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2/07/07 02:45:33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폭풍 - 7. 서울 함락

26일의 군 원로 회의로 돌아가 봅시다.

김홍일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 원로들은 기본적으로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고 한강 방어선에서 맞서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맞서 채병덕과 신성모는 서울 사수를 주장했는데 이를 지지한 장군이 한 명 있었죠.

수경사, 이후 수도 사단에서 수기사로 이어지는 이 사단의 지휘관은 이종찬 준장이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수도를 방위하는 책임자라서 그럴까요, 그는 일본 육사 동기였던 채병덕에게 수도 사수를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 근거는 이랬죠.

+) 나중의 증언이긴 합니다만 -.-a

- 당시는 유엔군이 출동해 줄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참전한다 해도 언제 도착할 것인지는 예측이 안 됐다. 이 상황에서 방법은 서울 고수, 한강선으로 퇴각 둘 뿐이었다.
- 하지만 한강선 결전은 서울시민을 버리는 것이 되고 퇴각해도 기껏 5~6일 정도 지탱할 수 있을 것이었다. 우리 군은 한강 결전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그러므로 한강 결전은 듣기는 좋아도 실은 비참한 패주작전, 즉 게릴라적 저항 후에 멸망하른 애처로운 작전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망치다 죽었다는 오명만이 남는 작전이었다.

"서울 고수는 자칫하면 옥쇄 작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서울 시민을 버린 채 도망쳤으나 결국 죽었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서울을 사수하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게 좋은 방책임은 정해져 있었다."

- 한편 채 총장이 한강선으로 퇴각하는 의견을 받아들였다 가정하더라도 시민들의 피난을 위해 27일 늦게까지 서울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는 오십보 백보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그의 주장을 본다면 서울 사수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그의 말대로 시민들이 피난가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을 지켜야 했으니까요. 거기다 UN군이 온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후방으로 물러나봐야 나라가 망하는 것과 다름 없었을 수 있죠.

문제는, 그의 말대로 됐다면이라는 거죠. 그는 채병덕이 자신과 같은 주장을 한 거라고 하면서 채병덕을 옹호하는데, 정작 다른 이들의 증언에서는 채병덕은 그저 대통령의 명령이라는 말만 한 것으로 나옵니다. 물론 채병덕이 죽었으니 다 뒤집어 씌웠을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_-a 그랬다면 그가 서울 시민을 지키기 위해 뭐라도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거나 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맞았더라도, 상황은 이종찬이 주장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UN군은 곧바로 참전했고, 한강 이남으로 가서도, 계속 밀리면서도 국군은 나름 잘 싸웠습니다.

결정적으로, 그 때 군도 정부도 시민들의 안전은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김홍일의 한강선 결전에도, 이종찬의 서울 고수론에도 서울 시민들의 피난은 들어 있었습니다. 전 서울 시민들이 피난하려고 하진 않았을 겁니다. 일제 35년도 버틴데다 그냥 38선 이남에 있어서 한국인이 되는 거라 생각한 사람도 많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피난가려 했던 사람들의 수도 참 길게 늘어져 있었죠. 그것이 북한이 싫어서든, 단지 전쟁이 싫어서든 간에요.

김홍일의 주장대로 했다면 바로 서울에서 피난하라는 말이 시민들에게 전해져야 될 것이었고, 이종찬의 주장대로 서울을 사수했다 하더라도 27일까지 피난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되지 않았죠.

군사적인 부분으로 본다면, 이종찬 말대로 서울을 고수해 한 29일까지 버텼다면 더 큰 참사가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김포사가 겨우겨우 막고 있던 북한군은 결국 김포를 뚫고 들어왔고, 마침 그 타이밍에 시흥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영등포를 비롯한 한강선 이남이 점령됐을 테니까요.

---------------------------------------------

25일 10시에 낚시 중에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11시에 국무회의를 열었고, 14시에도 계속합니다. 신성모는 북진 어쩌구만 반복했고 이승만은 일단 대통령령 377호와 긴급명령 1호를 공포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전국에 있는 북한에 협조할 수 있는 무리, 즉 보도연맹원을 예비 검속하라는 것이었죠. 이는 27일까지 구체적인 명령으로 바뀌어 갔고, 많은 보도연맹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이거나 끌려옵니다. 그 뒤의 운명이야 뭐... 천천히 말 하도록 하죠. 어쩄든 이 때까지는 계엄령도 선포되지 않았고 전시체제로 바뀌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일단 11:35에 무초 주한미대사의 방문을 받고 탄약 지원을 요청했고, 장면 주미대사에게 연락합니다. 유엔한위 역시 14:00부터 이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죠.

중앙방송 KBS는 07:00에 남침 제 1보를 보도합니다. 10시에도 낙관적으로 방송했죠. 당시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은 그 때는 남침 자체보단 휴가 중인 장병의 복귀에 목적이 있었기에 민심을 크게 자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했습니다.

12시에도 마찬가지로 참 낙관적인 방송이 나왔고, 나중에는 옹진 17연대의 해주 돌입설이 나옵니다.

일단 25일은 이렇게 속보만 좀 전하고 정규 방송대로 진행했고, 26일부터는 국방부에서 보도과장이 파견돼 방송을 관장하게 됩니다.

26일 06시에는 무초가 국민을 격려하는 방송을 했고 08시에 신성모의 방송이 있었지만 딱히 다를 바 없었습니다. 여기에 철수 명령이 내려진 17연대가 해주로 돌입했다고 하고 7사단이 동두천을 탈환하자 바로 "북진 중"이라고 했으며, 저녁에는 27일에 100대의 비행기가 우리를 지원한다는 말을 해 댔죠. 여기에 17시부터 자정까지 사회 명사를 초빙, 민심을 수습하게 하려고 했습니다만....

27일 06시에 이런 말이 방송됩니다.

"정부가 수원으로 이전한다."

------------------------------------------

27일 새벽, 국방 수뇌 연석회의에서 미군의 직접 지원이 없는 한 사태가 절망적이라는 점에 모두가 동의합니다. 여기서 육군이 계속 철수할 경우 마지막에는 게릴라전으로 끝까지 싸운다는 것과 해, 공군은 이를 돕고 마지막에는 정부 망명에 대비해야 된다는 말이 나왔죠. 여기서 신성모는 정부가 수원으로 이동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동의를 얻습니다.

그리고 채병덕은 곧바로 국회로 가서 "서울만은 고수한다. 반격으로 전환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다" 라고 했구요

신성모는 05:00에 국방부로 이 수원 이동 결정을 발표하게 했고, 06시에 전국으로 보도됩니다. 갑작스럽긴 했죠. 국군이 잘 싸우고 반격하니 어쩌니 하다가 갑자기 정부가 이동한다는 것이요. 하지만 차라리 이것을 그대로 미는 게 나았습니다. 갑자기 내용이 바뀌어 수원 이동위 취소되고 서울을 사수했다는 내용이 흘러나왔으니까요. 서울 시민들은 혼란에 빠졌고, 피난 행렬은 시작됐습니다.

09시, 다시 군 수뇌가 소집됩니다. 여기서 신성모는 참석자들에게 위스키 한 잔씩을 돌리며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충성스러운 장병들이 지금 현재에도 최선을 다하여 싸우고 있으나, 미국의 특별 긴급 원조가 없는 한 우리드르이 힘으로 수도를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라고 비통하게 말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분위기가 다운되자 갑자기 이렇게 말 했다고 하죠.

"그런 게 아니고 여하간 열심히 싸워 서울을 사수하자는 이야기야!" 라구요 (...) 그리고 채병덕은 이렇게 말 합니다.

"정부는 남쪽으로 이동할지라도 군은 서울을 고수하자"

-.-

이 날 1사단을 보고 온 김홍일이 다시 철수를 건의하지만 채병덕은 무시합니다. 그리고 17시에 의정부사가 만들어지고 북한군이 시간을 끄는 사이 창동 방어선을 어떻게든 만들고 있었던 27일 새벽, 국회에서는 "수도 사수"를 결의합니다. 이것도 좋게 볼 순 없어요. 군에 대한 지식이 없던 의원들이 그냥 군부의 말만 믿고 한 것이었으니까요. 문제는 그 이후였죠. 이 결의안을 채택한 후 이들은 대통령 이승만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이미 서울을 떠나 있었습니다.

----------------------------------

이승만이 서울을 뜬 것은 27일 새벽 2시, 일단 그와 그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절대 서울을 벗어나지 않겠다능" 같은 저항을 했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신성모 등의 간곡한 충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기차를 탔다고 하죠.

물론 미대사 무초의 증언대로라면 25일 적이 쳐들어왔을 때 이미 서울을 뜰 생각을 했다고 하지만요.

괜히 누구 말이 맞냐의 얘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좋게 봐 줘서 그래도 자기 나란데 서울을 버리기는 싫었겠죠. 문제는 그게 아니예요. 아예 25일 당일부터 서울을 떴더라도 그는 그래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어쨌든 대통령이고 군 통수권자니까요. 만약에 스타 할 때 게이머에 해당하는 유닛이 따로 있고 그게 본진 커맨드 센터에 있다면 적이 본진 쳐들어오기 전에 멀리 있는 멀티로 도망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잡히면 게임 끝인 건 맞아요. 아무리 더러운 대통령이라도, 아무리 더러운 방법으로 대통령이 됐더라도 일단 군 통수권자인 이상 그는 가장 안전한 위치에 있어야 됩니다.

문제는 그가 피난 가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시민들에게 피난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정부는 서울을 사수한다고 했으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수뇌부인 국회에도 이를 알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 철수할 수야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회에는 알려야 되지 않을까요? 자기 자신이 직접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최소한 이런 것을 알리고 확실하게 피난 준비를 시켜야 되는 것 아닐까요?

그가 일으킨 수많은 사건들이 있지만, 그를 "국부"로 생각한다면 가장 반대할 사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네, 당시 한국에 있어 좌익 세력이 어디 국민이였습니까. 이승만 대통령 가카께서 관대하셔서 그 자비로 공산주의를 버리고 자유 민주주의에 귀의한다는 조건으로 목숨을 허락받은 존재였을 뿐이죠.

문제는 이 때 이승만이 버린 것은 좌익만이 아니었습니다. (좌익이야 뭐 보도연맹들처럼 일일이 찾아서 죽이라 죽이라 했고 -_-) 서울에 살던 사람들, 독립운동가 이승만을 존경하고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 대통령 이승만을 지지했던 우익들, 하다못해 좌우 그런 건 모르겠고 어쨌든 이승만의 통치에 순응했던 사람들, 이승만은 그들을 모두 버린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구요.

철수한다고 한다면야 25일 당일에 해도 상관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책임을 지고 가야 했어요. 설령 대다수 서울 시민들이 공산당 치하에 놓인다 해도 그들에게 피난 간다는 사실은 말 해 줘야 했고, 국회의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후방에서 다시 정부를 만들 수 있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아무 것도 안 했어요. 그가 정말 도망가고 싶어서 도망갔든, 주변의 만류로 진짜 기절이라도 시켜서 도망가게 했든 상관 없습니다. 그는 정부 단위로 철수한 게 아니라 자기 혼자 도망갔습니다.

하다못해 그 인조도 왕자들을 먼저 보낸 후 그는 나름대로 뒷처리를 한 후에 피난 갔다가 잡혔습니다. 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았다가 잡히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자기가 대통령이라면, 그 책임을 지라는 것이죠. 그는 서울 시민들에게도, 대한민국을 이끄는 이들에게도, 군에게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이 국부일까요? 이승만 국부론을 반대하는 게 그저 좌파 빨갱이, 합쳐서 좌빨이라서일까요?


정작 이걸 한 건 당시 이승만에게 달려갔던 국회의 대표 조봉암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저기 이 사실을 알리고 철수를 주도했고, 주요 기밀 문서를 불태우면서 이승만이 했어야 될 책임을 졌습니다. 조봉암이 빨갱이라구요? 그렇다면 이 나라는 빨갱이가 지킨 겁니다. 그리고 이승만보다 오래 남았고 남은 정부 요인들과 군을 도왔던 것은 미대사 무초였구요.

+) 이 때 조봉암과 같이 갔던 신익희는 가족을 데리고 함께 탈출, 조봉암은 가족을 제대로 챙기지 못 한 채 마지막까지 남아서 공문서들을 태운 후 서울이 점령된 상태에서 겨우 탈출합니다. 북한군은 "반역자 조봉암을 잡으면 죽인다"고 떠들고 다녔구요.

이후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나는 도망갈 수 없다능"이라면서 대전까지 왔다고 하죠. 근데 이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부산까지 달려갔든 제주도로 갔든 아예 일본으로 갔든 마찬가지예요. 어디에 있든 그가 상황을 살펴보고 뭐라도 확실한 명령을 내리고 혼란을 진정시켜야 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요했던 27일, 16:30까지 아예 연락두절이었죠.

한편 27일 07:00, 신성모는 국방부수뇌를 소집해 정부는 철수하니 군은 알아서 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고, 채병덕은 서울 고수를 계속 외치다가 13:00에 일선 부대에는 비밀로 한 채 육군본부를 시흥으로 철수합니다. 이 때 미군이 한국에 온다는 말을 듣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긴 하지만요. 당시 국무의원들은 이범석의 (아래에 다루겠습니다) 주장대로 서울을 포기할 것인가의 논의를 계속 했지만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 한 채 정부만 수원으로 향합니다. 국회 역시 27일 04시에 산회한 후 각자 행동하기로 했고, 이승만이 있는 대전으로 가 다시 모이게 됩니다. 하지만 210명 중 62명에 달하는 사람이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 합니다.

---------------------------------

"UN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이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공중수송으로 무기와 물자를 날아와서 우리를 도우니까 국민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

이 상황의 드라마틱함을 강조하는 것이 이 녹음 방송입니다. 다만 이 자체는 흔히 알려졌듯이 서울 사수를 말 하는 방송은 아니었습니다.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이 UN 결의를 얻은 후 시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전화방송기에 대고 읊은 것이었죠. 어찌 보면 적의 치하에 놓이게 될 국민들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정부의 수원 이동이 취소되는 방송을 한 후 아무런 말이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이런 말을 했으니 당연히 서울 사수로 들릴 수밖에요. 특별 방송을 위해 왔던 저명한 인사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방송을 그만두라고 해서 막힙니다. 27일 21~23시 동안 세 차례 방송됐고... 이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피난길이라도 어떻게 떠날 수 있었지만 믿지 않고 서울에 남은 사람들은 정말 제대로 뒤통수를 맞게 됩니다.

이래놓고 방송사라는 중요한 곳에 신경쓰지 않아서 북한군에 넘어갑니다. 뒤늦게야 이를 폭파시키려 했지만 이미 북한군이 장악해서 가는 길에 전사, 이후 방송에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해 부산으로 진격한다는 내용이 가득차게 됩니다.

---------------------------------


대통령이 떠난 상황, 새벽 2시에 경무대에서 비상 각의가 열립니다. 여기서 이범석은 중대한 주장을 합니다.

"이 씨는 정부를 한수 이남으로 옮겨 활동의 자유를 가져야 하며 서울 쟁탈전에 빠져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 그는 서울 방어계획을 설명했는데 가가호호 시가전을 벌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정부가 강을 건넌 뒤 한강 다리를 폭파하도록 제의했는데 그것은 적이 쉽게 도강할 수 없도록 할 뿐만 아니라 서울에 남은 국군들이 퇴각할 길이 차단됨으로써 보다 완강하게 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건 해롤드 노블의 회고입니다. 반면 당시 총무처장 전규홍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이범석 장군이 발언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결정해야 할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서울을 사수하느냐, 아니면 포기하고 내려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도저히 서울 사수가 불가능한 일이라면 우선 시민들을 전부 피란시켜야 합니다. 또 요원들을 철수 시킨 후 한강 다리를 전부 끊어야 합니다"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내용, 지금으로서는 어느 게 맞는지는 확인 못 해 봤습니다. 어쨌든 한강교를 모두 폭파해야 된다는 건 이범석이 처음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전규홍은 그 마무리를 이렇게 맺습니다.

"이 장군의 이 말을 들은 신성모는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뒤로 돌아 앉아 뭔가 메모를 했다"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적의 전차, 유일한 희망이 한강 방어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강교를 폭파한 것 자체를 욕 할 순 없습니다. 특히 적 전차가 바로 건너편에 있는 상황이라면 다리 위에 피난민들이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그걸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마구 욕 할 수는 없죠. 다리를 그대로 놔둔다면 그 전차가 시민들을 밟고 들어오든가, 다리를 건넌 후 시민들을 같이 죽였을 테니까요. 북한군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민간인의 안전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결국 문제는 그 때가 그렇게 위급한 상황이었는가, 즉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가"가 됩니다.


이미 한국 정부와 국군, 미군 고문단 사이에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계획은 있었습니다. 단 그 시점은 시민들과 국군이 충분히 퇴각했고 상황이 충분히 위급할 때, 북한군 전차가 삼각지로 들어설 때였습니다.

이 한강교 폭파 건에 대해서는 구두 명령 뿐으로 남겨진 문서가 없고, 서울 수복 후 서울시민들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 있었던 재판에서는 현장 책임자인 최창식 공병감만 사형을 당했죠. 그것도 아주 급히요.

여기서 특기할 점은 미군들의 증언입니다.

"이 명령은 한국군 고위사령부에서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으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큰 소리로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100킬로그램 이상의 거구였는데 돼지라는 별명을 스스로도 기꺼이 받아들일 정도였다. 그러나 군인답지 않은 외모와는 달리 그는 용사였다. 몇 시간만 더 교량을 고수한다면 며칠 내로 당장에 필요한 병력과 장비가 살아남게 되리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국방부 고위 관리는 즉각 폭파시켜서 비록 한국군 수천 명이 희생하게 되더라도 북한군의 탱크가 한강을 넘어서는 것을 저지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채병덕이 계속 반대하자 그는 즉각 지프차에 실려 한강 너머로 보내졌다. 채병덕 장군의 대리인인 김백일 부장은 한강교 폭파에 동의했다" - 조셉 굴든, 한국전쟁

이것으로 본다면 채병덕은 거의 납치되다시피 한강 이남으로 "옮겨진" 것이죠. 또한 여기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채병덕이 아닌 김백일 참모부장입니다. 그가 "누군가"의 명령에 복종해 한강교를 폭파한 것이었습니다.

"한국군은 전시의 혼란과 문서화된 작전명령이 없어 수사에 곤란을 겪었지만 어쨌든 군법회의를 열고 다리 폭파의 방법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공병감을 처형했다. 미군사고문단의 많은 장교들과 가진 회견을 토대로 만들어진 미 육군전사는 “전술 상황을 고려하지 말라”는 구두명령이 군 내부에서 내려진 것이 아니고 민간인 국방부 차관(장경근)으로부터 나왔던 것을 밝히고 있기는 하지만 책임을 한편에 전가시키고 있지는 않다." - 상동

육군참모총장(당시는 총참모장)보다 더 높은 선에서 내려온 명령, 물론 대통령 이승만은 이미 떠난 상황에서 가장 책임권이 있는 사람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이었던 사람이겠죠.

"김 장군은 교량이 지체 없이 폭파되어야 한다는 국무총리겸 국방부장관의 결정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렸다. 우리는 적이 실제로 가까이 올 때까지 교량이 파괴되지 않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우리는 교량의 조기 폭파에 대해 격렬히 반대했다. 그런 후 그는 떠났으며, 우리는 거의 24시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나는 즉시 라이트 대령의 숙소로 갔다. 내가 육군본부를 떠날 때 거대한 폭발이 있었으며, 교량이 폭파되었다. 그 시각이 오전 1시 35분이었다." - 군사고문단 부참모장 그린우드

그린우드의 증언에서 틀린 부분은 시각과 계급, 이 정도라면 한강교 폭파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식적으로 이 명령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 혼란 속에 구두 명령이었기에 그 명확한 책임자를 가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뭐... 그렇다고 합니다만.


이후 그는 5개의 한강교 폭파에 대한 재판에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해 재판을 빨리 끝내라고 호통 칩니다.


이 한강교 폭파는 그 때까지 있었던 교량 폭파 중 가장 잘 된 케이스입니다. 오히려 이제까지 다리 폭파가 제대로 안 됐기에 이를 더 서두른 것이라고 봐야 되고, 이것이 여기에 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일지도요.

미아리 방어선이 붕괴된 지(01:00) 불과 1시간 30분 후였습니다.

서울 수복 후 그들이 한 건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사형한 것 하나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최소 400에서 최대 1500은 될 폭파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었죠. 설령 맨 처음 말 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돈도 들지 않는 이 사과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재판 과정 및 최창식에게 죄가 있다는 식의 증언에는 적/혹은 아군의 기마병의 말발굽 소리를 착각해서 현지에서 했다는 식의 말들이 있죠. 마치 80년 5월에 있었던 어떤 사건처럼, "현지에서" "어쩔 수 없이" 했다는 쪽이요.

정말 어쩔 수 없었다면 미군과 국군에서도 이것을 최대한 옹호하려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양 쪽 모두 이것을 비판하고 있죠. 다만 국군의 경우 채병덕에게 모든 죄를 돌리는 쪽으로 가구요. 글쎄요. 정말 어쩔 수 없었을까요? 그리고 마치 희생양을 찾듯이 급히 진행된 재판 하나로 그 죄를 씻을 수 있었을까요?

+) 뭐 그 이후 박정희가 이런 일을 막기 위해 한강에 다리를 많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신빙성 여부는 모르겠네요

------------------------------------

그래놓고도 시민들은 계속 피난을 계속합니다. 다리 옆에 놓아진 부교로, 폭파가 제대로 안 된 한강 철교로, 아니면 나룻배를 찾아서, 아니면 어떤 거든 간에 강을 건널 수 있을만한 것을 부여잡고 말이죠. 이는 국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군이 나루터를 관리하게 되었고 사복을으로 갈아 입고 몰래 건너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25연대장 김병휘도 있는데 다행히 국군이 관리하는 나루터에 갔다가 옷 속에 숨겨뒀던 토마토 (...) 가 떨어져서 부끄러웠다는 회고가 있죠.

이외에 최소한 자기 부대가 통과하는 동안만이라도 폭파를 늦춰달라고 했던 5사단장 이응준은 나룻배를 타고 남하합니다. 장성들부터 시작해 많은 국군 장병들이 자기 가족을 그대로 두고 와야 했습니다. 유재흥의 경우 아내가 천안까지 피난 갔다가 더 내려갈 수 없다고 생각해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의 아는 사람 집에서 숨어 있었다고 하죠. 그리고 이전에 적었던 것처럼 서울에 남아 게릴라전을 펴다가 전사하거나 서울 수복 후 복귀한 군인들도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서울 함락에 대한 대략적인 얘기입니다. 참 짜증나죠.

채병덕의 경우 도주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좀 자유로운 편입니다. 한강교 폭파 자체는 그가 끝까지 반대한 것 같구요.

하지만 그가 애초에 서울 사수를 하든 말든 일단 시민들의 대피를 우선시 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겁니다. 설령 됐더라도 할 말은 있겠죠.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서울 사수를 믿었고, 그러면서도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미아리가 뚫린 후, 서울 곳곳에 차량을 이용한 바리케이드가 쳐지면서 적을 막을 준비를 하게 됩니다만 이게 너무 늦었습니다. 거기다 적의 편의대가 곳곳에서 출몰해 길을 유도하고 바리케이드를 치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이를 제대로 막을 병력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결과론이라 한들 원로들은 이 상황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종찬의 증언대로 서울 시민들을 위한 것이었으면 그에 대한 준비를 확실히 해야 했고, 정말 끝까지 싸우려 했다면 그 준비 역시 제대로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 했습니다.

그는 28일에 이르면 잠도 제대로 못 자서 회의 중에도 선잠이 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열심히 하기는 했어요. 하지만 이 건은 열심히 했다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전투 경험도 대부대를 지휘한 경험도 없었던 그, 능력의 한계는 컸을 겁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열심히 하고를 떠나서 잘 한 것으로 평가받아야 되는 정말 중요한 자리입니다. 이후 전사했기에 모든 잘못이 그에게 쏟아졌다는 것은 재고해야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왕이면 서울 곳곳이 점령되는 것을 더 자세히 보여드리고 싶습니다만, 여기서 끊겠습니다. 괜히 멘붕을 더 일으킬 필요는 없죠.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이렇게 북한에게 점령됩니다.

---------------------------------------

이래저래 남은 얘기들이 있지만 마지막 평가 때로 옮기겠습니다. 계획보다 두 배를 썼는데 할 얘기가 남는군요 휴 -_- 다만 필요한 얘기로 마무리를 하자면...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북한군의 삽질 역시 컸다는 것이죠.

애초에 북한군의 계획은 첫 날에 동두천-포천 점령이었습니다. 이는 잘 됐죠. 문제는 둘째 날, 그들은 이 날 한강 이북을 점령하려 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진격이 너무도 느렸다는 것이죠. 오죽했으면 전차를 끌고 왔음에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진격보다 느렸습니다. -_-; 지금까지 전투 과정을 보더라도 대충 국군이 잘 싸운다 싶으면 물러났죠. 그래놓고 한참 후에 다시 와서 그냥 뚫고 갔습니다. 진작에 뚫을 수 있었단 얘기죠. 다리 같은 경우도 제대로 폭파된 게 거의 없었던 상황이구요.

북한군은 전차를 너무 애지중지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하죠. 그 귀중한 물자인데다 그냥 받은 것도 아니고 쌀이랑 지하자원 바쳐서 산 거였습니다. 이런 상태인 한 대라도 깨질까봐 걱정했죠. 여기에 길도 좁고 좌우가 논이었기에 선두 차가 깨지면 후속하는 차량들이 쉽게 못 들어오기도 했죠. 거기다 애초에 전차부대의 진격 속도가 보병의 속도와 똑같았고, 그래놓고 보전 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전차는 속도도 느리면서 보병이랑 따로 와서 혼자 깨지는 일이 많았죠.

이 덕분에 북한군은 국군에게 참 많은 시간을 줍니다. 매 전선마다 국군이 처참하게 깨졌음에도 북한군은 국군이 방어진지를 만들 시간을 줬습니다. 기습한 것 치곤 참 신사적이었다고 할까요 (...)


서울 점령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차부대의 계획은 서울로 진입하자마자 한강교로 향해서 국군의 퇴로를 뚫고 한강교를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갑자기 계획을 바꿔서 서울의 주요 건물들을 점령하게 합니다. 만약 그대로 한강교로 달렸다면 1~2시간 안에 갔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북한군 전차가 한강교에 나타난 건 미라이가 뚫린 지 7시간 후, 한강교는 폭파됐지만 그래도 시민들과 군인들의 피난 및 후퇴는 어느 정도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북한군은 계속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거죠. 문제는 국군은 이 기회를 살리지 못 했구요.

하지만 북한군이 이렇게 진격을 늦춘 것에 대한 커다란 반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틀렸더라도 북한군의 계획 하에서 가장 틀어진 부분이 있죠. 어찌됐든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한강 남쪽으로 철수한 국군 병력도 있었지만 계획대로였다면 이들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북한군이 노린 것은 김포 반도 도하를 이용한 한강 남쪽 포위와 함께 춘천에서 수원으로 기동해 국군 전체의 후방을 포위하려 했습니다. 이렇게 됐다면 서울에서 몇 일을 버틴들, 아니 서울에서 더 버틸수록 적의 계획에 빠지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 편은 좀 편히 보도록 하죠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스타나라
12/07/07 03:03
수정 아이콘
아직도 개전 당시 눈시BB님의 맨트를 잊지 못합니다.
거기에 더해 오늘은 분노가 차오르는 글이군요.
워워~ 릴렉스~ 릴렉스~
Je ne sais quoi
12/07/07 08:29
수정 아이콘
할 말이 없군요. 이승만 이 xxx...
사티레브
12/07/07 09:09
수정 아이콘
전쟁을 완벽히 수행하는건 불가능하니 북한의 삽질엔 그 여지가 있었다는것에 감사한 서울에서의 일들이고
국군은 그리고 그자는.. 하
그를 욕할 dem를 줘서 고맙긴한데 그래도 분통이 에효
아키아빠윌셔
12/07/07 09:27
수정 아이콘
이승만 이 XXX가 튀면서 꾸준히 한거라고는 '좌익들은 잡아들여라' '좌익들은 잡아서 등급에 따라 분류하고 중대한 대상들은 죽여라' 밖에 없...-_-
가을독백
12/07/07 18:36
수정 아이콘
에휴.. 올바르게 역사를 알아야 하는건 맞지만, 참 먹먹하네요.
대통령이란 작자가.. 자신을 떠받드는 국민을 버리고, 안심시키고 자신만..후..

글 내용은 참..그렇지만, bgm은 정말 잘 어울리네요. 어떤곡인지 알 수 있을지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6728 [정치] 尹인수위 시절부터 보고.."무능한 대응"으로 한국전기차 차별피해 [53] Dango14808 22/09/29 14808 0
88398 [정치] 주미대사 "70년 동맹했다고 계속 미국과 해야하냐. 국익에따라 선택할수 있어야" [273] metaljet18077 20/10/14 18077 0
87544 [일반] [역사] 할복하는 일본, 할복을 도와주는 중국 [22] aurelius11814 20/08/06 11814 6
87505 [일반] [시사] 미국 외교의 또 다른 얼굴: 아시아 그룹 [16] aurelius11131 20/08/03 11131 3
84204 [일반] [현대사] 미국이 바라본 문선명과 통일교의 정체 [10] aurelius10542 20/01/31 10542 8
82162 [정치] [명단] 8월9일 정부 인사 개각 발표 [133] aurelius16173 19/08/09 16173 3
68601 [일반] 역사는 반복된다. 이승만의 하야과정을 되돌이켜보며... [10] Camellia.S9712 16/11/13 9712 22
64662 [일반] 80년대 미국에서 김대중을 감시했던 반기문. [177] KOZE15467 16/04/17 15467 4
59037 [일반] [역사] 19세기 일본의 어느 외교관.txt [16] aurelius8663 15/06/14 8663 4
46070 [일반] 영화 '감기' 감상평 (스포일러 포함) [26] 유유히7914 13/08/25 7914 0
43772 [일반] 윤창중 사건 일지 - 추가분 정리 [25] Rein_118662 13/05/15 8662 32
43696 [일반] 윤창중씨의 기자회견을 반박하는 기사들이 계속 나오네요. [51] 어리버리8706 13/05/11 8706 0
38060 [일반] 폭풍 - 7. 서울 함락 [12] 눈시BBver.26096 12/07/07 6096 1
16181 [일반] [쓴소리] 이상한 잣대 [14] The xian3601 09/09/23 3601 3
10065 [일반] [세상읽기]2008_1231(마무리2)<스크롤 주의> [30] [NC]...TesTER4671 08/12/31 4671 3
8501 [일반] [세상읽기]2008_0924 [19] [NC]...TesTER4438 08/09/24 4438 1
7669 [일반] [세상읽기]2008_0801 [33] [NC]...TesTER4674 08/08/01 4674 0
7591 [일반] [세상읽기]2008_0729 [15] [NC]...TesTER4217 08/07/29 4217 0
5493 [일반] 어민들에게도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3] Luth4726 08/04/26 4726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