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보내야 할 때
재활을 하는 곳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센터와 병원이다. 아주 간략히 말하자면 병원은 학교, 센터는 학원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니 결국 병원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여건상 센터만 다닐 수밖에 없다고 해도 병원을 주기적으로 찾아 아이의 발전상을 정확히 진단받는 게 좋다. 병원의 전문의와 함께 치료의 방향을 정해 센터에 의뢰하는 식으로 센터를 이용해야 한다.
병원은 진료만 하는 곳과 재활 훈련 프로그램까지 같이 제공하는 곳으로 나뉜다. 부모 입장에서는 재활의 기회까지 한꺼번에 주는 병원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그런 병원들은 대기자들로 넘쳐난다. (센터는 비용이 좀 더 나가기도 한다.)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막 들어갈 순 없다. 이건 단순히 병원에 비해 장애인 가정이 훨씬 많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병원들도 어떻게든 더 많은 장애아들을 돌보려 애를 쓴다. 8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학년이 나뉘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지금과 달리 골목마다 아이들이 넘쳐나는데, 교실의 수는 한정돼 있어 고안한 게 바로 오전반과 오후반이다. 한 교실을 두 학급이 아침과 낮에 나눠 쓰던 제도다. 병원의 경우 한정된 입원실 때문에 ‘낮병동’이라는 걸 운영한다.
재활은 한 번에 효과를 보기 어려운 치료법이다. 장시간, 그리고 장기간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그러니 아이가 병원에 입원해서 하루 종일 치료를 받는 게 이상적이다. 하지만 재활 필요한 아이가 홀로 입원할 수 있는 경우란 건 없다. 무조건 보호자가 따라붙어야 한다. 장기간 치료가 필요하니 보호자도 병원 생활을 장기간 할 수밖에 없다.
장기간의 입원 생활이 힘들고 고달프다는 것은 차치하고, 부모 중 한 사람이 집을 오래 비워둘 수 있는 여건을 모든 가정이 갖추고 있지 않다. 게다가 위에서도 말했듯 입원실의 수는 현재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반쯤 입원’하는 게 가능하도록 고안한 게 ‘낮병동’이다. 낮에만 입원하는 것이다. 밤에는 집으로 돌아간다. 장애아와 보호자가 하루 종일 병원에 머물러 있다가 밤에 잠만 자러 집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장시간 치료의 필요도 해결해 주면서 모자란 침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다.
우리 집의 경우 아내나 나나 집을 오래 비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직장이 걸려 있어 아예 불가능했고, 아내의 경우 내가 보내기 싫었다. 아내더러 장기 입원을 하라고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연애 때부터 일주일에 일곱 번 만났던 사이였다. 서로가 일주일씩 단기 선교를 갔을 때 빼놓고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났다. 밖에서 만나니 지출이 심했고, 우리는 순수 비용 절감 차원에서 결혼했다. 그런데 최소 반년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완강했다. 막내 성장의 황금기에 집중 치료를 받게 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평생 후회할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나 역시 막내가 훌륭한 치료를 제때 받아 건강히 자라주기를 그 무엇보다 바랐다. 하지만 동시에 아내도 내 옆에 있어주어야 했다. 상충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바라는 마음이 한 동안 지속됐고 난 어느 것도 놓지 않았다.
다행히 내가 고집을 부리는 기간은 병원 대기 기간과 겹쳤다. 병원에서 ‘기다리시라’고 하는 동안 나도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저울질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첫째와 둘째를 내가 돌보면서 회사일도 하는 게 부담이 돼서 아내를 붙들고 있는 걸까. 아내가 삶의 반경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게 싫었던 걸까. 첫째와 둘째는 아이들이긴 해도 초등 고학년들이어서 그렇게까지 부담되지는 않았다. 아내 없는 곳에 출장 잘만 다니던 나였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가. 복잡한 마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고, 아이의 귀한 하루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다가 낮병동이라는 좋은 제도가 있다는 걸 아내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됐고, 왜 굳이 입원을 해야 하는가,라는 내 생각은 더 강해졌다. 하지만 낮병동이 되는 병원이 우리 집에서 너무 멀었다. 아무리 가까워도 2시간 가까이 운전해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매일 그 거리를 운전하며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그래도 입원보다 낫다고 여겨 대기를 걸어두었다.
병원들이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여러 센터들에 등록했다. 여러 번 말하지만 재활이 필요한 장애인 가정이, 재활 시설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한 센터에서 원하는 모든 수업을 다 듣기는 힘들다. 자리가 열리는 대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해야 한다.
극 능동형인 아내의 경우 대기를 걸어둔 병원과 센터에도 자꾸만 전화를 걸어 혹시 오늘 결석자가 있는지까지 파악했고, 결원 때문에 급조된 수업에까지 아이를 보내느라 우리는 도로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충주 시내에서 수업을 듣다가, 곧바로 원주로 넘어가 다른 치료를 하고, 그러다 원주 반대편의 또 다른 시설로 갑자기 차를 모는 등 우리의 내비게이션은 항상 변화무쌍했다.
그런 아내를 조수석에서 관찰하고 있던 나는, 이 짓을 우리가 강남에서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적잖이 안도했다. 아내가 아이 성적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막내를 온갖 재활 수업에 보내듯, 첫째와 둘째를 각종 학원과 과외 수업으로 돌리느라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면 나의 생활은 어떤 색깔로 물들었을까. 그쪽으로 조금이라도 꽂혔다면 우리를 하루 종일 학원가에서 살게 했을 성향이 다분한 사람이, 귀촌해 아이들 뛰놀게 하겠다는 데 동의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동시에 등골이 서늘하기도 했다.
운전에 운전을 거듭하며 아이를 이 시설 저 시설로 옮기는 생활이 이어졌다. 4~5시간 걸리는 장거리도 아니고, 불과 40~50분 정도의 운전을 반복하는 것이었는데 3~4개월 하다 보니 피로가 누적됐다.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느낌만으로는 그 피로가 해소되지 않았다.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막내도 그랬을 것이다. 심지어 막내는 훈련을 받는 당사자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아이 재활에 큰 맥락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 점점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몇 월까지 걷기부터 완성한다’는 목표 아래 촘촘히 짜인 훈련 코스들을 소화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아이의 상태를 보고 선생님들 각자가 판단한 대로 하는 걸 반복하니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렇게 움직이는 걸까’라는 회의감 비슷한 게 들었다. 애써 빈자리를 찾아 도착했는데 방금 다른 센터에서 했던 수업과 거의 다르지 않은 걸 하거나, 이미 마친 전단계 훈련을 다시 하는 걸 몇 차례 보니 이 회의감은 더 진해졌다.
선생님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연기력 좋은 배우를 캐스팅했어도, 대본이 엉망이면 그 연기력이 드러날 수 없는 것과 비슷했다. 우리가 만난 선생님들 중 장애아 어머니 커뮤니티에서 꽤나 유명하신 분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성장 단계나 치료의 커다란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채 아이를 치료하려니 그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서울의 한 큰 병원에서 우리 자리가 열렸다. 입원 준비를 마치고 몇 날 며칠까지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한 병원에서 방향을 정하고, 커다란 맥락 아래 통일된 치료를 해야 효과가 있겠다는 걸 절감한 나는 더 이상 누가 가니 마니 고집을 부릴 마음이 이미 없는 상태였다. 아내와 막내 없는 집에서 어떻게 지내나, 하는 쓸쓸한 생각이 여전히 진했지만, 아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음을 수긍했다.
집이 벌써 조용해진 듯했다.
14. 입원하던 날
첫째 아이는 아담처럼 자기 막내 동생을 대했다. 아담이 온갖 동물들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우리 큰 아이도 시시때때로 막내의 애칭을 바꾼 것이다. 이제 막 10년 남짓한 그 아이 인생에서 이처럼 사랑스럽고 귀여운 게 처음이라, 어쩔 줄 몰라 이름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듯했다. 아가 옆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고 ‘귀여워’만 남발하다가 엄마 아빠한테 ‘네 할 일은 하지 않냐’고 혼나면 도망치듯 나오던 게 새로운 이름들이기도 했다.
어떤 날은 막내 살집 통통이 오른 게 귀여워 퉁퉁이라고 하려다가, 어감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둥둥이라고 불렀다. 그게 또 다음 날에는 동동이로 바뀌기도 했다. 막내에게 유독 꽉 맞는 내복이 있는데, 막내가 그걸 입고 몸매를 여과 없이 자랑하는 날에는 첫째가 ‘소시지’라고 불렀다. 첫째 눈에는 그 옷을 입은 막내가 비엔나소시지처럼 보였다고 한다. 옆으로 돌아누워 낮잠을 자는 막내가, 그 터질듯한 볼살 때문에 베개가 필요 없는 모습으로 숨을 색색 쉬자 첫째는 한동안 아이를 볼탱탱으로 불렀다. 요즘에는 막내 덕분에 우리가 다둥이 가족이 됐다면서 ‘다둥이’를 ‘둥다이’로 바꿔 부른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미처 다 적어놓지 못한 게 아쉽다.
첫째는 아이가 울면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이곤 했다. 빠르게 달려가 아이를 달래고 간지럽히고 우리 집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단 것까지 어디선가 찾아서 주려 하다가 혼났다. 한창 분유를 먹일 땐, 첫째가 자연스럽게 분유 담당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작은’ 엄마 그 자체였다. 막내 보겠다고 굳이 자는 아이 옆에 누워있다가 지네에 물린 적이 있는데, 그때 병원에서 한 말이 ‘막내 대신 내가 물려서 다행이야’였다.
그런 첫째도 못하는 게 있는데, 맷집 제공이다. 아직 힘 조절을 할 줄 모르는 막내가 품 속에서 갑자기 팔다리를 휘젓고 온몸을 비틀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근처에 있으면 얻어맞기 일쑤다. 아이 무게가 꽤 나가기 때문에 타격감이 제법 있다. 첫째는 딸아이라서 그런지 그것을 매우 아파했다. 발끈해서 동생을 혼내기도 했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게 해 놓고 “너, 사람을 그렇게 때리면 안 되는 거야!”라고 엄숙하게 말하곤 하는데, 그 장면이 상당히 귀엽다.
이 부족한 맷집 제공을 둘째가 한다. 아무래도 남자아이라서, 또 튼튼한 아빠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이미 안정적이다. 막내가 아무리 안경을 벗기고 마스크를 잡아채고 머리를 당기고 귀를 비틀고 얼굴을 내리쳐도 둘째는 그저 웃는다. 그 모든 게 귀여울 뿐이다. 어느 날은 둘째 뒤에 막내를 잠시 앉혀 놓고 식탁을 차렸다. 둘째는 밥을 먹는 내내 막내에게 머리채를 잡혔지만, 아무렇지 않아 했다. 아이가 머리를 당기면 당기는 대로, 목을 잡아끌면 끌리는 대로, 동생의 리듬에 온몸을 맡기며 밥도 잘 먹었다.
체력 측면에서도 둘째가 누나보다 나은 면모를 보인다. 나와 아내가 잠시 집을 비우고 집 바깥을 청소하거나 밭을 둘러보거나 집 앞 상점에 급히 물건을 사러 나갈 때 등 막내를 두 아이에게 맡겨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때 활약하는 건 대부분 둘째다. 당연히 첫째와 둘째가 연합해서 아이와 같이 놀아주긴 하는데, 첫째보다 둘째가 더 오래 버틴다. 집안 청소를 한 번씩 싹 할 때도, 첫째는 주로 엄마 아빠와 힘을 합하고, 둘째가 단독으로 아이와 놀아준다.
하지만 둘째는 아이가 울 때 제일 먼저 달려온다거나 하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때론 냉정할 정도로 자기 할 일을 우선시하기 때문인데, 이 점은 우리 부부도 존중해주려 한다. 나는 막내가 나머지 두 아이의 짐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고, 둘째가 막내를 사랑할 줄 알면서 동시에 자기 할 일도 챙기는 게 오히려 반갑다. 다만 그런 둘째를 급히 불러 도움을 요청해야 할 때도 더러 있는데, 그게 미안할 뿐이다.
막내를 중심으로 두 아이의 성향이 이렇게 갈리다 보니 특화되는 분야가 생겨났다. 아이를 이뻐하지만 체력 고갈이 빠른 첫째는 자연스럽게 아이를 재우는 쪽으로 전문성이 개발됐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아이 재우기 도움이 필요할 때는 첫째를 부른다. 둘째는 막내가 어떤 놀이를 좋아하고 어떤 것에 반응을 보이는지 잘 안다. 막내의 뇌 발달을 위해서는 자극이 많이 필요한데, 이것을 둘째가 충족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막내와 공놀이를 신나게 하는 건 우리 집에서 둘째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여러 글에서 밝혔지만 아내는 아이를 위해 늘 분주했다. 정보를 취합하고 전문가에게 물어보고 빈 병원을 알아보고 공무원들과 통화하면서 지원 프로그램을 확보하느라 항상 전화를 쥐고 있었다. 통화할 때가 아니라면 막내 이유식 준비하느라 부엌에서 바삐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막내가 보이면 뛰어가 안고 놀아줬다. 몸이 하나 더 있어도 부족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걸 요약하면 ‘시끄럽다’가 된다. 늘 다른 이름으로 막내를 부르는 첫째, 막내와 공놀이하며 뛰어다니는 둘째, 누나와 형에게 꺄아 꺄아 소리를 지르며 바둥거리는 셋째, 통화와 요리로 늘 소음을 아우라처럼 이고 다니는 아내는 전부 합해 정신없는 집안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서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나에게는 오케스트라보다 더 향긋하고 웅장한 음악이었다. 난 집중하기 위해 문을 닫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 현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엉덩이가 늘 들썩였다. 그래, 그 들썩이는 소리까지 합해야 우리 집 시끄러운 소리가 완성된다.
아니, 완성됐’었’다.
그 모든 소리의 합이 아내와 막내가 입원하는 날 한꺼번에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4인실의 작은 병실 안 한 구석에 아내가 6개월 동안 누워있을 매트를 깔고, 아내와 아가의 옷이 들어갈 임시 서랍장을 설치하고, 아이가 가지고 놀 장난감들을 넣어 놓을 때, 우리 집을 광광 울리던 모든 소음들도 같이 이사했다. 아이들도 한 동안 막내를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더 막내를 물고 빨았다. 그러고는 엄마를 안아주고 또 안아줬다. 그럼에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꾸만 뭘 두고 온 느낌. 뭔가 실수한 기분. 중요한 뭔가를 하지 않은 찝찝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매정히 닫히는 병원 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손을 흔들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유리 너머로 수도 없이 던지고 받았다. 적막은 그때부터 우리를 감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첫째와 둘째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느라 애썼다. 그 고요를 듣고 있는 게 나도 괴로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었을 때의 그 텅 빈 공간감이 미리부터 두려웠다. 아내도 막내도, 그리고 우리의 그 사랑스러운 소음도 전부 없어진 그곳이 얼마나 낯설까. 오는 길 내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었지만, 그 준비라는 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날 우리 셋은 같은 침대에서 서로 꼭 붙어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