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사색 : 가격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
Chapter 1. 심리와 가격
Q. 가격은 무엇으로 결정될까요?
흔한 경제 서적을 읽다보면, '가치판단과 기회비용'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건 합리적으로 타당해보입니다. 그리고 아마 실제로도 맞는 말일 것입니다. 가격은 의사결정에 의하는데, '가치판단과 기회비용'은 경제적 의사결정에 있어서 주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뭔가 설명되지 않는 듯합니다. 제 생각에 2가지가 더 있다고 봅니다.
당연함과 의지입니다.
경제주체들이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는가, 그리고 경제주체들이 어떤 의지를 품는가, 이런게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에 있어 룰을 정하는 사람들의 당연함과 의지 또한 가격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판매자인 내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팔아서, 더 많은 수익을 거두려면, 가격을 높여야 합니다. 그런데 애초에 '가격을 높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어떨까요? 가격이 스스로 올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음식점 주인이라면, 메뉴에 가격을 바꿔 적어야 합니다. 누가 대신 바꿔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구매자인 내가 높아진 가격을 보면서, 기분이 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매를 거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심리적으로 어떤 가격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구매를 하는게 여전히 나에게 이익일 때에도, 구매를 거부할 수 있는 건, 당연함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격이 움직일 때, 실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겪는 경우들이 많은 듯합니다. 가격을 높이고자 하는 의지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당연함에 막혀 섣불리 올리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명분이 생기면 그때 올립니다. 혹은 남들이 가격 올릴 때, 나도 따라서 올립니다. 명분은 이를테면 뉴스가 공급해줄 수 있습니다. 뉴스가 집단적 가격변동을 야기합니다. 뉴스를 야기하는 것은 실제 어떤 변화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해석이나 평론일 수도 있습니다.
Chapter 2. 의지와 발전
가격이란 누가 더 이익을 보는지로 끝나는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흔히 가격이 높아지면, 그로인해 새로운 투자가 일어나곤 합니다. 가격을 높이고, 더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격을 높이고, 그 잉여수익으로 기술개발을 하는 것입니다. 가격을 높였고 돈을 잘 번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자, 재능있는 사람들이 뛰어들게 되고, 그 결과 발전하는 것입니다.
특정 분야에 가격상승 의지가 부족하거나, 의지가 있긴 하지만 당연함이 강력히 이를 억압하고 있다면, 그 분야의 제품과 서비스는 가격이 높아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기술개발도 되지 않을 것이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며, 기술과 재능이 없으니 투자도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각 국가마다 발전된 산업이 있습니다. 각 국가마다 가격이 다릅니다. 각 국가마다 재능있는 인재들이 주로 어디로 가는지가 다릅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 국가 내부에서의 '의지와 당연함'의 결과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중 상당부분은 '문화'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가 그 국가의 가격 스펙트럼을 결정합니다.
Chapter 3. 과학기술의 가격
왜 우리나라 이공계 천재들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가?
가치판단과 기회비용만으로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걸로 이해하기에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의지나 당연함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 의지와 당연함이 문화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고, 문화가 제도가 되어서, 직간접적으로 규제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심리나 문화는 경제학자들의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요소는 무시하거나 간단히만 언급하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다만, 실제 세상에 일어나는 일은 경제학적 합리성만으로 돌아가지 않는 듯합니다.
우리는 소비자로서 마트에 가격표가 딱 적혀있는 걸 많이 경험하곤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원래 기본은 부르는 게 값입니다. 부르는게 가격이고, 안 사면 그만입니다. 심지어 사람에 따라 다른 가격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부자이고, 돈 쓸 마음이 열려있는 것 같으면, 가격을 크게 부를 수 있습니다.
연차가 쌓이면 그에따라 임금이 결정되는 구조라 해봅시다. 오직 그렇게만 결정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임금협상의 경험은 없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만약에 협상에 따라서 임금이 크게 좌우될 수 있다면, 그러한 고정된 가격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임금을 높이려는 의지를 갖고 기업과 협상할 것입니다. 나는 이런이런 공헌을 했다 혹은 나는 이런 실력이 있다는 걸 입증했다 — 이러면서 가격을 높이려 할 것입니다.
누군가 무료로 재능기부를 하면, 그 분야에서 돈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의 수익이 감소할 것입니다. '나는 돈은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 사람들에게 무료로 재능기부할래.' —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이 배고파집니다.
'학자나 기술자가 돈을 탐하면 안 돼. 순수히 지적 열정을 해야 하는 것이지, 탐욕스러우면 안 되는 거야.' — 라는게 당연함으로 형성되어 있는 문화라면, 가격을 높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 학문 발전이 잘 되지 않고, 기술 발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아마 기업에서 탁월한 인재들에게 돈을 많이 주지 않는 여러 이유 중 두 가지는 이런 것일 겁니다. '기술자보다는 경영진이 돈을 더 많이 받는게 당연하지. 당연함에 위배되기 때문에, 상무보다 더 많이 버는 30대 기술자는 절대 존재해선 안 돼.'
또 하나는 그 일부가 많은 돈을 받으면, 나머지 사람들이 사기가 떨어진다고 안 줄 것입니다. '일부 기술자들 임금 올려주면 다른 기술자들도 올려줘야 되잖아. 그리고 기술자들 임금 올려주면, 다른 부서 사람들은 어떻게 돼? 다 같이 올려줘야 되잖아. 그럴 돈은 없어. 따라서 기술자에게 임금을 높여주면 안 돼.' — 그 결과 의대로 가거나, 혹은 해외로 나가버립니다. 혹은 워라밸과 안분자족 즉 적당히 일하면서, 적당히 벌고, 그걸로 만족합니다. 뭐 대단한 거 해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받은만큼 일하는 겁니다. 어차피 기업이 대단한 일을 해낼 의지도 없는 것 같고, 별로 희망도 없어 보이는데, 자리 보존에만 신경쓰면서, 승진은 해야 되니, 실력과 열정을 겸비한 사람이 보이면, 이런저런 구실로 견제하고 훼방놓으면 됩니다.
위계주의적 당연함과, 평등주의적 당연함이, 실력주의적 가격형성을 억제합니다. 엘리트 인재의 임금 상승을 억제합니다. 그 결과 해외로 나가버립니다. 그 결과 의대로 쏠려버립니다. 엘리트 인재가 없으니, 기업은 점점 영업이익이 줄어듭니다. 이익이 줄어드니 돈을 더욱 더 못 주겠습니다. 인재가 없고 이익이 줄어드니 투자도 잘 이뤄지지 않습니다. 미래를 팔아서 잠시 이익을 늘릴 수는 있습니다. 한가할 때는 그래도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중국이 치고 올라왔습니다. 엄청나게 열심히 일하는 엘리트 인재들이, 한국보다 100배는 더 많습니다. 당연함은 견고하고, 의지는 약해졌습니다. 성적우수자의 의대쏠림을 생각해보고, 해외로 고급인재 유출을 생각해보고, 안분자족을 생각해볼 때, 30배 차이가 아니라, 100배 차이라 보는게 그리 무리한 건 아닐 것입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인재들은 300명으로 3만명을 이길 수 있는, 스파르타 군대라도 되는 걸까요?
시간이 흐르고 있고,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문화의 힘입니다.
제도의 힘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널리 '탁월함'을 향한 욕망이 컸다면, 온갖 문제들이 다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탁월함을 향한 야망이 있고, 그것이 가능할 거라는 기대가 있을 때, 생겨나는 파워가 있습니다. 널리 사람들이 그렇게 야망과 기대를 품는다면, 문화적으로 생겨나는 파워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걸 가능케하는 것들에 투자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있고,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야망이 당연함을 생산합니다.
당연함이 가격을 결정합니다.
가격이 미래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