국에 대해서는 순수 전투원만을 포함시키는 이중잣대는 좀 많이 그렇군요. 겔리메르의 6만을 주장한다면 로마군도 해군 및 용병 3만 2천을 더해서 4만 7천으로 맞상대했다고 하면 되겠네요. 고트족 5만을 내리이겼네 주장하지만 당시 동고트 왕국의 지도자였던 토틸라를 따라다니던 핵심 전사집단은 1만 5천입니다. 이걸 박살낸 건 나르세스죠. 동로마 야전군이 몇세기동안 이민족 전사집단 상대로 보여준 강력한 파괴력을 생각하면 이건 '어렵긴 해도 뭐 기적적인 승리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요. 알렉산더와 나폴레옹 뺨따귀 후려친다? 이런 주장이야말로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에게 뺨따귀 얻어맞기 충분하군요. 병력 증원이 없었다? 어이쿠 참...

그리고 또 프랑크 10만 대군이라... 샤를마뉴가 롬바르드 왕국을 깨버릴때 끌고온 2~3만 가지고도 몇세기이래 서유럽 최대규모 군대가 알프스를 넘은 거라는 말을 듣고 있는데 10만? 피식하겠네요. 알메아니족과 연합해서 2만 내외입니다. 그리고 그게 나르세스에게 짓밟히죠.

군단장에 의한 황제 시해가 500년간 이어져온 제국의 대스타다...황제 시해 500년? 대체 왠 괴언낭설을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설파하십니까. 약탈로 인한 현지보급조차 하지 않았다... 아 물론 약탈은 안했죠. 해군이 일일히 따라다니면서 보급하고 현지민들의 지지를 얻어 '자발적으로 보급해주는' 이득을 누렸으니.

벨리사리우스가 뛰어난 지휘관이긴 하나 지금 말하시는 건 심하게 과장된 것입니다. 심각할 정도군요. 나원 참.
13/09/26 23:22
수정 아이콘
어째 공감이 안 된다 했더니, 까는 게시물이었군요.


네, 까는 게 심합니다.
13/09/27 00:28
수정 아이콘
우와 정말 웃기네요 크크크크 최근에 본 유머중에 수위에 들 정도로... 크게 터지진 않는데 완전 미소를 머금고 읽었습니다. 리델 하트를 이름만 들어봐서, 내가 얄팍하게 알았구나 다른 사람이구나 하고 있었는데.... 전문지식도 있고 정말 알 만큼 알 사람도 빠심에 빠지면 답이 없군요. 그나마 병참술 같은 면에선 나폴레옹을 인정해 주지만.
지금뭐하고있니
13/09/27 00:56
수정 아이콘
그래도 여기선 카이사르가 적정한 평가를 받는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그놈의 시저 빨로 카이사르가 모든 면에서 짱짱맨인 줄 아는 사람이 꽤나 있는데...;;;;
리델하트의 이야기는 그저 웃고 넘깁니다...
루크레티아
13/09/27 01:05
수정 아이콘
진짠줄 알았잖아요...;;
DogSound-_-*
13/09/27 05:10
수정 아이콘
병참술에서 나폴레옹이라;;;
현지조달이라 쓰고 현지약탈에 길거리 노숙이랑
도로를 통한 보급과 요새화된 로마야전이랑 비교가 되나요;;
아우스텔리츠전투 전에 수보로프의 결전회피기동 전술때문에 자멸위기까지 갈뻔했는데 이는 나폴레옹의 신들린 기동성을 보급이 못따라간 결과인데;;;
신불해
13/09/27 09:28
수정 아이콘
나폴레옹은 수보로프와 교전을 한 적이 없습니다. 수보로포는 나폴레옹의 96년부터 시작한 이탈리아 원정을 주의깊게 살피고 자신은 나폴레옹과 상대하고 싶은 호승심도 있었지만, 수보로프는 10월 경 스위스에서 퇴각했고 나폴레옹은 8월 말 쯤에 이집트를 떠나 프랑스에 귀환한후 쿠데타 준비에 여념이 없던지라 싸우고 말고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수보로프가 상대한 혁명군의 장군은 마크도날, 모로, 주베르 등입니다.
DogSound-_-*
13/09/27 11:44
수정 아이콘
아이고 헷갈렸네요 수보로프가 아니라 쿠투조프입니다 ㅠ
나이트해머
13/09/27 09:58
수정 아이콘
로마라고 해서 현지조달 안한 거 아닙니다. 도로를 통한 보급과 요새화는 어디까지나 수비전에서 적용되는 이야기고 나폴레옹은 적진으로 치고 들어가는 데 중점을 두었죠.

전근대 전쟁에서의 보급전은 사실상 '강이라는 지형요소를 활용한 보급' 과 '현지보급'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자국 영토 내로 적이 들어왔을때 한정으로 행정 인프라를 활용한 보급이 더해지겠네요. 이걸 극복하려면 철도와 자동차가 나와야 해요.
DogSound-_-*
13/09/27 12:01
수정 아이콘
아니요 굳이 수비에 한정된것이 아니라 정해진 행군량을 채운뒤 진지구축법따라 진지를 구축하고 그 진지로 퇴거했습니다.
물론 조건이 되는지역에 선정해야되며 그일은 호민관이 군보다 먼저 출발해서 미리 자리를 맡아놓은곳에 로마군이 열심히 po삽질wer로 만들었구요
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0HpkV&imgurl=http://cfile222.uf.daum.net/original/12783E104A6BA70A5201A5
아직도 남아있는 유대전쟁당시 이스라엘 마사다 요새 근처의 고대 로마군의 진지터입니다.
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0HpkV&imgurl=http://cfile219.uf.daum.net/original/15271B1A4A6BB2940289F3
로마 진지 구성도입니다.
이러한 진지를 구축하고 군단이 숙영하려면 많은 물자가 필연적으로 필요하게 마련인데 그 필요 물품 대부분은 로마시대의 유산인 도로망으로 본국으로 부터 보급 받았습니다.
https://pgr21.com/pb/pb.php?id=humor&no=153081&divpage=25&sn=on&ss=on&sc=on&keyword=DogSound-_-*
당시 로마의 도로망과 현재 남아있는 로마시절 만들어진 로마도로망과 도로 공사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알레시아 포위전 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0HpkV&imgurl=http://cfile226.uf.daum.net/original/161938134A6BB3E2036DEB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열심히 비부액(비박)을 하도록 권장했구요.. 당시 비박이라는것은 근처 농가에서 구한 짚단이나 나무 판자 등으로 임시 바람막이를 하고 모닥불을 피우는거니 사실상 약탈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나폴레옹시절 도로는 초봄이나 늦가을 쯤오면 완전 진창되는수준(히틀러와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죽쓴이유중 하나 - 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0HpkV&imgurl=http://cfile217.uf.daum.net/original/193B94214A6BAF4E2FA67C - 당시 초봄/늦가을쯤의 도로사정)
에서 나폴레옹의 미친듯한 특기인 기동력을 보급을 따라가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겠지만서도 너무 빈약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우스텔리츠전투 전에서도 황제인 나폴레옹조차 구운감자를 먹을정도 였으며 군화보급이 안되니 차라리 가죽을 보내라고 그러면 여기서 만들겠다고 할정도로 보급상황은 X망이였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결전을 원했구요.
뭐 진격의 알렉상드르와 징징이 프란츠, 멍청이 베이로더 3콤보덕에 쿠투조프가 해임되서 다행이였지 만약 쿠투조프의 뜻대로 갈리시아지방까지 나폴레옹이 끌려들어갔으면 당시 프랑스국내사정도 그렇고 보급상황도 그렇고 여러문제로 졌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트해머
13/09/27 14:26
수정 아이콘
로마군의 후방보급이라고 제시된 게 행정체계가 구축된 내지의 그것이군요. 이건 좀 아닙니다. 거기다 알레시아 공성전을 이야기하시는데, 그때 후방보급으로 로마군이 유지되었다면 베르겡토릭스가 내세운 전략인 스스로 갈리아 전지역을 초토화하여 로마군의 보급선을 끊는다는 전략은 성립 자체가 안됩니다. 거창한 진지는 후방보급선을 증명하는 근거가 전혀 안돼요.
갈리아전쟁기를 비롯한 로마군의 전쟁 수행 관련 기록을 읽어보면 로마군이 외지로 원정을 나갈 경우 거의 무조건 현지세력 포섭에 열을 올립니다. 그들이 물자를 제공해줘야 보급이 되니까요. 그게 아니면 약탈뿐이죠. 로마군은 근대 군대처럼 도로를 통해 후방에서 보급받는다, 는 환상이 퍼져 있으나 실상은...

로마가 라인강을 국경선으로 삼은 이유가 뭘까요? 라인강에서 밀려나자 곧바로 지중해로 밀려난 이유는? 정답은 보급입니다. 오랫동안 구축한 라인강 수로를 활용할 수 없게 되자 지중해로 바로 밀려난 것이죠. 도로를 통한 보급체계가 말하시는 것처럼 가능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를 전문적으로 다룬 서적인 <보급전의 역사>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역사상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수상 운송은 육상 운송에 비해 훨씬 저렴하고 손쉬웠다. 로마를 예로 들면, 몇몇 저자들은 그 비율을 1:50으로 추산하는데 말은 크기가 대동소이하지만 선박이 대형화되면서 수치가 확대된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동물이나 수레로 물자를 옮기는 비용은 같은 양의 짐을 선박으로 운송할 때보다 50배 가까이 더 들어간다는 의미이며, 물자의 가격이 싸고 양이 많을수록 그 격차는 커지게 된다. 그 결과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가능하다면 수상 운송을 통한 보급품의 수송을 선호했다.> 육상 병참선은 짧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로마의 군사보급에 관해 철저히 연구한 조너선 로스의 견해를 들어보면, 대략 5세기 동안 전선에서 100마일 후방에 위치한 기지로부터 육상으로 물자가 보급된 경우는 단 <3건>에 불과했다고 한다. 자료에서는 보급이 이루어진 방식은 알 수 없지만 100마일은 내가 지적한 말이 끄는 수송수단에 의존하는 군대의 한계와 아주 가깝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대부분의 경우 거리는 훨씬 짧다. 로스 자신이 언급했듯이 우리에게 알려진 로마 제국 시기의 군단 기지 가운데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강변에 자리 잡았는데 여기에는 아주 훌륭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네. 로마군의 보급체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결과 5세기동안 육상으로 후방에서 보급이 이루어진건 3건이래요. 몇년도 아니고 수십년도 아니고 무려 5세기동안 3건. 이게 '육로보급'의 현실입니다. 나머지는? 강, 바다 등 수로를 활용하고 그게 안되면 현지보급이였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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