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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6/09 15:49:39
Name 된장까스
Link #1 http://sss.net.cn/117001/1723.aspx
Subject [일반] 그 남자는 과연 '천명'의 욕심이 없었을까 - 한 중국 교수의 논설 (수정됨)
출처는 사천사회과학원의 2005년 4월 7일 기재글, 20여년 전의 글입니다.




제갈량이 촉한에 충성했다는 주장에 대한 재인식



1.



유비가 백제(白帝)에서 고아(托孤)를 전할 때, 제갈량에게 "만약 내 아들 유선(劉禪)이 '재능이 없다면(不才), 군께서 스스로 취하라(君可自取)'"고 말했다. 옛사람들은 이를 논할 때 대부분 그 군신(君臣)이 간담상조(肝膽相照)한 관계로 칭찬하며, '물과 고기[魚水]' 비유로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를 유비의 "속임수 있는 말(詭僞之辭)"(《촉서·제갈량전》 주석으로 손성(孫盛)이 말함)로 보아 제갈량을 의심하고 시험하기 위해 "스스로 취하라"는 말을 썼다고 주장한다. 전여경(田余慶) 선생은 이 두 가지 상반된 견해 모두 동의하지 않으며, 《촉사사제(蜀史四題)——유비 탁고어(劉備托孤語)》一文中에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전여경 선생의 견해가 타당한지 여부는 필자가 당장 평론하지 않겠다. 필자는 유비의 탁고(托孤) 발언이 진심인지, 가식인지, 혹은 다른 계획이 있었는지 오늘날 더는 고증할 수 없으며 참으로 영원한 미스터리라 생각한다. 현재 검토해야 할 문제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황제가 되길 원했는지가 아니라, 제갈량 본인이 재상에서 황제의 자리로 오르고 싶어 했는지다. 이 문제는 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전여경 선생이 말한 대로 "제갈량이 촉한에 대한 충성심은 지금까지 누구도 의심한 적이 없다". 이를 의심하지 않은 이유는 역대 문인과 소설가들의 과장을 거치며 제갈량이 '성인(聖人)'으로 변모해, '몸을 바쳐 죽을 때까지 충성(鞠躬盡瘁)'하며 '충절의 귀감'이 된 탓이다. 역사학자들도 이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마도 이 문제를 고사(古史)의 금기시된 영역으로 느끼며 함부로 다루지 못했을 것이다. 제갈량을 성단(聖壇)에서 모셔 내리기 위해선 이 가장 까다로운 문제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사실 제갈량이 집권했을 당시, 그를 '군주를 예로 섬기고 나라를 충성으로 꾀한다'는 기준으로 보는 시각은 없었다. 오히려 촉한 정권 내부에서 이엄(李嚴), 요립(廖立), 내민(來敏), 위연(魏延) 등이 제갈량의 전제(專制)와 권력 장악을 비판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제갈량 생전에는 그의 권위에 눌려 감히 직언하지 못했으나, 그가 죽자마자 승상 참군(丞相參軍) 안한 장군(安漢將軍) 이막(李邈)이 후주 유선에게 상서(上書)를 올렸다:




여록(呂祿), 곽우(霍禹)가 반역을 꾀한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며 효선제(孝宣帝)도 신하를 죽이는 군주가 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신하가 그 핍박을 두려워하고, 군주가 그 위세를 겁내어 간사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제갈량(諸葛亮)은 몸소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杖彊兵], 이리처럼 뒤를 돌아보고 범처럼 노려보며[狼顧虎視], '오대(五大)'가 변경에 있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어기고 있었기에, 신은 항상 이를 위험하게 여겼습니다. 이제 제갈량이 죽어 종족이 보전되고 서융(西戎)이 잠잠해진 것은 대소 모두의 경사입니다.(《촉서·양희전》 주석으로 《화양국지》 인용)




소위 "낭고(狼顧)"에 대해, 《진서·선제기(晉書·宣帝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위무제(魏武帝, 조조)가 사마의(司馬懿)가 웅대한 포부를 가진 것을 알아차리고, 그가 '랑고(狼顧)의 상(相)'을 지녔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확인하려 했다. 그를 불러 앞으로 걸어가게 한 뒤 뒤를 돌아보게 했을 때, 얼굴은 완전히 뒤쪽을 향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조는) 태자 조비(曹丕)에게 '사마의는 신하의 모습이 아니니 반드시 네 집안 일에 관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낭고의 상(相)"은 바로 "신하가 아닌 자"의 상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막(李邈)은 제갈량 역시 사마의와 같은 "낭고"의 상을 지녔다고 지적하며, 그가 장차 유씨(劉氏) 천하를 찬탈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리라고 암시한 것이다.

"호시(虎視)"에 대해, 《후한서·반고전(後漢書·班固傳)》에 수록된 《서도부(西都賦)》에는 "주(周)는 용이 일어남으로써, 진(秦)은 호랑이가 노려봄으로써(周以龍興, 秦以虎視)"라는 구절이 있다. 이현(李賢)의 주석은 "용의 일어남과 호랑이의 노려봄은 강성함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반고(班固)의 실제 의도는 이렇다: 비록 주와 진 모두 "강성"했지만, 주는 "용의 일어남(德)"으로 천하를 얻었고, 진은 "호랑이의 노려봄(武)"으로 천하를 취했다. 이막이 이 전고(典故)를 사용한 것은 제갈량이 "강병을 손에 쥔(身杖强兵) 진(秦)의 호시"와 같음을 암시한 것이다.



《좌전·소공 11년(左傳·昭公十一年)》에는 "오대(五大)는 변방에 있지 않으며, 오세(五細)는 조정에 있지 않는다(五大不在邊, 五細不在庭)"는 기록이 있다. 공영달(孔穎達)의 《소(疏)》는 가규(賈逵)의 설명을 인용해 "오대란 태자(太子), 모제(母弟), 귀총 공자(貴寵公子), 공손(公孫), 누세 정경(累世正卿)을 말한다"고 해석한다. 이 다섯 부류는 권세가 있어 변방에 있으면 반역하기 쉽기 때문에 "오대는 변방에 있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막은 제갈량이 이 오대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보아, 그가 군사를 이끌고 변방에 있는 것이 촉한 조정을 위태롭게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제갈량을 한(漢) 왕실을 위협하려 했던 여록(呂祿), 곽우(霍禹)에 직접 비유했다.




이막의 상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제갈량의 숭고한 이미지를 수호하려는 입장이라면 이막의 상소를 모략적 중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분석하면 이막의 주장이 근거 없는 헛소리는 아님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진정한 "낭고"의 상을 가진 인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마의나 제갈량이 당대인들에게 그렇게 인식된 것은 단지 그들이 찬탈의 야심을 의심받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촉한 정권 내에서 이막뿐만 아니라 상서령(尙書令) 이엄(李嚴) 역시 제갈량이 신하의 도리를 저버릴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했다. 《삼국지·촉서·이엄전》 주석은 《제갈량집(諸葛亮集)》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엄이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 구석(九錫)을 받고 왕(王)의 작위를 받을 것을 권했다."

구석(九錫)이란 무엇인가? 《후한서》 장회(章懷) 주석에 따르면, 구석은 본래 위서(緯書) 《예함문가(禮含文嘉)》에서 유래했다: 1. 거마(車馬), 2. 의복(衣服), 3. 악기(樂器), 4. 주호(朱戶), 5. 납폐(納陛), 6. 호분(虎賁), 7. 부월(斧鉞), 8. 궁시(弓矢), 9. 거창(秬鬯).



매번 왕조가 선양(禪讓)하기 전에는 반드시 구석문(九錫文)을 통해 그 사람의 공적을 총괄하고 작위를 올리며 특별한 예우를 베풀었다. 역사를 고찰하면, 구석의 예는 극히 높은 격식으로 일반 신하가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호분(虎賁)은 천자의 호위병으로 "천자의 졸병을 호분이라 한다"(《진세가(晉世家)》 주석 가규 언급). 부월(斧鉞)과 금칙(金戚)은 천자의 의장용 무기였다. 거창(秬鬯)은 천자가 상제(上帝)와 신령에게 제사할 때 사용하는 술로, 《예기·표기(禮記·表記)》는 "천자가 직접 밭을 갈아 기장을 재배하고, 거창을 빚어 상제를 섬긴다"고 기록한다. 구석 중 "납폐(納陛)"도 있다. "납(納)은 안으로 들인다는 뜻으로, 궁전 기단의 가장자리에 계단을 만들어 드러나지 않게 한 것이다. 맹강(孟康)은 '존귀한 자는 계단이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설명했다."(《왕망전 상》 주석) 채옹(蔡邕)의 《독단(獨斷)》 권상에는 "폐(陛)는 계단으로, 궁전에 오르는 통로다. 천자는 반드시 근신(近臣)이 무기를 들고 계단 옆에 서서 불의의 사태를 경계한다"고 적혀 있다. 이후 "폐하(陛下)"가 천자를 지칭하는 말로 확장되었으므로, 권신(權臣)이 "납폐"를 받는 것은 곧 "폐하"로 진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로 보아 구석을 받은 자는 "가황제(假皇帝)"의 자격을 갖추고, 훗날 "진황제(眞皇帝)"가 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왕망(王莽) 이래로 권신이 왕조를 교체하고 제위를 찬탈할 때는 반드시 먼저 왕(王)에 봉해지고 구석을 하사받은 뒤 용포를 입고 황제에 올랐다. 한말 조조(曹操)가 구석을 받고 한(漢) 왕조를 선양받으려 했을 때, 그의 측근 순욱(荀彧)이 강력히 반대했다. "순욱은 평소 조조의 최고 참모였으나, 그가 구석을 막으려 하자 조조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왕부지(王夫之)는 순욱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구석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유씨(劉氏)의 종묘사직(宗社)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이때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지 않은 자라면 누구나 측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순욱도 천량(天良)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죽음이 눈앞에 닥쳤음을 알았더라도 스스로를 억누를 수 없었다.




이엄(李嚴) 역시 유비가 임종 시 탁고(托孤)한 중신이었다. 어찌 그가 천량(天良)이 "완전히 마비되어" 이성(異姓)이 유씨 강산을 찬탈하는 것을 용인했겠는가? 그가 천하의 비난을 무릅쓰고 제갈량에게 구석(九錫)을 받으라고 권한 것은 오직 하나의 해석만이 상식에 부합한다. 표면적으로는 제갈량의 공로가 세상을 넘어섰다고 추켜세워 특별한 예우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제갈량이 왕망(王莽)이나 조조(曹操)의 길을 걸어 구석을 받고 왕을 칭한 뒤 촉한을 대체해 황제가 될 것인지 시험해보려는 의도였다.

이치상으로, 탁고 중신인 제갈량은 이에 대해 격분하며 이엄을 엄히 질책하고 자신이 한결같이 군주를 섬기며 한(漢) 왕실에 충성할 뜻을 분명히 밝혀야 했다. 그러나 제갈량의 답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회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와 오랜 친분이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리 없소! 그대가 이제 나라를 빛내라 권하며 구속받지 말라는 도리로 경계하니, 묵묵히 있을 수 없구려. 나는 본래 동방의 하찮은 선비로, 선제(先帝)께서 잘못 기용하시어 인신(人臣)의 극한 자리에 오르고 백억의 녹봉을 받았소. 이제 적(魏)을 토벌하지 못하고 은혜에 보답치 못했는데, 제(齊)와 진(晉)처럼 영광을 누리며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의리가 아니오. 만약 위(魏)를 멸하고 조예(曹叡)를 참수하여 황제(後主)가 고도(故都)로 돌아간다면, 여러 신하와 함께 승진할 때 십명(十命)도 받을 수 있거늘, 하물며 구석(九錫)이겠는가!(《촉서·이엄전》 주석 《제갈량집》 인용)




《한서·왕망전(漢書·王莽傳)》은 "종신(宗臣)이 구명상공(九命上公)의 존귀함을 가지면 구석(九錫)으로 등극하는 영예를 얻는다"고 기록했다. 장안(張晏)의 주석은 "《주례(周禮)》에서 상공(上公)은 구명(九命)을 받는데, 구명이 바로 구석이다"라고 설명한다. 제갈량이 말한 "십명(十命)"은 "구석" 외에 "일석(一錫)"을 더한 것을 가리키며, 이는 이엄이 권한 구석보다 한 단계 높은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제갈량의 이 발언이 상당히 오만하게 들린다고 본다. "몸을 바쳐 죽을 때까지 힘쓰겠다"는 자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오히려 난신적자(亂臣賊子)의 말처럼 보인다. 주지하듯, 구석은 신하의 상용 의례가 아니다. 한(漢)의 제도에 따르면 유씨(劉氏)가 아니면 왕(王)에 봉해지지 않는다. 조조가 위왕(魏王)에 봉해지고 구석을 받은 것은 불충한 마음이 뻔히 보였던 일이다. 제갈량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한(漢)과 위(魏) 교체기에는 조조 외에도 유비가 스스로 구석을 받아 한중왕(漢中王)이 되었고, 손권(孫權)이 위(魏)의 조비(曹丕)에게서 구석을 받아 오왕(吳王)이 되었다. 조조·유비·손권은 삼국(三國)의 군주들인데, 제갈량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 했단 말인가?


제갈량보다 조금 뒤의 동진(東晉) 승상 왕도(王導)는 진(晉) 왕실을 재건한 공로로 당대에 비교할 수 없는 위세를 누렸다. 당시 사람들은 "왕(王)과 마(馬, 황제 사마씨)가 천하를 공유한다"고 말했으며,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가 즉위할 때 왕도에게 어상(御床)에 함께 앉아 백관의 조배를 받으라 명하기까지 했다. "왕도가 굳이 사양하여 세 번이나 거절했다." 이후 사도(司徒) 채막(蔡謨)이 "조정에서 공(王導)에게 구석을 가하려 한다"고 농담하자 왕도는 이를 알아채지 못한 체 겸손히 사양했다. (《진서》 왕도전 인용). 이에 비하면 제갈량은 인신(人臣)의 큰 금기를 전혀 꺼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위(魏)를 멸하고 한(漢)을 중흥시키면 자신이 당연히 왕에 봉해져 구석을 받을 것"이라 선언한 셈이다.

물론 단지 제갈량이 구석을 사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가 반역을 꾀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한 추측이며, 근거가 충분하지 않아 완전히 납득시키기 어렵다.


제갈량과 유비의 군신 관계는 세인의 찬사를 받았으나, 제갈량과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관련 사료를 분석하면, 제갈량이 집권한 후 유선을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오만하게 군림하며 황제를 훈계했다. 제갈량은 상소에서 "진실로 성상(聖聽)을 넓히셔서 선제(先帝)의 남긴 덕을 빛내고, 지사(志士)의 기상을 북돋워야 하며, 함부로 스스로를 폄하하거나 잘못된 비유로 충언(忠言)의 길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또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일체로, 승진과 처벌, 선악 평가가 달라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며, 특히 "범법자나 충신은 유관 부처에 넘겨 형상을 결정케 하여 공정함을 보이시고, 사사로움으로 내외의 법을 달리해선 안 됩니다"(《촉서·제갈량전》)라고 강조했다. 이 말은 치국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지만, 연이은 "마땅히(宜)"와 "하지 말아야(不宜)"라는 표현은 신하의 말투가 아닌, 말 안 듣는 아들을 훈계하는 엄한 아버지 같았다. 특히 "궁중과 부중이 일체"라며 자신의 승상부(丞相府)를 황제의 궁궐과 동등하게 여긴 것은 황제 위에 군림하는 행위로, 봉건 체제의 군신(君臣) 관계를 심각히 위반한 것이다.


유비 생전 유선의 지능을 평가한 적은 없으나, 제갈량은 유비에게 유선이 "지혜가 크게 늘어 기대 이상"이라 칭찬했다. 유비는 임종 시 "이렇다면 내 무슨 근심이 있겠느냐"(《촉서·선주전》 주석 《제갈량집》)며 안심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제갈량이 북벌을 앞두고는 "후주가 젊어 선악(朱紫)을 구분하기 어렵다"며 시중(侍中) 동윤(董允)을 호분중랑장(虎賲中郞將)으로 임명해 친위대를 통솔하게 했다. 그는 유선에게 "궁중의 일은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두 동윤과 상의하라"고 지시했고, 동윤이 유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니 "후주가 그를 더욱 두려워했다". 이로써 유선은 황제의 위엄을 잃고 행동의 자유마저 박탈당했다. 유비 사망(223)부터 북벌(227)까지 5년도 안 되어 유선의 지능이 "크게 늘었다"에서 "선악 불분명"으로 격하된 이유는 무엇인가? 제갈량의 이중적 평가 속 의도는 무엇이며, 어찌 기군(欺君)의 죄를 염려하지 않았는가?


유비는 임종 시 제갈량을 탁고(托孤) 대신으로 삼았으나, 인사 배치상 그를 단독 집정자가 아닌 보정(輔政) 신하로 지정했다. 유비는 제갈량과 이엄(李嚴)에게 유조를 받들어 보정하게 했을 뿐 아니라, 차남 유영(劉永)을 불러 "내 죽은 후 너희 형제는 승상을 아버지처럼 섬기며 함께 정사를 돌보라"(《촉서·선주전》 주석 《제갈량집》)고 명했다. 이는 유선 형제가 제갈량과 공동으로 촉을 다스리되, 원로인 제갈량을 존경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유비의 유지를 완전히 저버렸다. 이엄을 영안(永安)에 남겨둔 채 자신은 유비의 영구를 모시고 성도로 돌아가 장례 후 즉시 "부(府)를 열어 정사를 처리했다." 이후 촉한의 모든 군사와 정치를 장악한 그는 "정사가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두 제갈량이 결정했다". 북벌 당시 유선은 20대 청년으로 한 제도상 정권을 반환받아야 했으나, 제갈량은 권력을 놓지 않았다. 유선은 불만이었으나 "정사는 제갈씨에게, 제사는 과인(寡人)에게 달렸다"(《촉서·후주전》 주석 《위략》)고 탄식할 뿐이었다. 이는 한헌제(漢獻帝)가 조조에게 조종당하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세인은 조조가 "주군을 속였다"고 비판하지만, 제갈량의 "기군(欺君)"은 왜 외면받는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제갈량 사후 유선은 어느 정도 그의 불만을 표출했다. 예를 들어, 이막(李邈)이 "제갈량이 전횡을 일삼았다"고 상소하자 "후주가 노해 그를 옥에 가두고 처형했다"(《촉서·양희전》 주석 《화양국지》). 이막이 처형된 이유는 단순히 제갈량을 비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상이 그(제갈량)의 위세를 두려워했다"는 발언이 허수아비 군주였던 유선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또한 제갈량의 사당 건립 문제에서도 유선은 계속 방해했다. "제갈량이 죽자 각지에서 사당 세우기를 청했으나, 조정에서 예법을 이유로 거부하자 백성들이 길가에서 사사롭게 제사를 지냈다. 일부가 성도(成都)에 사당을 세우자고 건의했으나 후주가 듣지 않았다."(《촉서·제갈량전》 주석 《양양기》) 결국 건의자들이 면양(沔陽)에 사당을 세우고 백성의 사적 제사를 금지하는 안을 내니 후주가 마지못해 승낙했다. 이는 유선의 보복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갈량 사후 촉한은 재상직을 폐지하고 장완(蔣琬)을 상서령(尙書令)과 대장군(大將軍)으로, 이후 비의(費禕)를 상서령·대장군으로, 장완을 대사마(大司馬)로 임용했다. "장완이 죽자 유선이 직접 국정을 처리했다"(《촉서·후주전》 주석 《위략》). 유선이 재상제를 폐지한 이유는 두 번째 제갈량의 출현을 막기 위함이었다.

실제 유비의 영안(永安) 탁고(托孤) 대상은 제갈량 단독이 아닌 이엄(李嚴)과 함께였다. 장무(章武) 3년, "선주(유비)가 병들어 이엄과 제갈량을 함께 유조(遺詔)로 소년 군주(유선)를 보필하게 했으며, 이엄을 중도호(中都護)로 삼아 내외 군사를 통솔하게 하고 영안에 주둔시켰다". 이엄은 군사권을 장악한 핵심 인물이었다. 유비의 구상은 제갈량이 정치, 이엄이 군사를 담당해 공동 보좌하는 것이었으나, 제갈량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이엄을 배제했고, 결국 그를 서민으로 폄적시켜 자동군(梓潼郡)으로 유배했다. 전여경(田余慶)과 윤운공(尹韻公) 학자가 이엄 숙청 사건을 상세히 논증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제갈량 집권 시 촉한 정권 내 이엄·요립(廖立)·위연(魏延) 등 소수가 반발했을 뿐 대다수 관료는 복종했다. 유비의 "자식이 무능하면 군(제갈량)이 스스로 취하라"는 유언은 제갈량을 '태상황(太上皇)'으로 만들었으며, 조정은 그를 사실상 '황제'로 섬겼다. 예를 들어, 북벌 전 오(吳)와의 동맹 재개를 위해 등지(鄧芝)를 사신으로 파견했을 때, 손권이 "촉주(유선)가 어리고 국세가 약해 위(魏)에게 밀릴까 염려된다"고 말하자 등지는 "대왕(손권)과 제갈량은 시대의 영웅이며, 촉과 오의 협력은 천하를 얻을 길"이라 답해 손권을 설득했다. 이처럼 제갈량의 권위는 국제적 위상까지 반영되었다.


역사가들은 종종 등지(鄧芝)가 탁월한 외교 능력으로 오촉(吳蜀) 동맹 회복에 큰 공헌을 했다고 칭송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발언에서 유선(劉禪)을 경시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손권이 "촉주가 어리고 약하다"고 말했을 당시 유선은 17세로, 전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이는 아니었다. 한(漢)·위(魏) 교체기에는 젊은 영웅들이 많았다. 손오(孫吳)의 창업주 손책(孫策)은 15세에 아버지 손견(孫堅)을 따라 동탁(董卓) 토벌에 참전했고, 20세에 강동(江東)을 정벌해 6군을 점령하며 손오의 기반을 닦았다. 손책이 암살당한 후 18세의 손권(孫權)이 뒤를 이었다. 등지가 주군의 위엄을 지켰다면 이에 반박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손권의 "촉주 유약론"에 대해 답변 없이 "손권은 시대의 영웅, 제갈량은 당대의 준걸"이라며 제갈량을 손권과 동등한 '일국(一國)의 군주'로 격상시켰다.


손권은 현명한 "웅략의 군주"였기에 촉한이 실질적으로 제갈량이 주도함을 알고, 황제의 위계를 내려놓고 직접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등지를 칭찬했다: "두 나라를 화합시킨 것은 오직 등지뿐이다." 실제로 손권은 제갈량과 빈번히 교류했다. "유비가 병사하고 유선이 즉위하자 제갈량이 정권을 잡아 손권과 동맹을 맺었으며, 중요한 일은 항상 육손(陸遜)을 통해 제갈량에게 전달하고 손권의 인장을 새겨 육손에게 수여했다."(《오서 육손전》) 손권은 육손을 통해 교류했으나 완전히 권한을 위임하지는 않았다. 육손이 제갈량에게 보낸 서한에는 손권의 옥새가 찍혔으니, 이는 고대 중국의 엄격한 군신(君臣) 예법을 반영한다.


반면 제갈량은 "유선이 정치에 서툴다"는 구실로 "내외의 권력을 총괄"(《촉서·후주전》 주석 《위략》)하며 외교에서도 유선을 완전히 배제하고 손권과 대등한 '대화'를 진행했다. 군신 간의 예법을 무시한 이 행위는 그의 독단적 권력 행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



여기까지 서술하자,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제갈량의 "야심"이 분명하다면, 왜 유선을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았는가? 진옥병(陳玉屏)은 그의 글에서 이렇게 논했다:




당시 상황에서 공적은 제갈량이 촉한을 위해 세웠고, 권력은 군사와 외교를 모두 장악했으며, 재능은 유선과 천양지차였다. 덕망 역시 두터웠고, 유비의 '군이 취하라'는 유언까지 있었으니, 선양(禪讓)의 조건은 충분했다.




그러나 필자는 실제 상황이 이렇게 단순하지 않았다고 본다.

진(秦)·한(漢) 이후 황제의 지위는 "군권신수(君權神授)"로 신성불가침했다. 유교적 교화로 "천자는 하늘의 명을 받들고, 천하는 천자의 명을 받든다"는 관념이 뿌리내렸다. 권신이 선양을 통해 제위를 찬탈하는 것은 큰 위험을 수반했다. 왕망(王莽)은 10여 년을 준비했으나 실패했고, 동탁(董卓)·원술(袁術)은 즉시 멸망했다. 조조(曹操)는 천하의 3분의 2를 장악했으나 끝내 황제가 되지 않았다. 사마씨(司馬氏)도 3대에 걸쳐 위(魏)를 찬탈했으며, 조융(趙翼)은 이렇게 지적했다:



사마의(司馬懿)는 승상과 구석(九錫)을 사양했고, 사마사(司馬師)·사마소(司馬昭)도 거듭 사양하다 결국 진왕(晉王)에 오른 후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선양을 받았다.




조조와 비교해 유비의 즉위는 "인화(人和)" 면에서 유리했다. 조조가 "한실을 찬탈한 역적"으로 낙인찍힌 반면, 유비는 "한경제(漢景帝)의 후예"로 인정받았다. 220년 조비(曹丕)가 한을 멸하고 위를 건국하자, 유비는 한중왕(漢中王)으로서 한실 중흥의 기치를 들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반대가 있었다. 익주 전부사마(前部司馬) 비시(費詩)는 유비의 즉위를 반대하며 상소했다:




전하께서 조조 부자의 전횡을 막기 위해 군사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적이 멸망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황제를 칭한다면 인심이 흩어질 것입니다. 한고조(漢高祖)께서도 진(秦)을 멸한 후 왕위를 사양했는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한의 전) 영토도 다스리지 못한 채 즉위하려 하십니까?




유비가 한나라의 계통을 계승하는 것조차 극력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물며 제갈량은 다른 성씨의 신하로서, 유언으로 중책을 맡은 시점에 이미 한나라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하고, 왕조를 바꾸려 했으니, 이것이 천하의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확실히, 유비는 임종 시에 제갈량에게 "스스로 취하라"고 허락했지만, 이는 결코 유비의 희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조치였으며, 전제 조건은 유선이 "재능이 없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제갈량이 집정할 때, 유선은 여전히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할" 수 있었고,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제갈공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그래서 진수가 그를 "현명한 재상을 임용하여 이치에 따르는 군주가 되었다"1라고 칭찬했으니, 제갈량이 어떤 이유로 그를 쉽게 폐위시킬 수 있었겠는가?


유비가 세상을 떠난 후, 제갈량은 비록 조정의 대권을 독점했지만, 촉한 정권 내에서 아직 절대적인 권위를 확립하지 못했다. 제갈량의 국가 통치와 민생 안정의 정치적 재능, 그리고 오나라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하는 외교적 재능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의 군사적 재능이 과연 어떠했을까? 유비가 생존했을 때, 제갈량은 단지 "백성을 안정시키고 전략을 세우는 일"만 담당했을 뿐, 단독으로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삼국시대는 전쟁의 시대였으며,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서는 국가를 세울 수 없었다. 조조, 사마의, 손책, 주유, 육손 등은 모두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제후들을 위협하고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제갈량이 한나라를 대신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촉한 조정에서 높은 명성과 절대적인 권위를 세워야 했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나는 군공을 세워야 했다.


"한나라와 적은 함께 존재할 수 없으며, 왕업은 편안히 한쪽에만 머물 수 없다"(《촉서·제갈량전》 주석에서 《한진춘추》를 인용), 촉한 정권에게 있어서 북벌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제갈량 개인에게 있어서, 북벌하지 않으면 그의 군사적 재능을 보여줄 수 없고, 촉중의 사인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을 것이며, 개인적인 명성을 세울 수도 없어, 결국 황제의 보좌에 오르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제갈량의 전·후 《출사표》의 주제는 두 글자로 요약된다: 북벌. 이는 제갈량이 집정한 후, 국가 전체가 시종일관 추진한 변하지 않는 정책이었다. "만약 위나라를 멸하고 조예를 참수하여, 황제가 옛 거처로 돌아가고, 여러 자손들과 함께 오르게 된다면, 십명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구석이겠는가!" 내가 보기에, 제갈량의 이 말은 전혀 꾸밈이나 거짓이 없으며, 오히려 진심이 드러난 것이다. 왜냐하면 북벌이 일단 성공을 거두면, 제갈량은 공적이 세상을 뒤덮어 아무도 그와 겨룰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그는 이미 공이 너무 높아 상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가 "재능 없는" 유선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취하려" 한다면, 이미 견고한 기반과 풍부한 정치적 자본을 갖추게 될 것이다.


제갈량이 북벌의 목적이 구석을 받아 한나라를 대신하여 황제가 되기 위한 것이라는 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비슷한 예를 들어 비교해볼 수 있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백여 년 후, 동진의 권신 또한 이와 같은 방법으로 같은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동진은 강좌에 편안하게 머물렀고, 중원과 두 수도는 오랫동안 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동진 조야 상하는 모두 북벌과 옛 수도로의 회귀를 공개적인 정치적 깃발로 내걸었다. 그러나 동진의 북벌은 양날의 검이었다. 동진 조정에게 있어서, 북벌이 성공하면 비록 옛 땅을 회복하고 화하를 통일할 수 있었지만, 권신들은 공이 높아져 커지면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동진의 권신들은 항상 북벌을 권세와 명성을 높이는 자본으로 삼았다. 북벌에서 조금이라도 승리를 거두면, 즉시 왕의 봉작과 구석의 하사를 기대하며, 왕조를 바꾸는 조건을 만들었다. 동진의 대장군 환온이 촉을 멸망시킨 후, 그의 명성은 크게 높아져 "조정이 그를 두려워했고", "정치는 환씨에 의해 이루어지고, 제사는 과인(황제)이 맡는다"는 정치적 구도가 형성되었다(《효무제기》 사신의 말).


환온은 중외 제군사를 도독하면서, "스스로 영웅적인 계획이 세상에 없고, 공적이 시대를 뛰어넘는다고 여겨, 주인을 진동시키는 위엄을 지니고, 군주가 없는 뜻(無君之心)을 품었다.(진서 환온전)," 환온은 비록 제위를 탐냈지만, 반드시 "조·위에서 특출한 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환온전), 관중과 허락 지역을 회복해야만 신하의 명분을 넘어서는 구석의 특별한 예우를 받을 수 있으며, 나아가 진나라 황제를 협박하여 양위케 할 수 있었다. 역사에 기록된 바: "환온은 자신의 재능과 힘을 믿고, 오랫동안 다른 뜻을 품고 있었으며, 먼저 하삭에서 공을 세워 돌아와 구석을 받고자 했다." 은호가 실패하여 폐립된 후, "내외의 대권이 모두 환온에게 돌아갔다." 환온은 군대를 이끌고 북벌을 했는데, 처음 두 번은 비록 일정한 전과를 거두었지만, 태화 4년(369)의 세 번째 북벌은 참패로 끝났다. "크게 패배하자, 명성과 실속이 모두 줄어들었다(진서 환온전)" 사안, 왕표지 등 세가대족의 저지 아래, 환온이 구석을 받으려는 계획은 결국 물거품이 되었다.


만약 환온의 "하삭에서 공을 세워 돌아와 구석을 받고자 했다"는 말과 제갈량이 말한 "만약 위나라를 멸하고 조예를 참수하여, 황제가 옛 거처로 돌아가고, 여러 자손들과 함께 오르게 된다면, 십명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구석이겠는가"를 대조해보면, 두 사람이 비록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대체로 비슷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그들의 언행이 얼마나 유사한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제갈량과 환온에 비해 남조 송나라의 개국 군주 유유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의 북벌은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구석(九錫)을 하사받았고, 결국 사마씨의 강산을 빼앗을 수 있었다. 《위서》 권97 〈도이유유전〉에는 "유유가 참람한 진(晉)을 전복시키려는 뜻을 품고, 만약 외부에 공명을 세우지 않으면 인망이 따르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서쪽으로 요흥(姚泓)을 정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희 12년(416) 8월, 유유가 군사를 이끌고 북벌에 나서기 전, 그의 심복 유목지(劉穆之)가 용양장군 왕진악(王鎮惡)에게 말하기를 "공(公)이 지금 경에게 관중(關中)을 맡기시니 그대는 힘써야 할 것"이라 하자, 진악이 답하기를 "내 지금 함양(咸陽)을 점령하지 못하면 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며, 공의 구석이 이르지 않는다면 또한 그대의 책임일 것"(〈도이유유전〉)이라고 했다. 진군은 억압할 수 없는 기세로 같은 해 10월 낙양을 함락시켰으나 조정에서는 아직 "구석을 하사하지 않았다". 왕홍(王弘)이 유유의 명을 받들고 수도로 돌아가 "조정에 은유하여 뜻을 전하(《왕홍전》)"여 구석 가봉을 요구했다. 유유가 관중을 평정하고 후진주 요흥을 사로잡자 진안제는 "유유에게 10개 군을 송공(宋公)으로 봉하고 상국(相國)과 구석을 더하여 위진(魏晉)의 고사를 참람하게 모방했다"(〈도이유유전〉). 이윽고 유유는 진을 찬탈하고 황제에 올라 송나라 정권을 수립하였다.


촉한의 북벌 성공 가능성은 도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사실 제갈량의 심중은 매우 명확했다. 《융중대》에서 제정한 "천하에 변고가 생기길 기다려" 익주와 형주 양로군이 동시 출병하여 조위를 협공할 전략 계획은 "관우가 패배하고 자귀(秭歸)에서 실패"(〈촉서 제갈량전〉 주장엄《묵기》인용)함으로써 이미 물거품이 되었다. 파촉지역은 비록 '천부'라 칭해졌으나 결국 "일주(一州)의 땅으로 대국(曹魏)과 비교하면 그 전사와 인민은 아마도 9분의 1에 불과했다"(〈촉서 제갈량전〉 주장엄《묵기》인용). 이로 보아 촉한의 종합 국력은 조위와 비교할 수 없었다. 비록 제갈량의 외교적 노력으로 오촉이 다시 동맹을 회복했으나 양국 간의 균열은 근본적으로 완전히 메워질 수 없었고, 양측은 각기 경계심을 품은 채 단지 상호 불가침에 만족했다


제갈량의 말을 빌리면: "내가 북벌할 때 동쪽의 우려가 없으니 하남의 적들이 서쪽으로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이로운 점이 이미 깊다"(〈촉서 제갈량전〉 주《한진춘추》인용). 오국의 협력을 잃고 단독으로 촉한의 힘만으로 중원을 수복하고 천하를 통일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삼국시대 초일류 정치가인 제갈량은 적아(敵我)를 잘 알고 있었으며, 정세 판단에 있어서도 명확했으므로 이 점을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왜 제갈량은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억지로 시행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진수(陳壽)는 오히려 훌륭한 해석을 제공했다: "제갈량의 소지는 진취적으로는 용양호시(龍驤虎視)하여 사해를 포괄하고, 퇴보적으로는 변경을 넘나들며 천하를 진동시키려 했다.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없는 날에는 중원을 유린하고 상국(曹魏)과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라 여겨, 이에 군사를 그치지 않고 자주 무력을 과시했다"(〈촉서 제갈량전〉). 이는 명백히 우리에게 제갈량이 북벌을 통해 증명하려 했던 점이, 촉한 정권에서 "중원을 유린"하고 강적 조위와 맞설 수 있는 자는 오직 자신뿐이라는 점이었으며, 이는 그가 "자취(自取)"하는 과정에서 극히 중요한 정치적 법마(砝碼)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진수가 제갈량을 평하길: "제갈량의 재능은 치군(治軍)에 장점이 있고 기모(奇謀)에는 단점이 있으며, 백성 다스리는 재간은 장략(將略)보다 우월했다"(〈촉서 제갈량전〉). 제갈량의 군사적 생애에서 기모를 사용한 사례가 드문 것은 사실이며, 진수의 논평은 제갈량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이 현대 삼국사 연구자들의 공감대이다. 그렇다면 왜 제갈량은 "기모"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가 군사적 재능이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었을까? 오나라 대홍려(大鴻臚) 장엄이 제갈량과 사마의의 군사적 재질 우열을 논평할 때 지적한 바:




공명(孔明)은...수만 보병을 이끌고 기산(祁山)으로 장구히 진격하여 개연히 하락(河洛)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겠다는 뜻을 품었다. 중달(仲達, 사마의)은 천하의 10배 땅을 점거하고 병합한 대군을 믿고, 견고한 성에 의지하며 정예병을 보유했으면서도 적을 섬멸할 뜻은 없이 오직 자기 보전에만 힘써 저 공명이 오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만약 이 사람(제갈량)이 죽지 않았다면 그의 뜻을 끝까지 펼쳐 해마다 계획을 운용하고 날짜를 정해 기책을 행했다면 양주와 옹주는 갑옷을 벗지 못했을 것이고 중원은 말안장에서 내리지 못했을 것이니 승패의 형세도 이미 결정되었을 것이다.(〈촉서 제갈량전〉 주장엄《묵기》인용)




물론, 장엄이 제갈량을 칭찬하고 사마의를 폄하하는 논평은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 당시 사람들이 제갈량의 군사 전략에 감탄했음을 반영한다. 삼국시대 일류 군사전략가인 제갈량이 기습으로 승리하는 병법의 상식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기모(奇謀)"를 사용하는 것은 극도의 위험을 수반한다. 만약 "기모"가 실패하면 군대가 큰 손실을 입게 되고, 제갈량 본인은 명성을 잃고 황제에 오르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제갈량과 위연(魏延)의 북벌 경로 논쟁은 후대 사가들의 큰 관심을 끌며 끝없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학자들은 위연의 제안인 5천 정예병을 이끌고 포중(褒中)에서 자오곡(子午谷)으로 출격해 장안을 기습하고, 제갈량이 대군을 이끌고 사곡(斜谷)으로 나와 장안에서 합류하는 계획이 "기모"라 여기며 "이렇게 되면 함양 서쪽을 단번에 평정할 수 있다"〈촉서 위연전〉 주《위략》인용)고 주장한다. 만약 제갈량이 이를 받아들였다면 북벌이 성공했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그는 지나치게 신중하여 결국 실행하지 않았다고 본다. 반면 다른 사가들은 제갈량의 "안정된 길로 나아가 농우(隴右)를 평정하겠다"는 전략(〈촉서 위연전〉 주《위략》인용)을 지지하며, 자오곡 북진이 비록 빠른 길이지만 위험도가 극히 높아 위군이 곡구를 막으면 최소한 노력만 허비하고 최악의 경우 전군이 궤멸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필자는 이 두 견해가 순수 군사적 관점에서 문제를 분석했을 뿐, 그 배경에 더 깊은 정치적 원인이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북벌의 성패는 촉한 정권의 안위뿐만 아니라 제갈량의 "선양(禪讓)을 통한 권력 장악"이라는 정치적 목표 실현 여부와도 직결되었다. 제갈량은 이 중대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신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사실 제갈량의 북벌에 대한 기대치는 그리 높지 않았다. 약소국 촉이 강대국 위를 공격한다는 것 자체가 군사사적 기적이었으며, 조위의 일부 영토를 빼앗고 지역적 승리를 거두는 것만으로도 제갈량의 뛰어난 군사 재능을 증명하고 높은 정치적 명성을 얻기에 충분했다. 만약 위연의 계획대로 장안 기습에 성공하더라도, 위연 자신의 예측대로 20일 안에 위군이 재집결하여 반격해오면 촉군은 조위의 심장부인 관중에서 위군 주력과 결전을 벌여야 한다. 장기화되면 제갈량이 조정에 돌아가 정권을 장악하지 못해 권력이 타인에게 넘어갈 위험이 있었다. 일단 실패하면 촉군이 큰 손실을 입어 제갈량은 "자취(自取)" 계획은 물론 재상 지위조차 보장받기 어려워진다. 개인의 정치적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결정이니 제갈량이 삼가고 또 삼갔음은 당연하다.

제갈량의 북벌 심리 분석은 단순히 필자의 추측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유사한 사례가 존재한다. "하북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와 구석을 받겠다"는 동진의 장군 환온(桓溫) 역시 북벌의 결정적 순간에 관중에서 강적과 결전을 피했다. 영화 10년(354) 2월, 환온이 북벌을 진행하며 승리를 거듭해 장안 근처까지 진격했을 때 북방 명사 왕맹(王猛)이 "환온이 관중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헐렁한 옷을 입고 찾아가 이를 잡으며 천하사를 논하니 주위 사람들이 없는 듯이 행동했다. 환온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왕맹은 '공이 수천 리를 멀리 와 적지 깊이 들어왔으나 장안이 코앞인데도 패수를 건너지 않으니 백성들이 공의 마음을 알 수 없어 오지 않는 것'이라 답했다. 환온은 묵묵히 대답하지 못했다." 호삼성은 (자치통감) 주석에서 "왕맹은 환온의 속마음을 지적한 것이라, 환온이 진(秦)을 정벌한 것은 강동을 진압할 공명을 세우려 함이지 참된 뜻이 죄를 토벌하고 백성을 구원하며 영토를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러니 패수를 건너 장안을 공격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환온이 대답할 말이 없었던 것"이라 분석했다. 환온이 북벌 중 장안까지 진군했으나 공격하지 않고 "신중하게 관망"한 이유는 첫째 전력 보존, 둘째 실패가 제위 찬탈에 방해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유유(劉裕)의 북벌은 가장 빛나는 전과를 거두며 일시적으로 장안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유유는 진(晉)을 찬탈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관중(關中)에 오래 머물면 조정에 변고가 생길까 두려워, 겨우 12세 된 아들 유의진(劉義眞)을 장안에 남겨두고 급히 건강(建康)으로 돌아갔다. 역사기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삼진(三秦)의 백성들이 유유가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문앞에 모여 눈물로 호소하길 '우리 잔민들이 왕화(王化)를 입지 못한 지 이미 백 년, 이제야 의관(衣冠)을 보게 되어 모두 기뻐하던 참입니다. 장안의 십릉(十陵)은 공의 조상 묘소이며 함양 궁전은 공의 집이니, 이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 유유는 민망해하며 위로하길 '조정의 명을 받들어 감히 머물 수 없노라'..."(〈자치통감 119권〉)





이는 유유의 자아기만적 변명에 불과했다. 하(夏) 국주 혁련발발(赫連勃勃)의 군사 왕매덕(王買德)이 유유의 속셈을 간파하고 지적했다: "관중은 지형이 뛰어난 곳인데 어린 아이를 지키게 하니 장구한 계획이 아니다. 허둥지둥 돌아간 것은 찬탈을 서두르려 함이니 중원을 돌볼 겨를이 없을 뿐이다."(《진서》 〈혁련발발재기〉)과연 왕매덕의 예측대로 유유는 "찬탈을 서두르기 위해" 관중을 포기했고, 얼마 안 되어 장안은 다시 호족(胡族)의 손에 떨어졌다.

동진(東晉)의 국력에 비해 촉한은 훨씬 열세였다. 따라서 제갈량은 북벌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그는 북벌 목표를 농우(隴右) 일대로 정해 "분열시켜 점차 잠식"(〈촉서 장완전〉)하고 "영토를 넓히려"(〈촉서 법정전〉)함으로써 부분적 승리를 추구했다. 정치적 상황과 지리, 인화 조건으로 보아 농우 지역은 조위 통치권 내 가장 취약한 고리이자 가장 공격하기 쉬운 곳이었다. 제갈량은 "농우를 평정함으로써" 승리를 확신했기에 "완벽한 계획으로 실패 없이 승리할 수 있어 위연의 계략을 채택하지 않았다"(〈촉서 위연전〉 주《위략》인용).

위연은 병사들을 잘 통솔하고 용맹과 전략이 뛰어나 촉한 유일의 천하명장이었다. 유비가 위연을 한중독(漢中督)으로 발탁했을 때 "온 군대가 경악"했으며, 북벌 과정에서 위연은 조위 명장 곽회(郭淮)를 대파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제갈량은 북벌 시 "촉병은 경무장했으나 우수한 장수가 부족함"(〈제갈량전〉 주《원자》인용)에도 불구, 위연 같은 인재에게 독립적인 지휘권을 주지 않았다. "위연이 매번 제갈량을 따라 출전할 때마다 만 명의 병력을 요청하며 제갈량과 별도의 길로 나아가 동관(潼關)에서 합류하려 했으나, 제갈량은 이를 막았다. 위연은 종종 제갈량이 겁쟁이라 여기며 자신의 재능이 제대로 쓰이지 않음을 한탄했다."(〈촉서 위연전〉) 제갈량이 위연의 군사적 재능을 모른 것은 아니었으나, 그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지 않은 까닭은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벌이 제갈량의 "자취(自取)"를 위한 정치적 자본이었기에 군사 지휘권은 반드시 자신의 수중에 있어야 했다. 위연이 전공을 세우더라도 제갈량의 직접적 지휘 하에서, 그의 신기한 계략에 따른 결과여야만 했다. 그러나 "성격이 오만"(〈촉서 위연전〉)했던 위연이 "한신(韓信)의 고사처럼" 독립 부대를 지휘하려 한 것은 제갈량에게는 자신의 "지도"를 벗어나 북벌의 공을 나누려는 시도로 보였으며, 이는 당연히 거부당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융중을 나온 이후 정치적 길은 순탄했다고 할 수 있다. "난세에 목숨만 겨우 보전하고 제후들에게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농부에서 촉한의 군사와 정치의 최고 권력을 장악한 재상으로 우뚝섰다. 유비의 "스스로 취하라(自取)"는 허락 아래 제갈량은 황제 자리에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나 "북벌"은 마치 오를 수 없는 높은 산처럼 제갈량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길을 막았다. 228년부터 234년까지 제갈량은 다섯 번 위나라를 정벌했으나, 연이은 출병으로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촉한은 병사와 백성들이 피폐해졌다. 북벌을 위해 촉한의 청년들은 거의 모두 군대에 징집되었고, 후방 지원을 보장하기 위해 여성들까지 동원되었다. 제갈량은 "헛되이 군대를 동원해 해마다 정벌했으나 한 치의 땅도 넓히지 못하고 제왕의 기반을 열지 못한" 반면 "국내는 황폐해졌고 서쪽 땅의 백성들은 부역과 세금에 시달렸다"(《촉서·제갈량전》 주석 장엄의 《묵기》 인용). 이로 인해 촉중 사민들의 불만이 광범위하게 일어났으며, 이런 상황에서 평생 신중했던 제갈량은 당연히 한나라의 선양을 받을 수 없었다. 오장원에서 별이 지며 제갈량이 병사하자 그의 "자취(自取)" 목표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북벌을 위해 제갈량은 진실로 "몸을 바쳐 힘을 다하다 죽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으나" 그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이 존경하는 "충심" 외에 매우 은밀하고 알아채기 어려운 "사심"이 있었을까? 물론 이 두꺼운 신비의 베일을 벗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백거이가 《방언오수병서》에서 말했듯이 "주공이 유언을 두려워했던 날, 왕망이 겸손히 참았던 때, 만약 당시에 죽었다면 진실과 거짓을 누가 알았으랴"라고 한 것처럼이다.

사실 인간의 욕망과 추구하는 목표는 주객관적 조건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조조도 "처음부터 황제의 자리를 탐내지 않았다". 그는 《양현자명본지령》에서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단지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해 공을 세워 후작에 봉해지고 정서장군이 되고자 했을 뿐'"이라 했으며, 이는 그의 본심이었다(《위서·무제기》 주석 《위무고사》 인용). 조조의 "불손한 마음"은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한 후에야 서서히 싹튼 것이다. 제갈량은 난세를 만나 명군을 얻어 처음에는 유비가 자신을 알아준 것에 보답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후주 시절 제갈량의 공덕은 세상을 덮었고", 촉한의 군정 대권을 장악한 그가 과연 어린 군주를 보필하려 했을지 의심스럽다. 한말 위초 시기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이 성행하며 황권이 쇠퇴하고 군신 명분의 강상윤리가 파괴되자, 권신들의 구석(九錫) 수여와 선양이 정치적 토양과 여론 기반을 얻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아래 시기가 성숙되면 제갈량이 "한위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촉중에 선양대를 쌓는 것도 가능성이 있었다.

천년이 넘도록 사람들은 제갈량을 고대 사회 충신과 현상의 귀감으로 여겼으나, 위 분석을 통해 필자는 제갈량이 "자취(自取)"했을 가능성을 도출했다. 이는 제갈량의 이미지에 손상을 주는가?

필자는 만약 제갈량이 촉한 왕조를 대신해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면 조씨가 한을 대체하고 사마씨가 위를 대체한 것처럼 정상적인 왕조 교체에 속한다고 본다. 봉건 강상윤리와 정통관이 이미 부정된 오늘날, 권신의 "찬위" 문제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대의 유식자들도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오직 덕 있는 자가 거둔다"고 했고, "예로부터 백성의 해악을 제거하고 백성의 귀의를 받은 자가 곧 민주(民主)다"(《위서·무제기》 주석 《위씨춘추》 인용)고 보았다. 따라서 왕망, 조조, 사마소 등의 역사적 공과를 평가할 때 그들이 찬위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제갈량 역시 마찬가지여야 한다.

객관적으로 분석하면 제갈량이 한을 대신해 황제를 칭한 것은 죄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에 순응한 것이다. "하늘이 한나라의 덕을 오래전에 싫어했다"는 《후한서·효헌제기》의 구절은 당시 사회 여론의 주류를 정확히 보여준다. 동한 왕조는 부패로 존재 가치를 잃었고 "천하가 모두 한나라의 운수가 다한 것을 알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위서·무제기》 주석 《위씨춘추》 인용)임을 알았다. 이는 대세이자 역사 발전의 필연이었다.

한나라 기운이 이미 다했는데 한가 천자를 보필할 가치가 있는가? 보필할 가치가 없다면 대체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예로부터 난세에는 웅대한 재능을 가진 자들이 역사의 무대에 오른다. 동한말 상황은 "군마다 황제를 삼고 현마다 스스로 왕이 되려 했으며", 조조가 말했듯 "나라에 내가 없었다면 몇 사람이 황제가 되고 왕이 되었을지 모른다"(《위서·무제기》 주석 《위무고사》 인용). 원소, 유비, 손권 등은 조조를 한나라의 적이라 비난했으나 그들 역시 한나라 신하가 되려 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조조, 손권, 사마의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재략을 가졌으며 "자취"의 선제 유조를 손에 넣었다. 만약 수명이 길고 북벌이 성공해 중원을 수복했다면 제갈량 자신이나 그 자손이 구석을 받아 황위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를 두고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




주자언(朱子彦), 상해대학역사계(역사학부)교수(上海大学历史系教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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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런 의견도 중국에 있다는 쪽으로 받아들이시면 될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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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나
25/06/09 16:03
수정 아이콘
여담인데, 나무위키의 삼국지 관련 글이나, 삼국지 갤러리 같은데서 보면 아무리 봐도 촉한, 그 중에서 특히 제갈량에 대한 재평가가 참 많은거 같습니다. 재평가는 좀 점잖게 말한 것이고, 솔직히 저는 폄하에 가까운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게 진짜로 오랜 시간동안 신화와 전설에 쌓여 감춰진 본질을 꿰뚫고자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단지 역사의 슈퍼스타를 삐뚤어진 관점으로 폄훼하려고 애쓰는건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본문은 그러니까 "제갈량이 북벌에 실패했으니까 망정이지, 성공했으면 마음을 뒤집어 찬탈했을지 그 누가 아는가?" 라는 뜻인데, 솔직히 역사에 if는 없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서브컬쳐에서 다루는 if 로서는 재미있을지 모르겠네요. (공명전의 마왕 공명 같은)
된장까스
25/06/09 16:09
수정 아이콘
최근 촉에 대해서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지 않는 학자들의 연구에 대응한다면 기존의 관념에 대응하는 촉한에 긍정성에 대한 최근 연구를 가져오면 되지 않을까도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역사연구라는건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류지나
25/06/09 16:40
수정 아이콘
그냥 저는 사실왜곡으로만 밖에 안 보여서... 선제의 명을 받들어 위를 정벌하려고 한 건 황제가 되려는 야욕에 가득찬 행보이고, 황제에게 충신을 추천하는 건 주변에 자신의 인재를 배치하려는 야욕이며, 출사표에서 선제를 반복적으로 언급한 건 황제를 권위로 겁박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수준이면 그냥 무슨 소릴 해도 왜곡해서 해석햇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된장까스
25/06/09 16:52
수정 아이콘
그래서 그냥 딱 이런 내용을 반박하는 학자들의 내용이 있으면 된다는 것이겠죠. 아무래도 학자의 분석을 가장 효과적으로 분쇄할 수 있는건 같은 학계의 반박이니까요.
無欲則剛
25/06/09 16:12
수정 아이콘
딱히 중요한건 아니지만 역사 계교수가 아니라 역사계 교수입니다.
여기서 계는 한국에서 말하는 학부같은 겁니다. 역사학부 교수 아무개 이런거죠.
된장까스
25/06/09 16:13
수정 아이콘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Liberalist
25/06/09 16:25
수정 아이콘
(수정됨) 역사적 인물의 내면에 대한 판단은 결국 여러가지 정황 증거를 주관을 개입시켜 해석한 다음에 간접적으로 유추해낼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보니까, 본인의 생각을 명확하게 서술한 글 같은게 갑자기 어디선가 툭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은 그냥 믿고 싶은대로 믿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근현대사의 영역으로 가면 남아 있는 자료가 많아 의도, 사상을 확정하는게 매우 쉬운데, 삼국지는 우리에게 다소 익숙하다뿐이지 실제로는 사료가 태부족한 머나먼 고대의 일인지라...
된장까스
25/06/09 16:29
수정 아이콘
학자의 해석들 중에서도 이런 해석이 있다고 가져 온 것이니까요. 국내 중문학과 교수분의 출사표 분석글에서도 이건 충성을 다루는 글이 아니라 제갈량의 권력을 증명하는 글이라는 논문이 있었기도 했죠.
전기쥐
25/06/09 16:42
수정 아이콘
제갈량의 전체적 행보를 생각해봤을때, 충성심이 가득한 신하가 아니고서야 그 행보가 설명이 안돼요.
국수말은나라
25/06/09 16:53
수정 아이콘
저는 제갈량에게 한신의 풍모가 있다고 봅니다만 반대로 한신은 역적의 상인가 아니면 공이 너무크고 지략이 웅대해서 황제가 쳐내지 못하는걸 황후가 투기와 계략으로 처형하고 과거 날조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가 필요하다 봅니다

즉 제갈량도 보기에 따라서는 한신보다도 더 꿈이 웅대하다 할수 있겠죠 창업주 공신들과도 한세대 이상 차이나니 집권 시에는 이미 공신 무리들이 다 죽은 후라서 동시대에서 떨어져 나간 한신보다도 강력한 권력이 있었을것이구요

다만 위략 등 어딜 찾아보더라도 찬탈이나 독자 세력 구축의 흔적은 찾기 어렵습니다 물론 북벌이 성공하지 못하고 일찍 죽은것도 크긴 합니다만
사실 그럴 요량였으면 장완 비위등 승상부를 성도에 남겨두지 않았겠죠 오히려 그의 충성심은 스스로 가정전투 이후 삭탈한 부분과 그의 사후 아들 손자가 대를 이어 목숨을 버림으로서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된장까스
25/06/09 17:11
수정 아이콘
제 생각이지만 제갈량은 아들 손자가 대를 이어 유씨 황실을 위해 목숨 버린것 덕분에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사마의도 정변 이후 구석은 물론이요 승상직이고 뭐고 다 거절했지만 아들, 손자가 찬위하니 역심이 있었다고 평가받기도 하는 감이 있죠.
국수말은나라
25/06/09 17:53
수정 아이콘
네 조조가 두려워한것이 자기대에서 찬탈하지 않아도 아들(조비)가 해서 결국 본인도 후세에 역적이 되는거였죠

제갈량 아들 손자가 목숨버리고 지킨것도 충절의 표상이 될만합니다
전기쥐
25/06/09 18:28
수정 아이콘
조조는 조비가 찬탈하기를 내심 바라지 않았을까요..
전기쥐
25/06/09 18:27
수정 아이콘
정변을 일으킨거 자체가 역적 아닌가요?
된장까스
25/06/09 18:57
수정 아이콘
사마의의 정변은 조상의 횡포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거병했던 것이고 조정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관구검이 사마사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을때조차 사마의를 두고선 '사마의는 충신인데 아들은 역신이다. 사마사 대신 사마의의 동생 사마부로 임금을 받드는 신하를 교체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으니까요. 본격적으로 사마의의 자손들이 찬위 가도를 달리기 전까지 사마의는 공식적으로 '대위의 충신'이었습니다.
전기쥐
25/06/09 18:59
수정 아이콘
그게 사마씨의 진나라때 쓰여진 역사서에 그렇게 되어있는거잖아요..
된장까스
25/06/09 19:05
수정 아이콘
관구검의 상소를 삼국지에 주석으로 올린건 사마씨가 아니라 사마씨를 부정하고 찬위한 유송의 학자인 배송지입니다. 배송지가 굳이 사마씨에 대한 당대 인식을 두고서 사마의도 같이 역적이라고 칠려고 했으면 이 상소를 삼국지에 주석으로 안 달면 그만이지 사마의에 긍정적인 기사를 굳이 실어줄 이유가 없죠.
허어여닷
25/06/09 19:01
수정 아이콘
글쎄요 이미 조조가 그런 명분으로 한실을 서서히 뒤엎은 시점에서 그냥 황조가 바뀌든 말든 유리해 보이는 쪽으로 줄 갈아타기라는 냉소적인 방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관구검의 명분대기도 과연 그가 실제로 정권 뒤집으면 같은 사마씨인 사마부에게 권역을 실제로 줬을지도 의문이고

제갈량의 충심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반대로 위진의 문벌귀족의 충성심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애초에 훗날 남북조의 패부 체제에 실질적인 영향을 준 건 촉이 아닌 위진이고
된장까스
25/06/09 19:08
수정 아이콘
봉건 강상윤리와 정통관이 이미 부정된 오늘날, 권신의 "찬위" 문제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대의 유식자들도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오직 덕 있는 자가 거둔다"고 했고, "예로부터 백성의 해악을 제거하고 백성의 귀의를 받은 자가 곧 민주(民主)다"(《위서·무제기》 주석 《위씨춘추》 인용)고 보았다. 따라서 왕망, 조조, 사마소 등의 역사적 공과를 평가할 때 그들이 찬위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제갈량 역시 마찬가지여야 한다.

밑에서도 썼지만 교수님이 직접 말하고 싶었던건 이 부분인거 같습니다, 논설 첫 부분부터 사마의와 제갈량이 당대에 '낭고'라고 불린거 얘기하는것 말씀하시는거 보면 동위로 보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요.
허어여닷
25/06/09 19:10
수정 아이콘
아랫 댓글로 말합니다
닉네임을바꾸다
25/06/09 17:02
수정 아이콘
(수정됨) 뭐 속마음이야 어쨌든 결국 안했으니 후대사람이 충신의 대명사처럼 쓴것도 못할것도 아니긴하죠 위진남북조시대 즈음에보면 그정도 위치된 놈들 가문치고 찬탈 안한 친구들이...
된장까스
25/06/09 17:06
수정 아이콘
(수정됨) '백거이가 《방언오수병서》에서 말했듯이 "주공이 유언을 두려워했던 날, 왕망이 겸손히 참았던 때, 만약 당시에 죽었다면 진실과 거짓을 누가 알았으랴"라고 한 것처럼이다.'

그래서 저 교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시죠. 또 구석을 받으라는걸 거절하지 않고 큰공을 세우면 구석은 물론이요 구석 이상도 받겠다는건 봉건시대 신하로써 매우 불궤한 말이고 이미 비슷한 사례가 여럿 있다는게 저 교수님의 논설이라...
nn년차학생
25/06/09 17:41
수정 아이콘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북벌이 성공했다면 지금 이미지와는 다른 면모가 나왔을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제갈량의 행보는 충신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삼각형
25/06/09 17:49
수정 아이콘
제갈량이 충신으로 남고
쓰마이가 역적이 된건

서로 수명이 차이나서다 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결국 제갈량은 역사든 소설이든 충신의 대표로 남아있을뿐
뭐 그외는 전부 상상일 뿐이죠
국수말은나라
25/06/09 17:57
수정 아이콘
그리고 비교적 근대인 이순신 장군도 역사에 남을 충신이지만 만약에 노량 전사 없이 삼남을 전부 통치했다면 민심이 급격히 쏠려 또다른 이씨 왕조가 안되었으리라는 보장이 어딧겠습니까

역사라는것은 if를 붙이기도 재밌겠지만 과정보단 결과로 평가하는게 맞다고 보는 편이라 어쨋튼 제갈량도 이순신도 만고의 충신입니다
우상향
25/06/09 18:16
수정 아이콘
유비에 대한 충성심은 진짜라고 보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역심은 품고 있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갈량이 유비를 따라나선 것이 유비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유비의 대업에 헌신할 각오를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보통 완력을 쓰는 사람들은 인물 그 자체의 매력에 충성을 하는 편이고 지모를 쓰는 사람은 자기와 뜻이 일치할 때 따릅니다. 관우, 장비와 제갈량 충심이 미묘하게 달랐을 걸로 짐작합니다. 순욱이 조조에 반대하다 죽은 것도 그런 연장선이고요. 그래서 제갈량은 역성혁명을 염두해 두지는 않았겠지만 만약 유선이 대업을 이루는데 방해가 됐다면 갈아치웠을 것 같기는 합니다. 유비의 다른 자식을 내세우든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그게 자신이 됐든 말입니다.
페스티
25/06/09 18:36
수정 아이콘
그렇게 낭만을 지켰기 때문에 지금까지 대대로 칭송받았으니, 저 교수님이 알못인걸로...
육체는 단명이고 근성은 영원한 것
25/06/09 21:31
수정 아이콘
대류...
폭룡이 최고다.
겨울나기
25/06/09 18:46
수정 아이콘
"조씨가 한을 대체하고 사마씨가 위를 대체한 것처럼 정상적인 왕조 교체에 속한다고 본다."
고작 이 한 줄을 객관적 논리라는 방패에 감추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에 자아의탁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된장까스
25/06/09 19:01
수정 아이콘
'봉건 강상윤리와 정통관이 이미 부정된 오늘날, 권신의 "찬위" 문제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대의 유식자들도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오직 덕 있는 자가 거둔다"고 했고, "예로부터 백성의 해악을 제거하고 백성의 귀의를 받은 자가 곧 민주(民主)다"(《위서·무제기》 주석 《위씨춘추》 인용)고 보았다. 따라서 왕망, 조조, 사마소 등의 역사적 공과를 평가할 때 그들이 찬위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제갈량 역시 마찬가지여야 한다.'

교수님이 직접 말하고 싶었던건 이 부분인거 같습니다,
허어여닷
25/06/09 19:09
수정 아이콘
네 그래서 저 셋을 평가할떄도 찬위 뿐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행보, 그들의 자손들의 행보까지 보고 사관들이 기록을 적은 거고 평가를 한 거잖아요?? 제갈량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솔직히 저 해석도 나온지 20년 넘어간 해석인 데다 학계 주류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그거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된장까스
25/06/09 19:12
수정 아이콘
예, 그래서 이런 의견도 있다고 말씀드린거고 혹시나 이게 마음에 안 든다면 반박할만한 근거가 있는 연구 내용을 같이 들고오면 좋겠다는 거죠.

'제갈량의 <출사표>는 겉으로 드러난 언어 수사적인 측면만을 살펴보면, 승상인 제갈량이 “한실부흥(興復漢室)”을 위하여 촉한의 마지막 황제인 후주 유선에게 온 맘을 다하여 충성과 충언을 바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그러나 <출사표>를 바치기 전에 제갈량은 이미 촉한의 주요 핵심 국가 권력을 죄다 자기의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었다.

제갈량은 군대 출동을 빌미로, 국가권력을 오로지 하면서 허수아비 황제인 유선을 감시 통제하여 무력화하였고,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독재정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출사표> 그 어느 곳에서도 황제 유선을 최고통치자로서 인정하는 부분은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출사표>는 황제를 억압하고 제갈량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독재정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내용으로만 조직되어 있을 뿐이다.'

- <출사표>에 나타나는 제갈량의 독재 정치 (2017)/ 홍윤기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https://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3564829

국내에서도 이런 논문이 있습니다. 이건 아직 10년도 안 되긴 했네요.
허어여닷
25/06/09 19:15
수정 아이콘
글쎄요 오히려 한때 통설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유행했던 한대기 황제 제사장론과 별반 다를바 없어 보이는데요
된장까스
25/06/09 19:17
수정 아이콘
이게 통설이 아니라면 통설이 왜 아닌지 반박하는 논문을 들고 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쪽에서 논문을 제시한다면 마찬가지로 이게 통설이 아니라는걸 논문으로 증명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허어여닷
25/06/09 19:22
수정 아이콘
오히려 반대 아닌가요 이게 왜 통설인지부터 주장을 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

이 논문이 왜 현재 학계의 해석과 맞아떨어지며 주류해석이라는 근거가 있습니까??
된장까스
25/06/09 19:33
수정 아이콘
https://arca.live/b/histor25385328036y/67246336
정권을 확립하고 정비한 제갈량은 동시에 정치권력을 승상부에 집중함으로써 안정적인 안정적인 지배를 수립하기 위해 고심했다. 그는 남정・북벌을 통해 자신의 출정지인 한중에 있는 승상부와, 부재 중인 성도에 설치된 승상부라는 두 개의 강력한 군부 위에 군림하며 권력의 안정화를 이루었다.

촉한에 있어서 「패부(覇府)」의 존재와 재상으로의 권력 집중은 왕조 교체의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며, 황제의 지위나 목숨을 위태롭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재상의 권력이 몹시 강대하고, 개인적 지도력에만 근거한 정치체제를 시행했기 때문에, 제갈량・장완・비의로 재상의 교대를 거듭할 때마다 정치적 공백이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중략) 이러한 권한의 분산과 절대적인 지도자의 부재는 정치적 혼란기로 이어졌으며, 이로써 그들은 위의 군사력에 대응하는 저항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 촉한정권 권력구조의 재검토 (2010)
https://spc.jst.go.jp/cad/literatures/83

가져오려면 이런 얘기들에 반박하는 논문들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제갈량이 찬위의 마음이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후한말 패부를 계승하는 쪽으로 보면 제갈량이나 조조가 패부체제를 구축하고 기존 조정 이상의 권력을 누리고 황권 이상의 권력을 누린 권신이다는건 꽤 많이 나오는 얘기일 텐데요.
류지나
25/06/09 19:57
수정 아이콘
딱 제가 삼갤에서 봤던 그 레퍼토리네요....
25/06/09 18:55
수정 아이콘
슥 읽어보니까 교수님이 위연빠 인거 같아요

천하명장 위연을 반골의 상이라고 한 제갈량이 반골임
된장까스
25/06/09 19:01
수정 아이콘
위연을 제갈량이 반골지상이라고 한건 연의설정이긴 합니다.
25/06/09 19:37
수정 아이콘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실행하지 않은 행위가 안정적인 정권 찬탈을 위한 몸사리기였다는 주장이 나오는 글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요

순신이 왜구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니 역심이 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급 급전개 아닌가요?

오히려 자오곡 쓰로잉을 했으면 역심 인정하겠습니다
된장까스
25/06/09 19:39
수정 아이콘
논거가 있지요. 함부로 기책을 썼다가 권력의 핵심이 되는 군사력을 상실하거나 피해를 입으면 그만큼 촉 내부에서 권위가 추락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굳이 제갈량만이 아니라 위에서 환온이나 유유의 사례도 기실 다를건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고요.

그래서 이순신이 제갈량급의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전 이순신이 조선의 실권을 장악하고 '낭고호시'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이순신과 제갈량은 존경받고 추앙받는 위인이지만 두 사람이 가진 위치와 권력은 엄청난 차이가 있죠.
25/06/09 19:49
수정 아이콘
이정도면 승상 정도면 역신 인증 1단계 통과 같습니다
쓰로잉을 해도 안해도 역신인데요
25/06/09 21:27
수정 아이콘
그리고 환온이나 유유 사례가 제갈량의 사례에 비교되면서 제갈량이 자제했을 것이라는 근거가 되려면

걔들이 선대여야 맞는거 아닌가요?
제걀량은 걔들이 누군지도 모를텐데
환온과 유유를 보면 쓰로잉하면 찬탈을 못하니까 쓰로잉 자제하자 라는 기적의 판단을 했다는거죠?

역사는 길고 길어서 정례와 반례 뭐든지 끌어다 붙이기 나름입니다
사실 개업군주는 말도 안되는 하드 쓰로잉을 하고도 이겨 낸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걸 생각하면 쓰로잉을 안한 것 자체가 정권 보전을 위해 협력적이었다는 증거 아닐까요
허어여닷
25/06/09 18:57
수정 아이콘
최소한 본인이 직접 난을 일으키지 않은 이상 역심이 있었느냐 아니냐는 탁상공론이죠

그리고 제갈량은 유선 생전에도 스스로 작위를 낮추거나 유선이 이엄 말 듣고 소환했을 때 일단 명령 따랐다는 점에서 충성심은 있다 보는게 맞다 봅니다

후대에 환온 유유도 그렇고 찬탈할 때 제갈량의 고사를 댄 거 자체가 위의 조조, 진의 사마의, 오의 손준 손침 등과 달리 진짜 찬탈을 시도한 적이 없으니 찬탈하려는 거 아니다 시늉 낼 때 들이댈 수 있는 게 제갈량말고 없으니까요
된장까스
25/06/09 19:10
수정 아이콘
후대에 탁고지신으로써 찬위를 할때 곽광, 주공의 예를 들어서 찬위를 한거랑 비슷한 상황이겠죠. 이 교수님은 그건 그거고 제갈량이 왕도나 주공의 예처럼 '제갈량에게 찬위의 마음이 정말로 없다고 단정할 수 없는 근거가 있다'는 주장이시니까요.
허어여닷
25/06/09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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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대지 못한다면 무의미한 논증이겠죠?? 제가 아는 한 유선의 권력이 제갈량 시절 조씨 집권기 헌제나 사마씨 집권기 조씨 황가들마냥 무력화되었단 근거를 대진 못하더군요
된장까스
25/06/0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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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제가 새로 가져온 논문에서도 촉한 황권의 무력화를 말하기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공을 세우면 구석은 물론이요, 십명도 받겠노라'는 발언은 신하로써 불궤한 발언이 맞겠지요. 제갈량의 반례로 구석의 예를 한사코 사양하고 동진 원제 사마예에게 충성한 왕도의 예를 들고 있고요.
허어여닷
25/06/09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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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내가 공을 세운 게 없으니 받을 수도 없다는 해석도 될 수도 있죠??

예전에 영조 시절 유엄이 건륭제가 쳐들어오면 그냥 우린 항복하면 된다 라는 실록 기록도 실제 의도는 그게 아니고 어쩌고저쩌고 라는 식의 해석이 나오는데 말이죠
된장까스
25/06/09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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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유엄은 그래서 영조에게 무례하고 저질스러운 발언이라 족히 논할 가치가 없다고 타박받기도 했고...무엇보다 영조는 자신의 집권 명분과 왕권탈취에 대한 스캔들인 '게장 드립'은 결코 용서치 않았지요.

왕망은 구석을 받고 전한을 탈취했고 조조 역시 구석을 받고 후한을 탈취했다는건 온 천하가 알던 시절입니다. 한의 신하를 자처하는 인물로서 '공이 있으면 구석은 물론이요 그 이상도 받겠노라'라는 발언은 선을 넘은게 맞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발언을 하고도 제갈량은 오히려 이엄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을 수 있었고 제갈량이 죽은 다음에는 사마의를 수식하는 '낭고' 발언이 나오며 유선은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제갈량의 사당 짓는걸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제갈량'이라는 이름 석자를 때고 보면 '황권도 위협하는 권신'이라 볼 여지도 있겠지요.
임전즉퇴
25/06/09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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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제갈량을 의심할 정도면, 어려운 나라에 순수 충신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구나 합니다. 제갈량이 틀림없이 역심 있다고 까는 게 아니라, 망탁조의를 무조건 인간 이하쯤으로 보지 말자는 큰 맥락에서 던지는 글 같기도 한데, 제갈량빠라서가 아니라 이런 논법이 예컨대 친일논쟁에 써먹히는 걸 알기 때문에 기분은 좀 별로입니다.

곁들여, 이막 저 사람은 행적을 전부 보지 않더라도 저 글 하나만 읽어도 참.. [제갈량 사당 세워주고 이막 살려준 가상 유선]의 제갈량 호감도<<<넘사벽<<<실제 유선의 제갈량 호감도 이렇게 보입니다.
된장까스
25/06/09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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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 제가 제시하는 학자들이 무슨 친일파 수준의 논리를 가져서, 아니면 독재를 옹호하려고 이런글을 썼다는 주장이신거 같은데 위에서도 몇번 말씀드립니다만, 정 이 논설에 반박하고자 하신다면 이 논리에 학제적으로 반박하는 논문을 들고 오시면 될 거 같아요. 전 어디까지나 학자의 논설을 가지고 온 거지 '친일 토착왜구'짓 하려고 이런 논설을 들고 온 것은 아닙니다. 이런 프레임은 뭐랄까...딱히 할 말은 없으니 '상대의 본심은 타락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색깔론 페인트칠을 하자'는 거 같달까요?
류지나
25/06/0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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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인데, 된장까스님이 자꾸 '논문' 방패를 들이미시는 거 같은데요,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 중국사 논문 뒤져가면서 근거를 제시할 사람은 없을 거 같고 (삼까페나 삼갤 정도겠죠) 그 전제하에 말씀드리자면, 제갈량이 충신인가를 단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다들 제갈량의 삶의 행적을 보고 그럴거 같지 않다는 강한 심증을 가지고 있을 뿐이죠.

이글 본문만 봐도 논리에 적절치 않은 부분은 다 짤라먹은게 보입니다. 이엄이 구석을 권한 것을 강력한 권신의 행세로 의심하고 있는데, 제갈량의 답변은 매우 강한 부정이었죠. 저 빌미가 된 [여러 신하와 함께 승진할 때 십명(十命)도 받을 수 있거늘, 하물며 구석(九錫)이겠는가!] 는 위를 정벌하면 신하로서 더 할 나위없다는 표현이지, 구석을 내놔라는 이야기가 아니죠.

이막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막이 제갈량을 헐뜯는 상소를 올렸다가 처형당한건, 그냥 담백하게 이막의 상소가 후주에게 마음에 안 들어서였겠죠. 그런데 이막이 헐뜯는 건 '일리가 있다' 면서 그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구요.

동윤을 기용해 궁 내 기강을 바로잡아서 후주가 두려워했다는 걸 마치 동윤이 후주를 억압했다는 식으로 왜곡하는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입니다. 다 이런 식이죠. 출사표를 왜곡해서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결정적으로, 제갈량이 황권을 위협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당대에 살던 인물들이 아무도 그런 소리 안했구요. (후주 본인조차) 정말로 제갈량이 후주의 권한을 다 뺏어가 독차지하는 재상이었다면, 제갈량 사후에 위상을 격하하던가, 아니면 제갈량 파의 세력을 축출할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제갈량의 사후 장완-비의 라인을 그대로 가동했죠. 제갈량의 자손도 아주 어여삐 여기면서 키웠구요.
된장까스
25/06/09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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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학자들의 논문 방패를 들이밀었다고 한다면 이를 반박하는 학자들의 논문들을 창으로 쓰면 되지 않겠느냐고 대답드린것 뿐입니다. '그 전제하에 말씀드리자면, 제갈량이 충신인가를 단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다들 제갈량의 삶의 행적을 보고 그럴거 같지 않다는 강한 심증을 가지고 있을 뿐이죠.'라고 하시는데...

본문의 교수님을 비롯해서 지금 제가 들고온 학자분들은 여러 전거를 들어 제갈량의 권신됨과 석연치 않음을 말하고 있는데 반박하는 논리들은 그저 제갈량은 역신이나 권신이 아니라는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 개인의 심증'이라는 얘기밖에 되질 않는다며 스스로 인정하시는 꼴이 아니신지요?

거기다가...오에서는 사사로이 손준이 손침에게 보정의 권한을 물려줬다고 다른 보정대신들이 그게 말이 되느냐고 손침을 공격했는데 제갈량은 장완-비의 라인을 사사로이 후계자로 삼아 재상의 권력을 물려줬으며 유선은 이를 사후승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선은 성인이 되어 나이 30이 가까워 성인으로써 통치가 가능했는데도 말이죠. 유선이 겨우 친정권을 좀 행사하기 시작한게 본문에서 나오듯이 비의 시절에서야 간신히 가능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40세에 육박하고서야 가능했던 겁니다. 이렇게 봉건사회에서 신하가 자신이 가신 권력을 사사로이 후계자로 지명하는 사례를 우리는 보통 권신 세도가의 정치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리고 본문의 교수님이 지적하는건 인신으로써 더 할나위 없다는 표현을 써도 빌미가 된 [여러 신하와 함께 승진할 때 십명(十命)도 받을 수 있거늘, 하물며 구석(九錫)이겠는가!] 는 쓰면 안된다는 겁니다. [정말로 큰 공이 있다고 구석 이상을 받고] 한실을 찬탈한 왕망, 조조의 사례가 있는데 구석은 물론이요 십명도 받겠다는건 굉장히 오만하고 위험한 발언이라는 지적이고 굳이 한실의 충신을 자처하는 자가 그 말을 써야 하는가라는 것에 대한 의문인 거지요.
류지나
25/06/0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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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첫 댓글에서 언급한 바가 있지만, 또 위에서 보니 링크를 보건데 된장까스님이 아마 직접 찾으신게 아닌게 확실하네요. (삼갤 주 레퍼토리였음)

님이 예시로 든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손준이 사사로이 손침에게 보정을 물려주니 신하들이 반발했죠? 그런데 촉에서는 장완-비위-진지가 권력을 이양받았는데 누가 반발했습니까? 그게 불충하다고 촉에서 언급하던 사람이 있던가요? 손준-손침은 가족 관계기 때문에 권력을 물려주는게 부자연스럽지만, 제갈량이 대체 왜 생판 남인 장완에게 권력을 물려주고나서 '나의 권세가 영영가겠지' 이러겠습니까?

이걸 '충성스럽고 능력있는 인사를 후임으로 추천' 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황제에게 절대 안 물려주려는 음험한 권신'으로 해석을 하는 거 자체가 오류라는 겁니다.
된장까스
25/06/0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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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당연히 아무도 여기에 반발을 할수 없죠, 손준-손침 라인은 보정 중 일부였기 때문에 다른 보정들이 말이 안된다고 들고 일어났던 것이고 제갈량은 분명 같이 유비의 탁고대신이었던 이엄을 이미 숙청한 상태였으니까요. 본문에서 지적했듯이 유비는 탁고대신으로 이엄도 분명히 지목했고 그에게 군권을 나누어 주었는데 제갈량은 이엄의 군권까지 다 가져가 홀로 탁고대신의 권력을 독점했고 [구석이 아니라 십명이라도 받을 수 있다]라는 불궤한 발언을 두고 되려 이엄을 숙청할만큼의 권력을 챙겼습니다. 제갈량 라인이 모든 촉의 권력을 다 독점했기에 '사사로이 권력을 독점한 제갈량은 분명 신하로써 주제를 넘었다'고 주장한 사람은 되려 처형되는 마당입니다.

제갈량이 왜 생판 남인 장완에게 권력을 물려줬으냐고요? 그거야 양아들 제갈교는 요절했고 친자인 제갈첨은 이제 7살밖에 안되었으니 자기 라인에게 사사로이 물려줄 수 밖에 없던 거지요. 오히려 제갈량이 탁고의 권력을 독점하고 이걸 유선에게 반환하지 않으며 자기 계파에게 계속 물려주라고 명시한거부터가 이 권력독점 체제를 당시에 제어할 사람이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오의 사례가 그 반례인거고요. 정말로 제갈량이 탁고대신으로써의 명분에 충실했다면 성인이 된 유선에게 권력을 돌려줬어야 정상입니다, 그는 '탁고대신'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사사로이 후계자를 지명하고 유선에게 이를 강요했으며 유선은 이를 사후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는게 실제 현실입니다.
류지나
25/06/0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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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비뚤어지게 해석하는게 근거가 있냐는 말인데요. 지금 된장까스님은 제갈량 일파가 권력을 독점했기에 이막이 바른 소리를 했는데도 황제가 참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갈량은 자신의 계파에게 권력을 독점시켰다- 이 말씀인데

저는 대체 죽는 사람이 혈연도 아닌 계파에게 권력을 물려준다는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논리하고도 안 맞아요. '제갈량의 권력 독점을 본 후주는 장완에게 재상 자리를 안 줌으로서 장완을 견제했다' 와 '장완 등의 제갈량 계파가 두려워서 모든 권력을 물려주었다' 그냥 바로 상충되지 않습니까?

이걸 기어코 제갈량의 권력욕에 끼워맞추려고 하니 이상한 논리가 되는 셈이죠. 그냥 담백하게, 제갈량은 후임을 추천하고 죽었고, 후주가 보기에 적절한 인선이여서 승인했고, 다만 제갈량의 재상 자리는 특별하니까 이후 라인에게는 재상 자리를 주지 않았고, 나랏일을 훌륭하게 치르던 신하가 죽었는데 이막이 개소리해서 빡쳐서 죽였고. 이걸 죄다 뒤틀고 있잖아요.
된장까스
25/06/0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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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그러니까 제갈량에게 대체 그런 권한이 어디 있느냐는거죠. 탁고대신은 어린 황제가 성년이 되면 탁고의 의무를 다하고 성인 황제에게 권력을 되돌려주어야 하는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제갈량은 [죽을때까지 성인이 된 유선에게 친정할 권리를 주지 않았으며, 그런 권력을 물려줄 후계자로써 장완을 지목했고 결국 유선은 비의 시절에야 간신히 친정의 권한을 가져오는데 성공합니다.] 적어도 제갈량이 제대로 된 탁고대신이 아니었음이, 본래 황제가 가졌어야 할 전제권력을 명분이 없음에도 독점했음이 이로써 증명은 된다고 보시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유선은 장완에게 재상의 권한을 주지 않음으로서 [보정이 아님에도 보정의 절대 권한을 받은] 장완을 필사적으로 견제했고 계속 이런식으로 황권을 돌려받기 위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본디 자신이 받아야 할 권한인 [친정 권력]을 되찾은 겁니다. [제갈량이 죽고 십여년이 훨씬 넘은 뒤에서나] 간신히요.

원래대로라면 유선이 성년이 되었을때 제갈량은 탁고대신으로써 권력을 유선에게 돌려줘야 했지만 제갈량은 그 대신 같은 탁고대신 이엄의 권한을 빼앗고 숙청하고 절대권력을 쟁취하고 마침내는 [구석이 아니라 십명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불궤한 발언을 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제갈량 생전에 없어졌다는게 이런 문제제기인 겁니다.
류지나
25/06/0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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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통설은 이렇습니다. 후주가 놀기를 좋아하고 정사를 보길 게을리해서 제갈량이 여러 차례 간언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 대로라면 제갈량은 후주에게 억지로 권력을 쥐어주고 싶었지만 황제가 귀찮은 정무를 게을리 한 거겠죠.

된장까스님은 제갈량이 어거지로 권력을 독점해서 후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용기를 내고 싶었지만 정계를 제갈량파가 다 차지해서 제갈량의 후임조차 자기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했다.

후주는 대단히 오래 산 사람입니다. 정말로 후자가 맞으려면, 후주가 이 인사에 대해 불만이 있다고 간접적으로나마 표하거나, 아니면 촉, 그것도 아니면 위나 오에서 관찰자가 뭔가라도 언급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 언급이 전혀 없잖아요. 막말로 후주가 나중에 진에 끌려가서 '제갈량같은 놈 땜에 살기 퍽퍽햇는데 진에 오니 살기 좋습니다.' 라고 해도 후주는 전혀 문제될 게 없는데 전혀 그런 소리가 없지요.

후주의 행태를 보면 전자임이 강력하게 의심이 듭니다. 정말로 자신의 권력이 뺏겼다고 아쉬워할 사람이면 진지쯤 되는 무렵에서는 정사에 깊이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주는 그냥 놀아제끼죠.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대체 권신이 '자기 계파'에게 권력을 주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혈연 관계라면 이해라도 하죠. 제갈량이 그걸 통해 얻는게 뭘까요? 뇌피셜로 장완에게 '제갈첨이 크면 권력을 물려주도록' 같은 언급이라도 했을까요?
된장까스
25/06/09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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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가 놀기를 좋아하고 정사를 보길 게을리해서 제갈량이 여러 차례 간언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대체 제갈량 시절에 이런 얘기를 언제 한 적이 있었는지요? 출사표에서도 대충 환관 기용하지 마라, 나의 승상부를 존중해라라고 했지 어디에 제갈량 시절에 놀기 좋아하고 정사를 보기 게을리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까? 애초에 유선이 친정하기 시작한게 비의대부터라고 나오는게 현실인데 친정도 못하는 황제가 놀기를 좋아해서 정사를 게을리 할 수는 있습니까?

후주가 이 인사에 대해 불만이 있다고 간접적으로나마 표하거나, 아니면 촉, 그것도 아니면 위나 오에서 관찰자가 뭔가라도 언급을 했어야 합니다. - 예, 그랬는데요? 조예부터가 조서에서 '제갈량은 유선 형제를 핍박하고 권력을 홀로 독차지 하고 있다'고 하고 있고 오의 손권은 본문에서 나오다시피 촉주가 유약하고 어려서 걱정이라고 떠봤다가 등지한테 '촉의 진짜 실세는 제갈량이다'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유선은 촉오동맹에서 어떤 역할도 할수 없었고 대외적인 촉오관계는 모두 제갈량이 주관했습니다. 유선이 성년이 된 이후까지요. 거기다가 후주는 제갈량-장완이 자신이 딴짓 못하도록 감시역으로 둔 동윤을 몹시 미워했고 진지를 발탁한 이후에는 그게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후주가 나중에 진에 끌려가서 '제갈량같은 놈 땜에 살기 퍽퍽햇는데 진에 오니 살기 좋습니다.' 라고 해도 후주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 - 낙불사촉을 잊으셨는지요? 적어도 유선이 그립지 않다는 촉은 제갈량이 집정하고 제갈량의 사당 지어달라고 제갈량의 계파인 형주사인들이 계속 칭얼거리던 그 촉이 아니었습니까? 유선이 그립지 않다던 촉은 제갈량의 촉이 아니라 딴 사람의 촉이었나요?

정말로 후주가 놀아 재꼈다고만 할거 같으면 후주 재위 말기에 황호가 전횡한다고 욕먹을 일도 없습니다. 본래 한나라 황제들이 환관을 이용해서 친권을 행사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놀기 좋아하고 정사에 관심만 없었으면 황호가 그렇게 비호받지도 못합니다.

이제 권신이 자기 계파에게 권력을 준다는 사실은 인정하시는 모양인데 팩트는 제갈량은 [탁고대신]이고 [그 권리를 놓지 않은체 후계자에게 물려줄게 아니라 친정할 권리를 유선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탁고의 법도가 맞고요. 그러니 실제로 촉에서 우선이 친정한것은 비의 시절때부터죠.
된장까스
25/06/09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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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나 님// 이렇게 '본인의 심증'수준도 딱 제 레벨에서 막히는 마당인데, '님만의 심증'으로 학자들을 깔거면 이럴 시간에 후한말~삼국시대 관련 논문들 뒤적거려서 학문적으로 이 논리에 반박할 논리를 가진 논문을 마련하는걸 권장드립니다.
별이지는언덕
25/06/0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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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제갈량이 제위까지는 욕심이 없었을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스스로가 촉한의 권신이 되고자 하는바는 명확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유비 사후 형주파와 익주파가 균형을 이뤄서 서로 견제하는걸 설계한 느낌인데 제갈량을 위시한 형주파가 아예 득세해버리고 그냥 승상부와 상서대가 권력의 핵심 OF 핵심이 되어버렸죠. 한데 세력이 약했던 촉한 입장에서 절대적인 1인 권력자의 운영되는 바가 더 좋은 체재라고 생각은 하지만
마냥 유비와 제갈량이 이상적인 군신의 관계의 표본이냐 이건 모르겠단 느낌이죠.
그러다 보니 유선이 제갈량 사후 승상부를 해체 해버렸고 득세한 형주파들에게 권력은 어느정도 주었지만 견제를 하였죠. 촉한사영이라고 하지만 전부 형주출신이구요. 여튼 촉한은 제갈량이 사서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기록이 적어 뇌피셜로 상상해야 할 부분이 많아서 참 애매합니다.
이궁의 변이나 고평릉사변처럼 익주파를 제거하는데 뭔가 있을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냥 이엄이 군량 수송을 담당했는데 늦어지고 거짓말하다 권력을 뺏겼다 수준으로 끝나버리니 아쉽습니다.
25/06/09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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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LuckyVicky
25/06/0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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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긴 했는데 자꾸 논문 얘기하시는 건 좀...

텍스트북으로 확립된 내용은 반복해서 논문으로는 잘 나오진 않는 법이라...
된장까스
25/06/09 21:03
수정 아이콘
'통설이 아니다, 학자들의 뇌피셜이다'라는 말에는 딱히 뭐라고 얘기하겠습니까, 그럼 그 통설화된 내용, 텍스트북이라도 가져와서 얘기하라고 말하는 수밖에요.
류지나
25/06/0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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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된장까스 님// 와... 낙불사촉하고 저의 근거를 연결시키는 건 놀랍습니다. 이걸 '촉이 그립지 않습니다 -> 제갈량이 권력을 독점해서 촉이 그립지 않은거다' 라고 논리의 비약을 하시는군요. 저는 이 해석을 보니 뭔 소릴 하셔도 그렇게 받아들이실 거 같아서 더 할말이 없네요.

등지 일화도 '제갈량은 영웅이다 = 촉은 믿을만하다' 라고 했는데, 이걸 제갈량이 실세다라고 해석을 하시는군요.

그리고 괜찮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어차피 된장까스님도 직접 논문을 뒤적거려 찾으신게 아니고 삼갤에서 떠도는 레퍼토리 주워다가 (몇 년 됐습니다) 언급하시는 거니까요.
된장까스
25/06/09 21:06
수정 아이콘
솔직히 말씀드리면 본문에서 그 대목이 '제갈량이 실제 실세고 유선은 촉에서 아니것도 아니다' 인식을 오에 알리는 행위였다고 쓰여있는데도 본문을 아예 읽지 않으신듯하여 논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일개 신하가 타국의 임금과 대등한 관계에서 자신의 임금 무시하고 진행하는거 부터가 임금이 권력 의사결정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증거였다고 말하는 마당인데 이것도 이해 못하실거 같으면 무슨 말을 더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괜찮습니다. 본문을 들고와봐야 어차피 이해도 못하시고 오래전에 망한 삼갤 수준 논리라는 식으로 업데이트가 안 된거 보면 삼국지 인식도 과거에서 별로 크게 벗어나지도 않으신 분 같고요.
류지나
25/06/09 21:07
수정 아이콘
뭔 소립니까. 등지의 발언을 그대로 옮겨볼까요?

"오와 촉 두 나라는 네 주의 땅을 갖고 있고, 대왕은 한 시대의 영웅이며, 제갈량 또한 한 시대의 호걸입니다. 촉에는 첩첩의 험준한 요충지가 있고, 오에는 삼강의 험준함이 있으니, 이 두 장점을 합쳐 함께 입술과 치아의 관계가 된다면, 나아가서는 천하를 겸병할 수 있을 것이고, 물러나서는 삼국 정립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대왕께서 지금 만일 위나라에 귀순하게 된다면, 위나라는 반드시 위로는 대왕의 입조를 바라고, 아래로는 태자가 궁으로 나아가 받들기를 요구할 것입니다.[4] 만일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반란을 토벌한다는 이유를 들 것이며, 촉은 반드시 흐름을 따라 할 수 있음을 보고 나아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강남의 땅은 다시는 대왕의 소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게 '후주는 별거 아니고 제갈량이 실세다' 라는 말이라구요? 그리고 낙불사촉도 말씀좀 해주시죠.
된장까스
25/06/09 21:08
수정 아이콘
(수정됨) 손권이 "촉주(유선)가 어리고 국세가 약해 위(魏)에게 밀릴까 염려된다"고 말하자 등지는 "대왕(손권)과 제갈량은 시대의 영웅이며, 촉과 오의 협력은 천하를 얻을 길"이라 답해 손권을 설득했다. 이처럼 제갈량의 권위는 국제적 위상까지 반영되었다.

역사가들은 종종 등지(鄧芝)가 탁월한 외교 능력으로 오촉(吳蜀) 동맹 회복에 큰 공헌을 했다고 칭송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발언에서 유선(劉禪)을 경시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손권이 "촉주가 어리고 약하다"고 말했을 당시 유선은 17세로, 전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이는 아니었다. 한(漢)·위(魏) 교체기에는 젊은 영웅들이 많았다. 손오(孫吳)의 창업주 손책(孫策)은 15세에 아버지 손견(孫堅)을 따라 동탁(董卓) 토벌에 참전했고, 20세에 강동(江東)을 정벌해 6군을 점령하며 손오의 기반을 닦았다. 손책이 암살당한 후 18세의 손권(孫權)이 뒤를 이었다. 등지가 주군의 위엄을 지켰다면 이에 반박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손권의 "촉주 유약론"에 대해 답변 없이 "손권은 시대의 영웅, 제갈량은 당대의 준걸"이라며 제갈량을 손권과 동등한 '일국(一國)의 군주'로 격상시켰다.

손권은 현명한 "웅략의 군주"였기에 촉한이 실질적으로 제갈량이 주도함을 알고, 황제의 위계를 내려놓고 직접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등지를 칭찬했다: "두 나라를 화합시킨 것은 오직 등지뿐이다." 실제로 손권은 제갈량과 빈번히 교류했다. "유비가 병사하고 유선이 즉위하자 제갈량이 정권을 잡아 손권과 동맹을 맺었으며, 중요한 일은 항상 육손(陸遜)을 통해 제갈량에게 전달하고 손권의 인장을 새겨 육손에게 수여했다."(《오서 육손전》) 손권은 육손을 통해 교류했으나 완전히 권한을 위임하지는 않았다. 육손이 제갈량에게 보낸 서한에는 손권의 옥새가 찍혔으니, 이는 고대 중국의 엄격한 군신(君臣) 예법을 반영한다.

반면 제갈량은 "유선이 정치에 서툴다"는 구실로 "내외의 권력을 총괄"(《촉서·후주전》 주석 《위략》)하며 외교에서도 유선을 완전히 배제하고 손권과 대등한 '대화'를 진행했다. 군신 간의 예법을 무시한 이 행위는 그의 독단적 권력 행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니까 본문을 안 읽었다고 하는겁니다. 등지가 뛰어난 외교관은 맞되, 유선의 권위를 생각하면 제갈량과 손권을 그런식으로 동위으로 두고 유선이 낮게 취급당한걸 무시하면 안 되는 말이라는게 본문의 논지입니다. 적어도 자국의 임금이 유약하다 소리를 들으면 봉건시대적 논리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게 정상입니다. 마치 경신대기근 당시 군약신강이라서 조선이 그 모양이라는 강희제의 말에 동평군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 것처럼 말입니다.
류지나
25/06/09 21:25
수정 아이콘
등지의 발언은 유선이 17세던 시절이지요? 제갈량이 아직 탁고를 해도 무방한 나이고 이 때 분명히 제갈량이 실세인 건 맞을 겁니다.
그리고, 제갈량이 실세가 아닌 적은 없습니다. 저는 제갈량이 실세가 아니라고 하는게 아니라, '권력을 탐하는 권신' 이냐는 겁니다.
등지의 발언 어디에서도 제갈량의 권신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제갈량의 위상이 높았고, 황제가 유약하다는 말에 등지가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정도가 담백한 진실이겠지요.

그리고 사실 제갈량이 정국을 다 차지했다면, 왜 기어코 죽을 때까지 북벌에 나섰을까요. 사실 황제를 본인으로 갈아치우고 북벌에 나서는게 마땅하지 않나요? 제갈량이 권신이라면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된장까스
25/06/09 21:33
수정 아이콘
이제 제갈량이 실질적 권력을 쥐고 국정을 오로지 했다는 단계는 인정하시는거 같은데 팩트는 이후에도 손권이 육손에게 자신의 인장을 찍어 제갈량과 소통하게 한 것에 반해 제갈량은 더 이상 촉주인 유선이 아리고 유약하지 않은 시점가지도 권력을 잡았다는게 팩트입니다. 그리소 본문에서 굳이 손책과 손권이 어린시절부터 권력을 잡았단느 것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이라 등지가 주군의 위엄을 지키려고 했다면 이점을 파악해서 유선이 어리고 유약하다라고 지적받는 것에 반박을 햇어야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라 어쨌든 신하일 제갈량을 올려치는 용도로만 썼다는 것입니다. 진정 유선이 군주라면 이 대목에서 유선에 대한 비호도 반드시 들어가야 봉건시대의 논리에 맞다는게 핵심이고요.



그리고 사실 제갈량이 정국을 다 차지했다면, 왜 기어코 죽을 때까지 북벌에 나섰을까요. 사실 황제를 본인으로 갈아치우고 북벌에 나서는게 마땅하지 않나요? 제갈량이 권신이라면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도 본문에서 설명합니다.

여기까지 서술하자,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제갈량의 "야심"이 분명하다면, 왜 유선을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았는가? 진옥병(陳玉屏)은 그의 글에서 이렇게 논했다:

당시 상황에서 공적은 제갈량이 촉한을 위해 세웠고, 권력은 군사와 외교를 모두 장악했으며, 재능은 유선과 천양지차였다. 덕망 역시 두터웠고, 유비의 '군이 취하라'는 유언까지 있었으니, 선양(禪讓)의 조건은 충분했다.

그러나 필자는 실제 상황이 이렇게 단순하지 않았다고 본다.

진(秦)·한(漢) 이후 황제의 지위는 "군권신수(君權神授)"로 신성불가침했다. 유교적 교화로 "천자는 하늘의 명을 받들고, 천하는 천자의 명을 받든다"는 관념이 뿌리내렸다. 권신이 선양을 통해 제위를 찬탈하는 것은 큰 위험을 수반했다. 왕망(王莽)은 10여 년을 준비했으나 실패했고, 동탁(董卓)·원술(袁術)은 즉시 멸망했다. 조조(曹操)는 천하의 3분의 2를 장악했으나 끝내 황제가 되지 않았다. 사마씨(司馬氏)도 3대에 걸쳐 위(魏)를 찬탈했으며, 조융(趙翼)은 이렇게 지적했다:

사마의(司馬懿)는 승상과 구석(九錫)을 사양했고, 사마사(司馬師)·사마소(司馬昭)도 거듭 사양하다 결국 진왕(晉王)에 오른 후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선양을 받았다.

조조와 비교해 유비의 즉위는 "인화(人和)" 면에서 유리했다. 조조가 "한실을 찬탈한 역적"으로 낙인찍힌 반면, 유비는 "한경제(漢景帝)의 후예"로 인정받았다. 220년 조비(曹丕)가 한을 멸하고 위를 건국하자, 유비는 한중왕(漢中王)으로서 한실 중흥의 기치를 들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반대가 있었다. 익주 전부사마(前部司馬) 비시(費詩)는 유비의 즉위를 반대하며 상소했다:

전하께서 조조 부자의 전횡을 막기 위해 군사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적이 멸망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황제를 칭한다면 인심이 흩어질 것입니다. 한고조(漢高祖)께서도 진(秦)을 멸한 후 왕위를 사양했는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한의 전) 영토도 다스리지 못한 채 즉위하려 하십니까?

유비가 한나라의 계통을 계승하는 것조차 극력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물며 제갈량은 다른 성씨의 신하로서, 유언으로 중책을 맡은 시점에 이미 한나라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하고, 왕조를 바꾸려 했으니, 이것이 천하의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확실히, 유비는 임종 시에 제갈량에게 "스스로 취하라"고 허락했지만, 이는 결코 유비의 희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조치였으며, 전제 조건은 유선이 "재능이 없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제갈량이 집정할 때, 유선은 여전히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할" 수 있었고,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제갈공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그래서 진수가 그를 "현명한 재상을 임용하여 이치에 따르는 군주가 되었다"라고 칭찬했으니, 제갈량이 어떤 이유로 그를 쉽게 폐위시킬 수 있었겠는가?

(중략)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삼국시대는 전쟁의 시대였으며,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서는 국가를 세울 수 없었다. 조조, 사마의, 손책, 주유, 육손 등은 모두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제후들을 위협하고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제갈량이 한나라를 대신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촉한 조정에서 높은 명성과 절대적인 권위를 세워야 했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나는 군공을 세워야 했다.

이상입니다.
류지나
25/06/09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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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니까 본문의 주장이 '제갈량이 위를 격파했으면 선양했을 것이다' 라고 거의 확신을 하고 있는데... 이게 대체 무슨 근거라고 말씀하시는건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제갈량 속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니구요. '제갈량은 촉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북벌을 했다' <-> '제갈량은 자기가 황제가 되기 위하여 북벌을 했다' 인데, 후자의 근거가 대체 뭔가요.

아니 본문에 있으니까 본문의 황당함도 얘기하죠. 위연의 작전을 물리친게, 위연의 작전이 들이맞으면 제갈량이 황제로서 군공을 세울 수 없으니 위연을 기용하지 않았다구요? 이건 진짜 어거집니다. 일단 위를 격파해야 황제고 뭐시고가 되는게 아닌가요? 어차피 위연은 제갈량 휘하 군단장일 뿐이라 모든 영광은 총사령관에게 돌아가는게 지당한 시절입니다. 저는 이 논리가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갈량이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을 가졌고, 그 야심을 이루기 위해선 군공이 필요했고, 군공이 필요해서 촉을 쥐어짜내서 북벌을 했다 뭐 이런 논리가 성립이 되는데... 이 의심을 들이대려면 제갈량이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이 있는 걸 확정지어야겠지요. 그런데 과연 그런가요?
된장까스
25/06/09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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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 댓글로 갈음합니다.
류지나
25/06/0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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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제가 생각하는 제갈량 권신론의 가장 부정적인 부분이 이겁니다.

황제 자리에는 관심이 없는, 그러나 권력은 탐하는 권신이라 칩시다. (정도전 드라마의 이인임 포지션 같은) 그런데, 권력을 탐했다면, 그리고 권력을 얻었다면 그 권력을 휘둘러서 대체 무엇을 했냐는 겁니다. 권신은 결국 그 권한을 잘못 휘둘러 나라를 망치던가, 아니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던가 해서 권신이라고 비판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제갈량은 둘 다 아니죠. 사실, 이거 가지고 [제갈량은 촉을 전시 국가 체제로 만들어서 나라를 망쳤다] 는 논리로 이어지긴 합니다만, 대체로 제갈량은 훌륭한 정치가로 여겨왔었죠. 이건 이거대로 논쟁이 있겠지만, 아무튼 제갈량은 사욕은 확실히 안 채웠습니다.

본문은 제갈량이 '일이 잘 풀리면 황제 자리 강탈할지도' 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역사에서 IF는 소용이 없잖습니까. 나온 결과로만 보고, 정사에 묘사된 제갈량은 훌륭한 재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했구요. 제가 아까부터 자꾸 '제갈량 계파의 권력 이양' 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권신으로서 대체 무엇을 추구하며 그렇게 했느냐 이거죠.

제갈량은 소싯적에 자신을 관중, 악의에 빗댄 바가 있습니다. 특히 관중은 되게 의미심장하죠. 관중은 제환공을 모시며 제나라를 패자로 만들었는데 제환공은 관중을 절대 신임해서 권력을 맡겼고 관중은 흐트러짐없이 임무를 수행했었죠. 제갈량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가 '재상 정치' 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걸 가지고 황제의 권력을 독차지했다라고 하면 관중이나 제갈량의 그릇을 너무 폄하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된장까스
25/06/09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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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아무튼 제갈량은 사욕은 확실히 안 채웠습니다.' 이 부분은 본인 스스로 쓰시면서도 스스로 내심 거리낌이 있으실겁니다. 모든 권신이 권력을 잡았다고 이인임마냥 사리사욕에 몰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은 모르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을 얻었다면 그 권력을 휘둘러서 더 높은 곳, 극 황위를 넘보는 쪽으로 집중되는 경향성은 충분히 있을수 있는데, 문제는 제갈량의 언행을 뜯어보면 [탁고대신으로서 제대로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인신의 몸으로써 촉의 권력을 오로지 장악하다보니 찬위의 뜻으로 해석되는 문제되는 언사나 권력의 지나친 집중]으로 보건데 [충분히 그런 마음을 품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게 본문의 핵심이고, '제갈량 같이 재능 있는 사람이 그러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라고 그런 상황의 제갈량의 마음에 대해서도 옹호하는게 본문의 진짜 논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건시대의 충성논리로 제갈량을 평가하기보단 제갈량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렇게 볼 여지가 있고 그 쪽에서 한번 평가하자는게 본문의 결론인거죠.

심지어 이 교수님도 제갈량은 훌륭한 정치가가 아니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 논지의 결론은 [제갈량이 설령 찬위를 할 마음이 있었더라도 그의 훌륭함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결론으로 끝납니다.

'천년이 넘도록 사람들은 제갈량을 고대 사회 충신과 현상의 귀감으로 여겼으나, 위 분석을 통해 필자는 제갈량이 "자취(自取)"했을 가능성을 도출했다. 이는 제갈량의 이미지에 손상을 주는가?

객관적으로 분석하면 제갈량이 한을 대신해 황제를 칭한 것은 죄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에 순응한 것이다. "하늘이 한나라의 덕을 오래전에 싫어했다"는 《후한서·효헌제기》의 구절은 당시 사회 여론의 주류를 정확히 보여준다. 동한 왕조는 부패로 존재 가치를 잃었고 "천하가 모두 한나라의 운수가 다한 것을 알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위서·무제기》 주석 《위씨춘추》 인용)임을 알았다. 이는 대세이자 역사 발전의 필연이었다.

한나라 기운이 이미 다했는데 한가 천자를 보필할 가치가 있는가? 보필할 가치가 없다면 대체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예로부터 난세에는 웅대한 재능을 가진 자들이 역사의 무대에 오른다. 동한말 상황은 "군마다 황제를 삼고 현마다 스스로 왕이 되려 했으며", 조조가 말했듯 "나라에 내가 없었다면 몇 사람이 황제가 되고 왕이 되었을지 모른다"(《위서·무제기》 주석 《위무고사》 인용). 원소, 유비, 손권 등은 조조를 한나라의 적이라 비난했으나 그들 역시 한나라 신하가 되려 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조조, 손권, 사마의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재략을 가졌으며 "자취"의 선제 유조를 손에 넣었다. 만약 수명이 길고 북벌이 성공해 중원을 수복했다면 제갈량 자신이나 그 자손이 구석을 받아 황위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를 두고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
된장까스
25/06/09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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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은 제환공을 모시며 제나라를 패자로 만들었는데 제환공은 관중을 절대 신임해서 권력을 맡겼고 관중은 흐트러짐없이 임무를 수행했었죠.' 예 그렇습니다. 근데 관중은 제환공을 모시면서 존왕양이의 기치를 한번도 저버리지 않은 반면에 제갈량은 [큰 공로를 세우면 구석이 아니라 십명이라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라고 한 게 문제죠. 두번이나 [큰 공로를 세워 구석 이상을 받은 신하]에게 찬위 당한 한실의 신하를 자처한다면 함부로 해선 안되는 발언인건 분명합니다.
에이치블루
25/06/09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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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행했던 원균 정상화론과 비슷한 거 같은데요.

거의 2천년이 지나도 댓글 장판파를 열리게 하는 삼국지 인간군상의 위대함과 드라마틱함이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25/06/09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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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을 증명하려면 증거를 대야하는데 당대나 연결된 시대에 그런 분석이 있었나? 하고 읽어봤는데 증거는 없고 현대인의 뇌피셜만 있는건 좀 그렇네요; 문과계 학문들은 이런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아서 아쉽더라고요
줄곧 중/한에서 충의지사로만 묘사됐는데 역심이있었단 주장이 있었어? 하고 관심갖고 읽어봤는데 말이죠.

사실 글의 맨 위에 달린 류지나님 리플을 읽고 평소에 어느 분야에서나 흔히 통용되는 논리인 '인재풀론'에 따라 생각하면...
역사지식의 중요도가 떨어진 지금과 달리 고대부터 근세까지는 문장을 짓든 유세를 하든 모든 고지능활동에 고사 레퍼런스를 들어 말하는게 기본이었지요. 거기다 당대기준이면 사료접근성이랑 해석력자체가 아예 다른데 이게 결정적인 차이.
그래서 폭넓은 고사 지식을 요구받던 과거의 최고 천재들(동북아에서 이 "최고지능"들의 종착점은 거진 관료, 학자, 문인 등이었죠)과 현대에서 그닥 천재도 아닌 사람들(보통 현대 최고지능들은 과학계,금융계나 기업가, 마인드스포츠쪽을 하든 하니까)이 다른말 한다? 이러면 후술할 경우가 아닌 이상 뭐 볼일있나 싶긴 해요. 그 경우야 뭐... 권위차이와 인적레벨의 큰 차이를 뒤집을 고고학적 서지학적 증거고...
된장까스
25/06/09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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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9154

셋째, 중국사를 읽으려면 고전경전만 읽지 말고, <자치통감>, 이십사사만 읽지 말아야 한다. 당대학자의 연구성과를 많이 읽고, 당대의 눈길로 시대를 통과하여 과거의 역사를 읽어야 한다.

주변 대부분의 민족과 비교하면 중화문명은 역사상의 경험과 교훈을 종합하는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독특하고 발달된 문명의 성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전통사학의 성취는 일정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가장 방대한 사료를 가지고 있지만, 위대한 역사학은 나타나지 못했다. 진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중국역사의 두드러진 특징은 "순환성"이다. 하나의 왕조가 건립된지 1,2백년이 지나면 '관핍민반(官逼民反)'이 발생하고, 농민반란이 일어나며, 얼마 후에 신흥왕조로 대체된다. 이렇게 순환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모든 왕조가 동일한 궤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한 왕조의 건립초기에는 정치가 청명하고 심지어 태평성세가 나타난다. 새로운 핸드폰을 가지게 되면 처음 반년간은 잘 돌아가는 것처럼. 그러나 몇대가 지나고 나면 부패하고 혼란에 빠지며 각종 문제가 나타난다. 그러면 부득이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새로운 왕조가 건립된다. 그리고 새로운 왕조도 다시 똑같은 길을 걷는다. 이 규율이 2천년간 지속되었고, 남겨진 역사서는 "이십사사"가 된다. 그리고 조대가(朝代歌)를 하나 남겼다: "삼황오제하상주(三皇五帝夏商周), 진한삼국양진우(秦漢三國兩晋憂), 남북수당오대진(南北隋唐五代盡), 송원명청제통휴(宋元明淸帝統休)" 그래서 당대의 눈으로 역사를 읽으면, 우리가 역사에 대해 더욱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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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은우시의 이 글로 갈음합니다.
VictoryFood
25/06/09 22:15
수정 아이콘
??? : 이순신 그거 맘 속으로는 역성 혁명 생각하고 있었다니까?
25/06/09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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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크 생각해보니 이순신께서도 물론 겸양의 표현이기는 했지만, '내 충정과 재주가 무후만 못하거늘 무후의 기도법을 쓴다고 어찌 하늘이 들어주겠'냐고 했던게...
25/06/09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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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은 찬탈의 욕심이 있었다"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그에 맞춰 근거를 짜맞춘 글이네요.
제갈량이 당대의 일반적인 신하 이상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제갈량이 권신이었냐 아니냐 하는 논란도 있고요.
그런데 권력이 있었다와 찬탈 의도가 있었다는 구분해야 합니다.
저자는 이막과 이엄의 사례에서 별다른 근거 없이 인물의 심리 상태를 추측하여 의도가 있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막이 처형된 이유는 단순히 제갈량을 비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상이 그(제갈량)의 위세를 두려워했다"는 발언이 허수아비 군주였던 유선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라 여겨진다"거나 유선의 보복심 때문에 제갈량 사당을 짓는걸 반대했다고 하고 있고, 구석을 권하는 이엄을 엄히 질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심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당대에 제갈량의 충성을 의심했던 인물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있어요.
25/06/09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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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환온과 유우 등의 사례와 제갈량의 사례가 비슷한 점은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어쨌거나 제갈량은 찬탈 시도를 한 적도 없고, 의도를 드러낸 적도 없습니다.
25/06/09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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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학계 논의 좋아하시니 최진열 교수 인용해봅니다. "유비는 죽기 전에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의 재주가 미치지 못하면 공이 황제의 자리를 취하시오" 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제갈량은 죽을 때까지 후주 유선에게 충성을 다했다." - 최진열 저 <역사 삼국지> p.848
된장까스
25/06/09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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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최진열 교수님 썰 얘기할거면 그분의 히트작 중 하나인 '현재 가정의 배정 위치는 잘못되었다'도 한번 논하고 싶기는 한데 그것도 받아들이실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네요.
된장까스
25/06/09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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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은 왜 북벌을 했는가? 첫째, 제갈량이 익주는 피폐해졌다고 인정하면서 북벌을 단행한 것은 당연히 한실 부흥을 위해서다. 촉한은 병사가 총인구의 10%를 차지하는 병영 국가였다. 그 군대에는 비익주 출신자들이 다수 포함된다. 즉 외래 정복자가 익주에 뿌리내리기 위한 정통성이 한실 부흥이란 국시인 것이다. 한실 부흥이라는 국시를 수행하지 않는 촉한은 존재할 이유가 없으니 제갈량은 국가의 존재의의를 걸고 북벌에 임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의 북벌에서 두번째 목적은 [제갈량 본인의 군사력 장악을 위한 것]이다. 유비 생전에 제갈량이 군을 이끌었던 것은 방통이 전사하고 형주에서 유비를 구원하러 갔던 것이 유일하다. [유비 생전 군주권의 물리적 기반인 군사력은 유비와 일족이나 다름없는 관우 장비가 장악했고 제갈량은 유비에게 그럴 정도의 신뢰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유비 사후 제갈량은 유비 사후 남정과 북벌로 군권 장악을 이루었으며 승상부는 촉한의 실질적 정부로 기능했다.] [제갈량은 자신의 신념인 한대적 정신으로 인해 선양받지 않았으나 그것조차 가능할 만큼의 권력을 북벌을 통해서 장악했던 것이다.] - 와타나베 요시히로 저 <삼국지의 정치와 사상>

사실 본문처럼 찬위의 마음이 있을수도 있다는 분도 계시고 이렇게 '한대적 정신'으로 찬위의 마음은 없었으나 본인의 촉 내부의 권력장악을 위해 힘쓴건 사실이고 찬위 그것조차 가능할 만큼의 권력을 장악했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긴 하죠.
25/06/09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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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탈 야심이 있다"를 정해놓고 그에 맞는 근거를 끌어오려니까 북벌도 저렇게 해석하는겁니다.
된장까스
25/06/09 22:26
수정 아이콘
와타나베 요시히로 이 분은 [찬위의 마음은 없었다, 다만 그것조차 가능할 정도의 권력은 분명히 존재했다]라고 주장하시는 겁니다. 제갈량이 촉 내부에서 권력 장악을 위해서 힘쓴것도 분명한 사실이라는 쪽이기도 하고요.
25/06/09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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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가 그렇게 주장했다는건 이해했고, 전 본문에서 아전인수식으로 북벌 의도를 해석한 것에 대한 코멘트입니다. 제갈량이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건 동의힙니다.
된장까스
25/06/09 22:33
수정 아이콘
뭐 이 주장의 대마는 제갈량이 했던 [조예를 베고 옛 도읍으로 돌아가는 큰 공로를 세우면 십명이라도 받을것인데 하물며 구석이랴!]가 인신의 몸으로써 할 만한 소리는 아니다라는 것과 [제갈량은 탁고대신으로서 권력을 오로지 독점한 뒤 권력을 유선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가 핵심이니까요.
25/06/09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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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엄은 당장 줘팰 수가 없으니까 적당히 말로 달랜거고, 그 정도로 권력을 독점했음에도 찬탈 의도나 시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에서 진짜 찬탈 의도가 없었다고 봅니다.
된장까스
25/06/09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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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말로 줘팼다고 한다면 왕도처럼 아예 구석은 받지도 않겠다라고 씹어버려도 그만이긴 했죠. 만약 제갈량과 이엄의 세력 가운데 이엄의 세력이 더 강력했다면 이 편지들이 공개되었을때 무사하지 못할쪽은 누구였을지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25/06/09 23:05
수정 아이콘
네 알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평행선일거라 더 답변 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발제와 토론을 좋아하신다면 네이버 부흥카페나 위진남북조 마이너 갤러리를 방문하시길 추천드립니다.
된장까스
25/06/09 23:09
수정 아이콘
sabre 님// 비교적 좋은 답변 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카바라스
25/06/09 23:10
수정 아이콘
솔직히 사마의랑 제갈량을 비교하면 긁힐만하죠. 나무위키에서 깽판치는 삼국퍼거들은 좀 짜증나긴함
25/06/09 23:27
수정 아이콘
폄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근거없이 누군가를 깎아내려 헐뜯을 때 쓰는 말입니다

역심을 드러낸 일이라는 것도 인정되지 않는 방향이 통설로 평이 갈리고
당대부터 근후대까지 충신으로 평가받는 인물을 결국 실패한 잠재적 역신으로 평가한다면

그 행위에 걸맞는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25/06/10 00:33
수정 아이콘
모 드라마에서 권세가가 말하길
정치에는 허세와 실세 두 가지 부류만 존재한다죠
이미 모든 권세를 쥐고 있는데 굳이 명성을 버리고
찬탈을 할 이유가 없죠. 나라의 실세가 누구인지
모두가 알고 명분과 실리가 다 있는데 말이죠
+ 25/06/10 03:23
수정 아이콘
이천년 넘게 중국역사에서 충신의 대명사로 꼽힌 제갈량이 망탁조의 같은 간신과 비슷한 취급을 당할 수가 있군요. 색다른 관점으로 역사인물을 재단하기도 정도것 했으면...
특별수사대
+ 25/06/10 04:30
수정 아이콘
(수정됨) 유선의 황호 기용이 제갈량에 대한 정치적 견제책이라는 의견도 있긴 하더군요.

그렇지만 본문은 딱히 공감이 안 가네요. 담백하게 보더라도 탁고 이후 제갈량은 이미 병권을 쥐고 개부권과 인사권도 행사하며 국가 대전략도 수행하는등 이미 거의 협천자급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였는데 왜 이름뿐인 제위를 노린다는 것인지요? 그 권위가 유비의 탁고와 충신이라는 인식에서 기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찬탈시도는 성공해도 잘 되야 본전이고 수틀리면 위나 오의 침공으로 멸망이고 실패하면 기존 권위는 모두 잃고 처형인데요. 촉의 성립 이념자체가 한의 복고주의니 유씨가 아니라는 건 단순 정치적 약점 수준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자체의 붕괴라서 찬탈 이후 촉이 촉으로 성립할지도 불투명하고.. 본문에서 은근히 암시하는 것처럼 "그래서 조조랑 다른 게 뭐냐?" 소리를 들을 거라는 걸 당대인인 제갈량이 몰랐을 리도 없고...

요컨대 당대 제갈량이 제위를 찬탈해서 얻을 게 뭐가 있나요? 제위만 남고 뿔뿔이 흩어진 촉과 이어지는 멸망뿐인데. 제갈량이 권신이라고 한들 제위 찬탈을 할 이유도 없고, 권신이라도 권력을 유지하려면 촉한의 성립 이데올로기인 유씨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최선이죠.

결국 내심 권신이라도 최선의 수는 촉한과 유선에게 충성하는 것이고, 실제로도 제갈량은 죽을때까지 촉한에 충성했는데(적어도 그렇게 평가받았는데), 이천년 전 사람의 마음속이라도 읽지 않는 한 이걸 권신이라고 평할 수나 있을런지요. 권력을 지녔으나 충심을 보인 것을 찬탈의 목적이 있었다 혹은 황제를 겁박하는 권신이었다고 주장하는 건 본인 일기라도 발견되지 않는 한 그냥 끼워맞추기라고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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