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판
:: 이전 게시판
|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5/04/12 17:05
이 관점에 크게 동의하지 않는 게, 고구려를 한국사에 편입된 '정복 세력'으로 인식하는 것부터가 이상한 느낌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건국설화조차 (그게 진짜든 아니든)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만 봐도, 고구려는 그 건국 단계부터 이미 '한국사의 일원'이었지 외부의 세력이라 보기 힘들어 보입니다. 삼국시대 이전-직전 만주와 한반도의 구분이 그렇게까지 명확해 보이지도 않고요.
25/04/12 18:24
(수정됨) 한국사 체계를 소급 적용해서 고구려가 건국 당시부터 '한국사의 일원'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급 적용이 가능한 이유는 결국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까지 남진했기 때문이죠. 고구려의 정복이 없었다면, (말씀하셨다시피)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백제 건국신화만 가지고는 고구려를 삼한과 한 덩어리로 묶을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원삼국시대에 만주와 한반도의 구분이 불명확했던 것은 맞는데, 그건 삼한의 경계가 낙랑군 이남이었기 때문이지 만주까지 삼한으로 인식되어서가 아니니까요.
25/04/12 18:54
고구려가 만주만이 아니라 한반도 일대에서도 확고한 영역을 구축한 점은, 당연히 고구려의 역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하지요.
하지만 그것을 '한국사에 진입했다'거나 '유일한 정복 세력'이라고 보는 관점은 고구려를 '주류 한국사와 구분되는 외부 세력'으로 인식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습니다. (당나라와의 협공 하에 이루었다고는 하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를 '남쪽의 정복 세력'으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거든요.
25/04/12 20:36
고구려가 '진입했다'고 표현하는 까닭은 종족 계통 때문입니다. 낙랑군 이남은 삼국지 동이전에서부터 한(韓)으로 묶이는 반면에, 초기 고구려는 한(韓)으로 인식되지 않았죠. 부여, 옥저, 동예까지 합쳐서 대략 예맥이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고구려가 예맥을 통일하고, 낙랑군을 정복하고, 삼한의 일부까지 정복한 덕분에 고구려를 한(韓)으로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이 인식이 이어져서 예맥을 한국사로 보게 된 거고요.
그리고 한국사는 한(韓)을 중심으로 전제하고 있으니, 고구려가 한(韓)으로 인식되는 과정을 '진입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죠.
25/04/12 20:58
중국에서 고구려를 비하할 때 '맥'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는 거로 아는데... '고구려가 예맥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말은 대체 어디에 근거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예맥에 고구려를 포함시킬 텐데요.
25/04/12 21:02
위 대댓글을 보시면, [ 부여, 옥저, 동예까지 합쳐서 대략 예맥이라고 불렀어요. ] 라고 썼습니다.
당연하게도, '(고구려에) 부여, 옥저, 동예까지 합쳐서 대략 예맥이라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25/04/12 21:07
아 그런 의미로 이야기하셨군요. 오독하여 죄송합니다.
다만 그렇게 이야기할 경우 '진입했다'는 표현은 더 이상해집니다. '삼한의 의미가 바뀌었다'고 해야지 '진입했다'고 하는 건 이상한 표현이라 보거든요.
25/04/12 21:15
고구려가 삼한으로 인식되면서 한국사의 구성요소로 진입했다는 느낌을 살리기 위한 표현인데, 어차피 고구려의 시작부터 한국사로 소급 적용할 것이니 굳이 '진입했다'고 하지는 않아도 되긴 합니다. 그냥 '삼한' 개념의 확장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읽어 주셔도 무방합니다.
25/04/12 19:10
그리고... 확실치 않으니 유보한다는 의미에서 '진짜든 아니든'이라고 표현했지만, 결국 여러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성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거듭 언급하고 있으니까요. 거기에 일본 쪽의 기록에서는 아예 부여와 연관짓기까지 한 거 보면...
물론 부여와의 관련성을 언급하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지더라도, 결국 백제 자체가 북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죠. 심지어 그걸 고구려-백제의 건국단계(온조왕 이야기할 때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을 함께 이야기하니)에서 계속 언급하는 점도 유의미한 지점입니다. 고구려의 건국 시점부터 이미 한반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었음을 보여주니까요.
25/04/12 20:56
백제 왕실은 처음에는 고구려 출자를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부여 출자를 주장했는데, 주장을 그렇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한다면 신라 왕실이 흉노 출자를 주장한 것은 신라 기마민족설의 근거가 될 것이고, 고려 왕실이 당나라 출자를 주장한 것은 고려 중국인설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는 결국 고고학 자료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백제의 고구려 출자설은 물론 고구려의 부여 출자설조차도 물질문화의 변화와 잘 조응하지 않고 있죠. (참고: https://cafe.naver.com/booheong/220862 )
25/04/12 21:00
위의 예맥에 고구려 포함되지 않는다도 그렇고 민간의 독자연구에 근거하시는 말씀을 자꾸 하시는 느낌이네요.
그리고 '정복세력'과 '기마민족'은 등치어가 아닙니다;; 개념 정의부터가 뭔가 이상한데요. 삼국사기/삼국유사와 같은 가장 권위 있는 사료의 내용을 부정하려면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물질문화의 변화 이런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하시는 근거들을 보니 솔직히 더 이상의 이야기는 의미없다고 생각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25/04/12 21:04
예맥에 고구려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 적 [ 없습니다. ]
'정복세력'과 '기마민족'을 등치어로 주장한 적도 [ 없습니다. ] 의견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는 건 이해하는데, 정작 제 대댓글을 잘 읽지 않으시고 말씀을 하시니 저도 좀 곤란하네요.
25/04/12 21:12
(수정됨) 일단 위에서 구절을 오독한 건 사과드립니다. 정식 근거가 아닌 카페 가입을 해야 볼 수 있는 글을 출처로 가져오셔서 민간 독자연구에 근거하는 주장을 하시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현재의 정설을 부정하려면 더 많은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백제가 출자를 주장했다거나 물질문화의 변화 등은 일부 소논문 등지에서 주장하는 바이지만 그것이 '정설'로 인정되었는가부터, 그러한 주장이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의 문헌에서 백제의 뿌리를 고구려에서 찾는 것을 반박할 정도인가는 다른 이야기니까요. 위에서 이야기된 대로 부여-고구려가 같은 '맥'인 것도 그렇고, 백제가 부여-고구려 출자를 차례로 주장한 것부터가 이미 상호관계성을 강하게 보여주는 셈입니다. 신라 기마민족설/고려 중국인설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바는 아니겠지요. 오히려 밑에 인용하신 '백제 국가형성사 연구의 발전을 위한 제안'과 같은 논문에서조차 "마한문화과 예계문화권은 선으로 명확하게 그어질 수 있는 성격의 공간이 아니다"(242쪽) 같은 표현을 쓰고 있으니까요; 암튼 이 정도로 하고 줄이겠습니다.
25/04/12 19:41
고조선 준왕이 마한왕이 되었다는 기록이나 백제의 부여 계승의식, 신라가 고조선 유민의 후예라는 기록 등을 보면 고구려의 남진이 없었더라도 "한국사 진입"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한반도 중부 / 만주와 북부 (뭐 여기서 한반도의 중북부의 정의도 지리적이진 않죠. 사실상 한국의 영토를 지리상 한반도로 규정하니)가 분리됐다 보긴 힘들다고 봅니다. 물론 본문에선 말한 고토회복 수준의 명분을 가질 정도는 못 됐겠지만요
삼한일통 의식이 현 통합된 한국사의 시작이라는 건 동의합니다. 이걸 무시할수록 오히려 고구려는 우리 역사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라 봅니다.
25/04/12 21:23
그렇게 되면 한국사 = 삼한이 돼버리니 맥락에서 차이가 발생합니다. 본문에서 명시하신 "통일체" 상태의 한국사까진 맞겠지만, 본문의 논리를 적용해도 고조선, 발해 같은 케이스가 애매하게 발생해 버립니다. 본문에서 쓰신 대로 직접적인 게 아닌 고구려를 통한 연결이 돼버리니까요. 이 부분은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25/04/12 22:53
한국사=삼한이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예맥이 고구려를 매개로 삼한에 결합하여 한국사를 구성한다는 것이 본문의 논지이지만, 고조선·부여·발해 자체도 한국사와 직접 연결될 수 있죠. 다만 저는 삼한 개념의 확장이 이러한 연결을 더 주목하게 하는 일종의 프레임을 제공해 주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요.
25/04/12 21:06
무덤 양식, 여러 기록과 설화로 볼때 3세기경 고구려계 세력이 남하하여 토착세력과 결합되었고 이들이 백제를 건국했다가 정설로 알고 있는데...
관련 논문이나 연구 결과가 있을까요?
25/04/12 21:10
(수정됨) 석촌동 고분군을 원래 그렇게 해석해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렇게만 볼 수 없다는 논의가 점점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관련하여 위 링크에서 언급한 논문들은 다음과 같네요. 권오영, 「백제 국가형성사 연구의 발전을 위한 제안」, 『한국사론』 67, 2021, 227-253. 김진영, 「원삼국~백제 한성기 중부 동ㆍ북부지역 적석분구묘의 재인식」, 『백산학보』 123, 2022, 5-51. 신광철, 「임진강 유역 점유 세력의 변천 -백제・고구려의 관계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5-44. 이형원, 「서울·경기지역의 마한·백제 주거 연구」, 『고고학』 18(1), 2019, 33-66. 임영진, 「서울 석촌동 집단토광묘의 구조와 축조배경」, 『백제학보』 30, 2019, 89-111. 정치영 외, 「새로 찾은 ‘양평 양근리 적석총’의 현황과 특징」, 『백제학보』 30, 2019, 227-249. 정치영, 「2020년 서울·경기·강원지역의 백제 고고학 조사 연구 성과와 전망」, 『백제학보』 37, 2021, 5-36.
|